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불쾌한 느낌
무림의 가문이나 문파는 엄격한 가법(家法)과 문규(門規)로 소속원들을 통제한다.
허나 무림맹은 여러 조직이 모인 연합체였기에 어느 정도의 맹규(盟規)만 정해놓고 세세한 부분은 각 가문과 문파의 자율과 협의에 맡겼다.
이것만 놓고 보면 무림맹의 맹규가 무척이나 느슨해 보이지만.
아니었다.
사람을 다스리는 부분만 그럴 뿐 나머지는 엄격했다.
무림맹처럼 거대한 조직이 굴러가기 위해선 수많은 것들이 필요하기 마련.
각 사안을 규제하는 맹규에서 단어 하나만 바뀌어도 눈이 튀어나올 만큼 큰돈이 왔다 갔다 했다.
맹규(盟規)를 만들고 고치는 원로원의 힘이 막강할 수밖에.
많은 이들이 뇌물을 바치며 혀를 매끄럽게 놀렸다.
감언이설에 혹한 원로들은 큰돈을 챙기며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었다.
물론 모든 걸 원리원칙대로 처리하려는 원로들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초심을 계속 유지하는 게 쉬울 리 있나.
하얀 천이 검게 물드는 건 금방이었다.
어차피 소속 가문이나 문파의 이권을 위해 영향력을 행사해야 하는데, 그 와중에 작은 부스러기 조금 주운 게 뭐가 문제라고?
시간이 지날수록 원로들의 목은 빳빳해졌다.
자신들이 있기에 무림맹이 굴러가고 강호가 평안할 수 있다는 오만함을 품게 됐다.
정광의 눈에는 똥 덩어리들이었을 뿐이지만.
‘머리는 막혔으면서 목청은 트인 건가?’
분명 순화해서 물었거늘, 원로들은 분기탱천하여 고성을 질렀다.
“보자 보자 하니까 감히!”
“지금 우리를 조롱하는 건가!”
“이렇게 시야가 좁을 수 있나!”
원로들이 언제 이런 모욕을 당해봤을까.
예전의 그들이었다면 상당수가 이번 싸움에 스스로 나섰을 것이나 지금은 아니었다.
“본 원로원은 천하의 안위를 위해 견마지로를 다하고 있네!”
“각자의 역할이 있고, 그것에 충실해야 하는 것을 이해 못 하다니 정말 실망이야!”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거나 떠드는 원로들을 못마땅하게 보는 이도 있었으나 소수일 뿐.
수많은 원로들이 정광을 비난했다.
하지만 정광은 어느 집 개가 짖느냐는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힘이 좋으신데 왜 입으로만 떠드실까.”
“저! 저! 말버릇 하곤!”
“하나 여쭐게요. 팔사 중 한 명이라도 잡으신 분 계신가요?”
“갑자기 무슨 말인가!”
“저는 셋 잡았는데.”
“허어. 잘난 척도 정도가 있지. 뭐 이런…….”
“잘난 척할 만하니까 하는 거죠.”
“무어라?”
정광은 어깨를 으쓱한 뒤 손가락을 하나씩 꼽았다.
“산서성, 섬서성, 사천성, 호북성을 질주하며 사마련과 목숨을 걸고 싸웠어요.”
“…….”
“혹시 남궁세가가 위험할까 싶어 장강을 타고 가다가 장강수로연맹과도 다퉜고요.”
“…….”
“잘난 척할 만하죠?”
확실히 그랬다.
“까마득한 후배인 저와 무혈단원들이 이렇게 죽어라 뛰어다닐 때, 원로님들께선 무림맹 안을 거니시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지 궁금하네요.”
어린 나이에 소수 인원으로 엄청난 공적을 세운 무혈단 아닌가.
원로들도 사람인지라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정광은 그들을 둘러보며 질문을 던졌다.
“무인이시니까. 정파무림의 명숙(名宿)들이시니까 피가 끓어오른다, 아이들이 저러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어서야 되겠는가? 이런 생각은 드셨죠? 암. 그렇겠죠.”
그럴 리가 있나.
그렇다고 아니라 할 수도 없고.
쥐 죽은 듯한 정적이 흘렀다.
정광은 아예 남궁신건을 지목해서 물었다.
“원로님. 대답 좀 부탁드려요.”
“우리라고 좋아서 이러는 게 아닐세. 맹규를 지켜야 맹이 바로 서는 법. 원로원에서 만든 맹규를 원로가 어겨서야 되겠는가?”
“바로 그거죠.”
짝!
정광이 손뼉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참에 새 맹규를 만드세요. 총공세를 펼칠 땐 원로원이 선두에 선다고.”
“지금까지 한 말을 듣긴 했나? 원로원은 그렇게 간단한 조직이 아니라니까. 맹의 중추이며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최후의 순간까지 맹에 있어야 한단 말일세.”
정광의 눈에 어처구니없는 빛이 떠올랐다.
“아니, 그런 최후의 순간이 오는 건 무림맹 소속 가문들과 문파들이 지리멸렬(支離滅裂)한 후잖아요. 맹에 남으신 원로님들께서 옥쇄(玉碎)하시는 걸 마지막으로 정파무림은 끝장나겠네요.”
“…….”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려면, 정파무림의 맥을 이으려면 청년들을 남겨야죠. 무당이 멸문 위기에 처하자 어떻게 했는지 못 들으셨어요?”
“…….”
천하가 아는 얘기였다.
연배 높은 진인들이 자신들의 피로 길을 열어 후인들을 피신시키지 않았던가.
“무량수불.”
아까부터 못마땅한 눈으로 동료 원로들을 둘러보던 무당 원로가 입을 열었다.
“무혈단주의 말에 동의하오. 본문이 그랬듯이 본맹도 그래야 한다는 말이외다.”
소림 원로도 나섰다.
“아미타불. 소승도 그렇게 생각하오. 피해를 줄이려면 한 손이라도 더 거들어야 하는 법. 무혈단주의 주장대로 새로운 맹규를 발의합시다.”
대부분의 원로들이 반발했다.
사방에서 고성이 터져 나왔으나 정광의 목소리가 더 컸다.
“아직 의협심(義俠心)을 품고 계신 분들이 있으셔서 다행이네요! 옳은 결정을 내리실 거라 믿고 그만 갈게요!”
“……!”
정광은 정말 몸을 돌렸다.
당황한 팽수관이 전음을 보냈다.
-진짜 가려고?
-네.
-이자들이 그 정도로 승복할 거라 믿는가?
-아뇨.
-그런데 왜?
팽수관의 귀에 웃음기 어린 정광의 전음이 꽂혔다.
-매는 안팎에서 때려야 제맛이죠. 아!
정광의 시선이 제갈문형에게 향했다.
그는 남궁신건의 일그러진 얼굴을 힐끔거리며 남몰래 웃고 있었다.
-저기요, 군사님. 부탁드릴 게 있는데요.
* * *
‘나도 정신없이 뛰어다니는데 지들이 뭐라고 놀아?’
이런 괘씸함만으로 전장에 몰아넣으려는 게 아니었다.
힘을 숭상하는 무림의 특성상 위가 몸을 사리면 조직이 망가지기 때문이었다.
‘앞으로를 위해 바꿔야 해.’
지금도 전생에 비하면 정말 평화로웠으나 더 평화로워져야 한다.
그래야 걸리적거리는 것 없이 천하를 주유하며 놀지.
공동파의 영일자를 이용해 많은 원로의 마음속에 앙금이 남게 했다.
그를 변호하는 남궁신건을 정론으로 구박했고.
예상대로 무당과 소림의 원로가 나서서 새로운 맹규를 발의하자고 주장했다.
‘아직도 말싸움 중이겠네.’
자신들의 보신에 있어서만큼은 의견이 거의 통일된 원로원에 분란의 싹을 틔운 상황.
‘안은 이쯤이면 됐고.’
밖에서도 패야 했다.
정광은 손을 번쩍 치켜들며 낭랑하게 외쳤다.
“자. 자. 드시죠! 무림의 정의를 위하여!”
“위하여!”
선창을 한 정광이 찻잔을 내려 입속에 털어 넣었다.
‘아. 맹숭맹숭해.’
술을 마시고 싶었으나 지금은 곤란했다.
무림맹의 일반 무인들은 물론이요, 명문의 제자들까지 모인 자리에서 그러는 건 좀 그렇지 않은가?
정광은 주위를 둘러보며 피식 웃었다.
‘많긴 하네.’
원로원에서 나오자마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정광은 그들을 이끌고 곤륜파 연무장에 와서 잔치를 벌이는 중이었다.
사람들은 요리와 술을 삼키며 감탄했다.
“크으. 고기가 살살 녹는구나.”
“술은 또 어떻고. 향긋한 향에 톡 쏘는 맛이 아주 일품인걸.”
그럴 수밖에.
정광이 맹에 들어오기 전에 부탁한 대로 장이의 모친이 숙수들을 데려와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의 솜씨는 입맛이 까다로운 정광도 인정할 정도였기에 모두 만족스러운 얼굴로 맛을 즐겼다.
“그런데 맹 내에서 이래도 되는 건가?”
“자네, 조금 늦게 와서 못 들었나 보군. 진옥룡이 군사님께 미리 양해를 구했다 하셨네.”
“오오. 그럼 아무 문제 없지.”
“흐흐. 마음껏 즐기자고.”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흥에 겨워 검무를 추는 사람.
박장대소하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람.
그런 소란스러움을 뚫고 얼굴이 불콰하게 물든 장한이 정광을 바라보며 외쳤다.
“진옥룡! 그대의 무용담을 듣고 싶소이다! 부탁드리오!”
다른 사람들도 호응하자 정광이 씩 웃었다.
“좋아요. 잘난 척 좀 해보죠.”
“으하하하!”
다들 왁자하게 웃었다.
하늘을 꿰뚫을 정도로 높은 명성을 떨치는 기재가 이리도 소탈하다니.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정광과 무혈단의 처절한 분투 때문이었다.
‘허어. 그런 도산검림을 헤쳐 나왔을 줄이야.’
‘내가 번(番)을 서며 힘들다고 투덜거릴 때, 무혈단은 정말 목숨을 내던지다시피 하며 싸우고 있었구나.’
사람들의 감정이 정광의 말에 따라 움직였다.
긴장했다가 환호하는가 하면.
슬퍼하는 한편 통쾌해했다.
자연히 그들은 비슷한 그림을 떠올리게 됐다.
‘나도 거기에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설령 죽더라도 무인으로서 그만큼 가치 있는 최후가 어디 있겠는가.’
사람들의 기색을 살피던 정광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너무 아쉬워하지 마세요. 건곤일척의 승부가 남았으니까.”
“……!”
“같이 통쾌하게 싸워보죠.”
“우와아아아!”
사람들은 손과 병기를 번쩍 들며 함성을 질렀다.
그들 중 선망의 눈초리로 정광을 바라보던 한 청년이 물었다.
“진옥룡! 이번에도 선두에 서서 싸우실 겁니까?”
“아니요.”
“……!”
선두에 안 선다고?
청년은 물론 모든 사람들이 의아해했으나.
정광의 이어지는 말에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서긴 왜 서요. 바로 달려서 사마련주의 목을 쳐야지.”
“와아아아!”
“같이 달리죠.”
“우와아아!”
사람들의 사기가 최고조로 올라갔다.
그 누구와 싸워도 이길 수 있을 만큼.
‘아주 활활 타네. 슬슬 꺼뜨려 볼까.’
정광은 때가 왔음을 알고 입을 열었다.
“이번 싸움이 무척 중요하다는 거 아시죠? 한 번에 끝내야 한다는 것도요.”
“물론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원로원의 원로들께서도 나서시려고 하더라고요.”
“……?”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총력전을 펼치기로 했으니까 당연한 거 아닌가?’
‘대체 무슨 의미지?’
정광은 그들을 둘러보며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라? 모르셨어요?”
“……?”
“아. 맹규를 잘 모르시는구나. 원로원은 전시(戰時) 상황에 맹을 지키게 돼 있는데.”
“맹을 지키다니요? 좀 쉽게 풀이해 주시겠습니까?”
정광의 눈이 빛났다.
‘물론이지. 그러려고 찻물만 삼키면서도 버티고 있었는데.’
원래는 오랜만에 돌아왔겠다, 제대로 못 먹는 일반 무인들을 배불리 먹이려고 계획한 잔치였으나 원로원의 행태를 보고 방향을 틀었다.
“잘 들으세요.”
정광은 조곤조곤 설명했다.
“원로원은 무공이 낮은 맹의 일반 무인들까지 장강을 넘어가 목숨을 걸고 싸울 때, 한적한 무림맹에 남아서 쳐들어오지도 않을 적을 기다리며 투지를 불태우는 조직이라는 거죠.”
“……!”
사람들은 경악했다.
표현이 신랄한 건 둘째 치고, 그런 맹규가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들만 안전한 곳에 있는 거야?’
‘우리 같은 아랫것들은 죽든 말든 상관없이?’
정광이 안타까운 얼굴로 그들을 위로했다.
“후우우. 삶이 여유가 있어야 복잡한 맹규를 낱낱이 알죠. 저도 오늘에서야 알게 됐거든요. 어찌나 놀랐던지.”
“…….”
“그래도 너무 의기소침하지는 마세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맹규를 바꿔서라도 함께 싸우려는 분들이 계시니까.”
눈에 총기가 있는 청년이 손을 들었다.
“진옥룡. 함께 싸우려는 분들이 계신다는 건, 원로원 전체의 의향은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네.”
“…….”
“그래도 ‘일부’라도 옳은 뜻을 품고 계신 게 어디겠어요.”
“…….”
“토의를 거쳐 맹규를 바꿀지도 모르니 마음속으로 응원하며 지켜보죠.”
응원은 개뿔.
너무나 깊은 실망감에 입맛마저 달아나 버렸다.
‘아예 모르다가 전장에 집결하고 나서야 알게 됐으면 이렇게까지 힘이 빠지지는 않으련만.’
‘아니. 그랬으면 싸움을 앞둔 긴장감 때문에 원로원이 왔는지 안 왔는지조차 몰랐겠지.’
‘하아. 조용한 곳에서 술이나 진탕 마시며 욕을 퍼붓고 싶구나.’
‘그렇다고 지금 나가기엔 좀…….’
사람들이 잔치를 연 정광의 체면을 생각해 망설이는데.
‘다시 불을 붙일 때가 왔나.’
아까의 희망에 찬 불이 아니라 분노로 얼룩진 불이었다.
정광은 품에서 전표 뭉치를 꺼내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밤이 늦었으니 잔치는 그만 파하죠. 더 드시고 싶으신 분들은 맹 밖으로 나가셔서 한잔하시고요.”
다들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으나.
곤륜 비전 운룡금나수(雲龍擒拿手)를 당할 재주는 없었다.
결국 그들은 손에 전표 한 장씩을 쥔 채 맹 밖으로 흩어졌다.
잠시 후.
무림맹 인근의 반점과 주루는 대호황을 맞았다.
‘이게 웬 떡이냐!’
‘하루하루가 오늘 같았으면!’
주인들은 환호했다.
술에 떡이 된 무인들이 비분강개한 목소리로 떠들어댔으나 돈만 벌면 됐지, 알 게 뭔가?
……라고 생각했는데.
‘어? 잠깐. 무림맹 원로원이 뭐?’
‘이런 비겁한 자들을 봤나!’
‘그러고도 정파무림의 명숙이냐!’
주인들만 분노한 게 아니었다.
점소이들도, 다른 손님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밤이 지나고.
새벽을 거쳐 아침이 왔다.
* * *
끼이익-
남궁신건은 방문을 열고 나와 따스한 아침 햇살을 맞았다.
전날의 불쾌했던 감정이 조금이나마 누그러졌다.
‘진옥룡, 이 흉악한 놈 같으니. 그따위 간계를 써?’
어젯밤 내내 격론을 벌였으나 많은 원로들이 새로운 맹규를 만드는 것을 거부했다.
‘네놈이 아무리 잘났어도 깊은 연륜을 따라잡을 수는 없어. 이번 기회에 세상이 네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단단히 새겨주마.’
이렇게 다짐하며 길을 걷는데.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이건 또 뭐야?’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무림맹 무인들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