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감춰둔 한 수
“흐음. 네가 바로 진옥룡이구나.”
한로의 물음에 정광이 인상을 찌푸렸다.
백리연화를 보자마자 쫓아왔거늘, 하마터면 늦을 뻔했다.
기분이 좋을 리 있나.
한로를 보는 눈빛도, 입에서 나오는 말도 곱지 않았다.
“어떻게 된 게 모르는 사람이 없네. 그쪽은 어디서 굴러오신 개뼈다귀세요?”
“…….”
평생 들어본 적 없는 폭언에 황당해하던 한로가 대꾸하려 했으나.
자오가 더 빨랐다.
“저자는 사마련주 사지환의 심복 중 한 명인 소면호리(笑面狐狸) 한로라 합니다. 강서성(江西省) 의춘(宜春)에 자리한 부유한 상가에서 사남이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막장인 삶을 살다가 인근을 지나가던 사흑맹(邪黑盟) 원로의 눈에 띄어 입맹한 뒤, 타고난 음흉함과 무재로…….”
“자오. 짧게요.”
“웃는 얼굴로 흉악한 짓을 일삼는 나쁜 개뼈다귀입니다. 장법의 고수지요.”
“수고하셨어요.”
정광은 한로를 훑어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과연. 딱 봐도 그런 것 같네요.”
“……재밌는 놈들이구나.”
한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 이었다.
“영인(影人)인 것을 숨기며 살다가 련을 배신한 종놈이나, 그런 종놈과 합이 척척 맞는 주인이라니.”
“주종이 아니라 친우죠. 그런데 영인이 뭐예요?”
“호오. 모르고 있었군.”
한로는 정광과 자오를 번갈아 보며 미소 지었다.
“영인은 첩보와 암살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집단이다. 멸문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저 까마귀가 그 맥을 잇고 있었어.”
정광의 눈이 살짝 커졌다.
한로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래. 의심해라. 저 까마귀가 왜 지금껏 정체를 숨겼는지. 네 뒤통수를 치려고 그런 건 아닌지!’
하지만 정광의 입에서 나온 건 탄성이었다.
“오오. 자오, 비밀조직 출신이었어요?”
“……비, 비슷합니다.”
“갑자기 있어 보이시네. 어쩐지 재주가 많으시더라.”
“…….”
“사마련에 그런 분들이 많으신 줄 알았는데 자오가 특별한 거였네요.”
“…….”
자오는 긍정도 부정도 못 했다.
긍정하기엔 얼굴 가죽이 얇고, 부정하자니 사실이 아니어서였다.
“허허.”
한로는 하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생각하는 방식이 독특하구나.”
“자오는 뒤통수를 칠 사람이 아니거든요.”
“저 속이 시커먼 까마귀가 신의를 지킬 거라 보느냐?”
“물론이죠. 그쪽처럼 머리 없는 사람도 아니고요.”
“무슨 뜻인지 궁금하군.”
정광은 한로를 빤히 바라봤다.
별호에 ‘호리’가 붙었으니 교활한 건 틀림없겠지만 어디 한 군데가 비어 있었다.
‘왜 이렇게 개념이 없어?’
남궁화운과 너무 비교되지 않는가.
그는 백리연화를 보자마자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눈치챘다.
무슨 이유인진 모르나 정광이 남궁화인을 쫓지 못하게 붙잡고 있던 그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남궁화인의 행방을 찾아 떠났다.
백리연화가 처음 터진 숲까지는 정광과 함께 달려갔으나 그 뒤에 바로 갈라진 것이다.
한마디로 무엇이 중한지 아는 자였건만…….
한로는 달랐다.
살인멸구(殺人滅口)에 실패했는데도, 되지도 않는 이간계(離間計)나 펼치고 있었다.
글렀다 싶으면 재빨리 튀어야지,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지.
‘무공 수위가 제대로 안 느껴져. 자신이 있는 건가.’
대놓고 물었다.
한로가 아닌 자오에게.
“저 개뼈다귀 분이요. 센 개뼈다귀이신가 봐요.”
“무위가 정확히 알려진 자는 아닙니다. 세긴 하겠으나 진옥룡만 하겠습니까.”
“그런데 왜 저렇게 나댈까요. 나에 대해 파악하려는 건가?”
한로가 한숨을 쉬었다.
“후우. 그런 목적이 있긴 했지.”
“성과는요?”
“괜히 말을 섞었다고 후회하는 참이다.”
“그럼 손발을 섞어보죠.”
정광이 내공을 일으키며 운룡을 뽑으려는 순간.
한로가 쌍장을 내밀었다.
음유(陰幽)한 두 줄기의 장력이 정광을 향해 쏘아졌다.
‘잘 어울리네.’
음흉한 성정과 들어맞는 무공.
정광은 금빛 광채를 머금은 운룡으로 그것들을 갈랐다.
화아악-
그때, 장력 중 하나가 뱀처럼 꿈틀거리며 방향을 틀었다.
운룡을 비껴가며 정광의 뒤에 있는 자오에게 향한 것이다.
정광은 즉각 반응했다.
화아아아아아악-
운룡에서 터져 나온 금빛 검기가 정광과 자오의 주변에 방벽을 만들었다.
남궁세가의 무리에 곤륜과 자신의 것을 넣어 하나로 뭉뚱그린, 남궁화운과 겨루며 그럴듯하게 다듬어진 검형이 한로의 장력을 모두 막아냈다.
콰아앙! 쿠우웅!
이젠 정광의 차례였다.
받은 만큼 돌려준다.
뭐 이건 보통 사람들 얘기고.
정광은 받은 것에 열 배 이상 곱해서 돌려주는 성격.
방벽을 쏘아서 한로를 아예 짓뭉개 버리려고 하는데.
‘이놈 보게.’
한로가 하늘로 솟구치며 장력을 연달아 내려꽂았다.
그것들은 모두 자오를 감싼 방벽에 부딪혔다.
콰콰콰쾅!
한로는 정광과 자오를 넘어 날아가면서 계속 장력을 내질렀다.
정광은 자신을 감싼 방벽까지 자오에게 밀어야 했다.
자오를 덮고 있던 금빛이 더 짙어지며 한로의 장력을 모조리 막아냈다.
‘크윽. 머리가 나쁜 놈이 아니잖아. 싸울 줄도 알고.’
무척 심후한 내공이었다.
때리는 게 아니라 꿰뚫듯이 운용하는 기술도 대단했고.
정광은 검기를 거두고 한로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벌써 한참이나 멀어진 상황.
‘따라갈까.’
고민은 짧았다.
한로의 신법이 빠르기도 했거니와 함정을 판 곳으로 유인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홀로 오진 않았겠지. 만의 하나를 대비해 그런 수를 준비하고도 남을 놈이야.’
뭐 이렇게 끝내는 것도 나름의 이익이 있었다.
‘그보다 영 이상한데.’
위화감이 들었다.
정체 모를 요상한 느낌이었다.
‘뭐지?’
정광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자오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죄, 죄송합니다. 저를 보호하시느라 소면호리를…….”
“아.”
그래, 이거였다.
자오가 없었다면 이렇게 쉽게 보내진 않았으리라.
“짐이 되어서…… 크흑.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정광은 바로 부정했다.
“아뇨. 제 실수인데요. 현생에 이런 일은 처음이라.”
“……네?”
“의표를 찌르죠. 다시 만나면 제 신경을 분산시키려고 자오를 또 공격하겠죠?”
“……그럴 것 같습니다.”
“어떻게든 버텨보세요. 제가 그사이에 잡을게요.”
자오가 입을 떡 벌렸다.
“……모, 못 버티면…… 어떻게 될까요?”
“겸손하시긴.”
정광은 빙그레 웃으며 자오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떻게든 잘되겠죠.”
“…….”
자오는 입을 뻐끔거렸으나 정광은 진심이었다.
전생에 경험한바, 죽음에 맞닥뜨린 이는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곤 한다.
자오라고 못 할 것이 무엇이랴.
‘현생이 평화로워서 그런가. 너무 귀하게 키웠어. 슬슬 놓아주자.’
자오는 자질이 있는 이였다.
잠재력을 끌어내기 위해선 한계에 부딪히게 해야 하는 법.
‘계속 그러다 보면 얻는 게 있기 마련이지. 음?’
정광은 주위를 둘러보며 혀를 찼다.
여기저기서 익숙한 기운이 몰려오고 있었다.
“남궁세가 사람들이 오네요. 그만 가죠.”
정광은 힘이 빠진 자오를 들쳐메고 남궁세가에 스며들었다.
여전히 혼잡한 걸 보니 별다른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남궁화인도 남궁화운도 돌아왔겠지.’
정광은 그들을 떠올리며 씩 웃었다.
‘둘 다 잠 좀 설치겠네.’
* * *
밤이 물러가고 아침이 왔다.
정광은 푹 자고 일어나 아침 식사를 즐겼다.
그리고 침상에서 한참 동안 뒹굴뒹굴하다가 남궁화인의 집무실로 향했다.
‘조금만 놀려주자.’
상황에 따라 많이 놀릴 수도 있고.
“멈추시게.”
전각 밖을 지키고 있던 무인이 막아섰다.
“진옥룡, 무슨 일인가?”
“가주님 뵈려고요.”
“약조가 되어 있나?”
“아뇨.”
“그럼 돌아가게.”
“가주님께서 저를 보고 싶어 하실 텐데요.”
정광의 말대로였다.
전에 봤던 사내가 문을 열고 나왔다.
“진옥룡, 들어오시게. 가주께서 찾으시네.”
정광은 사내를 따라 들어갔다.
집무실 앞에 있던 시비들이 문을 열었다.
화려한 의자에 꼿꼿이 앉아 있는 남궁화인이 보였다.
무척 위엄 있는 모습이었지만…….
‘잠을 못 잤구나.’
눈에 눈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얼마나 많이 고민했기에 저럴까.
정광은 문이 닫히자 예의 있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가주님. 푹 주무셨어요?”
“……덕분에.”
정광은 남궁화인의 맞은편에 앉아 넉살 좋게 웃었다.
“다행이네요. 저도 그렇거든요.”
“…….”
남궁화인은 말없이 정광을 노려봤다.
정광은 그 시선을 담담히 받아냈다.
“어제는 무척 바쁘셨던 것 같은데 오늘은 한가해 보이시네요.”
“……어제나 오늘이나 집무실에서 서류만 만지고 있는데 무슨.”
“어라?”
정광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제 인근의 숲에서 친우분과 계신 걸 봤는데.”
“……그럴 리가. 비슷한 이와 착각을 했나 보군.”
“하긴. 대남궁세가의 가주께서 그런 질 나빠 보이는 중늙은이와 친분이 있으실 리 없죠.”
“……흰소리나 할 거면 그만 나가게.”
“하나만 여쭙고요.”
“……무언가?”
“제 군사, 찾으셨죠?”
“……아직일세.”
“아. 이러면 낭패인데.”
정광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어쩔 수 없죠. 다른 방법을 써야지.”
“……무엇을 하려고?”
정광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모았다.
“죄송합니다. 왠지 비밀로 해야 할 것 같네요.”
“…….”
“남궁세가에서 해야 할 일을 제가 대신하는 것이니 군사를 찾아내면 섭섭지 않게 사례하셔야 해요.”
“…….”
“그때까지 푹 쉬시길.”
정광은 바로 몸을 돌려 집무실에서 나왔다.
뒤통수에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으나 개의치 않았다.
‘어제 일을 물어볼 수도 없고 안 물어볼 수도 없고. 아주 미칠 것 같은 기분이겠지.’
좌불안석으로 만들었으니 곧 입질이 올 것이다.
정광은 그때를 그리며 다음 물고기를 낚으러 갔다.
“태상가주님. 저 왔어요.”
끼이익-
남궁학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밤새 얼마나 많이 궁리했는지 눈그늘이 어제보다 더 내려와 있었다.
“왔느냐.”
“네. 시작하죠.”
남궁학의 죽어 있던 눈이 형형히 빛났다.
“좋아. 기다리던 참이다.”
“남궁화운 대협의 거처는 안 알려주실 거예요?”
“물론.”
남궁학은 무심한 얼굴로 검을 뽑았다.
“그 녀석에 관한 얘기는 그만해라. 내겐 너와의 싸움이 더 중요해.”
정광은 내심 혀를 찼다.
‘이런 걸 아비라고. 발전이 없네. 생각 자체가 없어.’
과거 진천마였던 시절의 아비와 비교하면 성인군자가 따로 없었으나 냉정히 평가하면 자격이 없는 자였다.
‘빨리 끝내고 가자.’
남궁학은 전보다 더 조화를 갖춘 제왕검형을 펼쳤다.
허나 그래 봐야 얼마나 대단할까.
며칠 다듬지도 못한 것인데.
정광은 남궁화운이 펼쳤던 무공을 흉내 냈다.
삭막한 회색 하늘이 남궁학을 짓눌렀다.
그것은 끊임없이 변덕을 부리며 다양한 무리를 풀어냈다.
남궁학의 눈에 경악이 떠올랐다.
‘이건 본가의 것이 아닌가!’
하지만 얼마 안 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남궁의 검처럼 중(重)을 중심으로 삼고 있긴 하나 완전히 다른 무공이었다.
‘끝을 알 수 없는 녀석이로다.’
오기가 솟았다.
자신도 모르게 전력을 다하게 됐다.
어설픈 새 옷을 벗어 던지고 익숙한 것으로 갈아입은 것이다.
정광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러났다.
“다시 돌아가시면 어떡해요.”
“……아!”
“그래도 훨씬 나아지셨는데 스스로 그걸 망가뜨리셨네.”
“…….”
남궁학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이런 바보 같은 짓을. 그 무공은 무엇이냐?”
“독보검(獨步劍)이요.”
다른 이였다면 무슨 그런 오만한 이름이 있냐며 황당해했겠지만 남궁학은 달랐다.
“그럴듯하군. 그럴듯한 이름이야. 네가 만든 것이냐?”
“아뇨. 다른 분이 만드신 걸 얻어 익힌 건데요.”
“……천하는 넓고 사람은 많다더니 오늘에야 그 의미를 알겠구나.”
정광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넓고 많은 걸 왜 따져. 근처에 있는 제 자식이 만든 것인데.’
잠시 생각에 잠겼던 남궁학이 입을 열었다.
“아직 한 번의 비무가 남았지. 내일 이 시간에 오거라.”
“하루 만에 되시겠어요?”
“독보검을 견식하니 떠오르는 게 있어.”
남궁학은 대답도 듣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정광은 어깨를 으쓱한 뒤 발걸음을 옮겼다.
‘나타날 때가 됐는데.’
남궁학의 거처에서 벗어나 울창한 나무숲에 이르러도 남궁화운의 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역으로 나를 안달 나게 만들겠다, 이거군.’
남궁화운에게 끌려갈 생각 따윈 없었다.
‘위진홍도 그만 데려올 때가 됐지. 가볼까.’
정광은 품속에 손을 넣었다 꺼냈다.
* * *
“야 이 미친 새끼야! 언제 풀어줄 거야! 빨리 대답해!”
의자에 묶인 위진홍이 독기를 담아 외쳤으나 남궁화운은 침착했다.
“당과(糖菓)를 더 먹고 싶은가 보지?”
“흡!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거참. 정말 모를 일이군. 그 맛있는 걸 왜…….”
남궁화운은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아직 어린 녀석인지라 마음도 달래줄 겸 어머니의 비법대로 만든 당과를 먹였더니 독약을 먹은 죄인처럼 발광했다.
그게 우스워 소란을 부리면 먹였건만, 그때마다 조용해졌다.
이젠 말만 해도 잘못을 비는 경지에 올랐고.
‘정말 이상한 놈이야.’
정광을 생각하니 그럴 만도 했다.
그 주인에 그 수하 아니겠는가.
‘지금쯤 꽤 궁금해하고 있겠지.’
일부러 오늘은 건너뛰었다.
내일쯤 한번 찾아가 볼 생각이었다.
‘네가 칼자루를 쥐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아직 끝난 게 아니…… 음?’
남궁화운의 얼굴이 굳었다.
동시에 한쪽 벽면이 터져 나갔다.
콰아아앙!
흩날리는 잔해를 헤치며 정광이 걸어들어 왔다.
“……소형제, 여길 어떻게 알고 찾아왔지?”
정광은 품속에 손을 넣었다 꺼냈다.
그 손엔 하얀 가루가 채워진 병이 들려 있었다.
남궁화운이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어제 뿌렸던 가짜 독분(毒粉) 아닌가?”
“독분이 아니긴 했죠.”
정광이 씩 웃으며 덧붙였다.
“정확히 말하면 십리추종향(十里追從香)이라 해요.”
“……!”
“놀라시긴. 감춰둔 한 수가 모든 걸 뒤집기 마련이잖아요.”
자신이 독보검을 펼치며 했던 말임을 눈치챈 남궁화운이 얼굴을 굳혔다.
“친우 놀이는 그만 끝내주셔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