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248화 (247/569)

248화

용맹정진(勇猛精進)

수많은 참배객이 산을 오르고 있었다.

정광은 그들 사이로 걸으며 입맛을 다셨다.

‘오늘도 득실득실하네. 진짜 쏠쏠하겠어.’

이 많은 사람이 시주하는 금액은 얼마나 될까?

곤륜과 비교해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개파조사 그 영감은 왜 터를 그런 데다 잡았는지.’

변방 중의 변방인 청해성인 건 그렇다 치자.

좀 완만하고 기후 좋은 산을 고를 것이지, 구름과 맞닿을 정도로 높고 험한 데다 칼바람에 눈보라까지 휘몰아치는 곤륜산이 웬 말인가.

극악의 난도를 자랑하는 접근성이었다.

아무리 신실한 도우(道友)라도 떨어져 나갈 수밖에.

‘믿음이 문제가 아니야.’

한번 오르고 나면 몸져누울 판인데 믿음은 무슨.

그나마 정광을 보러 오는 근성 있는 여도우들 덕분에 조금은 나아졌으나…….

그것으론 부족했다.

자신이 없더라도 도우들이 계속 산에 오르게 하기 위해 체조법을 만들어 뿌렸다.

무림맹 무인들도 효과를 봤을 만큼 나쁘진 않은 것이었기에 곤륜의 살림이 좀 폈으나 말 그대로 좀 폈을 뿐.

근원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다.

‘그래서 돈을 열심히 모았는데.’

돈도 써본 놈이 쓸 줄 안다고, 곤륜 도사들은 엉망진창으로 썼다.

아니, 쓰러져 가는 도관을 바로 세우고 도복에 솜이라도 두툼하게 넣지, 어려운 이들을 돕는답시고 사방팔방에 뿌려? 곤륜이 제일 어려운데?

그래도 정광이 모은 돈이 워낙 많았기에 한동안은 괜찮을 터였다.

장강의 수운(水運)으로 정기적인 수입이 생길 테니 앞으로도 문제없을 것이고.

‘그래. 할 만큼 했어. 나머지는 알아서들 하겠지.’

그 알아서 한다는 게 여기저기 계속 퍼줄 것이란 건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들의 삶이 있고 정광의 삶이 있으니까.

그저 가만히 앉아 떼돈을 버는 소림이 부러워 잠시 든 생각…… 은 개뿔.

계속 부러웠다. 정말 부러웠다.

소림승들도 곤륜 도사들 못지않게 궁색하게 사는 건 아나, 내실 자체가 다르지 않은가!

‘가만. 무림맹 근처에 작은 도관(道觀)을 세운 것처럼 청해성 전역에 지어버려?’

곤륜산을 오르기 힘든 이들이 잠시 들러 축원하고 간단한 제를 지낼 수 있게 한다는 명분으로 돈을 벌 수 있으리라.

자신이 나고 자란 곤륜이니 빈민구제에 돈을 펑펑 쓰면서도 떵떵거리고 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정광은 백승무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가 바빠지겠네. 뭐 제 복이지.’

그만한 능력은 있으니 잘 해낼 것이다.

정광은 가벼운 마음으로 소림사 산문에 이르렀다.

산문 앞에 서 있던 지객당(知客堂) 승려들의 눈이 커졌다.

안면이 있든 없든 간에 보자마자 알아챌 수밖에 없어서였다.

“지, 진옥룡!”

정광은 두 손을 모으며 인사했다.

“아미타불. 안녕하세요.”

“…….”

“어? 표정이 왜 그러시죠?”

“……도사인 자네가 불호를 외워서 당황했네.”

“뭘 그런 걸 가지고. 부처나 원시천존이나 그 나물에 그 밥…….”

정광은 소림승들과 참배객들이 경악하자 말을 살짝 바꿨다.

“두 분 모두 육식을 안 하시고 나물과 밥을 즐기셨죠. 그렇게 통하시는 면이 있으니 승려와 도사도 통해야 하지 않을까요. 불호든 도호든 무슨 상관입니까. 한데 어우러져 살아가는 세상인데.”

“…….”

“저 들어가도 돼요?”

“……가세나.”

“말은요?”

“잘 돌볼 테니 걱정하지 말게.”

소림은 중원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다웠다.

금세 정신을 차리고 정광을 안내했다.

거대한 부지에 세워진 고풍스럽고 웅장한 전각들.

그 사이를 지나치는데 먼저 들어간 지객승이 알렸는지 아는 얼굴들이 나타났다.

모두 만면 가득 미소를 머금고 있었는데 산서성에서 함께 싸웠던 십팔나한(十八羅漢)과 무승들이었다.

“아미타불. 진옥룡, 어서 오게나.”

“자네의 협행을 귀가 따갑게 들었네. 정말 큰일들을 했어.”

“공우 사질이 서신에 뭐라 적었는지 아나? 자네 칭찬뿐일세.”

“정말 많은 걸 배우고 있다 하더군. 고맙네, 정말 고마워.”

정광은 어리둥절했다.

‘왜 이렇게 달라붙지? 도복에 고기와 술 냄새가 남아 있나?’

코를 킁킁거려봤으나 아무런 냄새도 안 났다.

산에 오르기 전 내공을 주입해 모두 털어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왜?’

정광이 의아해하든 말든 소림승들은 그를 둘러싸고 웃음꽃을 피웠다.

그들의 눈에는 하나같이 호감의 빛이 맺혀 있었다.

‘아무렴 어때. 좋은 게 좋은 거지.’

정광은 그냥 받아들였다.

그리 나쁘진 않은 기분이었다.

그때, 익숙한 얼굴의 승려가 나는 듯 달려왔다.

“아. 원굉 대사(大師)님.”

“진옥룡, 이게 얼마 만인가!”

“얼마 안 됐는데요.”

“여전하군, 여전해. 그래, 이래야 자네답지.”

“대사님은 많이 변하셨네요.”

강퍅한 인상은 남아 있으나 분위기가 상당히 유해져 있었다.

“하하. 그런가?”

“…….”

허나 미소는 예전 그대로였다.

딱딱한 얼굴에서 입꼬리만 올라가니 머리가 모자란 이가 흉계를 꾸미는 것 같았다.

“어쨌든 잘 왔네.”

원굉은 그 미소를 유지한 채 다른 승려들을 나무랐다.

“그만 좀 달라붙게나. 진옥룡이 불편해하지 않는가? 나중에 자리를 마련할 테니 그만 할 일들 하러 가게.”

승려들은 원굉의 미소가 익숙한지 빙그레 웃으며 물러났다.

“자. 가세나. 방장께 인사부터 드려야지.”

“네.”

정광은 원굉과 함께 걸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의 승려들이 그랬듯, 경내의 분위기가 많이 바뀌어서였다.

‘확실히 부드러워졌어. 강(强)이 아니라 유(柔)에도 신경 쓰기 시작한 건가?’

무공을 떠올렸으나 아니었다.

원굉은 정광이 의아해하는 걸 눈치채고 입을 열었다.

“본사가 좀 변했지?”

“네.”

“자네 덕분일세.”

“네?”

원굉의 눈이 살짝 가라앉았다.

“본사는 꽤 오랫동안 강호 출입을 삼갔네. 현 황조가 과도한 혜택을 내린지라 최대한 조용히 지내려고 한 것이야.”

타 문파의 질시와 오해를 막으려고 승려이자 무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안 했다.

수양에만 힘쓰고 속세의 힘없는 시주들과 속가 문파들을 등한시한 것이다.

“허나 자네 덕분에 변화했지. 승려이자 무인으로서 균형을 잡았다고 할까?”

세간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고 강호 출입을 늘렸다.

다른 뜻이 없음을 적극적으로 해명하며 어려운 이들과 속가 문파들을 도왔다.

“여전히 시기하며 오해하는 자들도 많으나 거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지 않나.”

힘든 삶을 살고 있는 민초들이 너무나 많았기에.

본사의 도움을 바라던 속가 문파들이 넘쳤기에.

원굉은 걸음을 멈추고 정광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의 입에서 진심이 담긴 말이 흘러나왔다.

“고맙네. 정말 대단한 일을 해줬어.”

“뭘요.”

“겸양이 지나치군. 자네에겐 수많은 협행 중 하나겠지만 본사엔 너무나 큰 깨달음이었네.”

정광은 목을 긁으며 시선을 피했다.

‘시간이 흘러도 저런 말을 할까? 아닐 텐데.’

가만히 들어보니 소림도 여기저기 미친 듯이 퍼주고 있었다.

안 그래도 궁핍하게 살고 있는 걸 뻔히 아는데 앞으로는 더 심해지지 않겠는가.

본사를 지원하는 속가 문파들도 언젠가는 허리가 휘게 될 터.

벌써 그들의 원성이 환청처럼 들렸다.

“허허. 쑥스러워하기는.”

아니라니까.

“웃는 걸 보니 자네도 기분이 좋은가 보군.”

내가?

“이런. 말이 길어졌어. 어서 가세나.”

“네.”

두 사람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뭔가 좀 이상한데…….’

정광은 낯선 기분을 간직한 채 소림 방장인 현죽을 만나게 됐다.

대나무처럼 꼿꼿한 자세와 부리부리한 눈.

카랑카랑하나 부드러움이 담겨 있는 목소리.

그는 예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정광을 반겼다.

“어서 오게나.”

“안녕하세요.”

“현오 사제의 말이 맞았군.”

“네?”

방장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노납은 자네가 한참 후에나 올 거라 했지만 현오 사제는 금방 올 거라 했거든.”

“오오. 그새 신통력이라도 생기셨나 봐요.”

“정말 그런 게 아닐까 싶은 모습으로 입적(入寂)했지.”

“아…….”

정광의 머릿속에 현오와의 마지막이 떠올랐다.

‘극락에서 다시 뵙죠. 저는 아마 천천히 갈 테지만.’

‘흘흘. 지옥이 아니길 빌어다오.’

‘뭐 어디가 됐든 잘 가세요.’

‘잘 있거라.’

그래. 분명 그랬다.

정광은 혹시나 하던 마음을 접었다.

현오를 진맥해 봤기에 수명이 얼마 안 남은 건 알고 있었으나, 실제로 그렇게 되니 기분이 묘했다.

수많은 죽음을 보고, 그렇게 되게 만들었던 정광으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느낌이라 할까.

‘뭐야 이거?’

그때, 정광을 빤히 보고 있던 방장이 권했다.

“무슨 일로 왔는진 모르네만, 일단 사제부터 만나보겠나?”

“음. 그러죠.”

방장은 원굉에게 말해 정광을 안내하게 했다.

원굉은 정광을 데리고 꼬불꼬불한 오솔길을 걸었다.

그렇게 걷길 한참.

잡초가 듬성듬성 나 있는 작은 공터가 나왔다.

그 한가운데, 작은 석탑이 있었고.

현오를 빼닮은 소탈한 모습이라니.

원굉이 그것을 가리키며 말했다.

“인사드리게.”

“어울리는 곳에 모셨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사리(舍利)는 나오셨어요?”

번뇌가 크진 않지만 많았던 걸까.

현오의 몸에서 나온 사리는 작았으나 양은 무척 많았다.

원굉으로부터 그 말을 들은 정광은 놀란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래도 완전 땡중은 아니었던 건가.’

어리숙한 노승이었는데.

기억을 더듬어봤다.

‘역시…….’

치병(癡病)에 걸린 것처럼 의뭉을 떨 땐 어찌나 괘씸하던지.

불존의 부탁을 들어주고 대가도 받을 겸, 한 번 혼나보라는 마음으로 사바세계(娑婆世界)로 이끌었다.

산에서 업고 내려와 화려한 사두마차(四頭馬車)에 태울 때도.

정주현(鄭州縣) 최고의 포목점에 들러 화려한 비단 장포에 비단 모자를 씌울 때도.

너무나 당황해서 속으로 많이도 웃었었다.

‘그 후 고급 반점과 객잔, 심지어 주루까지 거침없이 달렸지.’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많이 먹는다고 했던가.

현오는 바로 배탈이 났다.

술 몇 잔에 인사불성이 되기도 했고.

그런 그를 내공으로 깨끗이 치유해 극락과 지옥을 넘나들게 했었다.

명승고적에 들르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놀잇배에 타면 몽롱한 눈빛을 흘리던 모습이라니.

‘그래. 얼마 안 되는 시간이지만 그렇게 즐겼었어.’

현오가 갑자기 엉뚱한 깨달음을 얻어 끝나 버린 외유였지만 정광의 머릿속에 깊이 남아 있는 기억이었다.

‘아. 그때부터였나. 땡중이 아니라 선사(禪師) 비슷한 모습을 보인 게.’

항마주(降魔珠)에 대한 단서를 준 건 좋았는데.

그 전에 뜬구름 잡는 소리를 얼마나 많이 늘어놓던지.

대충 정리하면 세상이 널 가만 놔두질 않을 것이다. 하늘이 내려준 네 쓰임을 알고 미리 마음을 정해놓으라 했던가.

정광의 지론과는 다른 말이었기에 대충 흘려들었건만, 현오가 잠든 석탑을 보자 다시 생각났다.

‘무슨 놈의 걱정이 그리도 많았을까.’

그의 염려가 느껴졌다.

작고 빼빼 마른 그가 구부정히 일어나, 진물 맺힌 눈을 부드럽게 휘며 반기는 것 같았다.

-왔느냐.

-네.

-수고했다. 편히 쉬다 가거라.

-…….

정광은 가만히 석탑을 보다가 두 손을 모았다.

그의 입에서 진지한 불호가 흘러나왔다.

“아미타불.”

* * *

정광과 원굉은 왔던 길을 묵묵히 걸었다.

원굉은 정광을 안쓰러운 기색으로 힐끔거리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가 떠난 뒤, 현오 사숙께서는 지난한 화두(話頭)를 잡고 용맹정진(勇猛精進)하셨네. 그리고 입적하시기 직전에 부탁하셨지.”

“곡차(穀茶)라도 한 잔 달라고 하셨나요?”

“…….”

“아니면 고기?”

“……기운을 참 빨리 차리는군.”

“차리다뇨. 항상 쌩쌩한데.”

“…….”

원굉은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자네가 오면 당신의 거처로 안내해 달라고 하셨네.”

“왜요?”

“전하고 싶으신 게 있다고, 자네가 알아서 찾을 거라고 말씀하셨지. 가보겠는가?”

“……!”

줄 게 있다는 데 마다하면 정광이겠는가.

눈을 번뜩이며 대답했다.

“암요. 가야죠.”

“…….”

“어딘지 아는데 먼저 신법 펼쳐서 가도 돼요?”

“……그냥 천천히 가세나.”

그들은 소림사 외곽으로 향했다.

투박하면서도 아기자기한 멋이 있는 암자(庵子)가 나타났다.

전에 왔었던 현오의 암자였다.

“밖에서 기다리겠네. 들어가…….”

정광은 이미 들어가 있었다.

‘변한 게 없구나.’

수많은 서책으로 빼곡히 채워진 서가(書架)들도, 그곳에서 나는 퀴퀴한 향도 그대로였다.

단지, 현오만 없었을 뿐.

‘……쓸데없는 생각이 자꾸 나네. 내가 알아서 찾을 거라 했지.’

고민해 볼 필요도 없었다.

답은 뻔하지 않은가.

어차피 현오의 암자에는 서책밖에 없었다.

‘어디 보자…….’

정광은 그것들을 훑어보다가 손때가 전혀 안 탄 것을 뽑았다.

현오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쓴 서책. 자신에게 주는 선물일 게 분명했다.

‘어떤 깨달음을 남겼으려나.’

무공은 꼭 무공을 닦아야 느는 게 아니다.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 모든 흐름은 하나로 귀결되는 법.

무공을 전혀 모르는 학승의 깨달음도 무인이 한 걸음 나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락-

담담히 첫 장을 펼친 정광이 눈을 크게 떴다.

‘이, 이건!’

사람은 죽어서 글을 남긴다더니.

현오는 죽어서 그림을 남겼다.

서책엔 현오가 정광과 헤어진 후 용맹정진(勇猛精進)하여 그려낸 춘화(春畵)가 있었다.

‘이 땡중이 진짜…….’

현오가 듬성듬성한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

얼마 안 가 정광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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