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그럼 순화해서
야망이 크고 성품이 나쁜 자는 의심이 많기 마련.
사람을 쉽게 믿지 않고 됨됨이가 아닌 능력으로 판단한다.
남궁화인이 그런 자였는데, 그가 제일 신임하는 식솔은 사촌 아우 남궁신건이었다.
그만큼 남궁신건이 능력 있는 자라는 얘기.
남궁세가를 대표해 무림맹 원로원의 일원이 된 그는 숙소 후원의 정자에 홀로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따사로운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
그에 어울리는 맑고 깨끗한 차.
평소처럼 나른함이 느껴져야 정상이건만.
그의 마음은 무척이나 복잡했다.
‘앞날이 걱정이로구나.’
가주였던 남궁화인이 물러나고 그의 이복형인 남궁화운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어떤 연유로 그렇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미 벌어진 일 아닌가.
더구나 태상가주 남궁학의 용인이 없었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다.
‘후우.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하겠으나…….’
맹주에 반(反)하는 파벌에서 계속 영향력을 유지하되 원로들을 설득하란다.
그래서 사마련에 총공세를 펼치려는 맹주에게 힘을 실어주라니?
신임 가주 홀로 그랬으면 이해라도 하지, 전임 가주 남궁화인까지 그런 서신을 보내?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답은 하나였다.
‘진옥룡…….’
그놈이다.
최근 남궁세가에 들른 그놈 때문이 아니면 이런 일이 어찌 일어날까!
명분도 맹주에게 있겠다, 일단 최선을 다해 지시에 따르긴 했지만.
‘이대로 가면 나도 위험해.’
자고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법.
가주가 된 남궁화운이 자신을 그대로 둘 리 없다.
원로가 된 지 얼마 안 된 지라 임기가 한참 남았으나, 스스로 물러나게 하고 부리기 쉬운 이를 보내리라.
그리고.
‘나는 본가로 돌아가자마자 한직으로 밀려나겠지.’
그냥 당할 수야 있나.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며 지금까지 버텨왔는데!
그 결실이 바로 이 자리인데!
‘가주. 기억 속의 당신은 천고의 기재였으나 나도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것이오.’
그때, 일반 무인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
무인이 기쁜 얼굴로 대답했다.
“원로님, 진옥룡이 왔습니다.”
“…….”
“저녁 식사 후 원로님들께 인사를 드리고 싶답니다. 그 말씀을 전해 드리러 왔습니다.”
“알겠네. 그만 물러나게나.”
“네.”
뭐가 그렇게 좋은지.
돌아가는 일반 무인의 발걸음은 경쾌했다.
그 꼴을 보자 남궁신건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명숙들에겐 막 대하는 놈이 일반 무인들에겐 살갑게 굴어 지지를 받는구나.’
역시 무서운 놈이었다.
인사를 하려고 한다 했으나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나.
‘음흉한 흉계를 꾸미고 있을지도 몰라.’
좋아.
상대해 주마!
남궁신건은 몸을 일으키며 눈을 빛냈다.
‘와라, 진옥룡!’
* * *
정광은 무척 바빴다.
어떤 특별한 일을 하느라 그런 게 아니라 인사하느라 바빴다.
이른 저녁 식사를 하러 가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릴 줄이야!
“진옥룡, 오랜만입니다.”
“안녕하세요, 왕일 대협.”
“대, 대협이라니요. 헌데…….”
“말씀하세요.”
“……제 이름을 어찌 아시는지?”
“전에 통성명 했었잖아요. 당연히 기억하죠.”
왕일의 얼굴이 감격으로 물들었다.
맹의 수많은 일반 무인 중 하나일 뿐인 자신을 기억해 주다니.
가슴이 벅차 입을 열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안녕하십니까, 진옥룡!”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정광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왕일처럼 정광이 자신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 나까지 알고 있어?’
‘신분에 상관없이 사람을 대한다더니 정말이었구나!’
그들이 감동하든 말든.
정광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끝이 없겠는데.’
지금 있는 이들만 해도 정신없이 떠들고 있거늘.
사람들이 계속 몰려오고 있었다.
‘말을 못하게 하려면 입에 뭔가를 넣어야지.’
정광은 사람들에게 물었다.
“식사는 하셨어요?”
“아, 아직…….”
“오랜만에 맹 밥 좀 먹으려는데 같이 가시죠.”
“여, 영광입니다!”
무림맹 일반 무인들이 이용하는 식당이 평소보다 일찍 찼다.
아니, 미어터졌다.
멀리서나마 정광을 보며 식사할 기회를 놓칠 이가 어디 있으랴.
그 속엔 장이와 함께 정광에게 훈련받았던 여섯 청년도 있었다.
전에 줬던 진공묘유환(眞空妙有丸)과 꾸준한 수련 덕분일까.
모두 장족의 발전을 한 상태.
정광은 그들에게 다전음(多傳音)을 펼쳤다.
-오랜만이네요. 식사 끝나고 봬요.
-……!
식사를 마친 정광은 할 일이 있어 그만 가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여섯 청년을 이끌고 곤륜파에 배정된 연무장으로 가 그들의 몸을 확인했다.
“오오.”
“어, 어떻습니까, 은공?”
“보이는 것 그대로네요.”
“그 말씀은……?”
정광이 씩 웃었다.
“고생하셨어요. 많이 좋아지셨는데요. 실전만 겪으시면 장이 소협과 큰 차이가 없겠어요.”
“……!”
청년들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걸렸다.
그간의 노력을 인정받아서였다.
“감사합니다, 모두 은공 덕분입니다.”
“뭘요. 전에 말씀드렸듯이 한자리하시게 됐을 때 갚으시면 되는데요.”
“하하. 그렇지요.”
정광의 가식 없는 성품을 익히 아는 그들은 기쁘게 답했다.
계속 열심히 수련해서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겠다고 다짐하며.
정광도 최대한 많이 받아낼 생각이었기에 청년들에게 적절한 조언을 하며 무공을 봐줬다.
“양 소협은 진기 운용의 세밀함이 다소 부족하니 앞으로 운기조식을 하실 때…….”
“원 소협은 역시 체술(體術)이 적성에 맞으시네요. 체술 칠, 곤술(棍術) 삼의 비율로 수련하세요. 그러면…….”
“모두 체조법은 제대로 해오셨어요. 그런데 맹에 푼 전팔식(前八式)보다 소협들만 익히신 후팔식(後八式)이 더 중요한 건 아시죠? 그중에서도…….”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니었다.
청년들은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하여 정광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정광은 그들을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질이 부족해도 하려는 의지가 있으면 가르칠 만하지.’
아주 높은 곳까지 올라가지는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 높이의 문은 두드릴 수 있을 터.
정광을 따르면 복이 온다는 확실한 선례가 되리라.
‘그건 그거고.’
그들을 부른 또 다른 목적을 이뤄야 했다.
“당분간은 그렇게 가시면 돼요. 때가 되면 또 알려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요즘 맹 분위기는 어때요? 특히 원로원요. 원로분들 개개인의 특성도 알고 싶네요.”
청년들은 자신들이 아는 것을 가감 없이 얘기했다.
맹주와 군사가 알 수 없는 사소한 것들이 줄줄이 나왔다.
청년들이 맹 곳곳에서 일하는 일반 무인이었기에, 그들이 근처에 있어도 높은 이들은 언행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흐음. 맹주 옹호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대립하지만 한 가지 사안에서만큼은 일심동체라.’
원로들의 성품도 재밌었다.
원래 그런 자들이었는지, 자리가 그렇게 만든 건지.
곤륜이 천룡단 창설에 만족하고 원로 자리를 고사한 것과 달리, 다른 곳들의 원로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탐욕을 드러내며 이권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안 그렇다는 이들도 있으나 어느 정도는 물들기 마련.
맹주와 군사에게 들은 정보.
청년들의 얘기.
그것들이 정광의 머릿속에서 분해되고 합쳐지다가…….
하나로 정리됐다.
정광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럼 가볼까.’
* * *
원로원은 여전했다.
여전히 똑같은 이들이 앉아 정광에게 호감을 표하거나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은 아군이라도 있지만…….’
잠시 뒤엔 모두 적으로 돌변하겠지.
정광이 피식거리자 같이 온 팽수관이 인상을 썼다.
-표정 좀 고치게. 오자마자 책잡히려고 그러나?
-뭘요. 이 정도는 다들 익숙하실 텐데요.
-…….
정말 그랬다.
정광을 익히 아는 원로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얼굴로 평정을 지키고 있었다.
-원로들을 싸움에 밀어 넣는 거야 환영이네만, 역풍을 조심하게.
-물론이죠.
조용히 있던 제갈문형도 전음을 보냈다.
-남궁 원로를 잡게나. 그가 제일 피곤하거든.
-쌓인 게 많으신가 봐요.
-하하. 부탁하네.
정광은 원로들을 향해 정중하게 두 손을 모았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정광에게 호의적인 이들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맹주 편에 선 문파와 가문의 원로들이었다.
“어서 오시게, 무혈단주. 여전히 헌앙하구먼. 잘 있었나?”
“자네의 수많은 활약을 들으며 기뻐했다네. 이렇게 무사히 돌아와 줘서 고마우이.”
“그래, 힘든 일은 없었고?”
정광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엄청나게 힘들었죠.”
“당연히 그랬겠지. 어떤 어려움이 있었나?”
정광은 잠시 후회했다.
‘자오가 있었으면 지루하고 긴 서론을 대신 말해줄 텐데.’
뭐 어쩔 수 있나.
직접 떠들어야지.
“단원들과 함께 제일 먼저 갔던 섬서성은…….”
정광을 좋아하는 이든 싫어하는 이든, 모두 집중해서 들었다.
소문으로 듣거나 서신으로 본 것들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생생한 얘기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광은 말투가 버릇없어서 그렇지, 뛰어난 언변을 가진 이 아닌가?
시간이 흐를수록 원로들은 정광의 얘기에 빠져들었다.
‘허어. 그런 일이 있었나?’
‘거참. 용케도 헤쳐 나갔군.’
얘기가 무르익었다.
사마련 섬서 지부에 독을 풀어 배앓이를 하게 하고, 후위진을 현인으로 만들었다 하자 원로들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물론 못마땅해하는 이도 있었고.
예를 들면 공동파 원로 영일자가 그랬다.
그래도 굳이 주목받기 싫어 가만히 있었건만.
정광이 ‘섬서성과 가까운 공동파가 조금 도와줬으면 나았을 텐데’라고 중얼거리자 참지 못하고 나섰다.
“본파도 감숙성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네.”
“그래서 ‘조금’ 도와주셨으면 좋았겠다고 한 건데요.”
정광이 ‘조금’이라는 단어에 힘을 줘 말하자 영일자가 코웃음 쳤다.
“흥. 본문이 도울 필요가 있는가. 자네가 치졸한 암수를 써서 다 해결했는데.”
정광의 눈이 빛났다.
‘걸렸구나.’
청년들에게 들은 대로 영일자는 인내심이 부족하고 옹졸했다.
그래서 미끼를 뿌렸더니 덥석 무는 것 아닌가.
정광은 과장되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치졸한 암수요? 독이 어때서요? 지금, 당가 무시하시는 건가요?”
“……!”
영일자는 깜짝 놀라 당가 원로를 바라봤다.
눈빛이 서늘한 게 무척 불쾌해하는 모습이었다.
영일자가 급히 해명했다.
“당 원로. 오해네. 독을 쓴 게 문제가 아니라 하필이면 더럽게 측간을 계속 드나들게 하고 사내를 사내가 아니게 하는 그런 수를 쓴 게 마음에 안 든단 말일세.”
당가 원로 당영의는 차가운 얼굴로 사과를 받았다.
“알겠습니다. 허나 지금처럼 오해의 소지가 있으니 앞으로는 주의 부탁드립니다.”
이번엔 영일자의 눈썹이 꿈틀했다.
‘감히!’
원로원이라고 노인만 있는 건 아니었다.
칠대세가 같은 속세의 가문은 도사, 승려, 거지로 이루어진 구파일방과 달리 활발한 활동을 해야 가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고 그에 맞춰 가문을 이끌 우두머리가 필요했기에 보통 지천명(知天命)을 전후해 가주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다.
당연히 가문을 대표해 무림맹의 원로가 된 이도 그 정도 연배일 수밖에.
영일자와 당영의의 나이 차는 컸다.
그런데도 이런 수모를 당하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사과했는데도 내게 이따위로 대해?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가를 대표하는 당영의로서는 해야 할 말을 했을 뿐.
하지만 그건 그쪽 사정이고.
영일자는 분을 억지로 삭였다.
“알겠네. 주의하지.”
이렇게 지나가려 했건만.
정광이 초를 쳤다.
“원로님. 구파일방에도 사과하셔야죠.”
“……그건 또 무슨 말인가?”
“현인이 됐다고 사내가 아니라뇨. 구파일방…… 아니, 개방과 아미는 일단 빼고. 팔파 모두 여인인가요? 그건 확실히 아니니 원로님의 말씀대로라면 사내도 여인도 아니겠네요?”
“무슨 그런 비약을!”
“있는데 안 쓰는 것이나 없어서 못 쓰는 것이나 같잖아요. 그럼 저도 원로님도 모두…….”
“갈!”
대노한 영일자가 호통을 쳤으나 팔파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아무리 수양이 높다 해도 사내보고 사내가 아니라 하는데 어찌 기분이 좋겠는가?
‘내 이놈을 당장!’
분위기를 눈치채고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영일자가 말을 이으려 하는데.
시기적절하게 남궁신건이 끼어들었다.
“이보게, 무혈단주. 그런 의도로 말씀하신 게 아니지 않나. 자네의 얘기를 들으시며 사마련의 악행에 분노하시다 보니 말씀이 조금 과하게 나왔을 뿐일세. 그렇지 않습니까, 진인?”
“……그렇네.”
“여러 진인과 선사께서도 이해해 주십시오. 사마련의 악행 때문에 많은 이들이 분개하고 있습니다. 곧 사마련을 징치하러 떠나야 하는데, 이런 작은 오해로 우리끼리 얼굴을 붉히면 그들만 좋은 일 아닙니까?”
그럴듯한 말이었다.
팔파 사람들이 받아들이자 정광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혀가 제법 매끄럽네.’
그러면 뭐 하나.
영일자는 남궁신건을 제일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자.
그가 몰리면 남궁신건이 나서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좋아.’
영일자라는 미끼로 대어를 꾀었다.
정광은 시기를 놓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무량수불. 정말 맞는 말씀이네요. 건곤일척의 승부가 코앞인데 사이좋게 지내야죠. 역시 창궁무애(蒼穹無涯), 의기천추(義氣千秋)라니까요.”
“……이해해 줘서 고맙네.”
“그래서 말인데요.”
“……?”
정광이 원로들을 쓸어보며 말을 이었다.
“모두 참전하실 거죠?”
“……!”
남궁신건과 영일자는 물론이요.
정광에게 호의적인 원로들까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어? 왜들 그러세요?”
남궁신건이 답했다.
“그건 안 되네.”
“왜요?”
“원로원은 평소 맹주가 바른 결정을 내리도록 돕고 전시(戰時) 상황에는 맹을 지키는 조직일세.”
“무림맹이 밀려 망하기 직전에야 싸우시는 거예요?”
“……표현이 과하군.”
“아. 죄송합니다.”
정광은 정중히 두 손을 모았다.
“무량수불. 그럼 순화해서 여쭐게요. 그러니까 원로원은 무공이 낮은 맹의 일반 무인들까지 장강을 넘어가 목숨을 걸고 싸울 때, 한적한 무림맹에 남으셔서 쳐들어오지도 않을 적을 기다리며 투지를 불태우는 조직이라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