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밀담(密談)
호남성(湖南省) 상담(湘潭)에 있는 아담한 장원.
키가 껑충한 노인이 소박한 정자에 꼿꼿이 앉아 있었다.
무심한 눈초리로 화원을 둘러보던 노인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삼켰다.
그 순간, 화원의 꽃을 탐하던 벌이 다가왔다.
노인은 왼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파삭-
벌이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노인은 왼손을 내리려다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
그 손에는 손가락이 두 개밖에 없었다.
‘아직도 어색하군.’
정광의 암수에 걸려 잘린 지 꽤 됐거늘, 볼 때마다 생소했다.
보는 것만 그렇다면야 큰 상관이 없으련만, 무공을 펼칠 때가 문제였다.
‘그래서 무당 장문인의 목을 치지 못했었지.’
그자가 펼친 동귀어진(同歸於盡)의 절초를 피하느라 한쪽 팔을 자르는 데 그쳤던 기억이 떠올랐다.
자신이 온전한 몸이었다면, 그가 무슨 수를 썼든 간에 목숨을 거뒀을 텐데.
두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하며 감각을 확인했다.
‘그래도 거의 돌아왔어.’
분명 좋은 일이건만.
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손은 예전처럼 쓸 수 있게 됐고 잘렸던 머리털도 자랐으나 한풍(寒風)만큼은 어쩔 수 없구나.’
모든 일의 원흉인 정광을 만나면 되찾을 수 있을까.
‘힘들겠지.’
오랜 시간 생각해 봐도 정광을 어찌해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가균은 고개를 저어 애도(愛刀) 한풍에 대한 아쉬움을 털어냈다.
‘하지만…….’
직접 선별하고 키워 신뢰를 나누던 천랑대(天狼隊).
그들의 죽음만큼은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언젠가 갚을 날이 오겠지. 앞으로가 중요해.’
자신이 이끄는 귀도회(鬼刀會)는 물론이요, 사파무림 전체의 명운이 흔들리고 있었다.
‘무당을 멸하지 못하고 제갈세가도 놓쳤어.’
련주가 기울어져 가는 전세를 뒤집기 위해 근신에 처했던 가균까지 대동하고 야심차게 벌인 일이었건만.
실패해 버렸다.
뿐이랴.
그전에 정광을 죽이기 위해 팔사(八邪) 중 둘인 창사와 부사를 자객으로 보냈었다는 소문이 알을 알음 퍼지고 있었다.
‘진옥룡이 제갈세가에 멀쩡히 나타나 훼방을 놓은 걸 보면 둘 다 죽었겠지.’
실로 경천동지할 일이었으나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정광이 그들을 이길 만큼 강하다고 믿어서가 아니었다.
단지 정광이라면, 상대가 누구든 간에 어떤 수를 써서라도 죽였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련주에게는 안 되겠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몰릴 줄이야.’
련주의 사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아니, 아주 안 좋은 상황이라고 하는 게 정확하리라.
‘무슨 수로 진천뢰(震天雷)를 입수했는지는 모르나, 그것조차 빼앗겼어.’
감금되다시피 한 자신조차 련이 술렁거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다급하겠지. 판세를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어떻게든 끌고 갈 만한 수를 썼을 텐데…….’
그때, 심복이 허공에서 나타나 부복했다.
“회주,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무슨 일이냐.”
“한로가 형편없는 몰골로 총단에 돌아왔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소면호리(笑面狐狸)가? 련주의 곁에 붙어 있어야 할 그가 언제, 어디에 갔던 것이지?”
“그건 알 수 없습니다만 새롭게 들어온 정보와 엮어 한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풀어서 말해보거라.”
심복이 침을 꿀꺽 삼킨 뒤 입을 열었다.
“사밀대(邪密隊)가 안 보인 지 꽤 된다고 합니다.”
“…….”
가균의 눈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사밀대는 련주 직속의 무력대로 암살에 특화된 자들.
그들이 사라졌다?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한로가 사밀대를 이끌고 나갔던 것인가. 하지만 혼자 돌아왔고.”
“그랬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일리가 있어. 그가 키운 것이나 마찬가지니. 그렇다면 목표는…….”
“…….”
둘 다 입 밖으로 내진 않았으나 뻔한 일이었다.
현 상황에 련주가 죽이고 싶어 하고 죽여야 할 대상이라면 정광밖에 더 있는가.
“수고했다.”
“아닙니다. 운신의 폭이 좁아 이 정도밖에 못 알아냈습니다. 속하를 벌해주십시오.”
“쓸데없는 소리. 진옥룡은 지금 어디에 있다고 하더냐?”
“장강을 타고 동쪽으로 향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현 위치와 목적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장강에 큰 소란이 일어났겠군.”
“장강수로연맹과 다툼이 있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건…….”
심복은 면목 없는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가균은 담담한 목소리로 그를 다독였다.
“본거지도 아니고 총단 근처에 묶여 있는 판이다. 너는 할 만큼 했어.”
“감사합니다, 회주.”
“생각을 좀 해봐야겠다. 그만 물러나거라.”
“존명.”
가균은 심복이 사라지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가균이 눈을 떴다.
그는 정자 바로 앞에 피어 있는 일지춘(一枝春)을 보며 무심히 중얼거렸다.
“호북성에서 장강을 타고 동쪽으로 가면 안휘성과 강소성이 나오지. 강소성에는 별것 없고. 안휘성에는 남궁세가가 있단 말이야.”
고개를 들어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올려다봤다.
그 속에 몸을 감춘 채 움직이고 있을 누군가가 떠올랐다.
“진옥룡의 목적지는 남궁세가였을 터. 련주가 그걸 알고 한로와 사밀대를 보냈으려나.”
가균은 고개를 저었다.
“진옥룡을 죽이겠다는 목적 하나로 보낸 게 아닐 수도 있어. 하필이면 남궁세가라, 다른 이유가 또 있을 법도 한데…….”
가균은 고개를 숙여 아까의 일지춘을 노려봤다.
“네놈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잠시 뒤.
바닥이 들썩거리더니 구멍이 났다.
한 사내가 흙을 헤치며 올라왔다.
뾰족하게 튀어나온 코에 기이할 정도로 큰 손바닥과 긴 손가락.
그야말로 두더지가 따로 없었으나.
목소리만큼은 평범했다.
“죄송합니다. 소인은 그런 것을 논할 식견이 없습니다.”
“소리도 거의 없이 땅을 파다니 재밌는 재주군.”
흥미롭게 사내를 보던 가균이 이를 드러냈다.
“네놈도 그만 나와. 손을 쓰기 전에.”
푸스스-
두더지 사내가 나온 구멍에서 다른 사내가 올라왔다.
그 사내의 입에서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소생도 손발이 잘린 채 묶인 처지라 확신은 못 합니다. 어찌 생각하고 있는지 정도는 이미 짐작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만.”
가균의 눈에 이채가 맺혔다.
천천히 일어선 그는 두 손을 모아 포권했다.
“누구신지 몰라 실례했소이다.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소.”
사내도 머리와 옷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예를 표했다.
“이런 식으로 찾아뵌 소생의 잘못이지요. 괘념치 마십시오, 회주.”
“…….”
“왜 그러십니까?”
“…….”
가균은 묘한 눈길로 사내를 보다가 물었다.
“회주라니. 지금 련을 부정하는 것이오?”
귀도회 소속 무인이 자신을 회주라 부르는 건 당연했으나, 외부의 인물인 사내는 부련주라 칭해야 했다.
그 점을 꼬집자 사내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지금의 련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말입니다. 회주께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많이 변했다더니 과연. 몰래 토굴을 파고 들어와 그런 말을 하는 이유는?”
가균의 말투가 바뀌었다.
사마련으로 엮인 그들의 관계를 사내가 부정했으니, 그도 공대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회주, 안에 들어가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만.”
난데없이 나타난 사내.
사마련주의 막내 제자인 후위진이 현인(賢人)처럼 고요한 눈빛을 발하며 덧붙였다.
“오랫동안 토굴을 판 성의를 봐서라도 그래주시지요.”
* * *
가균은 후위진과 함께 방에 들어갔다.
“앉게.”
“감사합니다.”
“재밌는 녀석을 데리고 있군. 응담후가(鷹潭后家)답다고 해야 하나.”
구멍으로 다시 들어간 두더지 사내를 말함이었다.
가균은 후위진을 새삼스럽게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눈빛은 바뀌었어도 간이 큰 건 여전해. 련주의 눈이 사방에 깔려 있는데도 이런 짓을 벌이다니.”
“사부가 편하게 감시하려고 회주와 저를 가까운 곳에 묶어놓은 덕분이지요. 너무 한적한 곳인지라 적적함을 참지 못하고 용기를 냈습니다.”
“련주에게 불만이 제법 많은 것 같군.”
“차도살인(借刀殺人)의 계책으로 화산과 종남이 있는 섬서성에 내쳐졌으나 나름대로 공을 세웠지요. 그런데도 또 이렇게 취급하시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칼을 거꾸로 쥐어도 당연하다는 말인가. 이해는 하네만. 이건 용기가 아니라 만용일세.”
“허나 만용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가균은 후위진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지금이 맞았으면 좋겠군. 아까의 물음에 답부터 해보게. 왜 남궁세가일까?”
“말씀 그대로 남궁세가이기 때문일 겁니다.”
“선문답이나 하자는 게 아니야. 정말 현인이 된 겐가?”
“…….”
“자네, 설마…….”
“남궁세가주인 남궁화인은 대협인 척하나 옹졸하고 야망이 큰 자입니다. 무림맹주 선출에서 밀렸다고 그대로 포기할 자가 아니지요.”
사사건건 맹주의 결정에 토를 달고 자신의 세력을 키웠다.
허나 그걸로 그치지 않을 거라는 게 후위진의 예상이었다.
“맹주가 되지 못했으니 명성이라도 높이려 하지 않겠습니까. 그 명성을 바탕으로 현 맹주의 임기가 끝나면 차기 맹주에 오르겠지요.”
전 중원에 널리 퍼질 만큼의 명성.
현시점에서 그걸 거머쥐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사마련과의 휴전.
반대도 있겠지만 싸움에 지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으리라.
“사실 사부야말로 그러길 원하고 있을 겁니다. 정파인이라 자부하는 남궁화인이 먼저 청했을 리는 없고, 사부가 선을 대었겠지요.”
“그래서 한로가 사밀대를 이끌고 남궁세가에 갔다? 진옥룡도 해치울 겸?”
“해치울 겸이 아니라, 제대로 된 화친을 위해서는 진옥룡이 없어져야만 하기 때문이겠지요. 소생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회주처럼.”
“확실히 변했군. 그다음은 어떻게 흘러갔을 거라 예상하나?”
“역시 회주의 생각과 같습니다만.”
“진옥룡을 죽이진 못했을 것이란 말인가?”
“네. 그러긴커녕 남궁화인과 손을 잡지도 못했을 겁니다. 진옥룡이 어떻게든 훼방을 놨을 테니까.”
“그놈을 너무 높게 보는 것 같은데.”
후위진이 빙그레 웃었다.
“직접 겪어봐야 깨닫는 것들이 있지요.”
“자네, 그놈에게 포섭된 것처럼 말하고 있어.”
“…….”
후위진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제안은 받았습니다만, 그대로 따를 마음은 없습니다. 이것조차 그가 예측했다 해도 말입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먼저 감사부터 드리겠습니다. 진옥룡이 제가 준 신물로 철혈장에서 신검을 얻었다는 사실을 감춰주셨지요.”
“말이 나온 김에 묻지. 그놈과 어떤 관계인가?”
“그것까지 말씀드릴 정도로 감사하지는 않습니다. 회주께서 변수를 쥐기 위해 그러신 것이니까요. 그 증거로 사부께 그의 무위를 감춰서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소운룡은 물론이요, 철혈무쌍용갑까지 숨겼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립니다만, 제 가문을 움직일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대부분 아버지의 명만 따르는데 그분은 남의 뜻대로 움직이실 분이 아닙니다.”
가균은 한 사내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도 모르게 얼굴이 일그러졌다.
“솔직히 생각해 보긴 했지만 기대는 안 하네.”
“그래서 혹시나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서론이 길군. 본론은 뭔가?”
후위진의 고요한 눈이 밝게 빛났다.
“회주께서 련주가 되셨으면 합니다. 겸사겸사 다음 대에는 소생을 밀어주시면 좋겠고요.”
“…….”
“제 나이가 너무 적다고 생각하시면 쌍도혈귀(雙刀血鬼)를 중간에 껴놓으셔도 됩니다.”
산서 지부장이었던 송훈을 말함이었다.
“송훈은 무림맹에 잡혀 있네만.”
“큰 싸움이라도 일어나 결판이 나면 풀려나겠지요. 인망이 있는 자이니 회주의 뒤를 잇기에 큰 부족함은 없을 것입니다.”
“생포된 치욕이 있으니까 자네가 련주 자리를 빨리 물려받기에도 좋고?”
“…….”
“내가 자네와 손을 잡을 이유가 뭐지? 그럴 만한 능력은 있나?”
“저를 따르는 이들이 제법 됩니다. 돈을 써서 옥에 가는 것도 막고, 쓸데없는 싸움 없이 귀환했기 때문이지요.”
“소문은 들었네. 고맙겠지. 허나 그 마음이 얼마나 갈까?”
“당분간은 갑니다.”
“그걸로 될 거라 보나?”
“회주께서 언제 마음을 굳히실지에 달렸지요.”
“…….”
가균은 후위진의 깊은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내가 숨기고 있는 게 있듯, 이놈도 더 숨기고 있는 게 있겠지.’
서로의 패를 꺼내 나눠보면 된다.
물론 진짜 패를 드러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예를 들면 밀약(密約).
‘그들은 왜 안 움직일까?’
정광에게 패하고 돌아오자마자 연락을 보냈다. 작아진 자신의 입지를 설명했건만 알겠다는 답신 뒤론 아무런 얘기가 없었다.
‘무엇을 꾸미고 있는 거지? 상소운을 죽인 마인은 황실의 인물이 아니라 그들과 연관된 자일 가능성이 커. 련주가 어떻게든 단서를 찾아 그들을 들쑤셔 틈을 벌려주길 바랐거늘. 헛된 기대였나.’
그들이 천마신교를 아직도 정리하지 못한 걸까?
또 다른 강한 세력, 예를 들어 황실 같은 곳에 동시에 손을 쓰느라?
‘련주의 터무니없는 야욕을 막기 위해 그들이 내민 손을 잡았건만…….’
자신은 그들에게 있어 이미 버린 패일지도 몰랐다.
‘이대로 당할 순 없지.’
힘을 키워야 했다.
마침 그걸 권하는 자가 앞에 있었다.
“내가 마음을 먹었다 치세. 어떡할 생각인가?”
가균이 물음에 후위진의 눈이 빛났다.
* * *
정광은 허청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깊은 얘기를 안 했다.
무혈단은 남궁화운이 알아서 챙길 테니 아무런 걱정도 없었다.
‘정사대전을 하든 말든. 발을 넓히려는 그가 명문과 명가의 자손들을 헛되이 죽게 할 리 없지.’
남궁세가를 훌쩍 떠난 정광은 고기와 술을 탐하며 말달렸다.
합비(合肥)에서 목적지까지는 대략 일천오백리(一千五百里).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으나 막상 달려보면 짧은 거리였다.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 정광은 그곳을 올려다보며 한숨 쉬었다.
‘그냥 다른 데 가서 수련할까?’
먹는 것도 자는 것도 불편한 곳이다.
그래도 어쩌랴. 수련하기엔 이만한 곳이 없는 것을.
‘최대한 빨리 끝내고 내려오자.’
정광은 말을 끌며 숭산(嵩山) 소실봉(少室峰)을 올랐다.
선종(禪宗)의 발생지이자 중원 무술의 본가, 소림사가 저 멀리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