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245화 (244/569)

245화

터무니없는 오해

남궁학은 정광 덕분에 새로운 경지에 접어들었다.

그 대가로 이미 무한의가(武漢醫家)의 속명단(續命丹) 세 알을 치렀으나, 그것이 아무리 귀한 것이라 해도 얻은 성취에 비하면 한참 모자랄 수밖에.

남궁학도 그 사실을 인정하고 정광이 원하는 것을 하나 들어주기로 했었다.

단, 협의에 어긋나지 않고 남궁세가에 해가 안 되는 것으로.

정광은 지금 그것을 지적하고 있었다.

“그랬었지.”

남궁학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다시 저었다.

“허나 원래는 세 번의 비무에 대한 대가였다. 마지막 세 번째 비무를 아직 안 했어.”

“하면 되죠. 시작할까요?”

“안 돼.”

“왜요?”

“시간이 필요하다. 내 검을 더 갈고 닦은 뒤에 해야 해.”

남궁화운과 남궁화인의 눈이 커졌다.

저 거만한 남궁학이 자신의 부족함을 스스로 인정할 줄이야.

정광도 놀랐다.

다른 이유로.

‘아니, 언제 폐관을 깨고 나올 줄 알고?’

그러시지요 하고 하염없이 기다릴 수야 있나.

그렇다고 삼분지 이만 먼저 받을 수도 없는 노릇.

바로 따졌다.

“큰일 날 말씀을 하시네요.”

“무슨 말이냐?”

“사마련과 곧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를 가릴 텐데 폐관수련이라니요.”

사마련은 막다른 골목에 몰린 상황이었다. 휴전까지 물 건너갔으니 더욱 그랬고.

이 소식이 전해지면 련 내의 분위기가 뒤숭숭해질 것은 물론이요, 련주의 입지도 좁아질 터.

무림맹에서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일거에 밀고 내려갈 게 뻔했다.

정광의 말을 이해한 남궁학이 눈살을 찌푸렸다.

“본가는 더 열심히 싸워야 한다, 이 말이렷다?”

“네.”

정광의 말대로 남궁세가는 이번 싸움에서 전력을 다해야 했다.

남궁화운이라는,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가주가 됐다.

그의 신상은 어떤 식으로든 강호에 퍼질 것이고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미 했던 얘기를 왜 또 하느냐? 가주인 이 녀석이 알아서 위엄을 보일 게다. 압도적인 전공(戰功)으로. 그 누구도 헛소리를 못 꺼내게.”

“제가 깜빡하고 말씀을 못 드렸는데, 그것으로는 부족해요.”

“부족하다?”

정광은 떠오르는 대로 대충 내뱉었다.

“전 가주님께서 헛짓거리…… 아니, 완화해서 실수를 저지르셨다고 정정할게요. 어쨌든 그러신 게 사실인지라 사마련에서 걸고넘어질걸요. 별의별 소문을 다 내겠죠.”

“…….”

벌게진 얼굴로 부들거리는 둘째 아들을 아비가 못마땅한 눈초리로 쏘아봤다.

“그건 놈들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해 본가와 네가 손잡고 끌어들여 일망타진한 것으로 입을 맞추지 않았더냐?”

“그거로 그치면 안 된다니까요. 사마련에서 있는 그대로 떠들겠어요? 악의적으로 퍼뜨린 소문은 터무니없이 살이 붙어 말도 안 되게 뒤틀리잖아요. 저에 대한 것들처럼.”

“……너에 대한 것은 오히려 너무 좋게 난 것 같다만.”

“무공뿐만 아니라 농도 느셨네요. 어쨌든 세간의 의혹을 씻기 위해서라도 잘못된 소문의 당사자이신 전임 가주께서 더더욱 열심히 싸우셔야 할 거예요. 음. 최선두에 서시면 그림이 좀 나오려나.”

붉었던 남궁화인의 얼굴이 검게 죽었다.

‘이 악귀가 나를 끝까지 잡아먹으려고!’

건곤일척의 정사대전(正邪大戰)에서 최선두에서 서라니.

그냥 죽으라는 말 아닌가!

허나 남궁학은 그럴듯한 얘기라는 듯 수염을 쓰다듬고 있었다.

“흐음.”

“아, 아버님! 흐음이라니요?”

남궁화인이 펄쩍 뛰자 남궁학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시끄럽다! 그렇게라도 죗값을 치르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간청하지는 못할망정 겁을 집어먹어?”

“…….”

“그러고도 네놈이 무인이냐! 정치질만 하다 보니 무(武)는 아예 잊어버리기라도 했어!”

“…….”

남궁화인은 아비의 시선을 피했다.

정광은 그의 참전을 아예 확정 지어버렸다.

“전 가주님과 현 가주님. 아드님 두 분이 나서시는데 태상가주님께서도 함께하시죠.”

“일없다. 내 일만 해도 바빠.”

“대규모 싸움에서 검을 휘두르시다 보면 뭔가 또 얻으시는 게 있을지도 모르는데…….”

“흐으음.”

말끝을 은근히 흐린 게 효과가 있었나 보다.

남궁학은 잠시 고민하다 정광을 노려봤다.

“그 싸움이 끝나면 너와 비무를 하고 대가를 지급하라는 말이구나.”

“뭐 겸사겸사요. 그 후에 폐관수련을 하시면 갈고닦을 게 더 많아지시겠죠.”

남궁학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광의 속셈이 빤히 보였으나 마음이 기울어서였다.

“넘어가 주지. 싸움이 있을 때까지 짧게 들어갔다가 나오마.”

“네. 전장에서 봬요. 어? 잠깐, 잠깐만요. 상거래는 어떡하죠?”

남궁화인을 끌고 떠나려던 남궁학이 얼굴을 찡그렸다.

“연이에게 일임했으니 알아서 해. 또 할 말이 있느냐?”

“조심히 가세요.”

“…….”

남궁학은 남궁화인과 사라졌다.

가만히 있던 남궁화운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소형제, 고마워.”

“뭐가요?”

“아우가 공을 세워 사람답게 살 길을 열어줬잖아. 물론 그럴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남궁화인이 죽지 않게 보호하며 싸울 거란 의미.

정광이 피식 웃었다.

“여전히 지키려고 하시지만 호칭은 바꾸셨네요. 아우라고 부르시고.”

“바꿀 때가 됐으니까.”

“저한텐 여전히 너무 가볍게 말씀하시는 거 아닌가요. 누가 들을까 봐 겁날 정도네요.”

남궁화운도 피식 웃었다.

“지금처럼 둘이 있을 때만 편하게 대할 건데 무슨 상관이야.”

“뭐 가주님 자유니까 그렇게 하시죠. 그럼 이만.”

정광이 떠나려 하자 남궁화운이 잡았다.

“잠깐. 할 말이 있어.”

“걱정하지 마세요. 모친 되시는 분의 장원은 제대로 고칠 테니까.”

“그것도 그것이지만…….”

남궁화운이 말을 잠시 끊었다가 이었다.

그의 눈은 원래의 삭막한 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아우와 달라. 태상가주님의 그늘에서 벗어날 거야.”

“그분 호칭은 그대로시네. 당연히 그러셔야죠. 식솔분들 관리부터 시작해서 하실 일이 천지네요.”

“관리가 아니라 장악이지.”

“으으. 역시 무서운 분이셨어.”

“엄살은. 그래서 말인데. 소형제의 사부와 자리를 좀 마련해 줬으면 좋겠어. 은밀하게.”

“어? 외부 정치도 하시게요?”

남궁화운이 어깨를 으쓱했다.

“최소한의 것은 해야지.”

“설마 전 가주님께 동조하던 세력을 버리고 본문과 함께하시려는 건 아니죠?”

“이런. 나를 그런 바보로 보면 섭섭한데.”

정광은 남궁화운의 뜻을 이해했다.

‘그들을 끌어안아 계속 지지를 받겠다는 말이네.’

그리고 남궁화인이 그랬듯 무림맹주인 팽수관과 맞설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하지만 중요한 일에는 어떻게든 구실을 붙여 협조하겠지.’

자신의 세력을 키우며 대의에 따른다.

권력을 갖는 대신, 어차피 나오기 마련인 반대 세력을 이끌며 도움을 주는 거다.

그 뜻을 전하기 위해 허청을 만나려는 것이고.

‘역시 사람을 잘 봤어.’

한번 마음을 먹으니 거침이 없다.

이런 인물이라면 믿고 맡길 만했다.

정광은 흡족한 미소를 짓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사부가 불편해하지 않을까?’

않을까가 아니라 확실했으나.

자신의 일은 아니지 않은가.

“맡겨주세요. 언제가 좋으시죠?”

“당장. 아. 소형제는 언제 떠날 생각이야?”

정광이 씩 웃었다.

“몇 가지 일만 처리하고요.”

* * *

남궁세가 무인으로부터 가주가 바뀌었다는 말을 전해 들은 허청은 끙끙 앓고 있었다.

‘정말 이렇게 됐구나. 그의 얼굴을 어떻게 본다?’

남궁세가의 엄청난 치부를 알고 있고,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안다.

잘못한 게 없는데도 마음이 영 불편했다.

‘껄끄럽구나. 껄끄러워.’

그때, 제자인 정광이 나타나 더 껄끄럽게 했다.

“새로 취임하신 가주께서 은밀히 뵙고 싶다고 하시네요.”

“……은밀히?”

“네.”

“……언제?”

“지금요.”

“후우우우.”

허청은 고개를 숙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얼굴을 든 그는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디로 가면 되느냐?”

“문밖에 계세요.”

허청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돌아왔다.

‘기척이 안 느껴지거늘. 대단한 강자구나.’

자신의 배분에 이런 고수가 있을 줄이야.

정광에게 이미 듣긴 했으나 놀라운 일 아닌가.

그래도 허청은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가주. 들어오시지요.”

“실례하겠습니다.”

남궁화운이 들어오고 정광이 나갔다.

정광은 무혈단의 숙소로 곧장 향해 백승무를 찾았다.

“사제. 바빠?”

정광이 이런저런 일을 벌이며 날뛰는 동안, 백승무도 남궁연과 치열한 격전을 치르고 있었다.

덕분에 푸석푸석한 피부와 퀭한 눈을 갖게 된 백승무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살려주십시오…….”

“잘 살아 있네.”

“곧 죽을 겁니다…….”

“사제가 잘 모르는구나. 사람, 그렇게 쉽게 안 죽어.”

정광은 자신이 말해놓고 고개를 갸웃했다.

‘잠깐. 상태가 영 아닌데. 진짜 죽는 거 아니야?’

이렇게 보낼 수야 있나.

할 일이 천지인데!

백승무의 명문혈(命門穴)에 손을 대고 내공을 불어넣었다.

“아…… 따뜻해…….”

정신을 차리라고 했건만.

백승무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눈 떠!”

“헉!”

“진기를 넣어주면 운기해야지. 뭐 하는 거야?”

“아, 알겠습니다.”

백승무는 바로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정광은 그를 도우며 다른 것도 도와줄까 고민했다.

‘뭐 그렇게 할 게 많다고 난리야.’

백승무의 어깨너머로 탁자에 쌓인 수많은 종이들이 보였다.

‘많긴 하네. 어디 보자. 장강을 타고 청해성에 진입한 후, 아합랍달합택산(雅合拉達合澤山) 인근에서 육로로 갈아타 성도(省都)인 서녕(西寧)에 도착할 때까지의 제반 비용과 이익 산출…….’

운기조식까지만 도와주기로 했다.

정광의 내공을 듬뿍 받은 백승무는 한결 나아진 얼굴로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당분간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정광은 말할 수 있는 것들만 얘기했다.

남궁세가의 가주가 바뀌었다는 말에 백승무의 눈이 빛났다.

“기회군요.”

“응? 설마 사업 대상을 태상가주에서 신임 가주로 바꾸자고? 그건 안 돼. 그 양반, 보통내기가 아니거든. 태상가주가 차라리 나아.”

“그게 아닙니다.”

“그럼?”

백승무의 눈에 맺혔던 빛이 아주 활활 타올랐다.

“정확한 연유는 모르겠습니다만, 가주가 갑자기 바뀌었으니 남궁 소저도 동요하고 있겠지요. 오늘, 그 빈틈을 찔러보겠습니다.”

“…….”

정광은 입을 살짝 벌린 채 자신의 사제를 바라봤다.

‘원래 이런 애가 아니었는데…….’

아주 마음에 들게 변했다.

무인이라면, 상인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그래, 뜻을 마음껏 펼쳐봐!”

“감사합니다, 사형!”

“아. 새로운 남궁세가주 있잖아.”

“네?”

“그분의 모친께서 아끼시던 장원이 있거든.”

“그런데요?”

“살짝 훼손됐다고 하더라고. 좀 고쳐줘. 최저 비용을 들여서 최고로.”

“……사형께서 박살 내셨습니까? 불은 안 지르셨고요?”

“어허. 나를 뭐로 보고. 그보다 붓이랑 종이 좀 줄래?”

“무엇에 쓰려고 그러시는지?”

“무림맹, 사천당가, 장강수로연맹에 서신을 보내야 하거든.”

“아. 여기 있습니다.”

정광은 백승무의 옆에 앉아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서신을 써 내려갔다.

그 모습이 어찌나 우아하고 멋진지, 백승무는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대체 뭐라고 쓰신 거지?’

분명 자세만 보면 용사비등(龍蛇飛騰)한 필체여야 하건만.

정광의 악필은 여전히 알아볼 수 없었다.

‘잠깐. 제갈 군사는 지금껏 사형의 글을 어떻게 알아봤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답이 나왔다.

처음엔 다른 사람이 몰라보게 쓴 암어(暗語)가 아닌가 의심했을 것이고.

갖은 고생을 다 한 뒤, 그냥 더럽게 못 쓴 글씨란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장강수로연맹과 당가에서도 고생깨나 하겠군.’

백승무는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울음이 치밀었다.

‘이걸 언제 다 해!’

그때, 정광이 옆에서 물었다.

“사제. 이 사업, 우리한테 유리하게 진행되는 거 맞지?”

“……아마 그럴 것입니다.”

“꼭 그래야 해. 그렇게 생각하고 수왕에게 서신을 쓰고 있거든.”

“사, 사형. 서신을 조금 늦게 보내시면…….”

“안 돼. 지금 보내야 시간에 맞단 말이야.”

벌써 혼자 답을 내놓고 어쩌라고!

백승무는 버럭 화내는 대신 서류에 얼굴을 파묻었다.

‘반드시 해내야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정광은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하는 백승무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성장했네. 그대로만 커라.’

사형된 입장에서 열정적으로 일하는 사제를 방해할 수는 없는 법.

서신들을 들고 조용히 나갔다.

후원에 가자 무혈단원들이 모여 남궁세가의 가주가 바뀐 사건에 대해 열심히 떠들고 있었다.

“아! 단주!”

“아우가 뭔가 했나?”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이오?”

정광은 일제히 달려드는 단원들에게 점잖게 말했다.

“무량수불. 터무니없는 오해를 하시네요.”

“…….”

“그보다 유 소협. 개방 분타에 청해 이것들 좀 전서구로 날려주세요. 혹시 몰라 여러 장 썼는데 반드시 도착해야 해요.”

“……무슨 내용이길래?”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훔쳐보시면 안 되는 거 아시죠?”

유정풍이 서신을 낚아챈 뒤 구시렁거리며 떠났다.

“아우가 쓴 거잖아. 봐도 못 알아볼 게 뻔한데 내가 미쳤냐?”

“철월도 동의한다! 철월이 발로 써도 단주 것보단 낫다!”

다른 단원들이 모두 고개를 주억거리는 가운데.

무당혈선(武當血仙)이라는 창피한 별호를 조금씩 퍼뜨리고 있는 대진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정광은 그의 얼굴을 보고 내심을 알아챘다.

‘장강에서 변형시켜 펼쳤던 태극(太極) 때문에 저러는구나.’

태극검존(太極劍尊)이 비슷한 것을 전수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표정으로 봐선 아니었다.

‘어찌 된 연유인지 들어보고. 한 수 가르쳐 주기로 했었으니 굴리기도 하고.’

무엇보다 무당의 무공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싶었다.

얼마 안 남은 정사대전.

그때까지 본신의 무공을 다듬고 발전시켜야 했기에.

“무당혈선님.”

“…….”

“잠깐 조용한 곳에 가서 얘기 좀 하죠.”

“……?”

“서로의 태극에 대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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