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편애
정광은 전각 지붕 위에 걸터앉은 중년인을 올려다보며 머리를 긁었다.
‘이놈은 또 뭐야.’
그가 지붕에 내려설 때쯤에야 기척을 인지했다.
남궁학에게 집중하느라 주변을 경계하는 기감을 줄인 탓도 있으나 상당한 실력자 아닌가.
‘눈이 인상적이네.’
삭막한 눈이었다.
사내가 풍기고 있는 도도한 기운과 안 어울릴 정도로.
‘느껴지는 기운이나 복색으로 봐선 남궁 씨인데…….’
아니나 다를까.
남궁학은 불청객이 등장했는데도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저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통칠 뿐이었다.
“네 녀석이 여긴 웬일이냐?”
“부탁드릴 게 있어서 왔는데 비무 구경도 좀 할게요.”
“웃기는 소리! 당장 사라져!”
남궁학이 노기를 드러내도 사내는 태연했다.
아니, 태연한 걸 넘어 손을 척 내밀며 당당히 요구했다.
“돈만 주시면 바로 떠나죠.”
“……무엇에 쓰려고?”
“친우와 놀려고요.”
“……네 녀석에게 친우가 있어?”
남궁학이 기가 찬 듯 묻자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주세요.”
“…….”
“어서요.”
남궁학의 수염이 부르르 떨렸다.
당장에라도 손을 쓰고 싶으나 억지로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거 재밌네.’
정광의 눈에 흥미로운 빛이 떠올랐다.
저 거만한 남궁학이 울화를 삼키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그럴 만한 상대여서겠지.’
분명 ‘놈’이 아니라 ‘녀석’이라 칭했다.
남궁학이 저 사내를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무공만큼은 저 연배에서 발군인 것 같은데.’
손을 섞어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그만큼 사내의 기운은 대단했다.
‘누굴까?’
정광은 남궁학에게 물었다.
“태상가주님. 소개 좀 해주시죠?”
“……일없다.”
“왜요?”
“……알 가치가 없는 녀석이야.”
“저런.”
정광은 엄숙한 얼굴로 두 손을 모았다.
“무량수불. 사람이란 그 자체로 중한 존재이거늘, 가치로 나누시면 어떡해요? 사해(四海)가 동도(同道)이니만큼 함께 어울려 살아가야죠.”
“……이젠 너까지 내 속을 긁는 것이냐?”
중년인이 끼어들었다.
“소형제. 꽤 인정받는가 봐. ‘너’라고 불리고 말이야.”
“그렇긴 하죠.”
“무척 강해 보이는데?”
“맞아요.”
“허어. 거참. 말하는 것도 마음에 들잖아.”
중년인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누가 봐도 호감을 느낀 얼굴이었다.
“소형제, 혹시 심심하면 나와…….”
“갈!”
남궁학이 사자후를 질러 중년인의 말을 끊었다.
“여기까지다. 또 훼방을 놓으면 가만두지 않을 게야.”
중년인이 두 손을 살짝 들어 올리며 알겠다는 시늉을 했다.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
“돈은요?”
“……손을 써야 말을 들을 것이냐?”
“그럼 그냥 아무 데나 들어가서 들고 나올까요?”
“…….”
남궁학은 중년인을 노려보다가 한자씩 끊어 말했다.
“조용히 기다려. 할 일을 끝낸 뒤에 주마.”
“약조하신 거예요. 소형제, 힘내!”
“닥치라 하지 않았더냐!”
“여부가 있겠습니까. 지금부터 싸움 끝날 때까지 한마디도 안 할 겁니다.”
“…….”
남궁학은 그를 한 번 더 쏘아본 뒤 정광에게 시선을 돌렸다.
“시작하자.”
이번엔 정광이 속을 썩였다.
“싫은데요.”
“……왜?”
정광은 지붕 위의 사내를 가리켰다.
“외인이 있는 데 태상가주님과 어떻게 싸워요.”
“……무슨 의미지?”
“제가 어제처럼 내상이라도 입어봐요. 저분이 손을 쓰면 아무리 저라 해도 위험해질걸요.”
남궁학의 수염은 물론 눈썹까지 푸들거렸다.
“……내 앞에서 지금 본가를 모욕하는 것이냐?”
“산에서 내려올 때 사조님께서 당부하셨거든요. 강호는 무척 흉험한 곳이니 항상 조심해야 한다고.”
“……강호보다 네가 더 흉험해 보인다만.”
“그런 과찬의 말씀을. 어쨌든 사손 된 도리로 사조님의 말씀을 따라야지, 별수 있나요.”
“…….”
남궁학은 속으로 셋을 셌다.
그래도 솟구치는 살기를 전부 가라앉히긴 힘들었다.
꽉 다문 이에 힘이 들어갔다.
‘당장 요절을 내고 싶지만…….’
그럴 수야 있나.
어제처럼 또 한 번 겨뤄 작은 실마리라도 얻어야 했다.
‘꽤 그럴듯했어.’
천하의 무리(武理)를 모두 품은 정광의 무공을 보고 호승심을 느꼈다.
저런 아해(兒孩)도 해냈거늘.
자신이라고 왜 못할까.
밤새 궁리한 결과, 미완의 느낌이었던 제왕검형을 조금이나마 보완할 길이 열렸다.
‘최소한 시험이라도 해봐야 해.’
남궁학은 정광에게 약조했다.
“내 이름을 걸고 말하마. 저 녀석이 너를 칠 일은 없을 것이다.”
정광이 정말이냐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되었느냐?”
“으음.”
“……또 있나 보군.”
당연히 있었다.
“어제보다 더 심한 내상을 입으면 어떡하죠? 운기요상(運氣療傷)만으로는 치유하기 힘들 것 같은데.”
“…….”
남궁학은 속으로 다섯을 셌다.
다섯으론 무리였다.
“……가져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라.”
그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콰직!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 뒤 다시 나온 그의 손에는 작은 목갑(木匣)이 들려 있었다.
“받아라.”
정광은 우선 받고 물었다.
“이게 뭐죠?”
“무림 제일 의가인 무한의가(武漢醫家)의 속명단(續命丹)이다. 웬만한 내상쯤은 가볍게 치유될 게야.”
“뭐 이런 걸 다…….”
목갑을 열자 작은 단환 세 개가 드러났다.
정광은 단환에서 풍기는 향을 확인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제법 귀하고 값나가는 것들로 만들었네. 효과는 확실하겠어.’
안 그래도 무각사룡의 내단이 많이 줄어들어 영약이라도 구해야 하나 생각하던 참이었거늘.
정광은 목갑을 품에 넣고 운룡을 뽑아 들었다.
“빨리 시작하죠.”
“……어제와는 좀 다를 것이다!”
금룡이 포효하고 백색 구체가 떠올랐다.
서로 한 치의 밀림도 없는 공방이 계속됐다.
‘이것 봐라.’
정광은 살짝 놀랐다.
남궁학의 검이 변한 것이다.
아주 미세하게였지만.
‘고생깨나 했겠네.’
여전히 중(重) 위주였으나 다른 묘리들이 섞여 있었다.
단 하루 만에 이 정도까지 해낼 줄이야.
하지만 그런 만큼 운용이 매끄럽지 못했다.
평생을 바쳐 닦아온 무공에 다른 색을 급히 덧칠한 격이다.
이렇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어쨌든 방향은 제대로 잡았으니 나쁠 건 없지.’
정광에게도 그랬다.
어제보다 더 손쉽게 남궁학의 검기를 분쇄할 수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남궁학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만.”
“조금만 더 하죠.”
“그만이라니까.”
“왜요?”
남궁학이 손을 들어 자신의 턱 밑에 있는 운룡을 밀어냈다.
그리고 정광을 짓누르던 자신의 검기도 풀어버렸다.
“끝을 보고 싶은 게냐?”
정광은 운룡을 검집에 넣은 뒤 가뿐해진 몸을 주물렀다.
“아파라. 태상가주님께서 그러고 싶으셨던 것 같은데요.”
“엄살은. 잠시 기다리거라.”
남궁학은 뒷짐을 진 채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렇게 한동안 고민하던 그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생각과 달리 어그러지고 그릇된 느낌이야. 이도 저도 아니게 됐군.”
“그건 아니죠.”
지붕 위의 중년인이 불쑥 입을 열자 남궁학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조용히 있으라고 했을 텐데.”
“싸움 끝났잖아요.”
“네 녀석이 뭘 안다고 떠드느냐?”
“중(重)에 변(變), 유(柔), 쾌(快)를 전보다 더 넣으셨다는 건 알죠.”
“…….”
“이제 막 바꾸셨으니 화후가 낮은 건 당연한 일. 시간이 지나면 멋져질 거예요.”
“…….”
남궁학의 날카로웠던 눈매가 조금씩 풀렸다.
다시 한번 하늘을 올려다본 그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늘의 장난이 참 고약하구나.”
그리고 품에서 전낭을 꺼내 던졌다.
척.
중년 사내가 전낭을 받으며 감사를 표했다.
“잘 쓸게요.”
“어서 가기나 해.”
“그래야죠.”
지붕을 박차려던 중년인이 정광을 힐끔 봤다.
“소형제. 오래 있을 거야?”
“글쎄요. 그러진 않을 것 같은데.”
“그렇단 말이지. 흐음.”
중년 사내가 턱을 어루만지다가 바로 사라졌다.
정광은 그가 떠난 방향에서 시선을 돌려 남궁학을 바라봤다.
“눈썰미가 있는 분이네요.”
“…….”
“남궁세가에서 태상가주님 다음 가는 강자 맞죠?”
침묵하던 남궁학이 부정했다.
“저 녀석은 강자가 아니야. 그건 그렇고, 연이에게 들었다. 네가 꽤 재밌는 일을 벌였다더구나.”
“재밌다기보단 돈이 되는 일이죠.”
“설마…… 수왕을 꺾은 것이냐?”
이번엔 정광이 부정했다.
“그럴 리가요. 수왕께서 변질된 장강을 정화하기 위해 도움을 청하셨고 그에 응했을 뿐이에요.”
“……그래서 그가 네게 감사의 표시로 이권을 주기로 했다?”
“바로 그거죠.”
“……말도 안 되는 소리. 수왕은 그럴 자가 아니야.”
“사실인 걸 어떡해요.”
정광은 어깨를 으쓱한 뒤 백승무에게 손짓했다.
“사제, 이리와. 태상가주님께 인사드려야지.”
백승무는 침을 꿀꺽 삼키며 한 걸음 나섰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이 소용돌이쳤다.
‘투자금을 더 요구할지도 몰라. 사형께서 아끼시는 연 대인의 인장(印章)을 써야 할지도.’
‘이익 배분에 딴지를 걸면 복잡해지는데. 장강을 뚫은 공과 청해성에서 본문의 입지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내세울 수밖에.’
‘청해성이야 그렇다 치고. 서장과 운남은 답이 없는 게 문제야. 허나 그건 남궁세가도 마찬가지.’
‘좋아. 이대로 가자!’
백승무는 남궁학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곤륜의 백승무라 합니다.”
남궁학이 백승무를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연이와 얘기해라.”
“……네?”
남궁학은 정광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는 내일 이 시간에 오고.”
“또요?”
“속명단 세 개 값은 해야지. 흔한 것들이 아니니까.”
정광은 속명단의 값어치를 대충 계산했다.
“그럼 비무 한 번에 한 개라 하고. 두 번 남은 거로 치죠.”
“…….”
“제가 손해인 거 아시면서 그런 눈으로 보시면…….”
“그렇게 하지.”
“군사는요?”
“오늘 아들놈에게 확실히 주의를 주마.”
남궁학은 그대로 방에 들어가 버렸다.
정광은 어안이 벙벙한 백승무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잘했어, 사제.”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만.”
“남궁 소저와 논의하라는 말씀 못 들었어? 사제는 합격이란 뜻이지. 본 지 얼마나 됐다고 편애하시는지 원.”
“……제게서 대체 무엇을 보셨다고…… 말이 안 되잖습니까.”
남궁연이 민망한 얼굴로 백승무를 위로했다.
“원래 말수가 적으신 분입니다. 이번 일에 힘을 실어주시기로 한 것과 진배없으니 마음 푸십시오.”
“……정말 그럴까요?”
“물론이지요.”
지켜보던 정광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기분이 영 안 좋아 가버린 것이지만 승낙한 건 맞으니까 상관없지.’
골치 아픈 대화를 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그럼 좋은 시간 되세요.”
정광은 떠나려다 남궁연에게 물었다.
“아까 그분. 누구시죠?”
“……죄송합니다.”
“큰 비밀이라도 있는 분이신가.”
“…….”
정광은 곤란해하는 남궁연에게 손을 저었다.
“괜찮아요. 미안하면 우리 쪽 이익을 조금만 더 쳐주시면 되니까요.”
“그, 그건…….”
“그럼 이만.”
정광은 신법을 펼쳐 숙소로 돌아왔다.
“유 소협.”
“왜 그러는가, 아우?”
“남궁세가에서 태상가주님 다음 가는 고수가 누구예요?”
“그야 당연히 가주이신 남궁화인 대협이지.”
“아닌데.”
“……?”
“눈이 좀 삭막한 중년인 없나요? 예의를 별로 안 따지는.”
“흐음.”
유정풍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저었다.
“들어본 기억이 없어. 그런 자가 있나?”
“그럼 부탁드릴게요.”
“……또 나가서 알아보라고? 오늘도 새벽이 되어서야 돌아왔는데?”
“지분…….”
“금방 다녀오지. 편히 기다리게나.”
유정풍이 사라졌다.
정광은 탁자에 있던 술을 마시며 중년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잠깐. 그러고 보니 조금 닮았잖아.’
* * *
남궁화인은 눈앞에 나타난 노인을 노려봤다.
자식인 자신과 전혀 닮지 않은 아비, 남궁학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고얀 놈. 아비가 왔는데 이유부터 물어?”
남궁화인은 몰래 침을 삼켰다.
가슴이 세차게 뛰는 소리를 아비가 알아채지 못하기를 바라며.
“이곳은 가주의 집무실. 가주가 식솔에게 이유를 묻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남궁화인은 가슴을 펴며 위엄을 드러냈다.
허나 남궁학은 짧은 코웃음으로 무시했다.
“흥. 일이나 똑바로 해라.”
“무슨 말씀이십니까?”
“진옥룡의 군사 말이다. 버릇없다는 꼬마.”
“갑자기 왜…….”
“잔말 말고 당장 찾아.”
“……!”
“눈빛이 왜 그렇지? 지금 아비에게 반항하는 게냐?”
“…….”
의자에 앉아 있던 남궁화인이 천천히 일어섰다.
그렇게 남궁학과 눈높이를 맞춘 그는 무거운 목소리로 거절했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제대로 못하니 이러는 것 아니냐?”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아버님께서 제게 이러실 권한은 없습니다.”
“…….”
남궁학의 눈에 노기가 떠올랐다.
동시에 엄청난 기가 일어나 남궁화인을 짓눌렀다.
“찾아.”
“크으윽…….”
“가문에 먹칠하지 말고 어서.”
“끄으으…….”
간신히 버티던 남궁화인이 신음 섞인 말을 토해냈다.
“아, 알겠습…… 크흑. 니다.”
“못난 놈. 진작 그럴 것이지.”
남궁학은 기를 거두며 신형을 돌렸다.
그리고 지나가듯 말했다.
“그 녀석에게 신경 좀 쓰고.”
“……?”
“네놈이 불편하니 내게 찾아와 돈을 달라고 하지 않느냐?”
“……!”
남궁화인의 눈에서 불길이 일었다.
허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더없이 공손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반드시 그래야 할 것이야.”
남궁학이 사라졌다.
남궁화인은 일그러진 얼굴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잠시 뒤.
그의 입에서 억눌린 고함이 새어나왔다.
“왜 형님만 편애하시는 겁니까! 대체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