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원흉(元兇)
하북성에서 손꼽히는 대토호(大土豪)인 진주언가(晋州彦家)는 오랜 세월 동안 무림칠대세가의 일원이었을 만큼 유명한 무가다.
심후한 내공과 단단한 외공을 바탕으로 펼치는 간결하면서도 무거운 권법이 장기였는데, 무공의 기풍이 그래서 그런지 올곧은 성품을 지닌 많은 협객을 배출했다.
그중 한 명이 당대의 태상가주 권존(拳尊) 언패호.
그는 어린 시절부터 협을 추구했다. 약관이 되기도 전에 힘없는 이들을 괴롭히던 색마(色魔)와 살귀(殺鬼)의 목을 베고, 장년에 이르자 하북성 남단을 휩쓸던 마적단을 홀로 토벌했다.
그 후에도 협행을 멈추지 않고 인구에 회자될 수많은 미담을 만들어냈으나…….
‘여기에 뛰어들라고?’
권존은 모든 것을 부술 기세로 회오리치는 소용돌이를 노려봤다.
‘이건 아니지.’
아무리 봐도 정말 아니었다.
사마련이 무슨 수로 이런 기사를 일으켰는지는 모르나 한낱 사람인 자신이 어찌 막겠는가?
‘뛰어들면 죽는다.’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할 정도로 갈가리 찢어질 터.
협의로 똘똘 뭉친 그였지만 쓸모없는 만용을 부릴 생각은 없었다.
그런 그를 정광이 재촉했다.
“어르신? 약조요, 약조.”
“…….”
“이러다 다 죽어요. 협의에 어긋나긴커녕 딱 부합되는 일이잖아요.”
“…….”
권존은 떨어지지 않으려는 입을 억지로 벌렸다.
“저기에 뛰어들어서 뭘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
“호수 바닥에 진(陣)이 설치돼 있을 건데 그걸 부수시면 돼요.”
“나는 진을 모른다.”
“제가 아니까 괜찮아요. 같이 가시죠.”
“……!”
권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직접 들어갈 생각이었나? 저 흉험한 곳에?’
뛰어들자마자 소용돌이에 휩쓸릴 게 분명하거늘.
다른 이들을 위해 희생할 각오를 다지고 있었을 줄이야!
감탄이 절로 일고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그래도 이건 개죽음이 될 게 분명한데…….’
권존이 고민하는 그때.
촤아아악!
소용돌이 한가운데에서 거대한 물줄기가 솟아올랐다.
그 물줄기는 허공에서 얽히고설켜 괴이한 형상으로 화했다.
‘……악귀?’
평생 본 적이 없는 것이지만 그 이름밖에 안 떠올랐다.
차가운 물방울을 화염처럼 불사르며 뻥 뚫린 두 눈을 굴리는 것을 무엇이라 표현하겠는가?
그 악귀가 흉측한 입을 벌렸다.
드드드득-
그리고 포효했다.
꾸아아아악!
요사한 요기(妖氣)로 뭉쳐진 끔찍한 소리가 연화의 갑판 위로 쏟아져 내렸다!
“윽!”
“커헉!”
무공이 낮은 수적들이 짧은 비명을 토하며 비틀거렸다.
“불존 어르신!”
정광의 외침에 불존이 응했다.
“아이금강삼등방편(我以金剛三等方便). 신승금강반월풍륜(身乘金剛 半月風輪)…….”
심후한 내공과 지극한 불심을 담아 항마진언(降魔眞言)을 읊었다.
전심전력을 다하는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후우우웅-
그의 전신에서 장엄한 광휘(光輝)가 일어났다.
그것은 순식간에 크기를 키워 연화(蓮花)의 선체를 뒤덮었다.
그 빛에 물든 수적들의 낯빛이 원래의 것으로 서서히 돌아왔다.
“크윽. 죽는 줄 알았잖아.”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사술에서 풀려난 수적들이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쓰는데.
허공에 떠서 그들을 내려다보던 악귀가 입을 크게 벌렸다.
콰아아아앗!
이번엔 포효가 아니었다.
푸른색이 아닌, 검게 번들거리는 물줄기가 연화에 내리꽂혔다.
“환존 어르신!”
정광의 외침에 환존은 행동으로 답했다.
스으으으-
자하신공(紫霞神功)을 끌어 올렸다.
그의 눈에서 흘러나온 자색(紫色) 빛이 그는 물론이요, 검까지 물들였다.
쉬이익-
신형을 솟구치며 검을 움직였다.
화산 무학의 집대성이라 일컬어지는 자하검결(紫霞劍訣)!
그중에서도 절초인 자하개벽(紫霞開闢)이 펼쳐진 것이다!
불길한 검은 물줄기와 아름다운 자줏빛 노을이 부딪혔다.
콰아아아앙!
호각이었던 걸까?
흑색도 자색도 사라졌다.
푸른 하늘이 드러나며 뛰어올랐던 환존이 떨어졌다.
쿵.
“…….”
환존은 갑판 위에 우뚝 서 악귀를 올려다봤다.
그의 눈빛은 무심했으나 꾹 다문 입술을 비집고 가는 핏줄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떠세요?”
정광의 물음에 환존이 등을 보인 채 답했다.
“오래 막지는 못한다.”
“겸손하시기는. 믿을게요. 군사님! 아니, 채주님!”
우경이 대답했다.
“말 안 해도 아네! 중군(中軍)에게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고 알려라! 돛을 접어! 노를 저어서 후진이다!”
“존명!”
수적들은 무시무시한 악귀에게 공포심을 느끼면서도 재빨리 움직였다.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쥔 우두머리의 명에 따르는 뱃사람의 본능이 공포심을 밀어낸 것이다.
북이 울리고 깃발이 휘날렸다.
뒤에서 오던 배들이 서서히 멈췄다.
연화도 조금씩 조금씩 뒤로 움직였으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악귀가 일으킨 소용돌이는 점점 빠른 속도로 돌았고 그 흐름에 영향을 받은 연화는 아무리 힘을 써도 끌려가기 시작했다.
“진옥룡! 우리도 오래는 못 버티네!”
우경의 절규에 가까운 고함에 정광도 외쳤다.
“최선을 다해주세요! 빨리 끝낼 테니까!”
정광의 시선이 권존에게 향했다.
“어르신은 어떠세요? 준비되셨죠?”
권존은 주위를 한 바퀴 둘러봤다.
굵은 땀방울을 뚝뚝 흘리며 항마진언을 외우고 있는 불존.
내상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악귀를 노려보며 검을 겨누고 있는 환존.
보잘것없는 무공을 가졌으면서도 필사적으로 배를 움직이려는 수적들까지.
마지막으로 담담한 눈빛을 흘리고 있는 정광이 보였다.
“가자.”
“자맥질할 줄 아시나요?”
“조금.”
“못하시는 것보단 훨씬 낫네요. 잘 들으셔야 해요. 이제…….”
정광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간단하게 설명했다.
고개를 끄덕인 권존이 내공을 끌어 올렸다.
그의 무겁게 가라앉은 눈이 정광을 향했다.
“우리가 해낼 수 있으리라 보느냐?”
정광이 씩 웃었다.
“제가 괜히 어르신을 택했겠어요?”
“평생의 자랑거리가 생겼군.”
“돌아오시고 나서 마음껏 자랑하세요.”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신형을 날렸다.
소용돌이의 중심지, 호수와 악귀의 다리가 닿은 지점을 향해서였다.
약조한 대로 정광이 먼저 앞서 나갔다.
‘그나마 중심이 제일 안전하지.’
시야에 목표물이 급격하게 확대됐다.
동시에 활짝 개방한 기감이 복잡하게 얽힌 요기를 낱낱이 감지했다.
‘여기냐?’
결이 보이고, 느껴졌다.
황금빛으로 물든 운룡이 허공을 갈랐다.
호수와 맞닿은 악귀의 외다리가 깨끗이 잘려 나갔다.
촤아악-
꾸워어어억!
악귀가 분노에 찬 고함을 질렀다.
호수에서 다시 물이 솟구치며 악귀의 다리와 이어지려고 하는 그때!
“지금이에요!”
“알고 있다!”
뒤이어 날아온 권존이 호숫물을 향해 일권을 내려쳤다.
언가 비전 붕산권(崩山拳)!
곧게 내려치는 단순한 일격이었으나 대단한 힘이 실려 있었다.
이름처럼 산을 무너뜨리진 못하더라도 호숫물 중 일부쯤은 분쇄하고도 남을 위력!
파아아앙!
올라오던 물줄기가 산산이 흩어졌다.
“방심하시지 말고 계속요!”
“물론!”
권존은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며 권격을 연달아 내질렀다.
호숫물은 솟구치지 못하고 점점 깊이 패여갔다.
실로 대단한 위용이었으나 막대한 내력을 쏟아부었기에 가능한 일.
권존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교대다!”
곧 호수에 떨어질 판이었다.
분명 약조했던 대로 외쳤건만.
정광이 거절했다.
“지금은 안 돼요!”
권존은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아차! 악귀!’
바로 머리 위에 있을 그것을 잊다니.
정광은 놈을 막느라 바빠 교대할 틈이 없을 게 확실…….
“…….”
아니었다.
호수와 끊어진 악귀는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연화에 다가가 맹공을 퍼붓고 있었다.
정광은 강호일절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을 펼쳐 허공에서 유유히 유영하고 있었고.
권존이 비통하게 부르짖었다.
“왜!”
“저는 힘을 아껴야 해서요. 먼저 가시죠.”
“…….”
풍덩.
권존은 결국 호수에 빠졌다.
또 한 번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로구나! 사특한 면도 있다더니 이 정도일 줄이야!’
정광의 말대로 소용돌이의 중심이 오히려 고요한 건 다행이었으나.
이용당했다는 걸 깨닫자 극심한 분노가 치솟았다.
허나 더 급한 일이 있었다.
자신의 안력이라면 호수 밑바닥까지 훤히 보여야 하건만.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낯선 상황.
권존은 재빨리 마음을 가라앉혔다.
‘평정. 평정이다.’
시야는 가려졌으나 다른 감각은 여전했다.
몸이 천천히 가라앉는데 밑에서 요사한 기운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그 기운을 따라 물살이 움직였다.
그의 다리를 향해서!
‘내 다리를 묶겠다고?’
권존은 몸을 뒤집었다.
상체를 아래로 향한 채 주먹을 내질렀다.
후웅-
정심한 내공을 품은 권격이 쏘아졌다.
그것은 다가오던 요기와 격렬히 충돌했다.
쿠웅-
무거운 소리가 고막을 찌르고 엄청난 진동이 전신을 울렸다.
‘으윽. 끝인가?’
아니었다.
요기가 계속 다가왔다.
갖가지 괴이한 형태로!
권존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이깟 사술로 감히!’
언온태산기공(彦蘊太山氣功)으로 평생 쌓아온 내공이 솟구쳤다.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을 겪으며 수련해 온 철갑신공(鐵甲神功)이 전신을 보호했다.
이렇게 내외(內外)로 완전해진 권존은 권사(拳師) 중의 권사다운 권을 펼쳤다.
일체의 허례허식(虛禮虛飾)을 배제한 지르기였다.
후우웅-
퍼엉!
부우웅-
콰앙!
요물들이 산산이 흩어졌다.
하지만 수가 너무 많았다.
놈들 중 일부가 권존을 물어뜯고 손톱으로 그었다.
무림일절 철갑신공을 꿰뚫을 수는 없었으나 아무런 피해가 없는 건 아닌 상황.
상처들에서 피가 흘러나와 칠흑 같은 어둠을 검붉게 물들였다.
‘성가시군.’
이런 꼴이 되다니.
물속이라 움직임에 많은 제약이 있어서였다.
‘바닥을 딛고 싸운다.’
원래의 계획이 그랬다.
순간 정광의 얼굴이 떠올라 마음이 흔들렸다.
‘평정!’
가까스로 가라앉히며 천근추(千斤錘)를 펼쳤다.
우웅-
신형이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더 많은 요물들이 달려들었으나 온몸으로 막아내며 속도를 올렸다.
그리고 마침내.
턱.
호수 바닥을 디뎠다.
수많은 상처를 입은 대가로 얻은 기회였기에 소중히 써야 했다.
‘여전히 아무것도 안 보이지만.’
느껴졌다.
전후좌우는 물론 위에서조차 요물들이 달려들고 있었다.
스으으-
권존의 신형이 낮아졌다가.
촤아악-
움직였다.
쾅! 펑! 후웅-
정면의 놈을 권으로 흩뜨린다.
좌측으로 빙글 돌아 지척까지 다가온 놈을 팔꿈치로 박살 낸다.
올려다보지도 않고 위로 장력을 뿌려 물보라로 만든다.
적수공권으로 천하를 질타했던 권존다운 위용!
‘이제야 제대로 펼칠 만하구나.’
강호의 격언 중 권사는 그 자체로 존경받을 만한 존재라는 말이 있다.
내공은 물론 외공까지 닦아 내외를 완전히 한다.
빠르고 변화무쌍한 보법과 신법으로 병기를 든 자의 사각을 노린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용기.
이렇게 몸과 마음을 단련한 자만이 권사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수가 너무 많아.’
내공과 외공으로 극복했다.
‘공격이 갈수록 교묘해지는데.’
보법과 신법으로 대응했다.
‘출혈이 심해서 어지럽군.’
정신력으로 극복했다.
‘나는 절대 쓰러지지 않아.’
권존은 자신의 다짐대로 계속 싸웠다.
요물들의 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허나 그만큼 다시 나타났다.
‘대체 어디에서 이렇게 계속 나오는 거냐!’
평정이 흔들리며 분노가 솟구치는 순간!
뒤쪽에서 엄청난 기가 느껴졌다.
지금의 그로선 절대 상대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기가!
권존은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더 분노했다.
‘이놈이 이제야!’
익숙한 기, 정광의 것이었다.
‘요물이고 뭐고 네놈부터…….’
몸을 돌리려는 그때!
정광의 전음이 들렸다.
-역시 권존 어르신. 덕분에 힘을 비축하고 왔네요. 곧 진을 파괴할 테니 그때까지만 더 버텨주세요.
-……반드시 그래야 할 것이다!
-물론이죠.
정광은 자신 있게 대답한 뒤 자신의 앞에 박혀 있는 거대한 쇠기둥을 어루만졌다.
‘앗. 따가워.’
엄청난 요기였으나 상대가 안 좋았다.
전생에 혼을 스스로 단련해 마(魔)를 품었던 정광 아닌가.
그래도 따가운 건 싫었다.
-인마. 일 안 하냐?
-우우우우웅!
역천경이 우렁차게 울었다.
쪼끄만 놈이 배는 얼마나 큰지, 정광의 손을 향해 달려드는 요기를 허겁지겁 집어삼켰다.
요기가 주춤거렸다.
덕분에 정광은 마음 편히 쇠기둥을 만지며 확인할 수 있었다.
그곳에 새겨진 문자들을!
진법과 사술을 묶어서 움직이는 원흉을 말이다!
‘이건!’
정광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어느 나라 문자야?’
생전 처음 보는 것 아닌가?
‘미치겠네.’
아쉬움에 탄식이 절로 나왔다.
이러면 무슨 원리인지 알 도리가 있나.
꽤 흥미로운 진이라 요령을 좀 훔쳐볼까 했는데…….
망했다.
‘아깝지만 할 수 없지. 그냥 힘으로 다 부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