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함께 천하를
남궁세가는 새벽부터 소란스러웠다.
실종된 위진홍을 찾느라 그랬는데, 세가 내의 모든 곳을 뒤지는 것은 물론 세가 밖으로도 많은 무인이 쏟아져 나갔다.
나갔던 이들이 들어오고 다른 이들이 또 나가고 무척 번잡한 상황.
하늘이 어둑어둑해지자 번잡함이 극에 달했고, 이런 상황을 의도한 남궁화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마만의 잠행(潛行)인지.’
어렸을 적, 아비의 눈을 피해 누군가와 함께 나간 후론 처음이었다.
정문을 통과해 걷다 보니 그때의 감정이 떠올랐다.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두근했었는데…….’
지금은 달랐다.
놀러 나가는 게 아니었다.
중요한 목적이 있는 만큼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안 돼.’
이렇게 혼잡한 상황에서 변복에 인피면구(人皮面具)까지 쓴 그를 알아보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정광이라면…….
‘눈치챌지도 모르지. 어디에 갔는지 아까부터 안 보인다는 보고를 받긴 했으나 함정일 수도 있어.’
아니면 몰래 밖에 나와서 흥청망청 놀고 있을지도.
정광의 성정을 생각하면 정말 그럴지도 몰랐다.
‘감히 내 가문을 멋대로 드나들어?’
울화통이 터졌으나 어쩔 수 있나.
막을 힘이 없으니 감내해야 했다.
‘이런. 놈만 생각하면 감정적으로 변하는군.’
남궁화인은 속으로 혀를 찼다.
정광이 자신을 쫓고 있다는 가정하에 움직여야 하거늘, 이 무슨 어리석은 짓이란 말인가.
‘따라올 테면 따라와라. 한 방 먹여주마.’
남궁화인은 자연스럽게 사람들 사이에 섞여 걸었다.
얼마 안 가 복잡하게 얽힌 골목이 나타났다.
‘여기까진 됐고.’
아담한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기다리고 있던 자가 눈에 안 띄는 평복과 인피면구를 내밀었다.
남궁화인도 입고 있던 옷과 인피면구를 벗어 건넸다.
두 사람은 서로의 것을 바꿔 착용했다.
-가주. 먼저 가보겠습니다.
-주의하게.
-네.
아까의 남궁화인과 똑같은 용모가 된 사내가 집 밖으로 나갔다.
‘……일흔여덟, 일흔아홉…….’
남궁화인도 백까지 센 뒤 다른 문을 통해 나갔다.
이런 일이 여러 번에 걸쳐 반복됐고…….
나무꾼 옷차림에 지게를 진 남궁화인은 작은 숲에 도착했다.
‘제대로 지키고 있군.’
숲 곳곳에서 익숙한 기운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가 가주가 된 뒤 만든 첩보 조직, 비연단(秘燕團)의 요원들이었다.
‘……저자인가.’
이미 밤이 된 시간, 숲속은 한 치 앞도 안 보일 정도로 어두웠다.
허나 남궁화인은 대단한 고수.
편하게 오솔길을 걸어 큰 그루터기에 앉아 있는 왜소한 중늙은이 앞에 이르렀다.
‘……위험한 놈이군.’
무공 수위를 가늠할 수 없었다.
최소한 남궁화인과 동급이라는 얘기였다.
‘사마련주의 심복이라면 저 정도는 돼야겠지.’
태연히 걸어 중늙은이의 맞은편 그루터기에 앉았다.
중늙은이가 미소를 띠며 인사했다.
“세상에 이런 복이 있나. 무명소졸(無名小卒) 한로가 창천일검(蒼天一劍) 남궁 대협을 뵙게 되었구려. 영광이외다.”
“겸양이 과하시오. 그대의 무위와 심계는 귀가 따갑게 들었소.”
“허허. 그저 련주를 오랫동안 보필해온 노복(奴僕)인 뿐인 것을. 금칠을 해줘서 고맙소. 덕분에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닐 것 같소이다.”
사람 좋게 웃는 한로와 달리 남궁화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사파의 종자가 감히 누구에게 농지거리를 던지는가.
어쩔 수 없이 만나기는 했지만 농을 나눌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보기보다 급하시구려. 그럼 소리가 안 새어나가게 막겠소이다.”
한로가 내공을 일으켜 주변을 둘렀다.
사파인이라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정순한 기였다.
“일단 하나는 됐고.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한로는 눈을 지그시 감고 기감을 퍼뜨렸다.
잠시 뒤, 눈을 뜬 그의 입가엔 미소가 맺혀 있었다.
“가주의 수하들이 무척 바쁜 것 같소.”
“할 일을 하는 것뿐이오.”
“진옥룡이 귀가(貴家)에 왔다기에 약조한 날짜를 미루실 거라 생각했는데, 용케 꼬리를 안 달고 제대로 오셨소이다.”
남궁화인의 눈썹이 치솟았다.
“나를 가볍게 보는 것이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소. 그랬다면 서신을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오.”
“흐음.”
남궁화인은 한로의 눈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련주의 서신, 읽긴 했소만 이해가 안 가는 점이 많소.”
“궁금하신 게 있으면 답해 드리리다.”
“련주가 싸움을 멈추고 싶어 하는 게 맞소이까?”
“그렇소.”
“내가 휴전을 제의하면 내 체면을 봐서 많은 부분을 양보할 것이고?”
“물론이오.”
남궁화인의 눈이 빛났다.
“귀련(貴聯)이 지금 불리한 상황인 건 맞으나 너무 갑작스럽소.”
“가주.”
“말하시오.”
“우리, 솔직해집시다.”
한로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어느 한쪽이 완전히 거꾸러지는 싸움 따윈 있을 수 없지 않소. 빛이 있어야 그림자도 있는 법, 정(正)이 있어야 사(邪)가 존재하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어차피 중간에 끝낼 생각이었다고 들리오만.”
“맞소이다.”
“귀련의 피해가 꽤 큰데 괜찮겠소?”
“그게 좀 문제이긴 하오. 적당히 이득을 보고 물러나려 했는데, 의외의 변수 때문에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다니.”
“…….”
두 사람은 동시에 같은 사람을 떠올렸다.
정광이었다.
“그래도 어쩌겠소. 마냥 나쁜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니 이쯤 해서 마무리를 지어야지.”
“귀련의 부련주인 도사(刀邪) 가균과 산서지부장이었던 쌍도혈귀(雙刀血鬼) 송훈 같은 이를 말하는 것이구려.”
“숨길 만한 일도 아니니 속 시원히 말하리다. 평소 련주의 뜻에 사사건건 반(反)하고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치던 자들이 거꾸러졌소. 저절로 쭉정이를 솎아내게 되었다 할까. 하릴없이 밥만 축내던 놈들도 떨굴 수 있었고.”
“애초에 그걸 노리고 싸움을 일으킨 것 같소만.”
“뭐 겸사겸사. 편하게 생각하시오. 그보다…….”
한로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련주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오?”
“생각 중이외다.”
“시간이 없소. 지금 정하셔야 하오.”
“…….”
침묵하던 남궁화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거절한다면?”
“그럴 리가. 그랬으면 여기까지 오셨을 리도 없지.”
“그대를 잡기 위해서 왔을 수도 있소.”
“그것 역시 아니외다.”
“왜 그렇소?”
한로가 빙그레 웃었다.
“아니, 불가능한 일이라 정정해야겠구려.”
“…….”
남궁화인의 눈이 깊어졌다.
하지만 한로의 눈은 그대로였다.
“겸손한 줄 알았더니 아니군.”
“이건 진짜 사실인지라. 하하.”
남궁화인은 넉살 좋게 웃는 한로를 보며 기시감을 느꼈다.
너무나 익숙하지만 불편한 인물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아비인 남궁학이었다.
‘왜 이런 생각이…….’
본능이 속삭였다.
저자와 싸우면 안 된다고.
‘……그렇다고 마냥 밀릴 수는 없지.’
남궁화인은 바로 평정을 되찾았다.
“내가 응한다 칩시다. 련주가 약조를 지킬 거라 어떻게 믿소?”
“신뢰는 충분히 드린 것 같소만.”
“……?”
“귀가에 협조를 구하기 위해, 귀가가 아니라 무당과 제갈세가를 치겠다고 서신에 적었지 않소. 실제로 그렇게 행했고.”
“…….”
“가주. 결단을 내리시오. 자꾸 망설이면 다른 곳을 택할 수밖에 없소.”
“……!”
“못 믿겠소? 그럼 시험해 보시고.”
“…….”
남궁화인의 머릿속에 몇 개의 가문과 문파가 떠올랐다.
자신을 따르는 척하면서도 잇속을 챙기려고 눈이 벌건 이들이었다.
‘……어차피 이게 최선이다.’
남궁화인은 마음을 굳혔다.
아니, 이미 정하고 있던 것을 입 밖으로 꺼냈다.
“맹에서 화친을 주장할 테니 약조를 지키시오.”
“물론이외다. 본련이 어느 정도 양보해야 귀맹에서도 받아들일 것이니 안심하시오. 아. 그리고…….”
한로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축하드리오.”
“무엇을 말이오?”
“수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게 되실 것 아니오? 길고 피곤했던 싸움을 종식시킨 영웅으로.”
“영웅은 무슨. 해야 마땅한 일을 하는 것이거늘.”
“허허. 역시 대협이시외다.”
“…….”
“이런. 농이 아니라 진심이오.”
“……됐소. 그만 가겠소이다. 연락은 전처럼 주고받는 것으로 알겠소.”
남궁화인이 일어서자 한로가 손을 저었다.
“아직 할 말이 남았는데 왜 그리 급하오?”
“일없소.”
“조금 전의 제안보다 더 좋은 것인데도?”
“…….”
“본련은 물론 귀가에도 무척 좋은 일이니 앉으시오.”
“……!”
남궁화인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귀맹이 아니라 귀가에 좋은 일이라니.
무림맹이 아닌 남궁세가에 이익이 되는 일이란 말 아닌가.
“들어나 봅시다.”
못 이기는 척 다시 앉자 한로의 목소리가 소름 끼치게 변했다.
“진옥룡, 그 망나니 말이오. 치웁시다.”
“……!”
“본련에서 손을 쓰겠소. 가주는 그저…… 흐음.”
한로가 말끝을 흐리며 먼 곳에 있는 노송(老松)을 흘깃 봤다.
그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실망이오, 가주.”
“무슨 말이오?”
“꼬리를 달고 오셨소이다.”
“말도 안 되는…….”
남궁화인이 화를 내려 하자 한로가 제지했다.
“그만. 내가 처리할 테니 돌아가시오. 연락드리겠소이다.”
한로가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기를 풀었다.
그러자 그가 흘깃 봤던 노송에서 하얀 연기와 불꽃이 솟아올랐다.
휘이이이이- 퍼엉!
폭죽이었다.
노송에서 누군가 뛰어내려 숲 밖을 향해 달리는 모습이 보였다.
남궁화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고 한로의 눈이 기이하게 번들거렸다.
“이럴 수가! 어떻게?”
“눈치가 정말 빠른 놈이오. 나중에 봅시다.”
한로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달리고 있었다.
‘대체 누구지?’
남궁화인 앞에선 태연한 척했으나 그도 무척 놀란 상태였다.
‘경공술은 제법이다만, 내공은 보잘것없어. 그런데 저 거리에서 내 이목을 속이다니.’
만약 놈이 욕심을 부려 더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면 모르는 채 지나쳤을지도 몰랐다.
‘잠행과 은신에 능한 놈인 것 같은데,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했을까?’
내공으로 대화가 새어나가는 것을 막고 있었다.
가까이 접근해 봤자 들을 수 없는 것이다.
‘가만.’
그런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한다는 자들이 떠올랐다.
‘설마…… 영인(影人)?’
그럴 리가.
맥이 끊어진 지 꽤 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잡으면 알겠지.’
내공을 끌어 올려 땅을 박찼다.
높은 나무들 위로 날며 주위를 둘러봤다.
‘……이런 교활한 놈을 봤나!’
검은 야행복을 입은 사내가 어느새 왼쪽으로 방향을 바꿔 달리고 있었다.
“멈춰라!”
사내는 멈추는 대신 폭죽을 또 쏘아 올렸다.
한로를 향해.
“이 쥐새끼가!”
시야가 하얗게 변했다.
가슴속에서 살심이 들끓었다.
한로는 장력으로 불꽃을 후려치며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 그래, 뛰어라! 곧 지옥을 보여주마!”
* * *
‘지옥은 개뿔.’
자오는 전력으로 달리며 코웃음 쳤다.
정광에 의해 진짜 지옥을 몇 번이나 경험한 그였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어쩐다.’
중늙은이는 대단한 고수일뿐더러 잔인하기로 이름 높은 자였다.
거리가 가까워져 손을 쓰면 삼초나 버틸 수 있으려나.
‘아니, 일초 만에 끝날지도 몰라.’
괜한 욕심을 부린 게 후회됐다.
사마련에 적을 두고 있을 때도 꼭꼭 숨겼거늘.
사부에게 배웠던 비전 기예를 쓸 생각을 왜 했을까.
간단했다.
정광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였다.
‘연화채의 배들을 가라앉혔을 때처럼 말이지.’
하지만 지금은 폐만 끼치게 된 상황.
발각된 걸 눈치채자마자 백리연화(百里煙火)를 터뜨렸다.
사천당가에서 정광을 위해 개량한 것인데, 당가를 상징하는 녹색이 아니라 곤륜을 의미하는 흰색으로 바꾼 것이었다.
‘벌써 두 개나 터뜨렸어.’
이제 하나밖에 안 남았다.
아끼다가 최후의 순간에 써야 했다.
‘나는 죽더라도 진옥룡께서 저자를 잡으시겠지.’
정광이라면 엄청난 복수를 해줄 것이다.
그러면 마음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겠지만…….
‘안 죽는 게 최고야.’
자오는 아주 오래 살고 싶었다.
천년만년 살 것만 같은 정광과 함께 최대한 오랫동안 천하를 노닐고 싶었다.
곁다리로 백승무도 함께하면 좋고.
무혈단원들도 간간이 보면서 말이다.
‘산다!’
자오는 최선을 다했다.
사부에게서 도망치며 봉인했던 것들을 모두 꺼냈다.
덕분에 부족한 무공으로도 꽤 오래 도주할 수 있었다.
‘아니, 진옥룡께 배워서 실력이 늘어난 덕분인가.’
자오는 막다른 골목 끝에 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마지막 백리연화를 쏘아 올리고 돌아서자 소름 끼치는 기운을 발산하는 중늙은이가 보였다.
“……오랜만이오.”
“날 아느냐?”
“물론.”
“얼굴을 드러내라. 어떤 놈인지 궁금하군.”
자오는 천천히 복면을 벗었다.
한로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비루먹은 까마귀잖아. 의외인걸.”
“무엇이 말이오?”
“네놈 같은 쓰레기가 영인이었다니. 우스운 일 아니냐.”
“…….”
“어디 보자. 파천방(破天幇) 출신이었지? 공갈협박으로 배를 채우는. 그 보잘것없는 방파가 영인문(影人門)이었다니. 잘도 감추고 있었구나.”
자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함부로 말하지 마시오.”
“무어라?”
“파천방은 사마련의 전신인 사흑맹(邪黑盟) 때부터 탐관오리들을 대신해 귀주성(貴州省) 정안현(正安縣)의 치안을 책임져온 방파로, 당신에게 모욕받을 정도로 후안무치한 곳이…….”
“갈! 네놈의 주둥아리는 여전하구나!”
“……아니외다! 자고로 사람이나 조직이나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는 법. 외부에서 보기엔 다소 과한 일들이 있었을지 모르나, 그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시끄럽다! 시간을 끌 생각 따위는 하지 마!”
“…….”
“너는 지금 죽을 테니까.”
“…….”
한로가 오른손을 들었다.
자오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이게 끝인가.’
아니었다.
맑은 목소리가 그의 귀를 울렸다.
“자오, 왜 무리했어요? 죽고 싶은 건 아니죠?”
“……!”
천천히 눈을 떴다.
바로 앞에 익숙한 등이 있었다.
분명 익숙한 등이었으나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다.
“……물론 아닙니다, 진옥룡.”
“그래요. 아직도 안 가본 데가 많잖아요. 함께 천하를 둘러봐야지 이게 뭐 하는 짓이람.”
정광이 한로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앞으로도 내 허락 없이 죽으면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