262화
다녀올게요
힘으로 부수는 건 부수는 거고.
사술(邪術)과 엮인 진(陣)을 파괴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평소처럼 일단 저지르고 보자니 걸리는 게 많았다.
홑몸이면 모를까, 수많은 이들이 배에 타고 있는 상황 아닌가?
‘확인을 해봐야겠지.’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야 한다 했다.
정광은 눈앞의 쇠기둥을 두들겨 봤다.
터터터텅!
쇠기둥이 휘청휘청하며 요사한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악!
‘조금 셌나?’
비명도 요기(妖氣).
엄청난 요기가 미친 듯이 쏟아져 나왔다.
정광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까탈스러운 놈이네.’
그냥 까탈스러운 게 아니라 많이 그랬다.
쇠기둥은 하나가 아니었다.
총 여섯 개였는데, 한 놈도 빠짐없이 발광하고 있었다.
‘하나가 당하면 동시에 반응하는 거구나.’
이래서야 원.
파괴하기 까다로운데.
아까의 거대한 악귀는 이걸 믿고 연화(蓮花)에게 달려들었을지도.
‘어쩐다.’
생각을 굴릴 틈이 없었다.
요기가 요물로 뭉쳐져 쇄도했다.
정광에게만이 아니라 권존에게도!
쿠우우우-
바깥쪽에서 돌고 있던 소용돌이도 급격히 빨라졌다.
위에 떠 있는 연화와 다른 배들이 견딜 수 있을지 걱정될 정도였다.
-이런! 무슨 짓을 한 게냐!
권존의 전음에서 다급함이 느껴졌다.
실제로 그는 다급히 온몸을 놀려 싸우고 있었다.
정광은 운룡으로 요물들을 베어내며 대답했다.
-시험 삼아 건드려 봤는데요.
-그런데 이 난리가 났다고?
-그러게요. 생각보다 괜찮은 진이네요.
-곧 파괴할 거라더니! 더 이상은 힘들다!
권존은 정말 힘든 상황이었다.
내공이 가득했던 단전은 바닥을 보이려 하고 있었고, 외공으로 단련된 신체는 상처투성이였다.
호흡도 못 한 지 오래였고.
이래서야 얼마나 더 버틸까?
그런 그에게 정광이 힘을 줬다.
-힘내세요.
-…….
-곧 끝낼 테니까요.
-농을 할 때가 아니야! 정말 그래야 한다!
-물론이죠.
정광은 머릿속에서 권존을 지웠다.
정신을 집중하며 모든 감각을 극도로 키웠다.
칠흑 같은 암흑 속이라 보이진 않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여섯 개의 쇠기둥을 복잡하게 잇고 있는 요기의 사슬을.
‘천음(天陰), 천양(天陽), 지음(地陰), 아무것도 없어. 육효(六爻)도 뭣도 아니라는 얘기지.’
지금 알고 있는 사실은 하나를 치면 다른 놈들도 동시에 반응한다는 것.
‘사술과 진의 합일이라. 진이야 그렇다 치고, 사술에서 풍기는 냄새가 꽤 익숙한데.’
게다가 이 정도 수준의 것을 펼칠 만한 이들이라면.
‘사천성에서 부딪혔던 천요문(天妖門)이겠지. 잘도 도망가더니. 이런 짓을 하는구나.’
투웅이 말하길, 사마련에 속한 게 아니라 사마련주와 협력 관계인 자들이라 했다.
‘귀찮은 놈들이야. 또 마주치면 지우는 게 낫겠어.’
뭐 그건 그때 일이고.
‘여섯 개라…….’
쇠기둥의 수가 조금 많았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했던가.
수왕이 생각났다.
수공에 능한 그라면 금방 와서 도울 수 있을 터.
하지만.
‘그건 아니지.’
도움을 청하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 싸움은 무림맹과 사마련의 것.
그런데 장강수로연맹이 배를 제공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무력까지 보태준다?
당장은 편하겠지만 길게 보면 손해였다.
‘무림맹만의 힘으로 끝내야 해.’
명분도 공도 이익도 무림맹이 오롯이 가져야 했다.
정 안되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보면 되고.
‘들어가 볼까.’
정광은 요물들을 베며 원을 그리고 있는 기둥들의 중앙으로 향했다.
요물들의 공격이 거세졌다.
적을 한가운데 두고 팰 수 있게 됐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정광은 목표로 했던 곳에 멈춰 서서 역천경을 불렀다.
-말 안 해도 알지? 젖 먹던 힘까지 내봐.
-우우우우웅!
역천경이 온 힘을 다해 울었다.
그 울음은 눈부신 빛으로 화해 팔방을 비췄다.
끼아아악-
빛에 닿은 요물들이 기괴한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
정광도 산양의 젖을 먹던 힘까지 전부 쏟아냈다.
삼청합일신공(三淸合一神功)으로 쌓아온 정순한 내공이 기맥을 질주했다.
전신의 근육이 저마다의 역할에 따라 이완과 수축을 행했다.
극도로 집중된 정신이 그 어떤 검보다 날카롭게 벼려졌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모여 하나로 화했다.
‘하나를 공격하면 다른 것들도 동시에 대응해?’
그래봐야 쇠기둥이지.
동시에 베면 된다.
‘상청무상검도(上淸無上劍道), 천지참(天地斬)!’
정광의 신형이 회전했다.
그의 손에 들린 운룡에서 황금빛이 솟았다.
그것은 금룡이 되어 정광을 둘러싸고 있는 여섯 개의 쇠기둥을 단숨에 베었다.
서걱-
꺄아아아악!
두 동강 난 쇠기둥들이 귀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어서 와서 도우라는 의미였을까?
주위에 있던 요물들이 쇠기둥들을 향해 허겁지겁 날아왔다.
자신들의 몸으로 쇠기둥들을 다시 이으려는 듯한 모습.
정광이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리 있나.
그렇다고 혼자서 다 해치우는 건 무리였다.
-어르신! 뭐 하세요! 치셔야죠!
-……!
순식간에 줄어든 요기에 깜짝 놀랐던 권존이 정신을 차렸다.
-소용돌이가 더 거세졌어요! 빨리 끝내야 해요!
-알겠다!
검기(劍氣)가 날고 권풍(拳風)이 불었다.
요물들이 조각조각 잘리고 산산이 부서졌다.
그때마다 쇠기둥들이 깎여 나가며 파편이 부유했다.
그러길 한참.
어둠이 사라지고 시야가 트였다.
권존은 지친 눈으로 주위를 쓸어봤다.
‘끝난 건가.’
소용돌이가 없어지며 잔잔해진 호수.
그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붙였던 요물들이 보이지 않았다.
오직 정광만이 있었다.
‘강하다는 건 알았으나 그런 신위를 보이다니…….’
시선이 마주치자 정광이 씩 웃었다.
권존의 뇌리에 각인될 만큼 너무나 아름다운 미소였다.
‘……괴물 같은 녀석이로다.’
긴장이 풀려서일까?
갑자기 피로감이 엄습했다.
이 생각을 끝으로 권존은 의식을 잃었다.
* * *
“푸하아아!”
정광은 수면 위로 올라오자마자 참고 있던 숨을 내뱉었다.
“흐으으읍.”
공기를 들이마시자 가슴이 불룩해졌다.
“후아아아.”
내뱉으니 홀쭉해지고.
정광은 이렇게 몇 차례에 걸쳐 호흡을 다스린 뒤 주위를 둘러봤다.
‘좋아. 선방했어.’
연화는 침몰하기 직전이었다.
가까이 있던 배들의 사정도 그리 좋지는 않았고.
그래도 사람이 죽은 것 같지는 않았다.
이게 어디냔 말이다.
“지, 진옥룡이다! 진옥룡이 올라왔다!”
정광을 발견한 한 무인이 펄쩍 뛰며 소리쳤다.
“어디? 아! 정말이구나!”
“진옥룡이 살아서 돌아왔다!”
“와아아아아!”
사람들의 환호성 속에, 연화에 타고 있던 사람들을 구하던 소선이 다가왔다.
“잡게나!”
마침 거기에 있던 우경이 뱃전에서 몸을 기울이며 손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척.
정광은 그 손을 굳게 잡고 소선 위에 올랐다.
기쁜 얼굴로 다가오던 사람들이 입을 떡 벌렸다.
“왜 그러세요?”
우경이 대표로 물었다.
“궈, 권존께서는 괜찮으신 겐가?”
“아.”
정광은 자신의 왼손을 내려다봤다.
그 손은 기절한 권존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있었다.
“아마요.”
“……아마?”
“확인해 보죠. 급한 일부터 먼저 하고요.”
“……어떤?”
사람들은 곧 알 수 있었다.
정광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는 것 아닌가.
기름종이로 단단히 싸맨 서류와 서책이었다.
“계약서는 괜찮고. 춘화…… 서책도 괜찮구나.”
“……이제 됐는가?”
“아니요.”
정광은 그것들을 다시 챙긴 뒤 기합을 질렀다.
“합!”
파아앙-
낭랑한 기합 소리와 함께 미세한 물방울들이 안개처럼 퍼졌다.
도복에 내공을 주입해 물기를 날려 버린 것이다.
“…….”
“후우우. 찝찝함이 사라지니까 좋네. 어르신도 확인해 볼까.”
정광은 그제야 권존의 몸을 살폈다.
“어? 상태가 안 좋으시네?”
“……!”
“제가 도와드릴게요!”
정광은 권존의 몸을 억지로 구겨 가부좌를 틀게 했다.
등 뒤에 있는 명문혈(命門穴)에 손바닥을 대고 내공을 밀어 넣었다.
“으쌰.”
퍼엉!
“쿨럭!”
권존이 물을 토했다.
“핫.”
퍼엉!
“우웩!”
권존이 그냥 토했다.
“아직 부족한가? 그럼…….”
“그만! 쿨럭쿨럭. 그만해라!”
권존이 비명 같은 고함을 지르자 정광이 반색했다.
“깨어나셨군요! 다행이에요!”
“시끄럽…… 크헉!”
“그렇죠. 안정을 취하셔야죠.”
정광은 사람들에게 주의를 줬다.
“운기조식으로 상세를 다스리셔야 하니 조용히 해주시겠어요?”
“…….”
“지루하시더라도 잠시만 참아주세요. 어르신, 어서 하시죠.”
“……여기에서?”
“부끄러움이 많으시네요. 그럼 저만 할게요.”
정광은 바로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권존과 지켜보던 사람들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이런 곳에서 운기조식을?’
‘호법도 없이? 수적들도 있는데?’
정파 무인들도 수적들도 이해할 수 없었다.
우경 역시 마찬가지.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겪어도 겪어도 알 수가 없구나.’
정광을 이해하는 걸 포기하고 수적들에게 작게 명했다.
“배가 최대한 움직이지 않게 해라. 주위를 경계하고.”
“존명.”
수적들이 명에 따랐다.
우경은 한숨을 쉬며 지금까지의 일을 돌아봤다.
‘거대한 악귀에게 연화가 반파되고 소용돌이에 휩쓸릴 때만 해도 죽는 줄 알았거늘.’
지금은 다른 소선에 타고 있는 불존과 환존, 그리고 배들을 건너뛰며 날아온 다른 십존들의 활약으로 악귀를 없앨 순 있었으나 소용돌이는 아니었다.
얼마 안 가 선체가 부서져 동정호에 가라앉을 줄 알았건만, 기적처럼 소용돌이가 사라진 것이다.
‘진옥룡이 또 나를 살렸구나.’
물속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엉망진창인 권존의 행색을 보면 무척이나 흉험한 싸움이었을 터.
고개를 슬쩍 돌려 멀리 떨어져 있는 중군(中軍) 선단을 확인했다.
제일 큰 배의 선수에 우뚝 선 수왕이 찡그린 눈으로 훼손된 배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렇게 될 것이란 걸 예상하고 있었던 걸까?’
그럴지도.
수왕은 뒤처리만 지시했을 뿐, 이번 싸움에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
‘나보다 그가 더 진옥룡을 믿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군.’
수십 년이 넘게 장강을 통치해 온 수왕의 인정을 받는 사내라.
우경은 정광을 주시하며 결심했다.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 도와야 해. 이런 영웅은 다시 나오지 않아.’
그때, 그 영웅이 눈을 떴다.
“버, 벌써 끝났는가?”
“네, 채주님. 어?”
정광은 권존을 보며 타박했다.
“왜 운기조식 안 하세요?”
“이런 곳에서 어떻게 하란 말이냐?”
“저는 했는데.”
“나는 아니야!”
“기력이 넘치시네요. 그럼 잠깐 힘 좀 써주실래요?”
“……무엇을 하려고?”
정광이 호숫물을 가리켰다.
“전부 사라지진 않았던데. 쇠기둥 조각들 좀 건지죠.”
“……왜?”
정광의 눈이 빛났다.
“처음 보는 문자라서요. 탁본을 뜨려고요.”
* * *
버릴 건 버리고.
수리할 건 수리하고.
정리를 마친 대선단이 다시 출발했다.
동정호에서 무사히 나와 장강 지류를 탔다.
상음(湘陰)을 지나 망성(望城)에 이를 때까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광은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아서 다 피하네.’
대선단이 나타나자 마주 오던 배들이 방향을 틀었다.
덕분에 대선단은 말 그대로 쭉쭉 나아갈 수 있었다.
‘금방 도착하겠는데.’
장강이라는 큰 관문을 넘기 직전이었다.
장강수로연맹의 배들만 파손됐을 뿐, 무림맹의 피해는 전무한 상황.
‘하지만 앞으로는 아니겠지.’
몇이나 다칠지, 얼마나 죽을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사마련주를 빨리 잡을수록 사상자가 줄어들 거라는 사실.
‘뭍에는 또 어떤 수작을 부려놓았으려나.’
생각하는 동안 시간이 흘렀다.
대선단은 목적지인 호남성(湖南省)의 성도(省都), 장사(長沙)에 도착했다.
‘별다른 느낌은 없는데.’
정광은 뭍을 둘러보다가 제일 먼저 뛰어내렸다.
턱.
‘흐음. 정말 없네. 이렇게 끝날 리가 없는데.’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일단 좀 쉬고.’
정광은 배들을 향해 크게 외쳤다.
“이상 없네요! 내리세요!”
사람들이 분분히 내렸다.
인원이 많은지라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정광은 그사이 수왕과 전음을 나눴다.
-다녀올게요.
-오래는 못 기다린다.
정광이 웃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