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241화 (240/569)

241화

혈향(血香)

정광과 남궁학은 신법을 펼쳐 달렸다.

얼마 안 가 그들은 삼십리쯤 떨어져 있는 용화산(龍華山) 인근에 이르렀다.

정광이 계속 빠르게 달리며 산을 가리켰다.

“태상가주님. 저기예요.”

“용화산?”

“네. 잘 아시네요.”

그럴 수밖에.

남궁세가 근처에 있는 산인데 그가 모르면 누가 알겠는가.

남궁학은 산세를 둘러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왜 하필 저런 데서…….’

마음에 안 들었다.

탁 트인 장소도 많거늘, 거추장스러운 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진 산이라니.

“네가 괜히 저곳을 택했을 리는 없지. 이유가 무엇이냐?”

정광은 솔직하게 답했다.

“제 군사가 여기에 잡혀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겸사겸사 왔죠.”

“…….”

설마 그런 연유였을 줄이야.

남궁학이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흉수는?”

“사마련인 것 같아요.”

“나를 이용해 그놈들을 치겠다는 말이구나.”

“에이. 저를 어떻게 보시고 그런 말씀을.”

어느새 산 바로 밑에 도착한 상태였다.

정광은 그대로 산길을 질주해 올라가며 설명했다.

“깨달음은 단지 깨달음일 뿐, 실전으로 다듬지 않으면 화려한 옷가지에 불과하잖아요.”

남궁학은 정광을 바짝 따라가며 눈을 빛냈다.

“너와 겨루기 전에 미흡한 부분을 찾아내고 보완하라는 얘기렸다.”

“바로 그거죠.”

남궁학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틀린 말은 아닌데…….’

위진홍이 이곳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정말 사마련이 납치했는지 의문투성이였다.

‘어쩐다.’

이미 산을 한참 오른 상태라 돌아가기도 뭐하고.

마음껏 손을 쓸 수 있는 상대가 있다니 마음이 동했다.

‘그리 나쁘진 않겠지.’

남궁학은 정광의 장단에 맞춰주기로 했다.

“다른 놈이 이런 수작을 부렸다면 일검에 목을 날렸을 거다.”

“저는요?”

“너 같은 무인이 번잡하게 함정을 팠을 리는 없고. 네 말이 사실이라면 본가의 책임도 있으니 이번 한 번은 넘어가 주마.”

“오오. 제 마음을 이해해 주실 거라 믿고 있었다니까요. 역시 태상가주님은 저의 종자기(鍾子期)세요.”

“흥. 나는 너 같은 백아(伯牙)를 둔 적 없다. 일이 끝나면 모든 걸 솔직하게 말하기나 해.”

정광은 알겠다고 하는 대신 경악성을 토했다.

“적들이 나타났어요! 조심하세요!”

“음? 어디…….”

정광이 신법을 펼치며 운룡을 뽑았다.

운룡과 함께 금빛에 휩싸인 그는 산 정상을 향해 달음박질쳤다.

“저 위쪽이요!”

“…….”

산 정상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남궁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질풍처럼 달렸다.

“대답하기 싫어 말을 돌리는 것이냐!”

“겸사겸사요!”

“보자 보자 하니까…… 호오.”

남궁학이 흥미로운 얼굴로 애검을 뽑았다.

정광의 말대로 산꼭대기 주변에서 인기척이 느껴진 것이다.

‘나보다 조금이나마 먼저 느껴? 쓸 만한 감각이군.’

솔직히 속이 조금 쓰렸다.

정광이 상당한 경지에 오른 건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한 단계 올라선 지금도 그보다 못 한 부분이 있을 줄이야.

‘수없이 많은 잡기 중 하나일 뿐이지. 내가 더 뛰어난 점이 많아.’

아니, 자신보다 먼저 내공을 끌어올렸기에 가능했을 터.

남궁학은 금빛 광채를 발하며 앞에서 달리는 정광을 노려본 뒤 내공을 일으켰다.

오감(五感)이 깨어나며 기감(氣感)도 확장됐다.

‘……꽤 많군. 묘한 기운도 있고.’

마음껏 손을 써도 되는 적이 한가득하다.

이런 기회가 어디 흔한가.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오늘, 내 검을 확실히 세운다!’

검에서 하얀 검기가 솟구쳤다.

달릴수록 짙어진 검기는 하얀 구체를 이루며 그의 몸을 완전히 감쌌다.

‘제대로 하려는 건 나만이 아니군.’

정광이 발하는 금빛도 더 짙어져 있었다.

무인이라면 호승심이 솟구칠 수밖에.

산 정상이 코앞이었다.

남궁학은 내공을 배가하여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내가 먼저다!’

새처럼 훨훨 날아올랐건만.

괜한 짓이었다.

정광이 갑자기 우뚝 멈춰 버리는 것 아닌가!

금빛 광채까지 거두며!

“태상가주님, 힘내세요!”

“……!”

정광이 응원할 때.

남궁학은 이미 정광을 훌쩍 넘어 산 정상 위에 떠 있었다.

‘이런!’

아래에서 느껴지는 수많은 기.

남궁학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그 위로 떨어져 내렸다.

콰앙!

“크헉!”

그의 몸을 감싼 검기의 구체는 나무든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갈가리 찢어버렸다.

남궁학의 속마음도 찢어졌다.

‘감히 나를 이용해?’

당장 되돌아가서 정광을 베고 싶었으나 그럴 틈이 없었다.

땅 밑에 은신해 있던 적들이 튀어나와 암기의 비를 뿌렸다.

남궁학의 수염이 극심한 분노로 부르르 떨렸다.

“얕은 수작을 부리는구나!”

그는 하얀 구체로 몸을 감싼 채 주위를 휩쓸었다.

적들의 사지가 허공에 날아다니고 붉은 피가 바닥을 적셨다.

“사마련, 사마련 하더니. 고작 이 정도냐!”

적들이 대답하기 전에 정광이 뒤에서 외쳤다.

“태상가주님! 고작 이 정도세요?”

“……!”

남궁학은 뒷목을 잡으려다 간신히 진정했다.

그래도 화가 치솟아 신형을 돌리며 고함을 치려 하는데.

정광의 준엄한 호통이 터졌다.

“전처럼 중(重)의 기운이 너무 강해요! 깨달으신 걸 써야죠!”

“……!”

남궁학의 눈이 점점 깊게 가라앉았다.

분노를 가라앉히고 정신을 차린 것이다.

‘그래. 그랬지.’

정광의 말은 한 치의 틀림도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화가 날까?

‘이놈들 다음은 네 녀석이야.’

정광을 ‘너’에서 ‘녀석’으로 격하시킨 뒤 주위를 둘러봤다.

사이(邪異)한 기운을 풍기는 무인들이 그를 조여오고 있었다.

‘진짜가 시작되는 건가.’

기묘한 기류가 그들 사이를 휘돌며 크기를 키워갔다.

‘여타의 진(陣)과는 많이 다른 것 같은데…….’

아무렴 어떠랴.

남궁학의 얼굴에 거만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깟 사술(邪術) 따위 바로 분쇄해 주마. 와라!”

* * *

‘신났네.’

정광은 남궁학의 외침을 듣고 피식 웃었다.

의욕이 보통 넘쳐 보이는 게 아니었다.

‘그럴 만도 하지.’

무인들이 펼치는 사술은 그럴듯했다.

정광이 상대했더라도 꽤 귀찮았을 만큼.

‘역시 남궁학을 데려오길 잘했어.’

한바탕 날뛰고 나면 화가 좀 가라앉을 것이다.

새로운 검도 제대로 다듬어질 테니 많이 귀찮게 굴지는 않으리라.

‘여기까진 됐고.’

남은 잔챙이들을 처리할 차례였다.

정광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땅바닥에 잔뜩 깔린 돌멩이들을 주웠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던져대기 시작했다.

슈우욱- 빠각!

쐐애액- 뻑!

던지고 또 던졌다.

아직 은신하고 있던 자들이 사방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나뒹굴었다.

정광은 그들에게 친절히 조언했다.

“그냥 누워 계세요. 안 그러면 죽여야 하거든요.”

“…….”

“어? 계속 싸우시려고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최소 한두 군데씩은 부러진 무인들이 태연한 얼굴로 정광에게 달려들었다.

“그럼 이만.”

화아아악-

금빛 광채가 번뜩였다.

수많은 핏줄기가 허공을 붉게 수놓고, 생을 잃은 육신들이 그대로 허물어졌다.

‘과묵한 애들이구나. 이제 번잡한 건 끝났고…… 이건 또 뭐야?’

정광은 눈살을 찌푸리며 호흡을 멈췄다.

주변에 떠도는 비릿한 혈향(血香) 때문이었다.

‘냄새는 별다를 게 없는데. 산서성 행화촌(杏花村)에서 마셨던 분주(汾酒) 같은 느낌이네.’

분주라 해도 웬만큼 마셔서는 간에 기별도 안 가거늘.

몇 동이는 마신 것처럼 머리가 핑 돌았다.

‘가격만 맞으면 괜찮겠어.’

대체 무엇이길래 이런 효과가 있을까.

정광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큰 바위를 향해 물었다.

“이거 뭐죠? 몽혼약(夢魂藥) 같은 느낌도 있는데.”

“…….”

바위가 사라지고 한로가 나타났다.

정광이 자신의 위치를 알아챈 게 놀라웠는지 눈이 살짝 커져 있었다.

“어떻게 알았지?”

“서투른 진 안에 계셨으니까요.”

“나인 걸 알고 물은 것이냐?”

“설마요. 속에까진 못 들여다봐요.”

“그럼 어떻게?”

정광이 무슨 그런 당연한 걸 자꾸 묻느냐는 듯 쏘아붙였다.

“하는 짓이 음산한 게, 딱 그쪽 같아서죠.”

“…….”

잠시 침묵하던 한로가 빙그레 웃으며 살기를 뿜었다.

소면호리(笑面狐狸)라는 별호에 걸맞는 모습이었다.

“진법에 능하다는 소문을 듣긴 했다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구나.”

“아까 그거. 무슨 향인지는 안 알려주실 거예요?”

“한번 맞춰보거라.”

“그쪽과 제가 그런 놀이를 할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닌데.”

정광이 고개를 갸웃한 뒤 중얼거렸다.

“환각 효과가 있는 약초나 광물을 사술과 함께 장복시켜서 피에도 그 성분이 흐르게 만든 것 같네요.”

“호오. 제법이구나. 비슷해.”

“이야. 대단하신데요.”

“쉬운 과정은 아니지. 마지막엔 대법도 펼쳐야 하고.”

“아뇨. 그런 거 말고. 돈이 보통 많이 드는 게 아닐 텐데 막 뿌리시는 게 대단하다고요.”

“허허. 그래, 너답구나. 허허허.”

한로의 양쪽 입꼬리가 쭉 올라갔다.

“그래도 아깝지는 않아. 너를 중독시켰으니까.”

“핑핑 돌기는 하네요.”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다만.”

한로가 정광을 뜯어보며 중얼거렸다.

“소문과 다른 게 너무 많군. 철전을 암기로 쓴다고 들었는데, 정보가 잘못된 건가?”

“아껴야 잘 살죠.”

“흘흘. 한마디도 안 지는구나. 천오검(天傲劍)을 무슨 수로 데려왔는진 모르겠지만, 쉽지 않을 게다.”

정광은 곁눈질로 남궁학을 봤다.

사이한 기운이 뭉클뭉클 피어오르는 무인들에게 조금씩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저쪽은 좀 걸리긴 하겠네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천오검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저들을 이기진 못해.”

“어떤 분들이시길래?”

“무척 궁금해하는 것 같구나.”

“예의상 물은 건데.”

“…….”

한로의 눈에 분노가 떠올랐으나 정광은 상관하지 않았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놈이 말은 왜 이리 많아.’

지금 남궁학은 자신이 새로 세운 검을 다듬고 있었다.

사술을 쓰는 무인들을 숫돌로 삼아 날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어제의 그였다면 힘들겠지만…….’

오늘의 그라면 된다.

이제 정광도 자신의 일을 해야 했다.

“빨리 끝내죠.”

삐딱하게 짝다리를 짚고 서서 왼손을 까딱거렸다.

“가까이 오세요.”

“삼장 거리면 싸우기 충분할 텐데?”

“네? 하하.”

정광이 피식 웃으며 바닥의 돌멩이를 주워 던졌다.

돌멩이가 한로의 몸을 뚫고 계속 날아갔다.

“환영 치우고 가까이 오시라고요.”

“…….”

“뭐, 안 오시면 제가 가죠.”

정광이 땅을 박찼다.

그의 신형이 유성처럼 날아갔다.

앞이 아니라 뒤로.

동시에 금빛에 덮인 운룡을 휘둘렀다.

쉬이이익- 서걱.

아름드리나무가 통째로 잘려 쓰러졌다.

쿠쿵!

‘어? 아니네?’

그때, 등 뒤에서 음유(陰幽)한 장력이 다가왔다.

한번 경험했던 한로의 장(掌)이었다.

“여차.”

정광은 크게 한 걸음 나아갔다 돌아서며 운룡을 쭉 내밀었다.

운룡의 날카로운 검첨(劍尖)이 한로의 손바닥을 꿰뚫으려는 순간.

스윽.

한로의 신형이 귀신처럼 흩어졌다.

‘이것도 환영?’

평소라면 이깟 환술(幻術)쯤은 코웃음 치며 상대했겠지만.

아까 들이마셨던 혈향이 감각을 흐리고 있었다.

그만큼 환술의 위력은 강해진 상태.

‘어디 있는 거지?’

정광은 내공을 운기하며 주위를 훑었다.

정면에 다시 나타난 이건 아닌 것 같고.

진짜는 좌측에 있었다.

은밀히 다가온 한로가 장법으로 정광의 옆구리를 때렸다.

펑!

“쿨럭.”

왼팔을 접어 상박과 하박으로 막아낸 정광이 입에서 피를 토하며 주르륵 밀려났다.

비릿한 혈향을 맡은 한로가 눈을 반짝였다.

‘제대로 먹혔군.’

그의 장력이 팔뿐만 아니라 내장에까지 충격을 준 게 분명했다.

기회임을 직감한 그는 그대로 전진하며 쌍장을 내질렀다.

‘죽어!’

부우웅-

한로의 쌍장이 정광을 때렸다.

아니, 뚫고 지나갔다.

‘환영!’

한로가 눈을 부릅뜨고 신형을 돌렸다.

뒤에도 옆에도 정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아!’

아까 맡았고, 지금도 은은히 느껴지는 혈향!

‘설마 내공으로 환몽혈(幻夢血)을 몰아낸 뒤 뿜어낸 것인가!’

환술에는 환술로.

경악하는 그의 머리 위로 정광이 떨어져 내렸다.

주즉시공(酒卽是空)으로 환몽혈을 밀어낸 그는 더없이 싱그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손에 들린 운룡은 광포한 금룡이 되어 내리꽂혔다.

쿠와아아앙!

서걱.

핏물이 터져 나오며 또 다른 혈향이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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