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해후
수왕(水王)은 정광에게 많은 걸 양보했다.
장강을 무상이나 다름없는 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함은 물론이요, 장강수로연맹의 모든 배를 동원해 무림맹이 사마련과 벌일 건곤일척의 싸움을 지원하기로 했다.
그래서 지금, 호북성 무한(武漢)의 강변에 수많은 배들이 정박해 있었고.
그래, 그렇다.
정광에게 양보한 것이었다.
정파 떨거지들에게 한 것이 아니라!
‘그런데 감히 이렇게 나와?’
어느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지 않나.
수왕의 눈이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지금 내게 시비를 거는 것인가?”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으스스한 살기를 담아 물었으나.
그의 앞에 서 있는 두 노인은 위축되지 않았다.
심지어 소맷자락에 홍매화(紅梅花)가 수놓인 푸른 도복을 입은 노도사는 수왕을 노려보며 나무라기까지 했다.
“선배. 본도(本道)가 언제 시비를 걸었다고 핍박하시는 게요?”
“자네의 시선과 말투 자체가 시비라고 생각하는데. 아닌가?”
“잘못 보시고 잘못 들으셨소.”
노도사의 칼 같은 부정에 수왕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환존(幻尊)이라는 허명에 헛바람이 들었나 보군. 오원도 내게 이렇게 대하진 못했거늘.”
“사부님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마시오.”
“무어라?”
노도사의 검은 눈이 자색(紫色) 빛으로 물들었다.
“비록 강호의 선배라곤 하나, 한낱 수적에 불과한 이가 평할 분이 아니외다.”
대놓고 내지른 도발이었으나.
수왕은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조소를 지었다.
“그런 것이었군.”
“무슨 말이오?”
“오래전, 자네 사부인 오원을 두들겨 팼던 기억이 났어. 그 대가를 받겠다, 이거 아닌가?”
“입조심하시오.”
“내가 할 말이네. 화산 깊은 곳에 틀어박혀서 폐관수련이라도 하고 나왔나? 자신감이 넘치는 것 같은데…….”
수왕의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일어났다.
“나를 상대할 수 있다고 보는 건가? 겨우 자네 따위가?”
노도사도 눈썹을 치켜세우며 살기를 발하려는 그때.
조용히 있던 다부진 체격의 노인이 나섰다.
“수왕 선배, 잠시만 멈춰주시오. 자성, 자네도 마찬가지일세.”
환존 자성이 반발했다.
“하지만 언 형. 저자가 사부님을 모욕했소이다.”
“무례는 자네가 먼저 저지르지 않았나? 서로 주고받았으니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네만.”
“그래도…….”
두 사람은 한동안 더 옳고 그름을 따졌다.
팔짱을 낀 채 지켜보던 수왕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진주언가의 권존(拳尊) 언패호가 인물이라더니 과연. 소인배와 한데 묶여 불리는 게 안타깝구나.”
“……소인배라니. 나를 칭한 것이오?”
“이보게, 자성. 좀 가만히 있으라 하지 않았나? 선배도 그만 도발하시오.”
권존 언패호가 두 사람을 말린 뒤 수왕을 주시했다.
“싸우려고 선배 앞에 선 게 아니외다.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이러는 것이오.”
“일단 들어보지.”
“이제껏 중립을 지켜와 놓고, 왜 갑자기 본맹의 편에 선 것이오?”
수왕은 간단히 답했다.
“알 것 없네.”
“…….”
“그러기로 했으니 그렇게 가면 돼. 답이 되었는가?”
“선배라면 되었겠소?”
“정 알고 싶으면 자네가 속한 무림맹에 물어야지, 왜 내게 이러는가?”
권존의 이마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선배와 진옥룡이 그러기로 약조했다고 들었소.”
“잘 알고 있군.”
“왜 그런 것이오? 맹주도 군사도 자세한 내용을 말해주지 않아 답답하오.”
“나도 말하지 않을 걸세. 계속 답답해하게나.”
놀리는 게 아니었다.
수왕은 입을 다물어야 했다.
황제와 오래전에 맺었던 약조는 물론 이번에 협의 중인 약조까지 연관된 일 아닌가?
세부사항까지 결론이 나고 황제가 정식으로 공표해야 알릴 수 있었으나, 사실을 모르는 권존으로서는 속이 터질 수밖에.
권존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선배, 이러지 마시오. 계속 이렇게 나오시면 우리가 어떻게 믿고 배를 타겠소이까?”
수왕의 눈에 노기가 맺혔다.
“누가 타달라고 했는가? 그럼 타지 마시게.”
“언짢으셨다면 사과드리겠소이다. 허나 경계할 수밖에 없는 우리 입장도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소.”
객관적으로 봤을 때 권존의 말은 타당했다.
오랜 세월 동안 닭 소 보듯, 소 닭 보듯 하는 사이였건만. 이제 와서 갑자기 손을 잡다니. 서로를 어떻게 믿고?
허나 이는 수왕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무림맹을 믿지는 않지만 이렇게 약조를 지키고 있거늘. 자꾸 분란을 일으킬 것인가?”
그의 말대로 정파 무인들과 장강수로연맹 수적들의 분위기가 흉흉했다.
서로를 노려보며 병기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이 당장에라도 싸움이 벌어질 것 같았다.
‘그래. 그의 말대로다. 여기서 멈춰야 해.’
권존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이 피를 흘려서 뭐하겠는가?
무림맹 본단이 오면 맹주와 군사를 닦달해서 답을 받아내면 되리라.
하지만 환존의 생각은 달랐다.
“승부를 보고 그 결과에 따르는 건 어떻소?”
“선배,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부탁드리외다.”
권존은 수왕에게 양해를 구한 뒤 언짢은 눈빛으로 환존을 바라봤다.
-자성, 자네 자꾸 왜 그러는가?
환존도 나름의 명분이 있었다.
-언 형. 과거 사부님께서 저자에게 패하셨다는 이유만으로 이러는 게 아니오. 본문의 제자들은 물론 이곳에 모인 모든 이들이 수적들과 손을 잡는 걸 싫어하고 있소.
그의 말대로 정파 무인들은 꺼림칙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이는 그간의 골이 깊어서도 그렇지만 더 큰 이유는 저들을 못 믿어서요. 배를 타고 장강으로 나아갔다가 저들이 삿된 마음을 먹으면 어떡하오? 자맥질에 능한 이가 몇이나 있다고?
-그래서 무력시위를 하겠다는 건가? 우두머리인 수왕에게?
-그렇소이다.
-자네를 무시하는 건 아니네만, 그를 이기긴 힘들 것이네. 수적이라 무시하지 말게나. 우리가 코흘리개였던 시절부터 명성을 떨치던 자일세.
-알고 있소.
-헌데 왜?
환존이 미미하게 미소 지었다.
-아까 말하지 않았소? 사부의 원한을 갚아야 한다고.
-…….
권존은 내심 탄식했다.
무림은 은원(恩怨)으로 굴러가는 세상.
제자가 사부의 원(怨)을 갚겠다는데 무어라 하겠는가?
‘패하더라도 형편없이 당하지는 않겠지. 나도 있고, 곧 다른 이들도 도착할 것이다.’
다른 십존들을 말함이었다.
‘진정한 고수의 수는 우리가 압도적으로 많아. 그 사실을 되새겨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유치한 기 싸움일 수도 있으나 할 때는 해야 하는 법.
권존은 마음을 정하고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본 수왕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정파라 이건가? 둘이 함께 덤비는 게 나을 텐데?”
권존은 고개를 젓고 환존은 검을 뽑았다.
그 검에서 장엄한 자색 검기가 솟구쳤다.
“선배. 한 수 배우겠소이다.”
“그러던지. 흑교(黑鮫)를!”
수왕이 소리치자 근처에 있던 수적이 길고 거무튀튀한 작살을 던졌다.
수왕은 그것을 낚아챈 뒤 환존에게 겨눴다.
“와라.”
“사양 않겠소.”
자색 검기가 쏘아지고 검은 기에 휩싸인 작살이 날았다.
그것들이 부딪히려는 그 순간!
“여차.”
찬란한 황금빛을 발하는 금룡이 날아와 작은 원을 그렸다.
그 원에 휘말린 검과 작살이 방향을 틀어 바닥에 박혔다.
콰직!
콰아앙!
바닥이 깊게 패이며 흙모래가 솟구쳤다.
“이럴 수가!”
“어떻게!”
환존과 권존이 경악하는데.
금룡이 가볍게 유영하며 흙모래를 밀어냈다.
시야를 가리던 것들이 삽시간에 사라지고 눈부시게 잘생긴 청년 도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 진옥룡!”
두 사람은 동시에 같은 별호를 외쳤다.
그 별호의 주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맞긴 한데. 우리 초면이죠? 어떻게 아세요?”
어떻게 알긴.
이런 외모에 이런 무공을 지닌 청년 도사라면 뻔하지 않은가!
“뭐 그건 그거고.”
정광은 입을 떡 벌린 두 사람과 살짝 놀란 표정을 짓는 수왕을 나무랐다.
“애들도 아니고 이러시면 쓰나요. 사이좋게 지내셔야죠.”
* * *
무림맹주 팽수관과 군사 제갈문형이 죽어라 달려와 상황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수왕이 마련해 놓은 천막으로 가 인사를 나누었다.
“수왕 선배, 무림말학(武林末學) 팽수관이 인사드립니다.”
“만나서 반갑네.”
“개인으로서 인사를 드렸으니, 이제 무림맹의 맹주로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팽수관의 전신에서 무거운 기도가 흘러나왔다.
“총채주, 약조를 지켜주셔서 고맙소.”
“그래도 맹주는 경우를 아는군.”
수왕의 시선이 환존에게 향했다.
“누구와는 다르게 말일세.”
무척 모욕적인 힐난이었으나.
환존의 시선은 정광에게 꽂혀 있었다.
조금 전에 겪은 일을 믿을 수가 없어서였다.
‘단 일검에 내 검과 수왕의 작살을 물리쳤다고?’
분명 무당의 태극처럼 원을 그리는 검초였으나 확연히 달랐다.
지극한 부드러움은 물론 그에 반(反)하는 강맹한 힘까지 담긴 초식이 아니었던가.
‘내 소문을 믿지 않았거늘. 정말이었구나.’
환존은 정광을 인정했다.
그가 인정할 만큼 정광은 대단한 고수였다.
물론 자신이 질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나도 수왕도 서로를 의식하느라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해 휘말렸을 뿐이야.’
곤륜의 진옥룡이라.
자신의 사문인 화산을 욕보인 놈이었다.
섬서성 최고 권력자들의 자제들을 패놓고 누명을 씌우다니.
오해로 일어난 일이라 주장했으나 누가 그걸 믿을까?
뿐이랴.
갖가지 비리를 저지른 자신의 사제, 자엽을 협박해 모든 사안을 입막음했다.
폐관수련을 마치고 나와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어찌나 분노했던지.
‘검을 움켜쥐고 달려가 베어버리고 싶었지.’
하지만 참았고, 만나게 됐다.
자엽의 죄를 묻고 징계를 내렸듯이, 정광에게도 그래야 했다.
‘헌데 이놈. 수왕과의 관계가 무척이나 좋은 것 같은데. 그것도 과하게…….’
수왕은 정광을 담담히 대하고 있었다.
정광도 그에게 스스럼없이 말하고 있었고.
“어르신. 배가 아주 번쩍번쩍하던데요? 오늘을 위해 싹 손보셨어요?”
“그럴 때가 되어서 그랬을 뿐이다.”
“에이. 아니시면서.”
“네 멋대로 생각할 거면서 왜 물었느냐?”
“음. 그렇기도 하네요.”
정광은 고개를 주억거리고 수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디서 너 같은 녀석이 나왔는지 모르겠구나.”
“곤륜이요.”
“됐다. 그보다 이제 어찌할 생각이냐?”
가만히 듣고 있던 환존이 끼어들었다.
“선배. 왜 맹주에게 묻지 않고 진옥룡에게 묻는 것이오?”
“자네의 맹주가 아니라 이 녀석과 약조한 일이니 당연하지.”
“흐음. 우리에겐 함부로 대하면서 진옥룡에겐 아닌 걸 보니…….”
“돌리지 말고 말하게.”
“사손뻘도 안 되는 그에게 패했나 보오.”
환존은 말을 마치자마자 내공을 끌어 올렸다.
모욕당한 수왕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 예상해서였다.
허나 수왕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가볍게 대꾸했다.
“패하진 않고 비겼네.”
“……!”
“아까 보니 다시 겨루면 패할 것 같지만.”
“……!”
수왕은 눈을 크게 뜬 환존을 충동질했다.
“못 믿겠는가? 그러고 보니 화산도 저 녀석과 원한이 있었지. 한번 겨뤄보게나.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니야.”
환존이 뭐라 하기 전에 정광이 잘랐다.
“왜 싸움 붙이세요?”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아. 갑자기 피곤해지네요.”
정광은 벌떡 일어나 팽수관에게 손을 내밀었다.
팽수관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얼 하는 겐가?”
“손바닥 한 번만 마주치죠.”
짝.
호기심을 느낀 팽수관이 그렇게 하자 정광이 선언했다.
“수왕 어르신. 우리가 했던 약조들 중 오늘 건이요. 맹주님께 위임했으니까 말씀 나누세요.”
“갑자기 무슨!”
“그럼 이만.”
정광은 신법을 펼쳐 천막을 빠져나왔다.
시원한 강바람을 맞자 기분도 그렇게 됐다.
‘귀찮은 일은 넘겼고. 조용한데 가서 낮잠이나 잘까?’
불가능했다.
모르는 이들이었다면 몸을 피하면 되건만.
모두 아는 이들이라 문제였다.
“사제!”
“단주!”
“사형!”
“아우!”
“도사! 철월이 왔다!”
뒤늦게 도착한 무혈단이 달려와 정광을 껴안았다.
그간의 안부를 물으며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정광의 눈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아니. 못 본 지 얼마나 됐다고 이 난리야?’
그래도 이 정도면 참을 만하건만.
“정광아!”
사부 허청이 천룡단과 함께 나는 것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제자야!”
“닥쳐라, 땅꾼! 내 제자다!”
“외톨이 거지, 자네는 정광과 아무런 관계도 아니지 않나?”
별로 보고 싶지 않았던 독존 당기황과 걸존 윤희구, 창존 악만춘까지 저 멀리서 티격태격하며 뛰어오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 외에도 안면 있는 자들이 수없이 몰려들었다.
그 속에는 장강수로연맹에 적을 두고 있는 우경 같은 이들까지 있었다.
정광의 얼굴이 난감한 빛으로 물들었다.
‘그냥 확 튀어?’
그러기엔 이미 늦은 상태.
정광의 신형이 수많은 인파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