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251화 (250/569)

251화

그건 아니죠

정광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맑은 물처럼 깨끗하고 고요한 눈이 드러났다.

수양이 지극히 깊은 진인이나 고승의 눈이 이럴까.

‘술 생각나네.’

진짜 진인이나 고승이라도 정광의 입장이 되면 그럴 것이다.

한 걸음 나아갔는데 자축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마침 준비도 된 것 같고.’

정광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방문을 열고 나갔다.

이른 아침이었으나 소작농들은 벌써 아침밥을 지으며 일을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이쿠. 신선님, 나오셨습니까?”

“어제 또 내려주신 고기가 거의 다 익었습니다. 어서 오셔서 드시지요.”

정광은 그들을 향해 기품 있게 두 손을 모았다.

“무량수불. 술은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미 준비해 놨습니다.”

“도가 깊으시네요.”

“흘흘. 모두 신선님 덕분입지요.”

정광은 씩 웃어 보인 뒤, 마을 중앙에 있는 공터로 향했다.

나뭇가지에 꿰인 돼지고기가 향긋한 냄새를 풀풀 풍기며 구워지고 있었다.

어린 꼬마들이 그 앞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침을 꼴깍꼴깍 삼키고 있었고.

“어? 신선님이시다. 여기에요, 여기!”

정광을 발견한 한 아이가 옆의 아이들을 밀어내며 손을 흔들었다.

아이들은 얌전히 공간을 만들어줬고 정광은 그 자리에 끼여 앉았다.

“응? 신선님.”

자리를 마련해 준 꼬마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더 신선님처럼 변하신 것 같은데. 선계(仙界)로 돌아가려고 하시는 건가요?”

어린아이의 눈은 순수하여 사물을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더니.

꼬마는 어른들과 달리 정광이 달라진 걸 느꼈고 다른 아이들도 뒤늦게 알아챘다.

“와. 진짜 바뀌셨네.”

“신선님. 정말 세상을 떠나시려는 거예요?”

정광은 마지막으로 말한 아이의 머리털을 헝클어뜨렸다.

“너. 말이 좀 이상하다. 나 안 죽어. 엄청나게 오래 살 거야.”

“헤헤. 잘됐다. 저희랑 오래오래 같이 살아요. 네?”

“일단 먹자.”

“네!”

귀찮게 하는 녀석을 떨쳐냈더니.

다른 녀석이 손을 들었다.

“잠깐만요. 신선님, 이제 생각났는데요. 고기랑 술 드셔도 되는 건가요?”

“물론이지.”

“신선님이신데요?”

“내가 먹어야 너희도 편하게 먹잖아.”

“그런가?”

“믿어야 복이 온다.”

“아아. 알겠습니다, 신선님.”

정광은 두 손을 모으는 꼬마의 머리를 대충 쓰다듬으며 외쳤다.

“도우(道友)님들! 뭐 하세요? 빨리 오셔서 드시죠!”

시주면 어떻고 도우면 어떠랴.

마을 사람들이 웃으며 답했다.

“네, 신선님! 갑니다요!”

흥겨운 식사였다.

다른 소작농들에 비해 무척이나 형편이 좋은 이들이었으나 매일같이 고기를 먹는 건 꿈도 못 꿀 일.

근 며칠간 계속된 고기 잔치에 모두가 기뻐했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식사를 마친 정광이 그만 떠나겠다고 말해서였다.

“갈게요. 모두 건강하세요.”

촌장을 비롯한 어른들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배웅했다.

“언젠가 꼭 한 번은 들러주십시오, 신선님.”

“기회가 되면 그러죠.”

아이들은 마냥 해맑았다.

“오실 때 고기 많이 부탁드려요! 아주 많이요!”

“그때는 너희들이 사야지.”

혹시라도 이곳에 다시 온다면 먼 훗날일 터.

그때 이 아이들은 청년이 되어 있을까, 중년이 되어 있을까?

젊은 나이에 병사했을 수도,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되어 정광을 맞이할지도 몰랐다.

그만큼 오랜 시간이 흘러야 보게 될 거라는 의미였건만, 아이들은 다르게 받아들였다.

“으아. 어쩌지? 돈 없는데.”

“얘들아, 토끼라도 잡아 드리자. 아주 많이. 신선님, 괜찮죠?”

괜찮긴 무슨.

그럴 바엔 직접 산에 올라 사슴을 사냥하는 게 낫지.

‘편히 앉아 대접받는 것이니 아주 나쁘지는 않으려나.’

아이들이 작은 가슴을 탕탕 치며 호기롭게 떠드는 모습이 제법 믿음직스러웠다.

정광은 약조를 지키겠다는 다짐을 받은 뒤 신법을 펼쳤다.

빚을 지워놔서 그럴까?

마음이 가벼웠다.

그래서 그런지 소림까지는 또 금방이었고.

정광은 바로 방장을 만나 물었다.

“무림맹에서 연락받으셨죠?”

“사마련 총단을 치는 것 말인가? 그렇네.”

“몇 분이나 가실 거예요?”

소림은 불존을 포함한 현 자 배 고승 몇몇과 원굉을 비롯한 십팔나한, 그리고 원 자 배 제자들 중 일부를 파견하기로 했다.

방장이 이 사실을 알리자 정광이 살짝 놀란 시늉을 했다.

“그렇게 많이요?”

“해야 할 일을 할 뿐일세.”

“다른 문파들과 가문들에게 모범을 보이시려는 거군요. 방장 어르신 덕분에 일이 좀 쉬워지겠어요.”

“도움이 된다니 다행이군. 그래, 언제 떠날 생각인가?”

“오늘요. 가능하시죠?”

고개를 끄덕인 방장이 정광을 물끄러미 보다가 반장했다.

“아미타불. 대공(大功)을 이룬 걸 축하하네.”

“소공(小功)인데요, 뭐.”

“허허. 크기의 차이가 무슨 상관일까. 공은 공인 것을.”

방장은 꼿꼿한 자세와 안 어울리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외에도 좋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맞는가?”

“조금요.”

“말해주게나. 궁금해서 그러네.”

“별것 아닌데.”

정광이 아이들과 있었던 일을 얘기하자 방장의 부리부리한 눈이 둥글게 휘었다.

‘선재(善哉), 선재로다. 현오 사제의 청을 부처께서 들으시고 진옥룡을 도우셨구나.’

아이들에게 빚을 지워서 기분이 좋다 하나 어찌 그럴까?

정광 자신은 모르지만 결핍되어 있던 부분이 조금이나마 채워진 것이리라.

‘쓸데없이 잔소리할 필요가 없겠어.’

정광은 차근차근 나아가고 있었다.

그런 그를 믿고 지켜봐야 했다.

“아미타불. 무운을 비네.”

이날 오후.

정광은 소림승들과 함께 하산했다.

목적지는 무림맹이었다.

* * *

‘뭐야 이건?’

정광은 머리 위의 현판을 올려다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옥룡객잔(玉龍客棧)?’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무림맹이 있는 하남성 남양(南陽).

거리에 있는 수많은 점포의 현판에 ‘옥룡’이라는 두 글자가 떡하니 새겨져 있는 것 아닌가!

‘어떻게 된 거지?’

곧 알 수 있었다.

거리를 거닐던 사람들이 정광을 보자마자 구름처럼 모여든 것이다!

“진옥룡! 귀하의 협행에 감복했습니다! 소생은 청도위가(靑道魏家)의 위모…….”

“만나게 되어 영광이외다! 나는 요지환검(搖之幻劍) 안중이라 하는데, 이것도 인연이니 곡차나 한잔…….”

정광의 인기는 절정이었다.

무림의 떠오르는 태양!

청년 무인들의 우상!

이게 바로 정광인 것이다!

그렇다 보니 무림맹 무인들을 상대로 먹고사는 점포들은 너도나도 ‘옥룡’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고, 그 결과 사방팔방이 옥룡 천지였다.

‘그래도 앞에 ‘진’은 안 붙였네.’

그럴 수밖에.

정광은 수많은 협행은 물론 악행으로도 유명했다.

누가 감히 그의 별호를 그대로 베껴 쓰겠는가?

‘뭐 그건 그거고.’

잡혀 있을 시간이 없었다.

마침 사람들에게 던져줄 만한 먹잇감도 있었고.

정광은 정중히 포권하며 낭랑하게 외쳤다.

“무량수불! 모두 반갑습니다! 그런데 불존 어르신과 소림의 고승들께서 어려운 발걸음을 하셨으니 조금만 조용히 해주세요!”

“……!”

“이 기회에 소림과 연을 트시는 것도 좋고요! 아무 때나 오시는 소림이 아닙니다! 천하공부출소림(天下工夫出少林)! 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 소림 아닙니까!”

“……!”

정광이라는 개인과 소림이라는 집단.

어느 쪽과 연을 맺는 게 더 이익일까?

무게 추는 자연히 후자 쪽으로 넘어갔다.

“아미타불! 안녕하십니까! 평소 소림의 위명을 귀가 따갑게 들으며 흠모해 왔습니다! 소생은 청도위가의 위모…….”

“관세음보살!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소인은 요지환검 안중이라 하온데, 이것도 인연이니 차라도 한 잔…….”

정광은 잽싸게 군중들을 떠넘기고 신법을 펼쳤다.

소림승들의 원망 어린 눈초리가 뒤통수를 찔렀으나 알 게 뭔가?

‘거긴 안 변했으면 좋겠는데.’

정광은 목적지에 도착해 가만히 훑어봤다.

기억 속 모습 그대로 현판조차 없는 반점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하하. 저 왔어요!”

깜짝 놀란 손님들이 정광을 에워싸려 했으나 더 빠른 이가 있었으니.

장이의 모친이었다.

“은공!”

어찌나 급하게 뛰어나왔는지 발을 헛디디는 그녀를 정광이 가볍게 부축했다.

“조심하셔야죠. 장 소협이 걱정 많이 하시던데.”

“……그 아이는 잘 있습니까?”

“물론이죠. 소문 못 들으셨어요?”

“듣긴 했습니다만…….”

“건강하게 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정광을 따라 다니며 공을 세워 명성이 퍼진 장이였으나 어미의 마음은 좌불안석일 수밖에.

안전히 잘 있다는 말을 듣자 눈에 눈물이 고였다.

‘울면 안 돼. 강해져야 해.’

그녀는 억지로 참으며 쾌활하게 물었다.

“은공, 시장하시지요?”

“그래서 왔죠.”

“쇤네가 모시겠습니다. 들어오시지요.”

그녀는 정광을 안내한 뒤 탁자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수많은 요리를 날랐다.

“마음이 급해 얼마 차리지 못했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잘 먹겠습니다.”

정광은 정말 잘 먹었다.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리던 그녀는 정광이 배를 두드리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은공 홀로 오셨는데, 다른 단원들은…….”

물어보기 죄스러워 단원들이라 했으나 장이에 대해 묻는 말.

정광은 자세히 설명해 줬다.

남궁세가에 있다고.

곧 큰 싸움이 벌어질 텐데 거기에 참가해 싸울 거라고.

아드님이 돈 많이 버시게 됐으니 더 이상 일하시지 않아도 된다고.

“…….”

천하에서 가장 강한 존재는 어머니라 했던가.

그녀는 애써 의연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요. 은공께서 내려주신 반점입니다. 쇤네는 죽을 때까지 계속할 겁니다.”

“저야 좋죠. 가끔 들르고 싶거든요. 그런데 눈물이 맺히셨네. 걱정되세요?”

그녀는 담담히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 아이가 스스로 선택한 길이니 그렇게 가야겠지요. 요리는 입에 맞으셨습니까?”

“물론이죠. 요리 솜씨가 더 좋아지셨네요.”

“감사합니다.”

“장 소협에게도 좀 가르쳐 주시죠.”

“……네?”

정광이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곧 돌아올 테니까 부탁드려요.”

“흐윽…….”

참고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까와는 다른 기쁨의 눈물이었다.

돌아올 거라 하지 않는가?

다른 사람도 아닌 정광이!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눈물을 계속 흘리며.

* * *

난전에서 살아남기 위해 중요한 건 무엇일까?

높은 무공인 게 당연하지만 그 외에도 몇 가지가 있다.

장이는 그중 둘이나 갖고 있었기에 정광은 그를 걱정하지 않았다.

“이보게 무혈단주. 오랜만에 와놓고 왜 말이 없나?”

정광은 생각에서 깨어나 눈앞에 있는 자를 바라봤다.

무림맹주인 팽수관이었다.

“드릴 말씀은 남궁세가에서 띄웠던 서신에 다 적었는데요.”

“거참. 정 없기는. 군사가 간신히 해독해서 들려줬는데 이러긴가?”

팽수관이 혀를 차자 옆에 있던 제갈문형이 빙그레 웃었다.

“맹주, 크게 틀린 말도 아닙니다. 먼 길을 달려와 피곤할 텐데 확인할 것만 하고 보내주시지요.”

“내가 뭘 안다고 확인을 하겠소? 군사가 하시오.”

팽수관의 퉁명스러운 말에 제갈문형이 고개를 저었다.

“무혈단주의 협행을 들을 때마다 언짢아하시더니 과연.”

“무슨 그런 모함을!”

“괜히 맹주 했다고. 함께 갔어야 했다고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어허. 이 중요한 순간에 농을 하다니. 어서 일이나 합시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제갈문형은 정광에게 감사부터 표했다.

대가를 주기로 했다곤 하나 자신의 가문을 구해준 은인 아닌가.

그리고 대화를 시작했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과 앞으로 일어날 일에 관한 얘기들이었다.

“……장강의 일은 정말 수고했네. 남궁세가가 문제인데. 가주가 바뀐 진짜 이유는 말할 필요 없고. 새로운 가주는 자네가 서신에 적은 대로 사마련과 싸울 의지가 확고한가?”

“네.”

“좋아. 남궁세가를 따르던 이들도 쉽게 설득할 수 있겠군.”

“가주께서 그분들에게 서신을 보내놓겠다고 하셨으니까 그럴 거예요.”

“전 가주의 서신이겠지?”

“물론이죠.”

“아주 좋아. 자네는 길게 말할 필요가 없어서 좋다니까.”

팽수관이 끼어들었다.

“나와는 길게 얘기해야 해서 안 좋다는 의미로 들리오만.”

“이런. 들켰군요.”

“후우. 내 편이 하나도 없다니까.”

정광과 제갈문형의 대화는 꽤 길게 이어졌다.

마침내 결론을 짓자 팽수관의 시선이 정광에게 향했다.

“이미 맹에 소속된 문파와 가문에 연락을 취해놨네. 오늘 자네와 군사가 계획을 또 다듬었으니 그들에게 또 알려야겠지.”

“그래야죠.”

“전력을 집중해서 한 번에 친다. 아주 좋은 생각이야. 그래서 말인데…….”

팽수관이 말끝을 흐리자 제갈문형이 반대했다.

“안 됩니다.”

“아직 말도 안 했소!”

“맹주께서도 참전하시겠다는 말씀 아닙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맹원들이 사지에 뛰어드는데 맹주가 몸을 사려서야 되겠소? 내 말이 틀렸소이까?”

“그래도 안 됩니다. 맹을 이끄시는 분께서 어찌 경거망동하신단 말입니까?”

두 사람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맞섰다.

지루하게 듣고 있던 정광이 타협안을 내놨다.

“비무로 정하시죠.”

결국 팽수관도 참전하게 됐다.

비무를 이겨서가 아니라 제갈문형이 한 발 뒤로 물러나서였다.

“맹주의 말씀처럼 맹원들의 사기진작을 위해선 그게 낫기에 수긍한 겁니다.”

“암. 알고 있소이다.”

“단, 사마련주와 자웅을 겨루겠다는 욕심은 버리십시오. 무혈단주가 서신마다 누누이 강조하지 않았습니까?”

사마련주는 내 것이다.

정광이 한결같이 써온 내용이었다.

지금까지 정광이 세워온 공이 대단했기에 팽수관으로서도 거절할 수 없었고.

“끙. 그렇게 할 테니 걱정 붙들어 매시오.”

“선두에서 싸우셔도 안 됩니다.”

“후우. 시어머니가 따로 없구먼.”

한숨을 내쉰 팽수관이 진지한 얼굴로 당부했다.

“이번 기회에 반드시 끝내야 하오. 힘들어하는 민초들을 위해서.”

“알겠습니다, 맹주.”

“네.”

“무혈단주, 출발할 때까지 푹 쉬게. 자네의 역할이 중요해. 아. 귀찮겠지만 오늘 밤에만 시간을 내주고. 원로원에 얼굴이라도 비춰야 하지 않겠나?”

“어차피 같이 싸우러 갈 텐데 그래야 해요?”

“그들은 안 갈 걸세.”

“네?”

팽수관의 얼굴에 비웃음이 걸렸다.

“흥. 괜히 원로인가? 입으로만 떠드니까 원로지.”

“그건 아니죠.”

정광의 눈에 빛이 맺혔다.

반드시 전부 끌고 가서 굴리겠다는 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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