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소년이 아니라 중년
세를 넓히는 대신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
치부를 숨길 순 있지만 오랫동안 웅크려야 한다.
남궁학은 일단 이 두 가지부터 생각해 봤다.
‘그나마 앞엣것이 낫지.’
뒤엣것은 성미에 안 맞았다.
당장은 좋을 수 있으나 길게 보면 손해 아닌가.
‘하지만 둘 다 마음에 안 들긴 마찬가지야.’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는 게 세상살이지만, 여타의 사람들이 그렇듯 남궁학도 얻고만 싶었다.
그게 안 되면 아무것도 잃지 않는 게 차선이었고.
하물며 가문의 명예가 걸린 일 아닌가.
정광이 마지막에 말한 방안이 그것을 지키는 길이었다.
‘살인멸구(殺人滅口)라…….’
남궁학은 그 대상인 정광을 가만히 뜯어봤다.
정광이 양팔을 긁으며 투덜댔다.
“여인이 그러는 건 익숙한데 사내가 그러는 건 영…….”
“시끄럽다. 조용히 있어.”
“말씀도 좀…….”
“생각 중이란 말이다.”
“아. 견적이 잘 안 나오세요?”
“…….”
정광의 말대로였다.
아무리 봐도 정광의 경지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마지막 세 번째 비무에서 확인해 주마.’
남궁학의 눈이 빛났다.
정광을 죽이려는 게 아닌, 이기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발현이었다.
호승심 때문에 생각해 봤을 뿐, 정말 살인멸구를 할 수야 있나.
창궁무애(蒼穹無涯), 의기천추(義氣千秋).
남궁학은 대남궁세가의 일원이요, 가주였던 자.
그따위 더러운 짓은 그의 거만함이 용납하지 않았다.
“무엇인진 모르나 네가 본가의 치부를 알고 있다는 말인데. 무혈단 아이들도 그렇느냐?”
“아뇨. 아, 자오는 조금 아네.”
“네 사부 허청은?”
“의심스러워 하시기는 하나, 제대로는 모르시죠.”
“흐음. 골치 아프군.”
“생각하시는 것보다 더 그럴걸요.”
“무엇이길래?”
“선택부터 하시면 말씀드리죠.”
남궁학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대답했다.
“꼭 골라야 한다면 앞엣것이다.”
“세를 넓히는 대신 구설수에 오르게 되는 거요? 역시. 훌륭한 선택이세요.”
“어서 말하기나 해.”
“네.”
정광은 있는 그대로 얘기했다.
남궁학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지금 그걸 믿으란 말이냐?”
“네. 확인시켜 드릴까요?”
“…….”
남궁학의 눈이 흔들렸다.
이렇게까지 자신 있게 말하다니.
확실하다는 의미인데…….
‘화인이 그놈이 못난 거야 알았다만 그런 일을 저지를 줄이야.’
남궁학의 기준에서 봤을 때, 사마련과 손을 잡는 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 이놈을 당장!’
마음 같아서는 당장 쳐 죽이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자신의 아들이고 가문의 가주 아닌가.
남궁학은 살의를 억지로 억누르며 냉정하게 생각했다.
‘이런 무거운 일을 거짓으로 속일 리는 없지만 직접 확인을 해봐야 해.’
‘정말 사실이라면 그놈을 끌어내려야 하고.’
‘그 자리엔 누구를 올려야 하지?’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는 거야 알겠다만, 세는 어떻게 넓힌다는 걸까?’
먼저 사실 여부부터 알아봐야 할 터.
남궁학은 차가운 눈으로 정광을 쏘아봤다.
“내게 확신을 줄 수 있으니까 이러는 것이렷다.”
“물론이죠.”
“말해보거라.”
정광이 그 방법을 설명하자 전부 들은 남궁학이 딱딱한 얼굴로 경고했다.
“다른 마음을 품고 허튼짓을 벌이는 건 아닐 거라 믿으마.”
정광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이거 왜 이러세요. 마주 보고 운기조식하는 사이에.”
“…….”
남궁학은 얼굴을 찌푸리며 떠났다.
거만하기 그지없는 그답지 않게 힘없는 발걸음으로.
‘그럭저럭 잘됐네.’
정광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학의 성품을 생각하면 당연히 첫 번째 것을 택할 거라 예상했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건 모르는 일 아닌가.
‘이제 다음 차례인데. 이게 문제란 말이야.’
아직 시간도 있겠다, 좀 더 기다려도 상관은 없었으나.
정광은 확실하게 가기로 했다.
“여기요.”
손을 들자 점소이가 나는 듯 달려왔다.
반점 전체를 빌린 재신(財神)께서 찾으시는데 누가 감히 미적거리랴.
싸움박질을 한 행색에 고기와 술을 탐하는 도사였으나 신선으로 대접해야 했다.
“소신선님, 부르셨습니까? 무엇이 필요하신지요?”
정광은 그의 손에 소액전표를 한 장 쥐여 줬다.
정광에겐 소액이나 점소이에겐 엄청난 돈이었다.
“감사합…… 억!”
“부탁드릴 게 좀 있는데요.”
“부, 부탁이라니요? 뭐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그럼…….”
정광의 설명을 들은 점소이는 마치 도산검림(刀山劍林)에 뛰어드는 협객처럼 비장하게 떠났다.
정광은 술잔을 기울이며 기다렸다.
‘얼마나 걸리려나.’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반점 안으로 한 사내가 들어왔다.
정광은 그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여기예요.”
“혼자 있으면서 무슨.”
사내는 정광의 맞은편에 앉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조금 전 반점 지붕에 꽂은 깃발은 뭐야?”
“근처에서 지켜보고 계실 게 분명한데, 망설이시는 것 같아 빨리 오시라고 그랬죠.”
“그래도 그렇지. ‘독보검(獨步劍)을 위한 연회. 안 오시면 평생 후회’라니…….”
정광이 남궁화운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중원을 주유하면서 배운 거예요. 짧고 자극적이어야 마음이 동하더라고요.”
“확실히 그렇긴 하네. 왜 불렀지?”
“용화산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보셨죠?”
“대충.”
“여기에서 태상가주님과 얘기하는 건 제대로 못 들으셨고요.”
“하루 만에 벽을 깨셨더군. 혹시나 들킬까 걱정돼서 멀리 있을 수밖에 없었어.”
“역시. 기감에 안 잡히시더라.”
남궁화운이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소형제, 뭘 꾸미고 있지?”
“아직 안 정해졌어요. 대협의 뜻이 중요하거든요.”
“나? 왜?”
“좀 드세요. 먹으면서 얘기하죠.”
“…….”
남궁화운은 정광을 노려보며 고기를 뜯고 술을 마셨다.
“맛없군.”
“부친을 닮으셔서 입맛이 까다로우시네요. 아니지. 군사한테 들었는데 미각이 좀 이상하시다면서요?”
“다 먹었으니 어서 말해봐. 점점 궁금해지잖아.”
정광이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궁금한 건 저죠.”
“뭐가?”
“가주님이 사마련과 내통하는 걸 아시면서 왜 말리지 않으셨어요?”
남궁화운의 눈이 묘하게 빛났다.
“소형제, 말은 바로 해야지. 내통은 아니야, 서신만 받았을 뿐이라고.”
“사마련과 손을 잡고 저를 죽이려고 하셨는데요?”
“잘 살아 있잖아.”
“저니까 그렇죠.”
“암. 그걸 아니까 안심하고 있었지. 그래도 혹시 몰라 따라가긴 했지만.”
“가주가 되고 싶으세요?”
“……!”
정광의 난데없는 말에 남궁화운의 눈이 흔들렸다.
“아니면 가주님을 지켜주려고 하시는 거예요?”
“…….”
남궁화운이 눈살을 찌푸렸다.
“가주에게 악의를 가지고 있는지, 선의를 품고 있는지 물었던 그것이군.”
“네.”
“내가 악의로 이런저런 일을 꾸몄으면 좋겠다고 말했었지. 가주를 끌어내리고 내가 올라섰으면 좋겠다, 이건가?”
“그게 제일 낫죠.”
“치부를 빌미로 본가를 소형제 입맛대로 다루려고?”
“그런 것까진 아니고. 제 일에 훼방만 안 놓아도 만족해요.”
남궁화운의 눈에서 열기가 일렁였다.
“내가 가주에게 선의를 품고 있어서 가주직엔 욕심이 없다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지는군.”
정광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쪽이신 것 같더라니. 진작 말씀하시지, 왜 이제야 이러실까.”
“소형제가 태상가주님과 무얼 하려고 하는지는 모르나 그리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아서지. 걸음걸이가 영 이상하셨거든.”
“정리부터 하죠. 가주께서 사마련과의 화친을 고려하시는데 제 군사가 나타나 식솔분들을 도발하니까 납치하신 거네요.”
“사마련에 대해 안 좋은 인상만 주더군.”
“군사가 실종되면 제가 가주님께 집중 못 하고 군사를 찾느라 시간을 보낼 것 같았고요?”
“소형제가 좋은 의도로 올 리는 없으니까. 그사이에 일이 끝날 거라 예상했는데 제대로 안 됐어. 사마련이 소형제를 노릴지도 몰랐고.”
“남궁세가가 사마련과 손을 잡아도 상관없으신가 보네요.”
남궁화운이 피식 웃었다.
“정(正)이나 사(邪)나 뿌리 뽑을 수는 없는 법. 피를 줄이는 것도 나쁘진 않아.”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닌데 대남궁세가가 사마련과 손을 잡는 명분으로는 부족하죠. 아우분을 끔찍이 아끼시네요.”
“…….”
“아우분은 형이 이러시는 걸 알려나.”
“…….”
정광을 노려보던 남궁화운이 고개를 저었다.
“생각하는 건 자유지. 어쨌든 나는 가주 따위는 되고 싶지 않아. 명분도 없고.”
“그래야 아우분이 사실 수 있는데.”
남궁화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소형제, 말을 좀 가려서 하는 게 좋겠어.”
“제가 아니라 태상가주님께서 손을 쓰실 것 같다는 얘기인데요.”
“……그분께 어디까지 고했지?”
정광은 사실대로 말했다.
남궁화운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직접 손을 쓰시진 않을 거야.’
물론 그냥 넘어갈 리는 없었다.
가문에서 축출하든, 형벌을 내리든 죄를 물을 게 분명했다.
‘어쩐다…….’
마치 그의 마음을 짐작한 듯 정광이 덧붙였다.
“이대로 가면 아우분은 좋은 꼴 못 보실 거예요.”
“…….”
“제 말이 의심스러우시면 태상가주님께 여쭤보시든가요.”
“…….”
고민하던 남궁화운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정광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나직이 속삭였다.
“아우분이 최소한의 손해만 보시고 끝날 방법이 있어요.”
“…….”
“성사는 대협께서 하시기 나름이고요.”
“…….”
남궁화운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일단 들어보지. 말해봐라.”
정광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남궁화운에겐 뱀보다 음험해 보이는 미소였다.
* * *
정광은 밤이 되고 나서야 반점에서 나왔다.
잠행술로 남궁세가에 스며든 그는 숙소로 곧장 향해 위진홍의 방에 들어갔다.
“군사, 저 왔어요.”
무언가 깊은 고민에 빠져 있던 위진홍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이오?”
“같이 가죠.”
“대체 어디를…… 헉.”
정광은 위진홍을 들쳐메고 다시 잠행술을 펼쳤다.
그렇게 남궁세가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까지 온 그는 위진홍을 내려놓고 등을 두드렸다.
“괜찮죠?”
“우욱. 우웩.”
“토하실 힘도 있으시고. 괜찮으시네요.”
“으윽…….”
위진홍은 속에 있던 것을 전부 게워낸 뒤 정광에게 따졌다.
“미리 얘기해 줬으면 이렇게 많이 힘들진 않았을 것이오!”
“아. 그럼 이건 미리 말씀드릴게요.”
“……?”
“오늘은 좀 예의를 갖추세요.”
“……대체 무슨?”
정광은 대답하지 않고 남궁세가를 바라봤다.
‘시간이 됐는데.’
아니나 다를까.
희미한 기가 남궁세가의 담장을 넘더니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남궁학이었다.
“태상가주님, 몰래 돌아오셨다가 나오신 거죠?”
“네가 그러라 하지 않았더냐.”
“혹시나 해서요.”
“그보다…….”
남궁학이 위진홍을 노려봤다.
위진홍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외견이 그 버르장머리 없다는 놈을 닮았는데. 네 군사 놈 말이다.”
“네. 맞아요.”
“왜 여기에 있지? 네가 숨기고 있던 것이냐?”
“납치된 곳에서 구했죠. 오늘을 위해 잠시 숙소에서 조용히 있게 했고요.”
“누가 납치한 것이냐? 설마…….”
“가주님은 아니에요. 나중에 말씀드리죠.”
“…….”
“무섭게 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 어서 가죠.”
“…….”
몸을 홱 돌린 남궁학이 남궁세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정광은 위진홍을 부축하며 그 뒤를 따랐고.
위진홍은 어이가 없었다.
“단주. 대체 뭘 하는 것이오?”
“나중에 알려 드릴게요. 최대한 힘든 표정으로 걸으세요.”
그럴 필요도 없었다.
안 그래도 식음을 전폐하며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궁리하던 위진홍 아닌가.
더구나 한바탕 토하기까지 했기에 그의 피부는 소년이 아니라 중년처럼 푸석푸석해 보일 지경이었다.
얼마 안 가 그들은 남궁세가의 정문에 이르렀다.
그곳을 지키던 무인들이 깜짝 놀라 외쳤다.
“태, 태상가주님!”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길래…….”
남궁학은 사마련 무인들과 싸울 때 입었던 다 찢어진 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그 정도까진 아니었으나 정광과 위진홍의 행색과 안색도 엉망이었고.
누가 봐도 온종일 격전을 치르다가 지금 막 돌아온 모습이었다.
“음?”
시선이 모이자 남궁학이 인상을 썼다.
“웬 소란이냐. 문이나 열어라.”
“네, 네!”
끼이이익-
문이 열리자 세가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고.
그들 역시 경악했다.
‘헉! 태상가주님께서 저렇게 되시다니!’
‘대체 누구와 싸우신 거지?’
‘저, 저건 실종됐던 사뇌(邪腦) 위진홍이잖아! 어떤 고초를 겪었길래 저런 꼴이!’
‘설마 태상가주님께서 진옥룡과 함께 저 녀석을 구해오신 건가?’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미칠 만큼 궁금했으나 남궁학이 두려워 물어볼 수 없었다.
정광은 그들의 반응에 만족하며 남궁학에게 전음을 보냈다.
-이쯤이면 됐어요. 저희 숙소로 곧장 가죠.
-……아직도 더 할 게 있느냐?
-거의 끝나가요.
-……꼭 그래야 할 게다.
그들은 무혈단이 묵는 숙소에 들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잠시 뒤.
남궁세가에선 난리가 났다.
수없이 많은 추측들이 수많은 식솔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것들은 집무실에 있던 남궁화인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가주님! 태상가주님께서 진옥룡과 함께 위진홍을 구해오셨습니다! 격전을 치르신 듯 의복이 모두 찢어진 상태로 말입니다!”
“……!”
콰직!
남궁화인의 손에 의해 의자 팔걸이가 부스러졌다.
‘위진홍을 정말 한로가 납치했었구나!’
‘아버님께선 왜 진옥룡과 함께 그곳에 갔다 오신 거지?’
‘한로 이 멍청한 새끼! 그렇게 장담하더니 일을 이따위로 처리해?’
‘진옥룡은…… 아니, 아버님은 어디까지 알고 계신 거야!’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패했을 게 뻔한 한로가 어디까지 불었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이럴 때가 아니야. 곧 이곳으로 와서 캐물을…… 음?’
그때, 지붕 위에서 아주 작은 소음이 들렸다.
지키고 있던 이들이 제압당하는 소리였다.
‘진옥룡인가!’
탁자 위에 있던 애검을 뽑아 들고 천장을 노려봤다.
사람 하나가 드나들 정도의 구멍이 뚫리고 한 사람이 떨어져 내렸다.
그자의 얼굴을 확인한 남궁화인이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형님.”
그의 앞에 남궁화운이 서 있었다.
소년이 아니라 중년의 모습으로.
“……오랜만이오, 가주.”
씁쓸한 얼굴로 인사를 한 남궁화운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오랜만이라는 말조차 할 일 없이 평생 피하려 했건만…….’
이왕 온 것. 목적을 이뤄야 했다.
“가주. 부탁이 있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