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236화 (235/569)

236화

저는 홀몸이 아니거든요

세간에서 제멋대로라 평가받는 정광이었으나 진천마로 살았던 시절과 비교하면 순둥이나 다름없었다.

허나, 그 악명 높은 진천마였을 때도 웬만하면 지켰던 규칙이 있었으니.

‘사람은 욕하되 무공 그 자체는 욕하지 말자’였다.

이는 예를 알아서도 아니고 심성이 착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귀찮아서였다.

‘상대의 힘이 강하면 본인이 모욕받는 건 참지만, 뿌리가 무시당하는 것까지는 참지 못해.’

상대가 보통 강한 게 아니라 말도 안 되게 강한 정광이었어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면전에선 감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으나 앙심을 품고 있다가 뒤통수를 치는 놈이 가끔 나왔다.

‘반평생을 넘게 싸워 복종시킨 놈들이 그랬지. 그래서 깨달았고.’

사람만 욕하고 무시하자.

그 사람이 멍청하고 모자라 제대로 못 익힌 것이지, 무공이나 진법이나 걔들이 뭘 잘못했단 말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오히려 주인을 잘못 만난 그 녀석들에게 힘내라고 위로해야 할 판이었다.

그래서 사람만 패고 욕했다.

칼을 거꾸로 쥐는 놈들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렇게 직접 체득한 진리였건만.

‘실수했네.’

쓸데없이 복잡하고 큰 효용은 없는, 쉽게 말해 케케묵은 진이라 솔직히 말해 버렸다.

훌륭한 절진이라고 바로 수습하긴 했으나 남궁화운의 안색은 영 안 좋은 상태.

‘할 수 없지.’

다음 해결 단계로 넘어갈 수밖에.

더 귀찮아지기 전에 아예 싹을 잘라 버리는 거다.

그리고 뒤처리를 어떻게 할까 생각하는데…….

남궁화운이 입을 열었다.

“진법에도 조예가 있다고 듣긴 했지만 대단하군.”

“이 정도 가지고 뭘요.”

“아니면 본가의 진법이 별것 아니었던 건가?”

정광의 눈이 빛났다.

왔다.

여기서 한 번 더 질러주는 거다.

눈이 뒤집힌 상태로 달려들게!

“솔직히 별것 아닌 수준이 아니라 엉망이죠.”

“…….”

“뭐 이해는 해요. 남궁세가는 검가(劍家)잖아요. 허구한 날 검만 주무르는 판에 진법을 알아봐야 얼마나 알겠어요.”

진법은 무식한 너희들이 익힐 만큼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

남궁화운의 입술이 꿈틀거렸다.

정광이 좋아, 붙어보자, 하며 내공을 끌어 올리려고 할 때.

예상치 못한 말이 들렸다.

“소형제의 말이 맞아. 확실히 그런 것 같다니까.”

“네?”

“본가에 진법이라곤 이런 것들밖에 없어서 익히긴 했지만 뭔가 아쉬운 기분이 들었었거든.”

“…….”

이게 아닌데.

흥분시켜야 했다.

“대협의 자질이 모자란 탓도 있죠.”

“내 잘못이다?”

“자질이 있으셨으면 부족한 점을 보완하거나 새로운 진식을 창안하셨을걸요. 그냥 감사히 쓰시죠. 불만 품지 말고.”

“…….”

남궁화운이 정광을 노려봤다.

정광은 그 시선을 마주하며 내심 웃었다.

‘자존심 좀 상했나? 와봐. 어서.’

남궁화운은 정광의 도발에 넘어갔다.

반만.

“소형제, 재촉이 너무 심하잖아. 꽤 애썼으니 넘어가 주지.”

남궁화운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검을 뽑았다.

푸른색이 은은히 감도는 곧은 검신이 드러났다.

정광의 눈에도 괜찮은 검이었다.

“가난하신 줄 알았는데.”

“값나가는 건 이것 하나야.”

“태상가주님께서 수전노는 아니신가 보네요.”

정광도 운룡을 꺼냈다.

검집에서 나온 운룡이 햇살을 반사하며 기지개를 켰다.

운룡을 물끄러미 보던 남궁화운이 입맛을 다셨다.

“거참. 탐나는 검이라니까.”

“이 녀석은 대협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네요.”

“저런. 안타까운 오해를 하고 있군.”

남궁화운이 검을 바로 세웠다.

푸른 검신에서 무거운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진법엔 자질이 없을지 몰라도 무공엔 아니거든.”

“흐음.”

“정말이야. 소형제 마음에 꼭 들걸?”

“한번 보죠.”

정광은 금룡을 움켜쥐고 달려들었다.

남궁화운의 푸른 검이 하늘이 되어 맞섰다.

정광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피식 웃었다.

‘무공만큼은 자질이 있긴 하네. 언제였더라?’

곤륜산에서 내려와 무림맹이 있는 하남성 남양(南陽)에 갔을 때다.

정광과 언의진의 사이를 오해해 질투심을 품고 덤벼들었던 남궁진영과 남궁진도가 생각났다.

‘섬전십삼검뢰(閃電十三劍雷)와 창궁비연검(蒼穹飛燕劍)이었지.’

섬전십삼검뢰.

이름대로라면 순간적으로 떨어지는 번개여야 했건만, 남궁진도가 펼쳤던 것은 쉬지 않고 내리는 소나기였다.

하지만 천재라는 남궁화운이 펼쳐내는 그것은 한순간의 기회를 노려 최단 거리로 급박하게 떨어지는 섬전 그 자체였다.

‘창궁비연검도 그렇고.’

남궁진도처럼 맥없이 휘젓는 검초가 아니었다.

남궁화운의 손에 들린 푸른 검은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제비가 되어 정광을 쉴 틈 없이 위협했다.

‘게다가 이것뿐만이 아니란 말이야.’

그 어떤 검식에도 무거운 기운이 담겨 있었다.

남궁세가가 중시하는 중(重)의 무리가 중심을 잡고 있다 할까.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고 딱 좋네. 내공도 보통이 아닌데.’

과거 스스로 독을 먹은 남궁력이 창궁대연신공(蒼穹大衍神功)을 운공하는 걸 도우며 그 진체(眞體)를 들여다봤던 적이 있다.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도도한 기운이 넘실거리는 걸 보면 보다 상위의 내공심법인 게 분명하리라.

‘하지만 거기까지지.’

남궁화운은 강했으나 정광의 예측 안에 있었다.

어떤 식으로 나올지, 이렇게 하면 어떻게 반응할지 대충이나마 그려졌다.

이는 남궁세가의 무공을 이해해야 가능한 일.

정광은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 능력을 펼쳐냈다.

“으쌰.”

남궁화운이 섬전을 내려치자 금룡으로 물어뜯었다.

제비의 날카로운 위협도 남김없이 쳐냈다.

“과연.”

남궁화운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몇 걸음 물러났다.

“본가 아이들 몇을 혼쭐 내줬다 들었는데 그때 파악한 건가?”

“네.”

“어쩐지. 소형제가 태상가주님과 겨룰 때도 느꼈거든. 제왕검형은, 그것도 변형된 제왕검형은 처음 볼 텐데도 당황하지 않더라고.”

“남궁세가의 무리가 오롯이 담긴 것이었으니까요. 익숙한 부분이 좀 있었죠.”

“게다가 흥미를 가지고 상대하느라 힘을 아끼는 느낌이던데. 맞지?”

“대협이야말로 아끼고 계시잖아요. 태상가주님의 변화된 무공을 한눈에 파악하신 분답지 않게.”

남궁화운이 헛웃음을 흘렸다.

“허허. 이거야 원. 밑천 다 털리겠네.”

“어? 진짜 남은 게 있으세요?”

남궁화운이 빙그레 웃었다.

“아까 말했을 텐데. 내가 무공에는 자질이 있다고.”

말이 끝나자마자 기세가 바뀌었다.

정명한 푸른 하늘이 아니라 삭막한 회색 하늘로.

당연히 검식도 바뀌었다.

여전히 중(重)을 뼈대로 삼고 있었으나 변덕맞은 하늘처럼 쾌(快), 환(幻), 변(變), 유(柔), 강(强) 등의 수많은 무리가 더해지거나 빠지며 쏟아져 내렸다.

남궁이되 남궁이 아닌 검.

남궁화운의 검이라 할까.

‘이것 봐라?’

정광은 내심 감탄했다.

남궁화운이 강한 것은 알았으나 그 경지가 이런 곳에까지 올라 있을 줄이야.

‘배우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신의 것을 만들어낼 줄 아는 무인이구나. 제법인데.’

무인은 무공을 위해서라면 목숨조차 내던지는 족속이다.

행여 비급이라도 나타난다?

강호가 피로 물드는 건 당연지사.

모두 자신이 지닌 것보다 강한 무공을 익히고 싶어 하기에, 새로운 무공을 창안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냥 만드는 것도 아니라 괜찮은 걸 만들었다는 말이지.’

칭찬받을 만한 일이다.

그래서 입을 열어 칭찬했다.

“자질이 없진 않으시네요.”

남궁화운이 무거운 일격을 찔러 넣으며 대꾸했다.

“소형제야말로.”

정광은 뒷걸음질 치며 운룡으로 전면을 방어했다.

몇 차례 더 검격을 퍼부은 남궁화운이 씩 웃었다.

“생소한 걸 봐서 당황했나 보군.”

“조금요.”

“조금이 아닌데.”

남궁화운의 말대로였다.

정광은 계속 밀리고 있었다.

남궁화운의 미소가 짙어졌다.

“감춰둔 한 수가 모든 걸 뒤집을 수 있지.”

“물론이죠.”

“……?”

패색이 짙은 주제에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는데.

정광의 왼손이 품속에 들어갔다 나오며 무언가를 뿌렸다.

‘독분(毒粉)!’

남궁화운은 즉시 호흡을 멈추며 왼손으로 장력을 내질렀다.

퍼엉!

심후한 내공으로 펼쳐진 천풍장(天風掌)이 독분을 저 멀리 날려 버렸다.

‘얕은수를! 어?’

그 독분을 가르며 금룡이 짓쳐 들었다.

‘여기서 물러나면 기선을 뺏겨!’

꿋꿋이 선 채 검을 움직여 금룡을 베었지만…….

휘릭. 끼리릭-

금룡이 몸을 뒤틀며 푸른 검신을 타고 내려왔다.

그대로 뒀다간 검을 쥔 오른손이 잘릴 상황!

‘고작 이거냐!’

남궁화운은 천재란 호칭이 아깝지 않은 무인.

손목을 뒤틀었다.

손목에서 시작된 작은 회전은 그의 검을 타고 올라가 크나큰 회오리를 일으켰다.

창!

금룡이 튕겨 나가며 정광의 가슴이 열렸다.

그곳을 향해 일격을 꽂아 넣으려던 남궁화운의 눈이 커졌다.

‘함정?’

어느새 다가온 정광의 왼손바닥이 그의 검을 후려쳤다.

독분이 묻은 손으로 검면을 때린 것이다.

쨍!

‘윽.’

독분이 휘날렸다.

검이 밀려나며 그의 가슴도 활짝 열렸다.

그곳에 검을 쥔 정광의 오른팔이 접혀지며 팔꿈치가 꽂혔다.

뻑!

‘크흑.’

왼손으로 간신히 막아낸 남궁화운이 정신없이 물러나며 검을 휘둘렀다.

의외로 정광은 따라붙지 않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실전경험이 적으실 텐데. 임기응변에 능하시네요.”

“능하기는. 아파 죽겠는데.”

남궁화운은 얼굴을 찌푸리며 왼손을 털었다.

“나참. 피멍 들었잖아.”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것보단 낫죠.”

“그건 그렇지. 그런데 독을 뿌리는 건 좀 그렇지 않아?”

“독 아니에요. 대협께 통할 만한 독은 말도 안 되게 비싸거든요. 빈틈을 만들려고 한 거죠.”

“끙. 지레 겁먹었군. 이런 망신이 있나.”

남궁화운이 속내를 토로하자 정광이 칭찬했다.

“대협은 참 재밌는 분이세요.”

“나? 왜?”

정광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뿌리에 신경 쓰지 않고 자기 길을 걸으려 하시잖아요.”

“뿌리는 무슨.”

남궁화운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반쪽짜리야. 아니,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며 완전히 잘린 거나 마찬가지지.”

“자유롭고 좋네요. 아까 그 검법, 이름이 뭐죠?”

“나 혼자 가지고 놀던 것이라 이름 따윈 없는데.”

남궁화운의 눈이 장난스레 빛났다.

“소형제가 하나 지어주지 그래? 고맙게 쓸게.”

만약 이 자리에 무혈단원들이 있었다면.

아연실색하며 뜯어말렸을 것이다.

정광에게 이름을 정해달라?

제정신이라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

“맡겨주세요. 뭐가 좋을까…….”

정광이 최선을 다해서 지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렇지. 독보검(獨步劍) 어때요?”

“……너무 과한 것 같은데.”

독보적인 검이라니.

듣기만 해도 얼굴이 뜨거워졌다.

허나 정광의 독보는 다른 의미였다.

“외톨이시잖아요. 홀로 걷는.”

“…….”

“하도 심심해서 홀로 노시다 보니 나온 검법이고.”

“…….”

틀린 말은 아닌데.

그래도 좀 그랬다.

‘이건 아니야. 무르자.’

얼굴에 철판을 깔고 거절하려 했건만.

정광은 이미 기정사실로 하고 소문을 퍼뜨릴 방안을 모색 중이었다.

“무림맹에 방을 붙이고 유 소협에게 부탁해 중원 전역에 널리 알려야지. 그리고…….”

남궁화운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소형제, 그냥 독보적인 검으로 가자.”

“아. 생각보다 거만하시네요. 그래요, 그 정도 편의는 봐드리죠.”

남궁화운이 헛웃음을 흘렸다.

정광은 자연스레 두 손을 모았다.

‘무량수불. 오늘도 협행을 했구나.’

베풀면 돌려받는 게 상식.

정광은 당당히 요구했다.

“그만 가도 되죠?”

“미안해서 어쩌나. 그건 곤란해.”

“어려운 길을 택하시네요.”

정광은 한숨을 쉰 뒤 운룡을 고쳐 쥐었다.

“저도 하나 보여 드리죠.”

“혹시 소형제가 창안한 무공이야?”

“창안이라기보단, 적당히 주무른 거예요.”

정광의 몸과 운룡에서 기세가 일어났다.

지금까지의 균형 잡힌 것이 아닌 무거운 기세였다.

“……이건 설마!”

“비슷하지만 다를걸요.”

정광은 머릿속에 담겨 있던 것들을 끄집어냈다.

과거 남궁력의 운기요상(運氣療傷)을 돕다가 그의 몸속에서 이리저리 비틀어 변형시켰던 진기의 흐름.

창궁(蒼穹)을 바탕으로 하는 남궁세가의 무공과 구름을 상징으로 삼는 곤륜의 무공, 거기에 자신의 것까지 넣어 조합했던 검법까지.

‘푸른 하늘 위에서 하얀 구름을 이끌며 질주하는 용이라…….’

꽤 그럴듯한 게 나왔었지만 이런저런 일에 바빠 손을 놓고 있었다.

거기에 남궁학의 무리와 남궁화운을 상대하며 느낀 요소들을 버무렸다.

그리고 펼쳐냈다.

화아아악-

운룡에서 금빛 검기가 솟구쳐 무거운 방벽을 이뤘다.

그것은 정광의 의지대로 남궁화운에게 쇄도했다.

“으하하! 이런 미친 소형제를 봤나!”

남궁화운이 대소를 터뜨리며 대응했다.

금빛 방벽과 회색 구체가 부딪혔다.

콰아앙!

금빛 검기와 회색 검기가 서로를 향해 쏘아졌다.

콰콰콰쾅!

정광도 웃고 남궁화운도 웃었다.

두 사람은 그만큼 즐거웠다.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한 지 얼마나 됐을까.

정광이 손을 저으며 물러났다.

“조금 쉬었다 하죠.”

“그럴까?”

그들은 마주 본 채 가부좌를 틀었다.

서로를 전혀 의심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흐으읍.”

운기조식을 마친 정광이 일어섰다.

남궁화운이 그 뒤를 따랐다.

“시간도 끌고 재밌는 싸움도 해서 좋긴 한데 말이야. 소형제, 이래도 괜찮아?”

“그냥 보내주시려고요?”

남궁화운이 두 손을 살짝 모았다.

“미안한데, 그건 안 돼.”

“혼자라서 외로우셨군요.”

“그런지도 모르겠군.”

“그러실 줄 알았다니까. 뭐 상관없어요. 힘은 보충했으니까.”

“나를 이길 수 있다 이건가?”

“꼭 그렇다기보단…….”

그때, 남궁세가와 어느 정도 떨어진 숲에서 폭죽이 솟아올라 하얀 연기와 불빛을 토했다.

휘이이이이- 퍼엉!

정광은 그것을 힐끔 보며 말을 이었다.

“저는 홀몸이 아니거든요. 저 대신 가주님을 감시할 친우가 있죠.”

“……누구를 말하는 것이지?”

“말이 좀…… 아니, 많은 분요.”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