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240화 (239/569)

240화

그건 그쪽 생각이고

정광은 눈앞에 서 있는 사내를 가만히 바라봤다.

보면 볼수록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지난 며칠간 조금씩 변하는 모습이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정도가 있지.

훗날을 위한 새로운 토대를 이제 막 다지기 시작한 참이다.

당장은 예전보다 오히려 못한 모습을 보여야 정상인 것이다.

앞으로도 오랜 세월 동안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개고생을 해도 될까 말까 한 일이거늘.

단 하루 만에 그 기나긴 과정을 훌쩍 뛰어넘어 나타날 줄이야!

그것도 저렇게 담담한 얼굴로!

정광은 완전히 다른 무인이 되어 나타난 남궁학에게 찬사를 표했다.

“아, 진짜 배 아프네.”

“…….”

남궁학도 사람인 걸까.

눈에 의기양양한 빛이 떠올랐다.

물론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여전히 거만했지만.

“별것 아니리라.”

“눈은 대단한 거라고 말씀하고 계신데요.”

“별것 아니래도.”

“…….”

정광은 하도 어이가 없어 한숨이 나왔다.

별것 아니긴 무슨.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게 빤히 보이는데 누굴 속이려고.

“하아아. 내가 미쳤지. 왜 쓸데없는 짓을 해서.”

“질시하는 것이냐?”

“네?”

“내가 조금 나아간 것이 부러워서 그러는 것이냐 물었다.”

“아뇨. 그걸 왜 질시해요. 크게 손해를 본 게 배 아파서 그러죠.”

남궁학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떠올랐다.

“손해라니? 무엇이 말이냐?”

“태상가주님께서 검을 새로 세우시는 값으로 속명단(續命丹) 세 알밖에 못 받았잖아요. 세상에 이런 손해가 또 있으려나.”

“무림제일의가인 무한의가(武漢醫家)의 것이다.”

“그럼 태상가주님의 깨달음과 바꿀까요? 싫으시면서.”

“…….”

남궁학은 할 말이 없었다.

무한의가의 속명단이 아무리 귀한 것이라 해도 자신이 얻은 것에 비하면 조족지혈 아닌가?

‘아니, 그보다…….’

정광은 정말 손해 본 걸 아까워하고 있을 뿐, 시기하는 기색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팔순(八旬)이 넘게 살아오며 대협이나 대인으로 불리는 자들을 수없이 봐왔건만, 정광 같은 이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늘이 장난을 친 건가. 재밌는 녀석을 내려보냈어.’

자신의 검을 정립한 기쁨에 미치진 못했으나 기꺼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 맞는 말을 하게 됐다.

“확실히 네가 손해를 보긴 했지. 원하는 것을 말해라. 들어주마.”

계속 불퉁거리던 정광이 눈부신 속도로 포권하며 외쳤다.

“창궁무애(蒼穹無涯)! 의기천추(義氣千秋)! 역시 대남궁세가의 태상가주님이시네요!”

“…….”

“일구이언(一口二言)은 이부지자(二父之者)요, 일언기출(一言旣出)이면 사마난추(駟馬難追)라. 약조 지키실 거라 믿을게요. 깨끗하게 문서로 남기고 싶으시면 그렇게 하고요.”

“…….”

남궁학은 마음이 바뀌었다.

왠지 단서를 조금 달아야 할 것 같았다.

“단. 협의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어야 하며, 본가에 해가 되는 일도 안 된다.”

“물론이죠. 저를 뭐로 보시고.”

“너로 보니까 이러는 것이야.”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어요?”

정광이 슬쩍 돛을 돌리자 남궁학의 눈이 빛났다.

“오늘이 마지막 비무 아니더냐.”

“이렇게 일찍이요?”

“무인이 시간을 따져서야 쓰나.”

“밤을 새우신 것 같은데. 나중에 하죠.”

“전혀, 아무 문제 없느니라.”

“…….”

정광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깨달음을 얻어서 신났네. 바로 확인해 보려고 달려왔구나.’

남궁학은 누가 봐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몸과 마음이 달아올라 있었다.

그런 그에게 나중에 하자고 해봐야 씨알이라도 먹히겠는가?

한바탕 손을 섞을 수밖에.

‘오늘은 건너뛰려고 했는데.’

남궁화인이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보다가 대응해야 하거늘, 아침부터 이 난리를 쳐야 한다니 마음에 안 들었다.

‘어쩐다.’

남궁학은 깨달음을 얻으며 변모했다.

얼굴을 거의 뒤덮고 있던 눈그늘은 말끔히 사라졌고, 피부도 상당히 매끈해진 데다 수염마저 윤기가 좔좔 흘렀다.

딱 봐도 최상의 상태인 것이다.

‘바로 암수를 펼쳐서 몰아붙일까?’

그래도 일찍 끝낼 자신은 없었다.

‘그냥 튀어?’

남궁학이 남궁세가를 넘어 안휘성 전체가 들썩일 정도로 뒤지고 다닐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미끼를 물었던 남궁화인이 다시 뱉어내고 몸을 사릴 수도 있었고.

‘어쩔 수 없지.’

최대한 빨리, 많은 힘을 유지한 채 쓰러뜨려야 한다.

그러려면 암습만 한 게 있나.

‘일단 독부터 풀자.’

뭐가 적절할까 고민하는 그때.

숙소로 다가오는 기운이 느껴졌다.

몇 번 만나 익숙한 자의 것이었다.

‘남궁화인이 입질을 하는구나.’

그랬다.

남궁화인의 심복이 숙소 밖에서 외쳤다.

“진옥룡, 계신가? 가주께서 찾으시네!”

“네! 갈게요!”

정광은 남궁학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어쩌죠? 가봐야겠네요.”

“갈 필요 없다. 내 일이 더 급해.”

“그건 아니죠.”

정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림말학(武林末學)인 제가 대남궁세가 가주님의 말씀을 어찌 감히 어기겠습니까? 부르셨으면 즉각 가야지요.”

“……네가 언제부터 그런 걸 따졌다고?”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으나 항상 따져왔습니다. 만약 제가 가주님의 부름을 무시하고 태상가주님을 따라간다? 행여나 밖에 소문이라도 나면 어떡합니까? 저는 망나니라고 찍히기 싫습니다.”

“……이미 그 이상으로 불리고 있지 않더냐.”

“그건 일단 넘어가죠. 어쨌든 남궁세가의 법도가 엉망이라고 다들 수군댈 겁니다. 태상가주님께서 가주님의 체면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신다고요. 생각만 해도 두렵네요. 이런 제 마음도 헤아려 주세요.”

“…….”

모든 일을 제 마음대로 처리하는 남궁학이었으나, 정광의 말을 듣자 살짝 흔들렸다.

‘확실히 소문이 나긴 하겠군.’

무혈단원들이 각자의 방에서 나와 구경하고 있었다.

‘개방의 후개 놈, 말이 많다던데. 말이 많은 걸 넘어 혀가 많다는 사파 출신의 놈도 있고.’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올라봐야 좋을 게 있나.

남궁학은 조금 기다리기로 했다.

“다녀오거라. 여기 있으마.”

“처소로 돌아가셔서 편히 쉬시며 기다리시는 게…….”

“너를 어찌 믿고? 잔말 말고 빨리 다녀와.”

“네. 이따 봬요.”

정광은 발걸음을 옮기며 무혈단원들에게 명했다.

“밥 든든히 드시고 푹 쉬고 계세요.”

굳이 전음을 보낼 필요도 없었다.

당오군을 비롯한 단원들은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하며 대기하라는 속뜻을 눈치챘다.

철월만 빼고.

“도사! 오늘부터 고기 두 배다! 약조를 지키고 가라!”

철월이 앞을 가로막으며 따지자 정광이 설명했다.

“아침 가져오시는 분한테 더 달라고 하세요.”

“……그럼 두 배로 준다고? 그렇게 쉽게?”

“물론이죠. 잘 아시면서 왜 그러세요.”

철월의 눈동자가 어지럽게 흔들리다가 중심을 잡았다.

“그렇지! 철월도 눈치채고 있었다! 철월은 똑똑하다!”

“암요. 맛있게 드세요.”

정광은 숙소 밖으로 나가 남궁화인의 심복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날씨가 좋네요.”

“…….”

사내는 고개를 슬쩍 들어 하늘을 봤다.

언제 비바람이 몰아치고 번개가 내리쳐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궂은 날씨였다.

‘역시 제정신이 아니야.’

사내는 속마음과 다르게 맞장구쳤다.

“그래. 좋은 날씨군.”

정광이 씩 웃었다.

“네. 정말 좋은 날씨예요.”

* * *

남궁세가주의 집무실.

남궁화인은 날씨 얘기 같은 서론은 집어치우고 본론부터 꺼냈다.

충혈된 눈을 빛내면서.

“왔는가. 무척 중요한 일이 있어 불렀네.”

“어? 가주님께서도 밤을 꼬박 새우셨나 봐요.”

“나도라니. 무슨 말인가?”

“음. 그런 게 있어요. 아침 먹어야 하니까 짧게 부탁드려요.”

“…….”

참을 인(忍) 자 셋이면 살인도 피한다 했건만.

남궁화인은 열 개가 넘게 필요했다.

“자네의 군사, 위 소협 말일세.”

“네.”

“직접 찾겠다고 했었는데 소득이 있는가?”

“아뇨.”

남궁화인은 정광을 노려보며 무겁게 말했다.

“그럴 줄 알았지. 내가 찾았네.”

“오오!”

정광은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남궁화인의 수작이 어찌나 우스운지,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썩어도 준치라더니. 역시 남궁세가네요.”

“…….”

“어디 있죠? 불러주세요. 빨리 보고 싶네요.”

남궁화인의 얼굴이 굳었다.

“위치만 알아냈을 뿐, 아직 데려오진 못했어.”

“에이. 농이 짓궂으시네요. 이래놓고 옛다 하며 보여주시려는 거죠?”

“…….”

“어? 정말이에요? 천하의 남궁세가주님이 아직도?”

“…….”

남궁화인은 치솟는 울화를 억누르며 당부했다.

“솔직히 털어놓을 테니 말 끊지 말고 잘 듣게.”

“…….”

“왜 대답을 안 하는가?”

정광은 손가락 하나를 펴서 일필휘지(一筆揮之)로 글을 썼다.

허공에 오랑캐의 문자가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알아먹지 못할 악필이 새겨졌다.

남궁화인이 대체 뭐 하는 짓거리냐며 쏘아보자 정광이 억울한 표정으로 항변했다.

“말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

남궁화인은 들끓는 살기를 한숨에 실어 내뱉었다.

“후우우. 그냥 말하는 게 낫겠군. 어쨌든, 어제 장원 밖으로 조사하러 나갔던 수하 중 한 명이 어떤 이에게 전언을 받아왔네. 위 소협을 데리고 있으니 아무도 몰래 직접 나오라는 내용이었지.”

“그걸 믿으셨어요?”

“위 소협이 실종된 건 본가 안에서만 아는 일이지 않나. 복색은 물론 성품까지 그대로 전하기에 안 나가 볼 수가 없었네.”

“그 질 나빠 보이는 중늙은이가 흉수였군요. 그래서 인근의 숲에서 그를 만나신 거고요.”

“맞긴 하네만. 그걸 대체 어떻게 아는 건가?”

“자오가 봤거든요.”

“허어. 나를 몰래 쫓을 정도의 실력자론 안 보이던데.”

“저도 가주님의 말씀이 안 믿겨요.”

남궁화인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믿든 말든 좋을 대로 하게. 나는 그자가 누구인지 아직도 몰라. 그는 내게 거래를 제안했지. 나는 당연히 거절했고.”

“어떤 거래였는데요?”

남궁화인은 정광을 가만히 노려보다가 씹어뱉듯 말했다.

“자네를 죽일 수 있게 도와달라더군. 내게도 좋은 일 아니냐며.”

“와. 가주님을 대체 뭐로 보고! 그런 후안무치한 망종이 아니신데 감히!”

“……아무튼, 대단한 실력자였어. 그런 무위에 자네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자라면 사마련 소속 무인이 아닐까 싶네.”

“그럴 가능성이 크죠.”

“거절했는데도 끝끝내 장소를 알려주더군. 삼십리쯤 되는 거리에 있는 용화산(龍華山)이었어. 본가로 돌아와 비밀리에 키우던 이들을 보냈지.”

“가주님 처소 지붕 위에서 생활하시는 분들 말씀이군요.”

“……그걸 어찌 알았나?”

“그냥요. 그래서요?”

남궁화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네.”

“흐음. 사람을 또 보내셨나요?”

“아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함정이야. 성동격서(聲東擊西)인 것 같단 말일세.”

“그곳으로 남궁세가의 주력을 끌어들이고 남궁세가를 칠 것 같긴 하네요.”

“그래서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자네에겐 사실을 말해야 할 것 같아 불렀네. 쓸데없는 오해를 사긴 싫거든. 흐음. 그자는 내가 이러길 바라며 일을 꾸몄을 수도 있어.”

“제가 제 발로 함정에 빠지길 기다리고 있다는 거죠?”

남궁화인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님 말씀대로라면 남궁세가를 노리거나 저를 노리는 거겠네요. 아니면 둘 다일 수도 있고.”

“그렇네.”

“어떻게 하실 거예요?”

남궁화인이 상체를 기울이며 속삭였다.

“본가를 상대로 이런 장난질을 쳤는데 좌시할 순 없지. 며칠 내로 주력을 비밀리에 모아 급습할 생각일세. 자네는 본가에 남아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주게나.”

“바로 안 갔다가 군사의 목이 날아가면 어쩌죠?”

“이런 말 하긴 미안하네만. 그가 아직도 살아 있을 거라 믿기진 않아. 작은 가능성에 가문의 존망을 걸 수는 없단 말일세. 본가가 무당처럼 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정광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네요. 그래요 그럼. 이제 가도 되죠?”

“이해해 줘서 고맙네. 나중에 보세나.”

정광은 예를 표한 뒤 집무실에서 나왔다.

걸음을 걸을수록 입가에 맺힌 미소가 진해졌다.

‘안 돌아가는 머리 쓰느라 고생 좀 했겠는걸.’

제법 그럴듯했다.

위진홍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어도 믿지 않았겠지만 나름대로 애썼다고 칭찬했을 만큼.

‘사마련이 위진홍을 납치한 건 아닐까 의심해서 이렇게 나오는 거겠지.’

한로의 무위를 보나 나타난 시기를 보나 그런 오해를 할 만도 했다.

‘최대한 의심을 피하고 일단 던지는 건가. 내가 이 일을 소문내기도 뭐하니까.’

만약 낸다 치자.

남궁세가는 사마련에게 손님을 납치당했다는 오명을 쓸 것이다.

허나 정광은 자신이 임명한 군사가 있는 곳을 들었음에도 움직이지 않은 쓰레기가 되는 것이다.

‘남궁세가야 무당의 예를 들며 대의가 어쩌고 함으로써 원성 좀 듣고 끝나겠지만 나는 아니지. 위진홍의 행방에 대해 더 따질 수도 없고.’

남궁화인으로서는 정광이 움직여야 좋겠지만 안 움직이더라도 손해는 없다.

뒤에서 찌를 기회는 얼마든지 있기에.

‘뭐 그건 그쪽 생각이고.’

정광은 숙소로 돌아와 아침 식사부터 했다.

못마땅한 얼굴로 지켜보던 남궁학이 채근했다.

“대체 고기를 얼마나 많이 먹는 것이냐? 그만 일어나거라.”

“든든히 먹어야 잘 싸우잖아요. 대충하기를 원하세요?”

“……일리가 있군.”

남궁학은 더 먹으라고 권하기까지 했다.

정광은 입가심으로 술도 한 잔 걸친 뒤 벌떡 일어섰다.

“가죠.”

“그래, 기다렸다.”

남궁학이 자신의 처소로 향하려 하자 정광이 고개를 저었다.

“집 다 날아가도 좋으세요?”

그럴 리가 있나.

남궁학은 정광의 말을 이해했다.

‘하긴. 제대로 싸우면 주변이 다 망가지겠지.’

그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정광이 기다렸다는 듯 제안했다.

“밖에 나가서 편하게 싸우죠.”

“네 말이 맞다. 어디가 좋을까?”

정광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앞장섰다.

“마침 제가 좋은 장소를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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