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선택과 대가
주즉시공(酒卽是空)으로 환몽혈(幻夢血)을 밀어내어 입에 머금는다.
한로를 끌어들여 한 대 맞아준 뒤 그것을 토해낸다.
환몽혈 때문에 순간적으로 틈을 보이는 한로를 사각에서 친다.
여기까진 제대로 됐건만.
서걱.
“큭.”
한로는 정수리가 아니라 어깨에서 피를 흘리며 물러나고 있었다.
정광은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며 혀를 찼다.
‘얕아. 반응이 빠르네.’
마지막이 시원찮았으나 실망하지는 않았다.
다시 깨끗하게 마무리 지으면 되는 일 아닌가.
‘또 수작을 부릴지 모르니 호흡은 멈추고.’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한로에게 쇄도했다.
운룡이 금빛 광채를 뻗어내며 쏘아졌다.
반드시 끝을 보겠다는 의지가 실린 매서운 일격!
한편, 한로는 들이마신 환몽혈을 내공으로 억누르고 있었다.
‘해약을 마실 시간도 없다니.’
소량이라 큰 문제는 없었으나 더 마시면 위험했기에 호흡을 멈춘 상태.
‘놈. 빨리 끝내고 싶어 하는 게 빤히 보이는구나.’
재빨리 보법을 밟아 옆으로 돌아갔다.
그가 아까 장(掌)으로 때렸던 정광의 왼팔 쪽이었다.
한로의 눈이 빛났다.
‘부러지진 않았더라도 최소한 금은 갔겠지.’
이쪽 방향을 노린다.
통하면 좋고, 안 통하면 다른 곳을 기습한다.
그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훌륭한 판단이었으나…….
상대는 정광이었다.
빳빳하게 펴진 정광의 왼손이 우아한 호선을 그리며 한로의 가슴을 찍어왔다.
한로는 헛바람을 흘리며 곤륜비전 상청인(上淸印)을 간신히 피해냈다.
안도감과 함께 의혹이 솟았다.
‘왼팔을 어떻게 움직이는 걸까? 보의(保衣)라도 입고 있나?’
그냥 보의가 아니었다.
철혈장의 장주와 소장주가 무각사룡의 비늘을 제련해 만든 철혈무쌍용갑(鐵血無雙龍甲)이었다.
한로가 그것까진 알 수 없는 노릇.
그래도 보통 보의가 아니라는 확신은 있었다.
‘간악한 놈 같으니. 내상은 무슨. 함정이었어.’
무공은 물론이요, 심계도 대단했다.
가균에 이어 창사와 부사가 당한 게 납득될 정도였다.
물론 각개 격파로 당했겠지만, 그것만 해도 엄청난 일 아닌가!
‘더 크기 전에 꼭 죽여야 해.’
기이한 보법을 펼쳐 운룡을 피하며 정광의 왼쪽을 노렸다.
‘그래도 여기가 낫지.’
그 어떤 보의라 해도 음사장(陰司掌)을 완전히 막아낼 순 없다.
타격을 받았으나 억지로 태연한 척하는 게 분명했다.
‘낙숫물은 바위도 뚫는 법.’
계속 왼쪽을 공격했다.
정광은 운룡으로 상대하다가 거리가 가까워지면 왼팔을 휘둘렀으나, 시간이 갈수록 그 빈도가 낮아졌다.
한로는 찌푸려진 정광의 얼굴을 보며 쾌재를 불렀다.
‘통증이 심해지니까 거리를 벌려서 검만 쓰려고 하는군. 조금만 더 하면 되겠어.’
바짝 달라붙으며 양손으로 장력을 쏟아냈다.
음유(陰幽)한 수십 줄기의 음사장이 정광을 괴롭혔다.
참다못해 화가 난 걸까?
정광의 검에 어린 금빛 광채가 쭉 늘어났다.
한로의 눈에 득의만만한 빛이 떠올랐다.
‘거리를 더 벌리려고 하는구나. 그렇게 놔둘 것 같으냐?’
정광이 환몽혈을 뱉어냈던 곳에서 멀어진 지 오래였다.
호흡을 다시 하자 진기가 한결 편하게 흘렀다.
‘좋아. 이대로 끝낸다.’
지금까지보다 더 바짝 다가가 박투술(搏鬪術)을 펼치려는 순간!
종(縱)으로 늘어났던 금빛 광채가 횡(橫)으로도 늘어나며 두터운 방벽을 만들었다.
‘또 이것을!’
한로는 이를 갈았다.
자오를 잡으려 했을 때 견식했던 남궁세가의 제왕검형과 비슷한 수법 아닌가.
‘저기에 갇히면 위험해. 일단 물러난다.’
장력을 계속 쏟아내며 거리를 벌렸다.
정광의 뜻대로 따라주는 게 마음에 안 들었으나 이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다시 기회를 봐서 파고들면, 흡!’
정광이 갑자기 눈부신 속도로 쇄도했다.
검기의 방벽으로 장력들을 막아내며!
‘망할!’
한로는 방벽 뒤에 있는 정광의 머리를 향해 장력을 연달아 내질렀다.
점으로 면을 뚫으려는 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히…… 미친!’
방벽이 그대로 밀려왔다.
장력에 맞은 부분은 뻥 뚫렸으나 나머지는 여전히 한로를 덮치고 있었다.
‘이런 무모한 짓을! 헉!’
방벽을 뚫고 들어간 장력은 애꿎은 허공을 때렸다.
정광은 어느새 뇌전보(雷電步)를 펼쳐 한로의 측면으로 짓쳐 들고 있었다.
‘검기의 벽은 미끼였나!’
운룡이 한로의 목을 노리고 쏘아졌다.
앞에서는 검기의 방벽이 밀려오고 오른쪽에서는 검이 날아오는 상황.
한로는 왼쪽으로 피했다.
두 방향의 공격을 모두 피해내는 최고의 수였다.
‘시도는 좋았다만 내공을 너무 많이 쓰는구나. 이왕 이렇게 된 거, 조금만 더 시간을 끌면…….’
냉철하게 머리를 굴리던 한로가 눈을 크게 떴다.
‘나나 저놈이나 피를 흘리지 않았는데 어디서 또 혈향이 나는 거지?’
정광이 뒤에서 말했다.
“아까 다 뱉어낸 건 아니었거든요.”
“헉!”
한로가 재빨리 신형을 돌렸으나 정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 있는 것이냐!”
“뒤요.”
“……!”
한로가 묘한 눈빛을 흘리며 다시 돌아서는 순간.
그의 목을 운룡이 갈랐다.
서걱-
“크륵.”
한로의 머리가 허공으로 솟았다가 떨어졌다.
정광은 그것을 걷어찬 뒤 사방을 향해 장력을 내질렀다.
아까 주즉시공으로 뿜어냈던 환몽혈이 장력에 맞아 멀리 밀려났다.
“후아아. 숨차 죽는 줄 알았네.”
정광은 그제야 크게 심호흡했다.
호흡하면 할수록 활력이 돌아왔다.
‘역시 없어봐야 그 소중함을 안다니까.’
물론 한로처럼 없어져도 하등 상관없는 존재도 있고.
‘그런데 손맛이 영…….’
정광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조금 전 걷어찬 한로의 머리통을 확인했다.
‘뭐야. 다른 놈이잖아.’
한로와 싸우기 전에 몰살시켰던 놈들 중 하나였다.
‘마지막에 환술로 바꿨나 보네.’
정광이 환몽혈을 이용해 순간적으로 펼친 환술처럼 간단한 게 아니었다.
상당히 높은 경지의 것.
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꽤 재밌는 녀석 아닌가.
‘얼마나 멀리 갔으려나.’
기감을 확장 시켜 주변을 관조했으나 걸리는 기운이 없었다.
별의별 수법을 다 써서 멀어지고 있으리라.
‘역시 사마련 녀석답구나. 다시 만나면 수작 부릴 시간을 주지 말고 없애야지.’
이런 수준의 환술을 펼쳤으면 그만한 대가를 치렀을 터.
오늘보다 더 쉽게 해치울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즐거운 기분으로.
‘그건 그거고.’
정광은 시선을 돌려 남궁학을 바라봤다.
그의 값비싼 푸른 장포는 넝마처럼 변했고 단정했던 머리는 산발이 되어있었으나 눈빛만큼은 살아 있었다.
‘의지는 충분한데.’
나머지는 어떨까?
사마련 무인들이 쏟아내는 사이한 사술이 기묘하게 뒤틀리며 남궁학을 공격했다.
남궁학의 검은 그때마다 그에 맞는 것으로 변모했다.
중(重)의 무리를 품은 채 강(强)에서 쾌(快)로, 쾌에서 유(柔)로 흘러가며 사술을 분쇄하는 모습이 아주 그럴듯했다.
‘검날도 제대로 세우고 있네.’
사이한 사술로 이루어진 숫돌은 오래지 않아 전부 갈려 나갈 것이다.
‘시간이 더 흐르면…….’
새로운 검존(劍尊)을 받아들이게 될 강호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정광은 상념을 접고 기지개를 켰다.
‘으으으. 운기조식이나 할까.’
가부좌를 틀고 앉아 삼청합일신공(三淸合一神功)을 운기 했다.
메말라가던 단전에 내공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아프네.’
한로에게 맞은 왼팔에서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부러지거나 금이 간 건 아니었으나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다친 상태.
그쪽으로 기를 인도하여 막힌 기혈과 응혈을 풀었다.
공을 들이자 뜻대로 되었다.
정광은 운기조식을 마친 뒤 도복 상의를 벗었다.
철혈무쌍용갑을 덮고 있는 누런 비늘이 햇살을 받아 다양한 빛깔로 반짝였다.
‘하아. 내 이럴 줄 알았지.’
정광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왼팔 부분의 비늘들이 우그러져 있는 것 아닌가.
‘그냥 싸게 먹혔다고 생각하자.’
생각은 그랬으나 표정은 달랐다.
정광은 얼굴을 찡그리며 우그러진 비늘들을 일일이 잡아 폈다.
‘익. 익. 손가락 힘을 단련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무슨 짓이람.’
남궁학도 그렇게 생각한 걸까.
어느새 적들을 몰살시킨 뒤 정광 앞에 서 있던 그는 검이 머금은 핏물을 털어내며 중얼거렸다.
“어이가 없군.”
“그러게요.”
“신검만 해도 놀랍거늘, 그 보의는 또 무엇이냐?”
“아. 그 말씀이셨어요? 도마뱀 내의요.”
“…….”
“비밀로 해주세요. 모양도 색도 영 부끄럽거든요.”
“…….”
남궁학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숨겨둔 한 수로 삼기 위해서 함구해 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창피해서 그러는 것이란 걸 느껴서였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 그렇게 하마.”
“역시 태상가주님이시라니까.”
“그보다 내게 할 말이 있을 것 같은데.”
남궁학이 강한 눈빛으로 노려보자 정광이 손을 저었다.
“잠시만요. 마저 하고요.”
“…….”
정광은 비늘들을 다 펴고 도복을 다시 입었다.
“끝났느냐?”
“네. 이제 태상가주님 차례예요.”
“그게 무슨 말이지?”
“운기조식하셔야죠. 그냥 서 계시기도 힘들잖아요.”
“…….”
“제 얘기를 듣고 화나시면 싸워야 할 텐데 그 상태로 괜찮으시겠어요?”
“후우우우.”
남궁학은 깊은 한숨을 내쉰 뒤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암습을 걱정하는 기색 따위는 전혀 없는 얼굴로.
그사이 정광은 주변을 돌며 시신들을 정리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안색이 어두워졌다.
‘뭐 이렇게 가난해? 사마련이 아니라 개방 애들 같네.’
탈탈 털어도 나오는 게 없었다.
필사의 각오로 싸우기 위한 물품들 외에는 전부 놓고 나왔나 본데 이래서야 쓰나.
‘살다 보면 언제 급전이 필요할지 모르는데 참 마음 편히 살다가 갔구나.’
정광은 두 손을 모아 원시천존에게 빌었다.
‘그곳에도 무일푼으로 가는 거니까 무임금으로 아주 오랫동안 부려먹기를…….’
운기조식을 마치고 눈을 뜬 남궁학이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이 어둡군. 의외로 자비심이 있어. 도사는 도사인 건가.’
소문과 비슷한 점도 있었으나 다른 점이 더 많았다.
진옥룡이라는 별호가 천하를 울린 지 꽤 됐지만, 누가 그의 진면목을 알아볼까.
남궁학 자신밖에 없으리라 생각했다.
‘조금 더 알아봐야겠어.’
이런 그의 마음과 통했는지, 정광이 그를 바라보며 제안했다.
“태상가주님. 자리를 옮겨서 얘기하죠.”
남궁학도 찬성했다.
더러운 피가 가득한 곳에서 무슨 대화를 하겠는가.
“알겠다.”
정광이 신형을 날리고 남궁학이 그 뒤를 따랐다.
남궁학은 정광의 등을 노려보며 지금까지의 상황을 정리했다.
‘납치당했다는 그 버릇없는 꼬마는 없었어.’
정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의구심도 품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사마련은 있었지.’
용화산 정상에 있던 이들은 누가 봐도 사마련의 종자들이었다.
중원 천지에 그런 사술을 쓰는 이들이 또 어디 있겠는가.
‘놈들을 죽이며 검을 바로 세운 건 괜찮으나…….’
정광이 왜 자신을 속였는지.
무엇을 얘기할지 궁금했다.
‘……어떤 내용인지에 따라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겠군.’
정광과 싸우다가 도주한 놈은 대단한 고수였다.
남궁학도 반드시 이길 거라 자신하지는 못할 만큼.
그렇다고 두려움 따윈 들지 않았다.
오직 투지만 치솟았다.
‘내가 이긴다!’
남궁학의 눈이 굳은 의지를 품고 빛났다.
* * *
탕!
정광이 호기롭게 술잔을 내려놓으며 권했다.
“자. 자. 태상가주님. 쭉 드세요, 쭉.”
“…….”
“요리와 술이 입에 맞지 않으세요? 많이 나쁘진 않은데. 역시 자오를 데려올걸 그랬나.”
“…….”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길에서 물은 사람들 중 세 명이나 이 반점을 추천했잖아요.”
남궁학은 화를 억누르며 간신히 물었다.
“먹고 마시려고 여기까지 온 것이냐?”
“설마요.”
정광이 고기 한 점을 꿀꺽 삼킨 뒤 설명했다.
“분위기를 좀 부드럽게 풀고 얘기를 시작하고 싶어서요.”
“켕기는 게 많은가 보구나.”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은 없죠.”
“너는 먼지가 쌓여 태산이 될 것 같다만.”
“하하. 농도 하실 줄 아시네요.”
“농으로 들렸더냐?”
남궁학이 내공을 끌어올리자 정광이 만류했다.
“잠시만요. 분위기가 정리됐으니 말씀드릴게요.”
“있는 그대로 말해야 할 것이야.”
정광은 대답하지 않고 다른 얘기를 꺼냈다.
“일단 몇 가지만 여쭙고 시작하죠.”
“…….”
“자꾸 노려보시면 그냥 도망갈 건데. 아예 안휘성 밖으로.”
“……말해보거라.”
정광이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태상가주님께서는 남궁세가가 더 높은 자리에 올라서길 원하시나요? 대신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올라야 해요.”
“…….”
“아니면 당장의 치부를 숨기는 게 좋으신가요? 그렇게 하면 오랜 세월 동안 웅크려 내실을 다져야 하는데.”
“…….”
남궁학의 얼굴이 굳었다.
질문이 심상치 않아서였다.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만.”
정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다시 저었다.
“사실 둘 모두를 택하지 않고 이대로 지내실 수도 있긴 해요.”
“……그 대가는?”
정광은 태연한 얼굴로, 하지만 전에 없이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
“저를 반드시 죽여서, 살인멸구(殺人滅口)를 해내셔야 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