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대공(大功)
사람이든 사물이든 힘을 받으면 밀린다.
타격을 받으면 아주 쭉 밀려나고.
그런데 타격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쉼 없이 두들겨 맞으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고수라 해도 중심을 잃고 쓰러지기 마련.
하지만 환존은 달랐다.
지켜보던 이들이 몸을 떨 만큼 곤죽이 됐는데도 제자리에 꼿꼿이 서서 버티는 모습이라니!
과연 환존!
……이 아니라 정광 때문이었다.
쓰러지려고 하면 반대쪽으로 가서 때리고, 또 넘어지려고 하면 다시 그쪽으로 가서 패고.
환존은 중심을 잃을 틈이 없었다.
계속 그렇게 얻어맞았다.
반면, 오랜만에 느끼는 찰진 손맛에 즐거워하던 정광은 시간이 지날수록 감탄하게 됐다.
‘제법인데.’
환존은 이를 악물며 정신 줄을 붙잡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내공을 끌어 올릴 만한데도 엄청난 인내력으로 참고 있었고.
재수 없는 놈이지만 약조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검이 부러졌을 때도 비무 중지를 요청하지 않았지.’
그랬다 하더라도 말을 끊어버리고 팼겠지만.
어쨌든, 천하가 넓다 하나 이런 이가 흔할까?
절대 그렇지 않다.
이 와중에도 눈을 빛내며 틈을 노리고 있지 않은가.
환존은 진짜 무인이라 할 만했다.
‘뭐 그건 그거고.’
그래서 더 팰 만했다.
이 정도 되는 고수를 근력만 사용해서 패는 즐거움을 언제 또 누릴 수 있으랴?
패고, 패고, 팼다.
우아하면서도 멋지게!
환존의 굳게 다물린 입에서 고통 섞인 신음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좋아. 소리를 더 키워볼까.’
운룡금나수(雲龍擒拿手)로 뒷목을 잡아 끌어내리며, 비룡선풍각(飛龍旋風脚)을 응용해서 한쪽 무릎을 쳐올렸다.
곤륜 비전 무공들로 펼친 환상적인 연계기였으나 보는 이들의 눈에는 시장통 악소(惡少)가 성명절기(姓名絶技)로 삼는 개싸움이나 다름없었다.
허나 그만큼 효과는 탁월했다.
펑!
“컥!”
환존의 복부에서 큰 북을 치는 듯한 소리가 났다.
입에서는 또렷한 비명과 함께 침이 흘러나왔고.
마지막으로 눈까지 풀렸으니, 무척이나 흡족한 반응이었다.
‘이제 그만 자빠뜨리고 밟자.’
슬슬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고 하는데.
허청의 전음이 귀를 때렸다.
-손속에 사정을 둬라!
-그러고 있는데요?
-더 둬! 그러다 큰일 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정광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환존쯤 되는 고수가 이 정도 맞았다고 설마 죽기야…….
‘눈이 완전히 풀렸네.’
몸은 안 죽더라도 정신이 꺾이기 직전.
그래선 곤란했다.
한 사람이 귀한 판국에 어찌 그런 짓을!
무림맹의 전력을 제 손으로 깎아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계획대로 개망신은 줬으니 최소한의 체면은 세워주자.’
정광은 환존의 뒷목을 잡고 있던 양손을 푼 뒤 우아하게 포권했다.
“양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환존은 멍한 눈으로 정광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런. 정신이 완전히 나간 건가?’
자세히 살펴보려고 하는데.
아니었다.
환존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괜찮으시죠?”
“…….”
“눈빛이 점점 강해지시는 걸 보니 그러시네요.”
“…….”
정광을 한참 노려보던 환존이 입을 열었다.
“내가 졌다.”
“비긴 거로 하죠.”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 셈이냐?”
“계속 검으로 싸웠으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잖아요.”
“그건 그거고 지금 내가 졌다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야.”
정광은 환존의 눈을 들여다보다가 작게 물었다.
“혹시 삐지셨어요?”
“삐지다니!”
“아니시면 다행이고요.”
“……이익.”
환존은 간신히 선 채 이를 악물었다.
중인환시(衆人環視)리에 어린놈에게 개처럼 두들겨 맞고 모욕까지 받다니.
이런 날이 올 것이라 상상이나 해봤겠는가.
‘얼굴을 들 수가 없구나…….’
고개가 점점 처졌다.
‘이 일을 어찌할꼬…….’
정광이 답을 줬다.
“그렇게 맞으시면서도 스스로를 통제하시던 분이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왜 쓰실까?”
정광은 한 손을 들어 환존을 향해 내질렀다.
환존은 반응하지 않았다.
정광의 주먹이 환존의 옆구리를 스쳐 지나간 뒤 멈췄다.
“왜 가만히 계셨죠?”
“나를 치려는 게 아니었으니까.”
“제 주먹이 어르신의 가슴을 노렸으면요?”
“비무가 끝났으니 내공을 끌어 올려 맞섰을 것이다.”
“아까 내공을 안 쓰신 건 사람들을 의식하셔서였나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러기로 했으니 지켰을 뿐이야.”
“바로 그거죠.”
정광이 손뼉을 쳤다.
“무슨 말이냐?”
“마음먹으신 대로 행동하시는 분이 왜 흔들리세요? 다시 새로운 마음을 먹으시면 되지.”
“……!”
“사람들의 시선은 왜 따지시고요. 아무리 꽂혀도 어르신의 몸을 뚫을 수는 없는데. 아까의 제 주먹처럼 무시하시면 되잖아요.”
“……!”
환존의 눈빛이 여러 차례 변했다.
정광은 씩 웃으며 환존을 부축해 갑판에 앉혔다.
“잠시 생각 좀 정리하시죠. 치료해 드릴게요.”
정광은 그의 뒤에 앉아 내공을 불어넣었다.
거절하려던 환존은 따스하고 부드러운 기운이 스며들자 그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망나니 같은 언행과 달리 내공은 순수하구나.’
정광을 다시 보게 될 정도였으나 얼마 안 가 고개를 저었다.
‘병을 주다가 약을 준다고 이렇게 생각이 바뀌다니…….’
시간이 더 지나자 다른 생각이 들었다.
‘……결국 모든 건 마음에 달린 것인가.’
마음, 마음이라.
폐관수련을 마친 뒤 들떴던 마음이 떠올랐다.
‘조금 전 무참히 짓밟혔는데도 또렷이 기억나는군.’
손만 뻗으면 다시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환존은 그 마음을 되새기며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뒤.
그의 몸이 은은한 빛에 휩싸였다.
강변에서 지켜보던 이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깨, 깨달음…… 읍!”
놀라서 외치려던 무인의 입을 화산파 노도사가 재빨리 달려와 틀어막았다.
“실례했네. 이해해 주게나.”
다른 화산파 제자들도 주위를 돌아다니며 작은 목소리로 양해를 구했다.
“중요한 순간이니 정숙해 주시기 바랍니다.”
“불편하시겠지만 부탁드립니다.”
당연히 모두 동의했다.
깨달음의 순간을 망쳤다가 무슨 원망을 들으려고!
아니, 원망으로 끝나면 다행이지.
어떤 식으로든 보복당할 게 뻔하지 않은가.
‘그나저나 정말 대단하군.’
‘진짜 용이라더니 과연.’
‘소문이 오히려 부족할 정도야.’
소문이란 본디 과장되기 마련.
믿지 못할 만큼 대단한 내용이면 더 그랬다.
하지만 그 소문의 진위를 직접 확인하게 되면?
더욱더 열광할 수밖에.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어느 날 오전.
정광의 무용이 무림맹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됐다.
* * *
정광은 어이가 없었다.
정신 좀 차리게 하고 치료해 준 뒤, 그걸 핑계로 푹 쉬려고 했는데.
‘깨달음을 얻어?’
여기까지만 해도 큰 문제는 없었다.
눈곱만큼 더 강해진 환존이 다시 덤비면 아까처럼 또 패주면 되니까.
그런데 이건 아니지.
깨달음에 빠진 환존을 두고 강변으로 돌아오자 사람들이 미친 듯이 몰려왔다.
“지, 진옥룡. 나와도 비무를 해주겠는가?”
“제발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어허. 사람들하곤. 왜 이리 무례한가? 나부터…….”
환존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낮은 목소리로 하는 말들이었으나 그 속에 담긴 간절함은 그 어떤 외침보다 강했다.
하지만 그건 그들 사정이고.
정광은 살짝 비틀거리며 중얼거렸다.
“으윽. 기, 기혈이…….”
“…….”
“내공을 너무 많이 썼나? 힘이 하나도 없네. 온몸이 쑤시고.”
“…….”
사람들은 황당한 얼굴로 정광을 뜯어봤다.
‘잘 걷다가 갑자기?’
‘얼굴도 뽀얀데 뭐?’
정광은 두 손을 모으며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실례합니다. 잠시 지나갈게요.”
“…….”
“자오. 사제. 나 부축 좀 해줘요.”
“아. 네!”
“알겠습니다, 사형.”
정광은 그들의 부축을 받으며 천막으로 향했다.
제갈문형이 웃음을 참으며 다가와 물었다.
“더 시범을 보일 기력이 없는가?”
“역시 군사님이시네요. 바로 아시고.”
“그럼 자네 단원들을 잠시 빌리겠네.”
“얼마든지요.”
정광과 함께 장강을 질타하며 장강수로연맹과 싸웠던 무혈단이다.
정파무림에서 그들만큼 선상(船上) 싸움에 익숙한 이들은 없다시피 한 상황.
정광이 승낙하자 제갈문형이 전음을 보냈다.
-쓸데없는 기 싸움만 멈추게 해줬어도 고마운데 전력을 올려주기까지 했군. 내일 출발할 때까지 귀찮게 안 할 테니 푹 쉬게나.
정광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군사는 됐지만 나머지는 아니지.’
많은 이들이 쫓아와 귀찮게 굴 게 뻔했다.
‘그래. 조금 전에 배운 걸 쓰자.’
천막에 들어가자마자 하얀 종이를 펼쳤다.
붓에 먹을 묻히고 든 뒤 전심전력으로 집중했다.
‘간다!’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붓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정광은 붓을 내려놓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소맷자락으로 땀을 훔치며 짓는 미소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허나 그의 좌우에서 지켜보던 자오와 백승무는 황당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진옥룡, 깨달음에 빠진 상황. 출입금지.]
겨우 이런 글을 쓰려고 그렇게 집중했다니.
“……사형. 그렇게 움직이기 싫으십니까?”
“응. 이미 많이 움직였잖아.”
“……이제야 이해했습니다. 이걸 붙여놓으면 십존 어르신들도 못 들어오시겠군요. 다른 사람들의 지탄을 받게 되실 테니까 말입니다.”
“사제. 도가 많이 늘었네.”
“……감사합니다.”
백승무가 도를 얻은 반면, 자오는 다른 것에 주목했다.
“오늘 새벽에 붙이셨던 것도 그렇고. 원래 이렇게 잘 쓰시는데 일부러 엉망으로 써오셨던 겁니까?”
그의 말대로였다.
크게 고민하지 않아도 알아볼 수 있는 필체 아닌가?
정광은 바로 부정했다.
“아니요. 이건 전력을 다해 써서 그런 건데요.”
“이렇게 하찮은 것을 왜 그렇게…… 아니, 계약서 같이 중요한 것들은 대충 쓰셨잖습니까? 필체를 가지고 상대 쪽에서 딴소리를 하면 어쩌시려고…….”
“딴소리하면 패고 더 뜯어내면 되니까요.”
“…….”
“하지만 자다가 깨면 깨운 상대를 응징한다고 달아난 잠이 돌아오진 않잖아요.”
“…….”
“이해하셨죠?”
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자오가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자 정광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자오. 귀찮은 선상 훈련에서 빼드렸으니 편히 쉬세요. 밥 먹을 시간 되면 천막으로 좀 가져다주시고요.”
자오와 백승무의 눈이 빛났다.
“맡겨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사형.”
“아. 군사 것도요.”
두 사람의 시선이 천막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위진홍을 향했다.
퀭한 얼굴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 어찌나 안쓰러운지.
정광이 남궁세가를 떠났을 때부터 줄곧 저런 상태였다.
‘벌써 며칠째인지 모르겠구나.’
‘그래. 밥을 가져와서 억지로라도 먹이자.’
이렇게 결심한 두 사람과 달리, 정광은 아까의 말을 끝으로 신경을 끊었다.
위진홍 스스로 이겨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알아서 잘하겠지.’
정광은 잠을 자다가 깨서 점심을 먹고, 침상에서 뒹굴뒹굴하다가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깊은 밤이 되자 체조법을 펼친 뒤 운기조식을 함으로써 긴 하루를 마무리했다.
‘이 정도면 됐어. 기대되는걸.’
사마련에서 어떻게 나올까?
장강을 타자마자 공격해 올까?
아니면 뭍에서 기다리다가 배에서 내리자마자 달려들까?
총단에 틀어박혀 공성전을 할지도.
‘아무래도 상관없어.’
정광은 준비가 되어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천막을 열고 나가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정광은 발걸음을 옮기며 그들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정광의 의례적인 인사에 중년 무인이 엄숙한 얼굴로 포권했다.
“대공(大功)을 이루신 걸 축하하네.”
“네? 아.”
흘깃 돌아보니 천막 입구에 붙여놓은 ‘진옥룡, 깨달음에 빠진 상황. 출입금지’가 보였다.
“감사합니다.”
“진옥룡! 대공을 이루신 걸 축하드립니다!”
“으하하! 강호의 홍복이로다!”
“진옥룡 만세! 무림맹 만세!”
사람들이 팔을 번쩍 들며 환호했다.
화산 제자들도 정광을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정중히 두 손을 모았는데, 그중에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울보 도사, 상원이었다.
“진옥룡, 오랜만이오.”
“어? 잘 계셨어요? 지금 우시는 거예요?”
“아니오. 살짝 맺혔을 뿐이외다.”
“제가 어르신을 때린 게 분해서요?”
상원이 빙그레 웃었다.
“정당한 비무에서 지셨는데 내가 왜 분하겠소?”
“좋은 마음가짐이시네요. 환존 어르신도 그러시면 좋을 텐데.”
“그대 덕분에 한 걸음 나아가셨소이다. 말씀은 안 하셔도 무척 고마워하고 계실 것이오. 투지를 불태우시는 거야 무인으로서 당연한 일이고.”
상원이 정중히 두 손을 모았다.
“축하하오. 그리고 감사하오.”
“뭘요.”
“또 봅시다.”
“죽지 마세요.”
상원은 물론, 흐뭇하게 지켜보던 사람들의 얼굴이 굳었다.
목숨을 건 큰 싸움이 시작된다는 걸,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껴서였다.
아침 식사 뒤.
모두가 도열한 가운데 무림맹주 팽수관이 단상 위에 올랐다.
“마지막 승부가 될 것이 분명할 터! 모두의 무운을 비오! 무림맹, 출진(出陣)!”
그의 연설은 짧았으나 무림맹 무인들의 피가 끓어오르기에는 충분했다.
“와아아아아!”
엄청난 수의 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건곤일척의 결전을 위한 첫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