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딴마음
‘낮잠도 낮잠이지만, 다시 무한(武漢)에 온 김에 황학루(黃鶴樓)에 들러 술잔을 기울이려고 했는데.’
중원 사대 명루(名樓) 중 하나인 황학루는 수많은 문인이 올라 천하절경을 즐기며 시를 지었던 곳.
월광채(月光寨)에 있는 수왕을 치러 왔을 때와 달리 시간이 좀 날 줄 알았건만.
시간이 나긴 개뿔.
당(唐)의 문인 최호가 황학루에서 지었다는 시가 떠올랐다.
‘석인이승황학거(昔人已乘黃鶴去).’
옛사람은 이미 황학을 타고 가버렸고.
‘차지공여황학루(此地空餘黃鶴樓).’
이곳엔 황학루만 남아 있구나.
‘황학일거불부반(黃鶴一去不復返).’
황학은 한번 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백운천재공유유(白雲千載空悠悠).’
흰 구름만 천 년 동안 한가로이 떠도노라.
그렇다.
사람들에게 잡혀 옴짝달싹 못 하게 되자 황학이 되어 날아가든지 구름처럼 떠돌고 싶어졌다.
게다가 뭐가 이렇게 시끄럽냔 말이다!
“아우! 우릴 떼어놓고 가는 건 한 번으로 족하네! 다시는 그러지 말게나!”
“제자야! 사천성을 떠난 뒤 요란하게 싸웠다고 들었다! 나도 같이 갔어야 했는데!”
“진옥룡! 오랜만일세! 다시 장강에 돌아와 줘서 기쁘네!”
“철월은 육포가 떨어졌다! 더 줘라, 도사!”
사람이 하도 많이 몰려 고함지르듯 말해야 들릴 지경.
‘이대로 가면 끝이 없어.’
결단을 내린 정광은 두 손을 우아하게 모았다.
“무량수불! 찾아와 주신 도우들께 감사드립니다! 허나 인사를 나누기 위해선 질서가 필요한 법! 질서를 지켜주시면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실 수 있을 테니 부디 협조 부탁드립니다!”
“……!”
난데없는 말에 모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러든 말든 정광은 무혈단에게 재촉했고.
“뭐 해요? 빨리 시작하죠.”
“아, 알겠습니다.”
눈치 빠른 자오가 재빨리 외쳤다.
“줄을 서주십시오!”
백승무가 그 뒤를 따랐다.
“저희를 믿어주십시오! 빠르고 알찬 만남을 조성해 드리겠습니다!”
정광과 다니며 수많은 민초들을 상대해 왔던 무혈단원들도 가세했다.
“무림맹 소속 분들은 이쪽입니다!”
“장강수로연맹 분들은 저쪽으로 모여주십시오!”
“양측에서 한 분씩 번갈아 가며 만나실 겁니다!”
“만남에 무공, 명성, 출신 등은 상관없습니다! 오직 선착순일 뿐!”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눈을 끔뻑거리던 사람들은 선착순이라는 말에 정신을 차렸다.
‘내가 먼저야!’
‘아니, 나다!’
사람이 미어터질 만큼 몰려 있는 상황이었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뚫고 들어갈 수밖에.
하지만 그 앞에 있는 이가 순순히 비켜줄 리 있나.
대혼란이 일어나려는 그때!
무혈단 부단주 당오군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힘을 써서 앞으로 나오시는 분들은 정중히 사양합니다!”
닥치는 대로 패면서 나아가려던 당기황이 어이가 없어 물었다.
“사양한다고? 못 만나게 할 거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할아버님. 오늘은 물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하! 네 무공이 그새 더 나아지긴 했구나. 그렇다 해도 네가 감히 나를?”
당기황이 분노했으나 당오군은 눈도 깜짝 안 했다.
“제가 아니라 단주가 그럴 거란 말입니다.”
“……정광 저 녀석이?”
“그의 성품을 뻔히 아시잖습니까?”
당기황은 눈알을 굴려 정광을 힐끔 봤다.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망할 녀석 같으니. 할 수 없지.’
정광은 그러고도 남을 이였다.
자신이 질 거란 생각은 안 했으나 이 많은 이들 앞에서 제자와 싸울 수는 없지 않은가?
“흥.”
당기황은 콧방귀를 뀌며 줄을 섰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무혈단의 통제에 얌전히 따랐고.
물론 아닌 이도 있었다.
“우리는 이렇게 많은데 수적 놈들은 적잖아! 불공평한 거 아니야?”
걸존이 불만을 토하자 무림맹 사람들도 동조했으나…….
정광은 간단하게 해결했다.
“억울하시면 장강수로연맹으로 적을 옮기시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걸존이 길길이 날뛰려고 할 때, 자오가 바짝 다가가 속삭였다.
“어르신. 단주의 입장도 헤아려 주십시오. 장강수로연맹의 배를 타고 가야 하는데 저들을 섭섭하게 대해서야 되겠습니까? 장강수로연맹이 무림맹을 돕겠다고 나선 이때, 괜한 분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고 사료됩니다. 되도록 좋은 대우를 해줘서 앞으로의 여로에 문제가 생기지 않게 함과 동시에…….”
“돼, 됐다. 네 말이 다 옳으니 그만 가!”
“아직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본디 사람과 조직이란…….”
“됐다고! 줄 설게! 섰잖아! 됐지?”
걸존이 질린 얼굴로 두 손을 내저었다.
걸존처럼 한마디 하려던 창존도 얌전히 줄을 섰다.
십존 중 셋이 이러는데 누가 또 따지랴?
덕분에 정광은 편하게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첫 사람은 그의 사부 허청이었다.
“안녕하세요.”
“자, 잘 있었느냐?”
“네.”
“…….”
허청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데 뭘 말하겠는가?
뒤통수도 따가웠다.
기다리기 힘드니 대충하고 빨리 가라는 사람들의 시선 때문이었다.
“후우우. 그래. 건강한 걸 봤으니 되었다.”
“안녕히 가세요. 다음 분요!”
좌중에 가득하던 열기가 빠른 속도로 식었다.
사람들은 떨떠름한 얼굴로 짧은 인사를 나눈 뒤 사라졌다.
뒷줄에 서 있던 사람들의 눈이 흔들렸다.
‘아니. 이럴 거면 안 하는 게 낫지.’
‘오늘만 날인가. 다음에 하자.’
인사를 나누고 떠나는 이들에 그냥 가버리는 이들이 더해졌다.
그만큼 줄은 빨리 줄어들었고, 정광은 편하게 일을 마칠 수 있었다.
‘그래도 오래 걸렸네.’
대낮에 시작했건만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있다니.
수뇌부들이 있는 천막을 보자 그들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느 정도 조정이 됐나 본데.’
예상이 맞은 걸까?
팽수관과 수왕이 명을 내렸고 무림맹과 장강수로연맹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강수로연맹이 훨씬 더 빨랐다.
‘뭐 당연한 일이지.’
무림맹은 수많은 가문과 문파가 모여 만든 연맹이다.
일원화된 조직 체계가 아니다 보니 느릴 수밖에.
장강수로연맹도 열여덟 개의 수채로 이루어진 연맹이었으나 그 정점에 선 수왕이 절대권력을 휘두른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마음에 안 들면 바로 목을 쳐버리는데, 누가 감히 그의 명을 설렁설렁 따를까?
얼마 전 말을 잘 안 듣던 일곱 수채까지 정리하지 않았는가?
‘우경이 꽤 중용받고 있는 것 같네.’
능력도 있겠다, 수왕으로선 쓸 만한 패일 것이다.
정광과의 약조 때문에 그래야 하기도 했고.
정광은 바삐 뛰어다니며 명을 내리는 우경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우경이 정광을 슬쩍 보며 전음을 보냈다.
-진옥룡, 밤에 잠시 시간을 내줄 수 있는가?
아까 짧은 시간이나마 인사를 나눴는데도 이런 말을 하다니.
정광은 대충 짐작이 갔다.
-새벽에 제가 찾아뵐게요. 우리를 주시하고 있는 분들이 계시거든요.
백기돈과 왕팔이 정광과 우경을 먼 곳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우경도 그걸 알고 있었는지 흔쾌히 동의했다.
-고맙네. 이따 보세나.
-네.
정광은 시선을 돌려 주변 환경과 사람들의 움직임을 뜯어봤다.
대충 계산이 나왔다.
‘내일은 힘들겠는걸.’
주도면밀하게 세워놓은 계획도 실행을 하려고 하면 차이가 드러나는 법.
배마다 적정한 인원과 물자를 실어야 한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자맥질을 할 줄 아는 이와 못 하는 이를 적절하게 섞어서 태워야 하고.
‘생전 처음으로 배를 타보는 이들이 많아. 시험 운행도 해봐야겠지.’
무엇보다 그간의 피로를 씻고 최상의 몸 상태를 갖춰야 했다.
‘모레 아침이나 돼야 출발할 수 있으려나.’
이미 어두워지고 있는데 뭘 해봐야 얼마나 할까.
정광의 생각대로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저녁 식사를 하게 됐다.
‘허어.’
무림맹 무인들은 하나같이 쓴웃음을 지었다.
먼 길을 오느라 건량과 육포만 챙긴 자신들과 달리, 수적들은 고기 잔치를 벌이는 것 아닌가.
물론 그들만 먹는 건 아니었다.
무림맹 무인들에게 갖가지 고기와 소채를 날랐다.
“드시오.”
“…….”
“뭐 하시오? 팔 아프오.”
무림맹 무인들이 경계하자 군사 제갈문형이 외쳤다.
“안심하고 드시오! 이미 협의가 끝난 일이외다!”
무림맹 무인들은 머쓱한 얼굴로 명에 따랐다.
“고맙소.”
한 무인의 건조한 말에 한 수적이 퉁명스레 답했다.
“드시다 모자라면 말하시오.”
“알겠소이다.”
일단 말은 그렇게 하고 받긴 했으나.
무림맹 무인들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수적들이 준 걸 먹으라고?’
‘저놈들을 어떻게 믿고?’
‘독을 타놓고 뒤통수치는 거 아니야?’
묵묵히 지켜보던 정광이 눈을 번쩍였다.
때가 왔음을 느낀 것이다.
벌떡 일어나 사방을 둘러보며 비장하게 외쳤다.
“비록 걷는 길은 다르다 하나 한시적으로나마 손을 잡은 사이입니다! 헌데 이렇게 의심이 많으셔서야 되겠습니까? 장강수로연맹이 순수한 호의로 베푼 것이란 걸 증명해 드리지요! 장이 소협, 빨리 굽죠.”
“지금 소금 뿌리고 있습니다, 단주. 자오 대협, 불을 부탁드립니다.”
“벌써 붙였네. 키우기만 하면 돼.”
자오가 장력을 몇 번 내지르자 불이 활활 타올랐다.
고기도 지글지글 익었다.
정광은 적당히 익은 고기를 높이 들어 올렸다.
“똑똑히 보세요!”
그리고 내려서 삼켰다.
“헉!”
“도, 도사가 고기를!”
정광을 그 누구보다 신뢰하는 무혈단도 먹기 시작했다.
정광은 몇 점 더 먹은 뒤 무거운 목소리로 외쳤다.
“제가 아니면 누가 지옥으로 들어갈까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고기입니다! 못 믿으시겠다고요? 더 먹어서 보여 드리지요!”
정광은 먹고 또 먹었다.
철월과 거의 비슷한 속도로.
“저기요, 군사님.”
열심히 먹던 정광이 부르자 우경이 답했다.
“무슨 일인가?”
“술도 주실 참이었죠? 맞죠?”
우경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반드시 줘야 한다는 의미 아닌가?
“크, 큰 싸움을 목전에 두고 있는지라 술은 준비하지 않았네만.”
“아. 좀 느끼한데. 뭐 할 수 없죠.”
정광은 계속 열심히 먹다가 배를 두드리며 한숨을 쉬었다.
“후우우. 더는 못 먹겠네.”
“…….”
“아. 맞다.”
정광은 황당해하는 사람들을 향해 두 손을 모았다.
“무량수불. 시간이 꽤 지났는데 괜찮죠? 안심하고 드세요.”
황당한 건 황당한 거고.
무림맹 무인들은 정광의 말에 따랐다.
안 그래도 배가 고팠는데 괜찮다는 걸 확인까지 하지 않았는가.
“머, 먹어볼까?”
“그, 그러세나.”
연기가 피어오르고 냄새가 퍼지자 의심 많은 이들조차 조심스레 맛봤다.
‘별 이상 없는 것 같은데?’
‘하긴. 진옥룡이 보장했으니 괜찮겠지.’
독에 능한 사천당가 무인들도 잠깐 확인하더니 먹고 있었다.
독존을 비롯한 몇몇 이들은 정광처럼 벌써 배를 두드리고 있었고.
더 이상 뭘 망설이랴.
사람들의 손과 입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정광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잘 먹어야 할 판에 왜 쓸데없는 의심을 해?’
수왕이 바보도 아니고 허접한 독이나 타는 얕은수를 쓰겠는가?
정광과 독존, 사천당가의 정예까지 있는데?
얼마 안 되는 시간이지만 협력해야 할 사이다.
이 일로 장강수로연맹에 대한 경계심이 조금이나마 풀어졌을 터.
‘이건 됐고. 진짜 문제는 무림맹 내부의 일이지.’
거대 가문과 문파의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모였다.
심지어 남궁세가 같은 경우엔 태상가주와 전임 가주, 거기에 신임 가주까지 온 상황.
크게 표가 나진 않았으나 여기저기서 기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내일 중엔 정리해야 해.’
쉽게 말해 서열 정리.
‘군사가 알아서 계획을 세웠을 텐데.’
제갈문형을 흘깃 보자 시선이 마주친 그가 빙그레 웃었다.
-내일 중으로 정리 좀 부탁하네.
-군사께서 직접 하시죠.
-안 될 일은 아니네만, 자네가 해야 빠르지 않겠나?
정광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능구렁이를 봤나. 나를 부려먹으려고?’
어쩔 수 있나.
머리로 푸는 것보다 힘으로 누르는 게 빠르니까 그리해야지.
‘저 두 명부터 손봐야겠어.’
아까부터 아주 까칠한 시선과 살짝 까칠한 시선이 느껴지고 있었다.
오늘 처음 만난 환존과 권존이었다.
‘그럼 조금 잤다가 일어나서 우경이나 만나볼까.’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했다.
정광은 허청에게 불려가 엄청난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고기를 먹다니! 제정신인 것이냐! 아니, 제정신이니까 그렇게 맛있게 먹었겠지. 하아아.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나조차 모르겠구나.”
“사부님, 그래도 확실한 명분이 있었잖아요.”
“그래, 그것은 칭찬하마. 덕분에 본맹 무인들이 기력을 채울 수 있었고 장강수로연맹 무인들을 조금이나마 덜 경계하게 되었지.”
“역시 사부님. 딱 아시네요.”
“그러면 뭐 할까? 제자인 너를 모르는데.”
정광은 한참 동안 시달리고 나서야 무혈단에 배정된 천막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두 시진 후.
정광은 우경의 천막에 스며들었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꼿꼿이 앉아 있던 우경이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무슨 문제가 생겼길래 부르셨어요?”
“자네가 필히 알아야 할 일이 있어서 그랬네.”
정광은 우경이 내민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설마 수왕께서 딴마음을 품고 계신 거예요?”
우경의 눈이 커졌다.
정광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둬 천막 입구 쪽을 바라봤다.
“아니라고 해주시면 좋을 텐데.”
순간, 수왕의 신형이 나타났다.
그는 오만한 눈빛으로 정광을 내려다봤다.
“나를 겨우 그 정도로 보고 있었던 것이냐?”
“아뇨. 그래서 설마라고 했잖아요. 그보다 앉으시죠.”
우경이 자리를 비켜주고 수왕이 정광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깐 말씀 못 드렸는데. 그간 더 정정해지신 것 같네요.”
“쓸데없는 소리.”
“제게 직접 말씀하시지 왜 군사님께 시키신 거죠?”
“내 주위에도, 네 주위에도 귀가 많아서 우경의 천막을 고른 것이다.”
“궁금하네요. 무슨 일이시길래?”
수왕은 정광을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황제가 내게 무림맹을 치라고 했다. 무림맹이 사마련과 싸운 뒤 다시 배에 탔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