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눈썰미
남궁화인을 또 감시하러 갔던 자오가 새벽에 돌아왔다.
“진옥룡, 난리가 났습니다.”
“무슨 일인데요?”
“남궁가주가 식솔과 가신을 불러 모아 호통을 쳤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든 군사를 찾아내라고 말입니다.”
“다들 황당해했겠네요.”
“그런 낌새였습니다.”
정광이 피식 웃자 자오도 웃었다.
동이 튼 뒤에 해도 될 말이거늘, 난데없이 새벽에 그런 소란을 벌이니 얼마나 당황스럽겠는가.
하지만 남궁화인으로서는 그럴 만했다.
‘그만큼 경각심을 주려는 거야.’
내 마음이 이렇게 급하니 똑바로 해라, 이런 의미다.
식솔도 가신도 당황스러움이 가시면 남궁화인의 의중을 눈치챌 게 분명했다.
자연히 최선을 다해 위진홍을 찾을 수밖에 없으리라.
‘남궁학이 밥값…… 아니, 무공값을 제대로 했네. 아들을 엄청나게 혼냈나 본데.’
두 사람의 성품으로 미루어 보아 부자지간의 관계가 돈독할 리는 없다.
그런데 이런 일까지 생겼으니 더 벌어져 버렸을지도 몰랐다.
‘뭐 그렇게 싸우면서 크는 거지.’
정광은 고생한 자오를 위로하고 푹 쉬라 말했다.
그리고 천룡단의 숙소에 가서 허청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했다.
심각한 얼굴로 듣던 허청은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예측했다.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대대적인 수색을 하겠구나.”
“네.”
“이곳에도 올 것 같은데.”
“그럼요.”
위진홍이 실종된 이래 남궁세가가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니다.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기에 웬만한 곳은 다 찾아봤을 터.
그런데도 못 찾았다?
허청과 정광이 위진홍을 숨겨놓고 허튼수작을 부리는 건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마음 편히 뒤지라고 하세요. 수고 많다고 등도 두드려 주시고요.”
“……앞엣것만 하마. 떳떳하다는 걸 확실히 드러내라는 말이구나.”
“네. 혹시 사부님 방에 춘화(春畵)나 술이 있으면 빨리 치우시고요. 바쁘시겠어요.”
“……뒤엣것만 하면 돼.”
정광은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야말로 치워야 할 게 산더미였다.
하지만 정광이 누군가.
고금제일천재 아니던가.
간단히 해결했다.
“사제. 나랑 방 바꾸자.”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그냥. 내 가슴이 그러고 싶다 하네.”
“…….”
백승무의 눈동자가 흔들리다가 멈췄다.
영 꺼림칙했으나 어쩔 수 있나.
까라면 까야지.
“……그러시지요, 사형.”
“고마워, 사제.”
이렇게 방을 바꾼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남궁세가 무인들이 들이닥쳤다.
“아침부터 미안하네! 잠시 폐를 끼쳐도 되겠는가?”
밖에서 들려온 큰 소리에 무혈단원들이 각자의 방에 있는 창문을 열고 머리를 내밀었다.
‘……아침이라고?’
‘……이제 막 동이 틀락 말락 하는데?’
‘……왜 저렇게 몰려온 거야?’
어처구니없어하는 단원들과 달리 정광은 태연했다.
“폐는 벌써 끼치셨는데요.”
선두에 선 중년 무인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근래에 강호를 떨어 울리는 진옥룡인 것 같은데…… 맞는가?”
“네.”
“과연.”
무인이 절도 있게 포권했다.
“남궁신영이라 하네. 만나게 되어 영광일세.”
“무슨 일이시죠?”
“…….”
받은 만큼 주는 게 인지상정이요, 강호의 도리이거늘.
정광이 자신은 전혀 영광이 아니라는 양 짧게 묻자 남궁신영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무혈단 군사 위 소협이 실종된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네. 본가가 열과 성을 다했으나 도저히 찾을 수 없더군.”
“저런.”
남궁신영은 크게 심호흡했다.
“……후우우. 그러다 보니 위 소협이 스스로 몸을 감추고 짓궂은 장난을 치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네. 그럴 만한 연배이지 않나?”
“……!”
무혈단원들의 눈에 분노가 떠올랐다.
위진홍이 장난을 치는 게 아닐까 의심된다 했으나 누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까.
너희들이 숨겨놓고 패악을 부리는 것 아니냐는 의미 아닌가!
“말도 안 되는…….”
“팽 소협. 제가 얘기할게요.”
정광은 팽강휘를 제지하고 남궁신영에게 물었다.
“그러면 천룡단 숙소에 가서 찾으셔야죠. 거기에 있다가 실종됐으니까.”
“당연히 그쪽에도 갔네. 혹시 몰라 여기에도 온 것이고.”
“흐음.”
정광이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남궁신영의 손에 땀방울이 맺혔다.
‘다른 누구도 아닌 진옥룡이다. 소문이 반만 맞아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지금 누구를 의심하는 거냐며 검무부터 출지도 몰랐다.
허나 그건 오히려 바라던 바였다.
‘사뇌, 버릇없는 애새끼 같으니. 대체 땅으로 꺼진 건지 하늘로 솟은 건지 원.’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았고.
‘그러니 저놈이 검을 뽑으면 그걸 문제 삼으면 돼.’
다소 말이 안 되는 이유로 수색을 청했으니 정광이 모욕감을 느끼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객이 주인에게 검을 들이미는 건 대단한 실례.
남궁화인의 정치력이면 정광의 무례와 위진홍의 실종을 상쇄해 없던 일들로 무마시킬 수 있으리라.
게다가 이건 남궁신영의 독단이 아니라 남궁화인의 명 중 하나였기에 거리낌 없이 일을 벌였는데…….
상대를 직접 대면하자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내가 무사할 수 있을까?’
정광은 종잡을 수 없는 성품만큼이나 측량하기 힘든 무공으로도 유명했다.
자신이 비록 남궁세가의 중진이긴 하나, 상대할 방법이 없는 고수인 것이다.
‘이런 약한 생각을…….’
남궁신영은 오기가 솟았다.
‘……뽑으려면 뽑아라! 어서!’
정광이 뽑은 건 검이 아니라 혀였다.
“수고 많으시네요. 들어오세요.”
“…….”
“어서요. 저희가 도와드릴 만한 일이 있을까요?”
“…….”
긴장이 풀리며 주저앉을 뻔한 남궁신영은 애써 평온한 얼굴로 답했다.
“아닐세. 우리가 찾을 테니 그냥 편히 쉬게나.”
그는 사람들을 이끌고 무혈단의 숙소를 탈탈 털었다.
특히 정광의 방을 중점적으로 뒤졌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남궁신영의 얼굴은 감탄으로 물들었다.
‘시비들을 물린 채 지내고 있다 들었건만. 이렇게나 깔끔하게 쓰다니.’
깨끗한 것뿐만이 아니었다.
방에 있는 것들도 인상적이었다.
‘도경(道經)이 꽤 많군. 그래도 도사라 이건가.’
지필묵은 물론이요, 직접 쓴 것으로 보이는 서책들도 많았다.
예의상 그 내용을 볼 순 없었으나, 표지에 쓰인 글자만 봐도 상당한 명필이었다.
‘남궁세가와의 협력 방안이라…….’
제목이 뜻하는 바도 놀라웠다.
‘본가에 해를 끼칠 생각은 없는가 보군. 하긴, 그러니 이렇게 바삐 달려왔겠지.’
어떻게 협력해서 사마련에 대항할지 글로 남기는 세심함이라니.
정광을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바뀌었다.
‘패악질만큼 협행도 많이 한다는 소문에 코웃음 쳤던 게 미안해지는구나.’
어쩔 수 없는 오해였다.
백승무가 남궁세가로부터 한 푼이라도 더 뜯어내기 위해 작성한 서류들이었지만, 그 내용을 남궁신영이 알 도리는 없지 않은가.
“이제 끝난 건가요?”
“…….”
정광의 물음에 남궁신영이 어색한 미소를 띠었다.
“거의 끝나가네. 봇짐이 상당히 큰 편인데 열어봐도 되겠…… 아니, 되었네. 사람이 들어갈 크기는 아니니 그럴 필요는 없겠어. 협조해 줘서 고맙네.”
사람이 아니라 전표와 보석 등으로 꽉꽉 채워진 봇짐이었다.
정광은 그것을 흘깃 본 뒤 씩 웃었다.
보기만 해도 배부른 느낌이었기에.
“뭘요.”
“그만 다른 방으로 가세나.”
정광의 방을 보고 감탄한 남궁신영은 다른 단원들의 방을 거쳐 백승무의 방에 이르렀다.
그리고 혀를 차게 됐다.
‘아직 도호를 못 받아 속인(俗人)인 처지라 듣긴 했지만, 이거야 원.’
철월의 방보다야 덜했으나.
유정풍의 방과 버금가는 대단한 양의 육포와 술병이 쌓여 있었다.
‘식탐도 많은 데다 이렇게까지 술을 즐겨? 제대로 된 도사가 될 리 있나. 곤륜에서 골머리 좀 썩게 되겠어.’
남궁신영은 금권검협이라는 별호로 무명을 떨치는 백승무를 흘깃 봤다.
그래도 부끄러운 건 아는지 붉어진 얼굴을 푹 숙이고 있었다.
실제로는 억울해서였지만.
‘제 사형과 이렇게 차이가 나서야. 그나저나 기대도 안 했지만 역시나 없군.’
남궁신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해야 위진홍을 찾을 수 있을까?
어쨌든 그만 나가봐야 했다.
“다시 말하지만 협조해 줘서 고맙네. 전력을 다해 위 소협을 찾을 테니 믿고 기다려 주게나.”
“고생 많으시네요. 그런데 잘될까요? 이미 남궁세가 전체를 돌아보셨을 텐데요.”
“아직 전부 본 건 아니…… 흠. 흠. 이만 가겠네. 편히 쉬게.”
남궁신영은 재빨리 말을 돌린 뒤 사람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정광은 그의 말을 곱씹으며 피식 웃었다.
‘찾기 곤란한 곳이 있구나. 어딜까?’
대충 짐작이 갔다.
마침 장원 밖으로 나갔던 유정풍이 돌아와 새벽이슬을 맞으며 얻은 정보를 풀었다.
“아우. 자네가 말한 중년 고수 말일세. 확실친 않으나 비슷한 이를 찾은 것 같네.”
“누구죠?”
“태상가주의 첫째 아들. 그가 아닐까 싶어.”
정광의 머릿속에 삭막한 눈빛의 중년인이 떠올랐다.
“태상가주의 장자면 유명할 텐데. 그걸 모르셨던 거예요?”
“어허. 내 잘못이 아니라니까. 그냥 장자가 아니거든.”
그의 이름은 남궁화운.
남궁학이 본처와 혼인하기 전, 아끼던 시비와 실수로 낳은 자식이었다.
“남궁세가에서 꼭꼭 숨긴 데다 남궁화운 그 양반도 쥐죽은 듯 지내니 알 도리가 있나. 분타 노친네들도 옛날에 그런 아이가 있었다던 것만 알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더군.”
“어떤 사람이었데요?”
“천재 중의 천재.”
유정풍이 정광을 가리키며 웃었다.
“당연히 아우만은 못하겠지만 대단한 신동이었다 들었네. 하지만 그게 끝이야.”
“죽었다는 소문이 돈 건 아니죠?”
“그건 아니고. 수십여 년 전, 언제부턴가 그에 대한 소문이 뚝 끊겼다지?”
“의도적으로 숨긴 거겠네요.”
“아마도. 아우의 말대로 그 연배에 그만한 고수가 있다면 그가 틀림없을 걸세.”
“흐음.”
그림이 그려졌다.
남궁학, 남궁화인, 남궁화운이 부자간에, 형제간에 어떤 감정을 품고 있을지.
그것을 어떻게 이용해야 남궁세가를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을지, 그 모든 그림이.
‘더 알아보고 고칠 덴 고쳐야겠지만 지금은 이 정도면 됐어.’
정광은 고생한 유정풍을 다독였다.
“수고하셨어요.”
“또 수고 안 해도 되지? 응?”
“일단은요.”
“으하하! 일단이 어디야. 거지의 본분대로 먹고 마시며 뒹굴어야지!”
유정풍은 자신이 뱉은 말을 충실히 지켰다.
그와 정반대로 백승무는 정신없이 서류를 비교하고 고쳐가며 분투를 벌이고 있었다.
“사제. 쉬엄쉬엄해.”
“남궁 소저와 곧 만나야 합니다.”
“그럼 세안부터 제대로 하고 옷매무새에 신경 써야지.”
백승무는 서류를 노려보며 답했다.
“상인은 외모가 아니라 숫자로 말하는 법입니다. 반드시 이길 것이니 믿어주십시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무참하게 밟아버려.”
“그럴 참입니다. 하하.”
정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방에서 나왔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건데 자꾸 미련을 갖게 되네. 지금부터 깨끗이 포기하자.’
더 이상 남에게 신경 쓸 겨를이 있나.
정광도 바쁜 사람이었다.
술과 함께 아침 식사를 즐겼다.
차로 입가심도 했다.
유정풍처럼 뒹굴뒹굴한 것은 당연지사.
그게 지겨워지자 운기조식까지.
그리고 남궁학의 처소로 향했다.
‘두 번째라. 오늘을 빼면 한 번 남았네.’
어제처럼 남궁연과 함께 가는 게 아닌지라 아예 잠행술을 펼쳤다.
덕분에 남궁세가 사람들의 제지 없이 편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정광은 전각 앞에 서서 남궁학을 불렀다.
“태상가주님. 저 왔어요.”
“…….”
“태상가주님?”
“나가마.”
남궁학이 문을 열고 나왔다.
그의 얼굴엔 어제보다 더 짙은 눈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궁리를 많이 하셨나 봐요.”
“조금.”
“성과는 있으셨고요?”
“그럭저럭.”
“그럼 시작하죠.”
“잠시만 기다리거라. 운기조식 좀 하고.”
남궁학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내공을 운기했다.
정광은 하도 어이가 없어 멍하니 바라봤다.
‘노망이 났나? 내 앞에서 뭐 하는 짓이야?’
시간이 흐른 뒤.
남궁학이 눈을 떴다.
그의 안색은 아까보다 훨씬 좋아져 있었다.
“되었다. 시작하자.”
“제가 베면 어쩌려고 그러셨어요?”
“너는 그럴 위인이 아니야.”
“어떻게 확신하시죠?”
“나 남궁학이 인정한 무인이니까.”
“…….”
그러면 그렇지.
정광은 남궁학의 거만함에 두 손 들고 말았다.
그래도 짚을 건 짚어야 했다.
“제가 태상가주님의 기대에 부응했으니 태상가주님께서도 제가 원하는 걸 하나 들어주시죠.”
“무엇이냐?”
정광은 직진으로 달렸다.
“어제 그분. 남궁화운 대협 맞죠?”
“……!”
“맞구나. 거처가 어디예요?”
“…….”
남궁학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 * *
남궁학은 정광을 쫓아냈다.
정광은 피식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생각보다 부자지간의 골이 깊네. 하긴, 성품이 저러니 그럴 수밖에.’
이로써 비무를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오늘만큼은.
‘내일 다시 와서 두 번째 비무를 하라니. 화난 와중에도 챙길 건 챙기는구나.’
어쨌든 최상의 몸 상태로 남궁학의 거처에서 나온다는 첫 번째 목적은 이뤘다.
이제 두 번째 목적을 이뤄야 할 때.
‘어제의 기색으로 봐선 올 것 같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나무가 울창한 곳에 이르자 미세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도도하면서도 무거운 기였다.
“재주가 많으시네요.”
정광은 큰 나무를 올려다보며 빙긋 웃었다.
“내려오시죠. 땅이 더 편하지 않겠어요?”
나무껍질이 서서히 일어나 사람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은신을 푼 삭막한 눈의 사내가 정광의 앞에 뛰어내렸다.
“소형제, 눈썰미가 무척 좋은데.”
“대협도요.”
“그래, 무슨 일인가?”
“제가 묻고 싶은 말인데요.”
“…….”
남궁화운의 눈이 빛났다.
어제의 가벼운 빛이 아닌 서늘한 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