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뜻밖의 방문객
“이거야 원.”
남궁화운이 고개를 저으며 양손을 들었다.
“완전히 당했군.”
“그럴 수도 있죠.”
“추종향(追從香)이라니. 참 재주도 좋아. 깨끗이 씻었는데도 향이 남은 게 신기한데.”
정광이 방 내부를 둘러보며 대꾸했다.
“좀 비싼 거라. 그보다 가난하시다더니. 본가 밖에 이런 장원을 갖고 계시네요. 꽤 아늑한데요?”
“아늑했었지만 이젠 아니지.”
“네?”
남궁화운은 정광이 무너뜨린 벽 쪽을 가리켰다.
원래대로라면 보이지 않아야 할 아담한 화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소형제 덕분에 아주 탁 트였구먼.”
“뭐 통풍 잘되고 좋죠.”
“아니.”
남궁화운의 눈이 과거를 더듬는 것처럼 아련하게 변했다.
“어머니께서 살아 계셨으면 슬퍼하셨을 거야.”
“……?”
“평생 타의에 의해 살다가 유일하게 자의로 만든 집이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까.”
“…….”
정광도 사람이었다.
그런 사연이 있다는데 어찌 뻔뻔하게 나가겠는가.
“깨끗이 보수해 드릴게요. 모친께서 활짝 웃으실 정도로요.”
그때.
쩌저저적-
남아 있는 세 개의 벽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남궁화운이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웃으시긴. 아주 펑펑 우시겠는걸.”
“…….”
쿠콰콰쾅!
집 전체가 무너져 내렸다.
어느새 빠져나온 정광이 그 광경을 보며 혀를 찼다.
“쯧쯧. 부실시공을 해도 정도가 있지. 어떤 목장(木匠)이 지었는진 모르지만 정말 너무하네.”
“…….”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네요. 아예 싹 새로 짓죠.”
“…….”
남궁화운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으리으리하게 짓는 게 좋을 거야.”
“모친께서 아늑한 걸 좋아하셨다고…….”
“돈이 없으셨으니까 그렇지. 설령 그렇다 해도 다른 세상에 계신 동안 취향이 바뀌셨을 수도 있지 않은가.”
“아하.”
정광은 남궁화운의 마음을 이해했다.
모친을 기리기 위해 멋진 집을 짓고 싶은 것이리라.
“그렇게 하죠.”
“좋아. 조금이나마 웃으시겠군.”
남궁화운이 희미하게 웃으며 들고 있던 의자를 내려놨다.
쿵.
정광의 시선이 그 의자에 묶여 있는 위진홍에게 향했다.
‘고문당한 흔적은 없네. 뭐 한다고 해서 대답할 성품도 아니지만.’
위진홍은 면목이 없는지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정광은 그의 마음을 헤아리고 담담히 말했다.
“군사. 너무 창피해하지 마세요. 이미 창피하니까.”
“…….”
“뻔뻔하게 고개를 들고 어떡해야 다시는 이런 치욕을 안 겪을지 고민하세요. 또 창피해지면 곤란해요.”
“…….”
위진홍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정광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별빛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정광은 그 눈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건 좀. 너무 뻔뻔한데…….”
남궁화운도 동의했다.
“과하면 모자람만 못하거늘. 확실히 그렇군.”
“하아. 얼마나 괴롭힘을 당했길래 저렇게…….”
정광이 남궁화운에게 따졌다.
“어떻게 책임지실 거죠?”
“원래 좀 이상했어.”
“그건 맞는데 많이 이상해졌잖아요.”
“오히려 조금이나마 나아진 것 같다만.”
정광이 손을 내저었다.
“됐네요. 그만 갈게요.”
“데려가려고?”
“물론이죠.”
“설마 이대로 보내줄 거라 믿는 건 아니지?”
남궁화운이 기세를 일으키자, 정광이 허리에 찬 운룡을 툭툭 쳤다.
“얘를 꺼내면 집을 짓는 게 아니라 장원을 새로 세워야 할 텐데요.”
“…….”
남궁화운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장원이 박살 나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정광에게 질 것 같진 않았으나 이길 자신도 없었다.
‘소란을 벌이면 내가 불리해.’
얼마 떨어지지 않은 본가에서 사람들이 몰려올 게 분명했다.
‘위진홍으로 거래를 하려 했건만…….’
이렇게 허무하게 발각되어 버리다니.
인질을 안 보이는 곳에 숨겨두고 하는 협상과 눈앞에 두고 하는 협상의 무게는 큰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가주가 벌인 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예상보다 적을 수도, 많을 수도 있었다.
어쨌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는 상태.
곱게 보내주고 하나라도 얻어내는 게 나으리라.
“한 가지 약조만 하면 보내주마.”
“뭔데요?”
“위 아우와 나의 친분은 비밀이야. 이해했지?”
정광의 눈이 가늘어졌다.
“일을 더 키우지 말자는 얘기네요. 그런데 왜 납치하신 거죠?”
“납치가 아니라 친분을 맺은 거라니까.”
남궁화운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말하지 않았었나. 원래 그런 성품이라 듣긴 했으나 너무 대놓고 도발하더라고. 본가와 위 아우 서로를 위해 다른 장소로 데려왔을 뿐이야.”
“저보고 남궁세가를 떠나라 하신 이유는요?”
“소형제가 사고를 칠까 봐 겁이 나서 그랬지.”
“어제 제 발을 묶으신 건?”
“그간 익힌 진법도 평가받고 비무도 해보고 싶어서라니까.”
“흐음.”
정광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 그렇다 치고. 가주께 선의를 갖고 일을 벌이신 건지, 악의로 저지르신 건지 판단이 잘 안 되네요.”
“소형제가 상관할 바가 아닌 것 같은데.”
“아뇨. 저한테도 중요한 일이거든요.”
“어느 쪽이었으면 좋겠는가?”
“악의요.”
“……이유는?”
정광이 싱긋 웃었다.
“그쪽이 처리하기 편하니까요.”
“…….”
남궁화운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내가 가주와 반목했으면 좋겠다는 말이군.’
왜?
물어봤자 대답 안 할 테지만, 너무 궁금해서 입을 여는데…….
정광이 빨랐다.
“좋아요. 비밀로 해드리죠. 대신 제가 군사를 데려가는 것도 함구해 주셔야 해요.”
“……무슨 장난질을 치려고?”
정광이 운룡을 툭툭 두들겼다.
“대화가 너무 기네요. 역시 검으로 얘기하는 게 나으려나?”
“…….”
남궁화운이 정광을 노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본가에 해를 끼치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그럴 리가 있나요. 도와드리러 온 건데.”
“가주도 본가의 일원인 건 알지?”
“반쪽짜리 뿌리라고 하시더니 정이 무척 많으시네요.”
정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뒤 덧붙였다.
“지켜보시다가 아니다 싶으시면 찾아오세요. 그때 다시 얘기하죠.”
* * *
정광은 위진홍을 들쳐메고 신법을 펼쳤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숙소로 돌아온 뒤, 무혈단원들을 모아놓고 주의를 줬다.
“사정은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군사를 찾은 건 당분간 비밀이에요.”
단원들은 의아해하면서도 기뻐했다.
꼴 보기 싫은 녀석이었지만 동료 아닌가.
이렇게 무사히 돌아오니 불편했던 마음이 사라져 버렸다.
철월만 빼고.
“도사! 쓸데없는 물건을 주워왔다! 당장 도로 갖다 버려라!”
“철월, 안 그래도 머릿속이 꽉 찬 상태일 텐데 그냥 지우시죠.”
정광이 양손을 매만지며 충고하자 철월이 발끈했다.
“철월은 도사가 두렵지 않…….”
“내일부터 고기 두 배.”
“……추릅. 도사는 역시 현명하다! 철월도 현명하니 지운다!”
철월을 손쉽게 설득한 정광은 위진홍을 데리고 빈방에 들어갔다.
“앉으세요.”
“…….”
위진홍이 시선을 피하며 앉자 정광이 피식 웃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
“나참. 뻔뻔해지시라니까.”
“……후우우.”
위진홍은 천천히 입을 열어 자신이 겪은 일을 설명했다.
정광은 묵묵히 들은 뒤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떤 대단한 비밀을 알아낸 것도 아니고 맛없는 당과만 계속 드셨네.”
“……단주는?”
정광도 그간 있었던 일들을 알려줬다.
가만히 듣던 위진홍이 작게 물었다.
“남궁화인이 사마련과 접촉한 게 맞군. 남궁화운이 그 사실을 알고 우리가 끼어드는 걸 훼방 놓은 것이오?”
“아마도요.”
“선의로 그런 건지 악의로 그런 건지. 그래서 물어본 것이구려.”
“네.”
“그런데 왜 악의로 그런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아!”
풀이 죽어 가라앉아 있던 위진홍의 눈이 빛났다.
“남궁화운을 이용해 남궁화인을 가주 자리에서 끌어내릴 생각인 것 같은데. 맞소?”
“겪어보니 자격은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가능성을 열어둔 거죠.”
“남궁화운은 시비의 자식인지라 정통성이 부족하오. 가주로 올리기엔 다소 무리 많소만.”
“태상가주가 그의 능력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못마땅해하는 걸 보면 그 스스로 은거한 거겠죠. 만약 그가 가문의 일에 나서겠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가주 자리까지는 몰라도 어느 정도 선까지는 허용할 것 같소.”
“거기에 남궁화인의 치부가 낱낱이 드러나고, 남궁화운이 태상가주는 물론 모두가 인정할 만큼 큰 공을 세우면?”
“……그 연배에 그만한 이가 없으니 가주가 되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겠군.”
천한 핏줄을 타고났다 해서 계속 천하랴.
무림사를 따져보면 아주 가끔이나마 있는 일이었다.
“단주가 그럴 토대를 벌써 만들어뒀다는 것으로 들리오. 만약 그렇다면…….”
“군사.”
열기를 담아 떠드는 위진홍을 정광이 제지했다.
“지금 이럴 때예요?”
“……무슨?”
“아까 얘기했잖아요. 다시는 치욕을 안 당하게 고민하라고.”
“……하지만 나는 무공을 익힐 수 없는 몸이라…….”
“머리만으로 천하를 움직이겠다더니 왜 몸 탓을 해요?”
“……!”
“진짜 실망이네. 그럼 그냥 말버릇이나 고치세요. 그나마 안전해질 테니까.”
“…….”
위진홍의 눈에 독기가 어렸다.
“싫소!”
“그럼 방법을 만들어내시던가.”
“물론이오! 내가 못할 것 같소?”
“기대할게요.”
정광은 솔직히 기대하지 않았다.
무림은 결국 힘이 지배하는 곳.
전생에 거느렸던 두 명의 책사 중 한 명인 마뇌(魔腦)가 그랬듯이, 머리의 한계는 너무나 명백했다.
‘뭐 알아서 하겠지. 운이 엄청나게 좋으면 뭐라도 찾아낼지 모르고.’
정광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빠르면 내일에라도 큰 변화가 일어날 터.
어떤 상황에도 대응할 수 있게 몸과 마음을 준비해야 했다.
“식사는 방으로 보내줄 테니까 나오지 마세요.”
“알겠소!”
“용변도 요강에 해결하시고요.”
“…….”
“그럼 이만.”
정광이 나가자 위진홍의 눈에 어린 독기가 짙어졌다.
‘내가 못할쏘냐.’
그도 무림인인지라 머리의 한계를 잘 알았다.
그게 싫어 힘 있는 자들에게 더 불손하게 대했고.
어떻게든 극복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세력을 모아 사천성으로 향하지 않았던가.
‘인정하자. 지금까진 운이 좋았어.’
어릴 땐 가신들이 지켜줬다.
사천성의 지휘권을 거머쥐었던 건, 세력을 이끌고 싶은 자신과 쭉정이들을 가치 있게 쓰고 싶은 사마련주의 마음이 일치해 가능했던 일이다.
‘훗날 머리에 걸맞는 손발을 찾더라도 내 몸은 내가 지켜야 해.’
위진홍은 궁리하고 또 궁리했다.
아무리 걸어도 깜깜한 어둠뿐이었으나 계속 걸어야 했다.
그리고. 반드시 찾아내야 했다.
위진홍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 * *
어두운 밤, 남궁세가 가주의 집무실.
남궁화인은 손에 쥔 서신을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봤다.
‘겨우 하루밖에 안 지났거늘, 벌써 서신을 보내?’
당분간 연락을 끊을 줄 알았건만 의외의 행동이었다.
‘오히려 역을 찌른 건가.’
서신의 서두엔 그들의 만남을 염탐한 자가 정광의 수하인 자오라고 적혀 있었다.
‘다설범협(多舌凡俠)이라 불리는 놈이 간자들이나 하는 더러운 짓을 하다니. 협은 없고 혀만 요사하구나.’
백리연화가 터지는 걸 보고 정광이 사주한 자라는 건 짐작했었다.
소문으로 듣던 사천당가의 기물과 색깔만 다를 뿐 똑같아서였다.
사천성과 한참 떨어진 안휘성에서 그게 터졌다?
당가와 친한 정광 빼고 누가 있겠는가?
아까 정광이 찾아와 이죽거릴 때는 참았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콰직!
탁자를 자오라고 생각하며 손을 휘두르자 산산이 조각났다.
남궁화인은 분노를 억누르며 서신을 읽었다.
‘……이건?’
한로가 헤어지기 직전에 말했던 내용이 이어졌다.
‘진옥룡을 밖으로 끌어내 죽이자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괴물을 어떻게 죽인단 말인가?
‘가만. 이렇게까지 준비를 했다니…….’
서신을 읽어 내려갈수록 설득됐다.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정광이 아무리 강해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으리라.
‘……어차피 길은 하나야.’
명백한 증거를 손에 넣은 건 아니지만 봐선 안 될 걸 본 놈이다.
그걸 빌미로 뭔가 획책하고 있는 낌새였고. 놈이 먼저 일을 벌이기 전에 빨리 죽여야 했다.
‘…….’
서신에 적힌, 정광이 가야 할 장소와 시간이 뇌리에 박혔다.
‘다른 방법이 없어. 내일 아침, 놈을 부른다.’
무척 긴 밤이 이어졌다.
정광에게 무슨 말을 해야 의심을 사지 않고 보낼 수 있을까.
남궁화인은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아침을 맞았다.
“밖에 누구 없느냐?”
“하명하십시오, 가주.”
“진옥룡을 불러오게.”
“알겠습니다.”
남궁화인은 피곤한 얼굴로 의자에 길게 기대앉았다.
피로가 쌓여 살짝 충혈된 그의 눈이 살기에 젖어 번들거렸다.
* * *
해가 떴지만 정광은 침상에서 뒹굴뒹굴하고 있었다.
아직 밥이 올 시간이 아니어서였다.
‘좀 빨리 오면 좋겠는데…… 음?’
정광의 눈이 살짝 커졌다.
거의 동시에 누군가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이렇게 가까이 올 때까지 기척을 못 느끼다니.’
정광은 침상에서 일어나 운룡을 허리에 찼다.
그리고 방문을 천천히 열었다.
끼이이-
문을 두드린 자의 얼굴을 확인한 정광이 작은 탄성을 질렀다.
“아.”
정말 뜻밖의 방문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