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244화 (243/569)

244화

강호의 도리

‘가주라…….’

세월이 많이 흐른 만큼 호칭도 변할 수밖에.

이름이 아니라 가주로 불린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부탁이 있다니.

남궁화인은 생소한 말에 당황했다.

‘나한테 부탁을?’

그건 자신이 하는 것이었지, 남궁화운이 하는 게 아니었는데.

아니, 자신이 요구하기도 전에 눈치채고 들어줬던 게 남궁화운 아닌가.

헌데 수십 년 만에 나타나 그걸 입에 올릴 줄이야.

‘흐음…….’

의심스러웠다.

오래전 철없던 소년이었을 때라면 기뻐하며 어서 말하라고 재촉했겠으나, 지금의 그는 노회한 중년이었다.

“난데없이 내 수하들을 제압하고 천장을 뚫고 들어와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

“그것도 아버님께서 진옥룡과 함께 위진홍을 구해온 이 시점에. 너무 공교롭지 않소이까?”

“…….”

남궁화운의 삭막한 눈이 잠시 천장을 향했다가 돌아왔다.

그 눈은 조금 전보다 더 쓸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쁜 의도는 없소. 가주를 위해 이러는 것이오.”

“나를 위해서라…… 하하.”

남궁화인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렇게 찾을 때는 피하더니 이제 와서 생각해 주는 척하기는.”

“그때 역시 가주를 위해 그랬던 것…….”

“그만.”

남궁화인도 알고 있었다.

남궁화운이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지 않기 위해 그랬다는 것을.

하지만 지금도 그럴까?

자신이 변했듯이 그도 변하지 않았을까?

“솔직히 말해보시오. 무엇을 꾸미고 있소?”

잠시 망설이던 남궁화운이 굳은 얼굴로 답했다.

“위진홍은 내가 납치했었소이다.”

“……!”

남궁화인의 눈이 커졌다.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한로가 아니라 형님이 납치했다고?’

‘그렇다면 아버님과 진옥룡은 누구와 싸우고 그놈을 데려온 거지?’

한로와 싸워서 구출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란 말 아닌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의 마음을 들여다본 듯 남궁화운이 답을 줬다.

“태상가주님과 진옥룡이 사마련과 싸운 건 맞소.”

“……!”

“위진홍을 그들로부터 구출한 것처럼 꾸민 건 진옥룡이 내 죄를 묻어버리기 위해 그런 것이고.”

“……!”

찢어질 것처럼 커졌던 남궁화인의 눈에 악독한 빛이 맺혔다.

“다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이오?”

“가주가 사마련과 손을 잡아 화친을 이끌려고 한 것과 진옥룡을 그들에게 넘긴 것까지 전부.”

“…….”

“태상가주님과 진옥룡에게 사과하고 가주 자리에서 내려와 조용히 지내시오. 이게 내 부탁이외다.”

“…….”

남궁화인의 안색이 몇 번이나 바뀌다가 붉게 자리 잡았다.

치솟는 분노를 참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왜 위진홍을 납치했소이까!”

“사마련과 휴전을 맺는 게 정도에서 많이 벗어난 것은 아니고, 가주 나름대로 가문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하는 일이었기에 도우려 그랬소. 하지만 진옥룡을 죽이려 한 건 선을 넘은 짓이지.”

“거짓말! 나를 곤란하게 하려고 그런 것 아니오!”

“아니. 가주가 한로를 만날 때도 진옥룡의 발을 묶었소. 가주를 위해서.”

“으하하하!”

남궁화인이 껄껄 웃다가 눈을 번뜩였다.

“계속 나를 피하는 줄 알았는데. 무엇을 하는지 전부 감시하고 있었군.”

“어려움은 없는지 살폈을 뿐이외다.”

“그걸 믿으란 말이오? 가주 자리가 탐나서 나를 밀어내려고 그런 건 아니고?”

남궁화인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아버님도 진옥룡 그놈도 형님의 죄는 묻어버리고 내 죄는 따진다 하지 않았소? 대체 무슨 수를 쓴 것이오? 숨겨왔던 야욕을 이제야 드러내다니. 그대를 믿은 게 후회스럽군.”

“나도 후회하고 있소.”

“너무 늦게 시작해서? 하하. 그렇겠지. 나라도 아까울 거야.”

남궁화운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그가 후회하는 건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완전한 정도를 걷게 도왔으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어버리진 않았을지도…….’

위진홍을 납치한 것은 후회할 거리도 못됐다.

그렇게 이목을 끌었는데도 정광은 모든 걸 알아냈으니까.

처음부터 남궁화인을 막지 않은 이상 어차피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 것이다.

‘내 책임도 커. 어떻게든 바로잡아야 해.’

남궁화인의 오해는 언젠가 풀릴 터.

아니, 풀리더라도 그는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나를 미워해라. 그걸 삶의 힘으로 삼아라.’

남궁화운은 마음을 완전히 굳혔다.

아우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그만 내려오시오.”

“싫다면?”

“힘으로 끌어내리고 올라야겠지.”

“하하하.”

비릿하게 웃던 남궁화인이 스산하게 말했다.

“나를 위해서, 가문을 위해서 애써왔소이다. 이대로 팽가에 밀릴 순 없어 수를 냈을 뿐이거늘!”

“알고 있소. 결과가 안 좋았을 뿐이지.”

“그대가 하면 뭐가 달라질 것 같소?”

남궁화운은 주먹을 들어 허공을 때리는 시늉을 했다.

“결국 무림은 힘이오. 힘이 있으면 정치가 크게 필요 없지. 무엇이 가로막든 부수며 똑바로 걸을 수 있소이다.”

“…….”

“마침 나는 힘이 있고, 진옥룡이 강호를 질타하며 수많은 사마련의 고수를 꺾어 지금의 위명을 얻었듯이, 본가의 이름을 높일 것이오.”

“…….”

남궁화운의 막대한 기세에 눌려 아무런 말도 못 하던 남궁화인이 이를 악물었다.

“한번 끌어내려 보시지.”

“언제가 좋겠소?”

“지금…… 후우우.”

남궁화인은 머리끝까지 치민 분노를 간신히 억눌렀다.

‘이래선 안 돼. 안 그래도 열세일 텐데 마음이 흔들린 지금 싸웠다간 필패다.’

머리가 차가워지자 여러 생각이 떠올랐다.

‘싸움을 미루고 그사이에…….’

그때, 뚫린 천장에서 무거운 음성이 들려왔다.

“사흘 뒤. 본가의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비무를 한다.”

“아, 아버님?”

“네놈이 이기면 죄를 탓하지 않으마. 허나 화운이가 이기면 자리에서 내려와야 해.”

남궁화인이 반발했다.

“비무 결과로 가주가 바뀌다니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명분은 만들기 나름이지. 네놈이 지면 스스로의 모자람을 알고 화운이에게 가주직을 넘기기 위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비무를 했다고 말해라.”

“그런 말도 안 되는…….”

남궁학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지금 당장 때려죽여 줄까? 간신히 참고 있는데?”

“…….”

“마지막 기회를 준 것이니 제대로 처신해. 좋은 모양새로 끝내란 말이다.”

남궁화인은 할 말이 무척 많았다.

나를 왜 이렇게 핍박하냐고.

내가 당신의 아들인 건 맞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틈이 없었다.

맑은 목소리가 남궁학을 재촉했다.

“태상가주님. 일 처리가 깔끔하시네요. 밤바람이 찬데 그만 가죠.”

남궁화인의 눈이 커지며 불길이 일었다.

알다 못해 치가 떨리는 목소리 아닌가!

‘진옥룡! 이 악귀보다 사악한 새끼! 네놈 때문에 내가!’

욕설을 내뱉고 싶었으나 어찌나 울화가 치밀어오르는지 머리가 핑 돌았다.

남궁화인은 비틀거리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의자가 삐걱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마치 그의 신세처럼.

* * *

남궁학은 그대로 거처에 틀어박혔다.

엄청난 분노가 가슴 속에서 들끓었다.

‘진실을 알려준다기에 대체 뭔가 했더니…….’

정광을 따라 지붕 위에서 들은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못난 놈이란 건 익히 알았다만 그따위 짓을 벌일 줄이야!

‘그 녀석도 문제야.’

남궁화운을 말함이었다.

제 아우의 나이가 몇인데 그렇게 지켜보며 챙겨주려 했단 말인가.

그나마 자신도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고 가문을 바꿔보겠다고 나섰으니 다행이었지만…….

‘망할 녀석 같으니. 차라리 진작에 그럴 것이지.’

남궁화인은 어려서부터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에 비해 남궁화운은 천재 중의 천재였고.

비록 출신은 천하나 그걸 상쇄하고도 남는 능력이 있는 아이였던 것이다.

‘내가 판단을 잘못했을지도. 억지로라도 소가주에 앉혔어야 했나.’

남궁학은 고개를 저었다.

이런 식으로 잘잘못을 따지면 끝이 없는 법.

지난 일을 후회해서 무엇하랴.

그래도 계속 생각이 났다.

‘내가 그놈을 너무 몰아붙였던 걸까.’

능력이 안 되는 남궁화인에게 과도한 걸 요구하긴 했다.

‘아니야. 그래서 그나마 저 정도라도 된 게야.’

문득 정광과 헤어지기 전에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멍청한 녀석. 형이면 아우를 똑바로 잡아줘야 하거늘, 어릴 때부터 저리도 감싸니 저 모양이 됐지.’

‘어? 그렇게 생각하세요?’

‘뭐가 잘못됐느냐?’

‘남궁화운 대협이 감싸줬으니까 그나마 저 정도 된 거 같아서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때는 부정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어미도 일찍 여의었는데 조금 더 부드럽게 대할걸 그랬나.’

‘아니야. 할 만큼 했어. 얼굴을 볼 때마다 울화통이 터졌지만 손찌검을 하진 않았잖아.’

‘하지만…….’

‘그래도…….’

머리가 복잡했다.

남궁학은 긴 한숨을 내쉬어 상념을 털어냈다.

‘뒤가 아니라 앞을 봐야 해.’

못난 둘째 놈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할지.

꽤 오랫동안 고민했으나 마음에 드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 * *

“정광아.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

허청의 방.

그가 굳은 얼굴로 묻자 정광이 편한 얼굴로 답했다.

“대충요.”

“……대충?”

입을 떡 벌리는 허청과 달리 정광은 담담했다.

“네. 어떻게든 되겠죠.”

“…….”

허청은 정광을 멍하니 바라봤다.

분명 자신의 제자이거늘.

볼 때마다 새롭지 않은가!

“어떻게든 되긴 뭐가 돼! 그렇게 큰 사달이 났는데!”

“사부님, 제 설명 제대로 들으신 거 맞아요?”

“당연하지!”

“그런데 왜 흥분하세요.”

“흥분? 사부에게 말도 안 하고 사마련과 싸운 건 그렇다 치자.”

“물론이죠. 어차피 이기니까.”

“……그렇긴 하지. 어쨌든! 네가 남궁세가의 치부를 알게 된 것 아니냐!”

“사부님, 목소리 좀 줄이세요. 다 듣겠어요.”

“네가 내공으로 막고 있잖아! 아차, 또 돛을 돌리는구나. 가만히 들어. 아니, 묻는 말에만 대답해라. 남궁화운이라는 자가 강하니 그가 가주가 될 거라 했지? 남궁세가의 가주와 태상가주가 너를 불편해할 게다.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

“제가 여쭙고 싶네요.”

“무어라?”

“이제 사부님도 비밀을 알게 되셨잖아요. 어떡하실 거죠?”

“……!”

허청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었다.

정광이 그런 그를 위로했다.

“비밀을 지키기로 한 약조를 어긴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사부님한테만큼은 반드시 말씀드려야 한다고 버텼거든요. 그분들도 정말 마지못해 승낙하셨고요.”

“…….”

전혀 위로가 안 됐다.

이렇게 껄끄러울 수가 있나.

앞으로 어떻게 얼굴을 대한단 말인가.

“……망할.”

“무량수불. 그런 속된 말씀을 하시다니.”

“……시끄럽다. 생각 좀 해야 하니 그만 가.”

“네. 안녕히 주무세요.”

허청은 밤을 지새웠고 정광은 푹 잤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 아침.

남궁세가의 모든 식솔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남궁화인과 남궁화운의 비무가 열렸다.

외인인 천룡단과 무혈단은 초대받지 못했으나 정광은 은신술을 펼쳐 몸을 숨긴 채 참석했다.

‘오랜 칩거를 깨고 나온 태상가주의 장자가 그간의 깨달음을 식솔들에게 나눠주길 원하자 가주가 나서서 직접 겨룬다. 명분은 괜찮네.’

정광은 높은 전각 위에서 육포와 술을 즐기며 구경했다.

사흘 동안 마음을 냉정히 가라앉혔는지 남궁화인의 표정은 담담했고 남궁화운 역시 그랬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예를 표한 뒤 비무를 시작했다.

‘상대가 될 리 있나.’

남궁화운의 검에서 남궁이되 남궁이 아닌 검식이 피어났다.

그가 창안한 독보검(獨步劍)이었다.

“오오! 이런 검이 있다니!”

“본가의 무리가 들어있는 것 같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검 아닌가?”

모든 식솔들이 경악했다.

아비인 남궁학도 마찬가지였다.

‘저 녀석이 만든 검이었던가!’

정광이 비무에서 선보였던 것으로 분명 독보검이라 했었다.

다른 이가 만든 걸 얻어 익혔다고 들었거늘, 그 주인이 남궁화운이었을 줄이야!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겠지만, 세는 넓힐 수 있을 거라더니…….’

과연 그럴만했다.

독보검을 통해 한 단계 나아간 남궁학은 품고 있던 자긍심에 상처를 받았다.

‘전보다 나아졌건만, 저 녀석보다 못하구나.’

뭔가 울컥하고 치밀어 올랐다.

정광에게도 느꼈던 호승심이었다.

‘아직 늦지 않았어.’

남궁학은 못난 둘째 놈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달았다.

‘그러려면…….’

생각을 정리한 그때.

쩌엉!

남궁화인이 쥐고 있던 검이 남궁화운의 검에 부딪혀 하늘로 솟았다.

남궁학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남궁화인에게 전음을 보냈다.

-약조한 대로 패배를 인정하고 네 형을 칭찬해라. 그리고 가주직을 양도해.

-…….

-제대로 하면 근맥을 자르지도, 단전을 폐하지도 않으마. 조용한 곳에서 수련을 시킬 게야. 어찌할 것이냐?

남궁화인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이 상황에 발악해 봐야 무너진 자존심이 아예 바스러질 뿐.

최대한 모양새 좋게 물러나는 게 최선이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날.

남궁화인이 물러나고 남궁화운이 가주 자리에 올랐다.

식솔들은 의아해하면서도 기뻐했다.

그만큼 남궁화인에게 불만이 많았고, 전설처럼 전해지는 남궁화운의 놀라운 자질과 직접 본 실력에 감탄했기 때문이다.

정광은 그들을 둘러보며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상했다.

‘그래도 이렇게 가주가 바뀌다니 뭔가 이상하다고 얘기가 나오겠지만, 남궁화운이 실력으로 증명하면 잦아들겠지.’

사람들이 삼삼오오 흩어졌다.

남궁학은 두 아들과 함께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

정광은 그 뒤를 따라가 남궁학에게 물었다.

“전 가주님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함께 폐관수련(閉關修鍊)을 시작하려 한다. 십 년이든 이십 년이든 지금 바로.”

“네?”

애써 분노를 억누르고 있던 남궁화인이 대경실색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조용한 곳에서 수련을 시킬 것이라 하지 않았더냐.”

“그래도 폐관수련이라니요! 게다가…….”

“게다가?”

남궁화인은 ‘아버님과 함께라니, 죽어도 싫습니다!’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차마 그러지 못했다.

남궁학의 기세가 너무 무서워서였다.

하지만 정광은 아니었다.

“태상가주님.”

“넌 또 무슨 일이냐?”

정광은 달아나려는 사기꾼을 잡는 듯한 눈으로 남궁학을 노려봤다.

“주기로 한 건 주고 가셔야죠. 그게 강호의 도리 아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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