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불청객
‘사형의 ‘잘’은 보통 이들의 ‘잘’과 달라.’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아주 잘…… 아니, 극도로 잘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백승무는 엄청난 압박을 느끼면서도 눈을 빛냈다.
‘이 거래. 조금이나마 더 유리하게 성사시키고야 말리라.’
정광이 자리를 비워주자마자 치열한 설전이 시작됐다.
“백 소협. 저희가 나라에서 사들이는 소금의 단가는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고려해 주셔야 합니다.”
“그야 당연한 일이지요. 수많은 경쟁자를 제치고 염인(鹽引)을 받는 게 쉬운 일이겠습니까. 유지하는 데에도 큰 비용이 들어갈 것이고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합의점을 찾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겠군요.”
남궁연이 빙긋 웃었으나.
백승무는 그렇게 만만한 상인이 아니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남궁 소저께서도 양해해 주셔야겠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백승무가 양 소매를 걷어 올렸다.
팔에 가득한 상처 자국이 남궁연의 눈을 찔렀다.
“저희도 많은 희생을 치렀다는 말이지요. 목숨을 걸고.”
“……아문 지 오래된 상처가 더 많아 보입니다만.”
남궁연의 날카로운 지적에도 백승무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받아쳤다.
“과거가 있으니 현재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휘상(徽商)이 염인을 얻기 위해 많은 고생을 하며 부를 쌓아 올렸듯, 저희도 장강수로십팔채가 지배하는 수로를 확보하기 위해 생사를 넘나드는 실전을 치러왔다고 이해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
남궁연이 노려보자 백승무는 자신의 상의를 가리켰다.
“장강에서 입은 다른 상처를 보기 원하신다면 당장 보여 드릴 수도 있고요.”
“…….”
백승무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남궁연이 얼굴을 붉히며 그럴 필요 없다고 만류할 줄 알았는데.
“보여주십시오.”
“……네?”
“이왕 이렇게 된 것, 전부 보고 견적을 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
이번엔 백승무가 침묵했다.
역시 남궁연은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못 보여줄 건 없지만, 여기서 상의를 벗었다간…….’
남궁세가에서 남궁세가의 금지옥엽을 희롱한 희대의 망나니로 악명을 날리게 될 터.
‘……정신을 단단히 차리자! 밀리면 안 돼!’
남궁연도 마찬가지였다.
‘……진짜 벗을 기세잖아! 목적을 위해선 수단을 가리지 않는 건가!’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다가 부딪혔다.
치열한 설전을 넘어, 한 단어만 잘못 내뱉어도 촌락 하나 정도는 사고팔 수 있는 살벌한 격전이 계속됐다.
두 사람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등줄기도 축축이 젖은 지 오래였다.
세부적인 내용을 논의하기엔 따져볼 것이 너무 많아 대략적인 얼개만 잡는 데도 혼이 빠져나갈 지경!
정광이 운기조식으로 내상을 치유하고, 허청을 만나 일의 경과를 얘기하며, 잠깐의 오수(午睡)까지 즐긴 뒤 돌아왔을 때. 두 사람은 거의 탈진에 이른 상태였다.
정광은 만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두 팔을 벌렸다.
“이야. 방이 아주 후끈후끈하네요. 좋은 시간 되셨어요?”
“헉. 헉. 사, 사제분께서 보통이 아니시더군요.”
“사제는?”
“훅. 훅. 남궁 소저께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정광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백승무의 등을 토닥였다.
“잘했을 거라 믿어, 사제.”
“……아, 아마 그럴 겁니다.”
“남궁 소저, 그만 돌아가셔서 쉬시죠. 오늘만 날이 아니잖아요.”
“……알겠습니다.”
남궁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다 백승무를 돌아봤다.
두 사람의 죽어 있던 눈에 회광반조(回光返照) 같은 빛이 떠올랐다.
“……내일 뵙겠습니다, 백 소협.”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지요, 남궁 소저.”
남궁연이 떠나자 정광이 백승무의 곁에 바짝 붙어 물었다.
“어떻게 됐어?”
“큰 틀만 겨우 잡았습니다. 다행히 밀리진 않았는데 세부적인 내용을 논의하기 위해선 정보가 필요합니다. 우선 개방의 유 소협께 부탁해 휘상이 소금을 비롯한 물품을 사들이는 단가와 유통망이 어떻게 뻗어 있는지…….”
백승무는 자오처럼 끝없이 설명했다.
정광은 황당한 얼굴로 듣다가 말을 잘랐다.
“아니, 일 얘기는 나중에 하고. 남궁 소저 어땠냐고.”
“하아. 정말 대단한 상재를 가지고 있더군요. 대륙전장(大陸錢莊)의 사총관 이후로 이렇게 힘든 상대는 처음입니다.”
“사총관? 강소산 그 양반?”
“네.”
“그 양반은 사내잖아.”
“사형, 잘 아시잖습니까. 상계는 능력으로 대우받는 곳이지, 사내인지 여인인지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백승무는 정색하며 설명했고.
정광은 크게 탄식했다.
“됐다. 내가 사제한테 뭘 바랄까.”
“네?”
정광의 눈에 안타까움과 한심함이 뒤섞인 빛이 떠올랐다.
남궁연의 상재와 성품이 그럴듯해 기껏 자리를 마련해 줬건만, 뭐 이런…….
‘텄다. 이 녀석은 천상 도사야.’
이왕 이렇게 된 것.
사형의 본분을 다해야지.
적성에 맞는 길로 이끄는 게 옳은 일이리라.
“사제, 그냥 빨리 본문으로 돌아가 도호(道號)부터 받자. 어차피 그럴 팔자잖아.”
“……아!”
백승무는 그제야 깨달았다.
“사, 사형. 하지만 저는 언 소저를…….”
“언 소저는 사제 이름도 모를걸?”
“그, 그 정도는 아니지요. 지금껏 함께해 온 시간이 있지 않습니까.”
“함께해 온 게 아니라 그냥 일행이었지. 그럼 헷갈리는 정도겠네. 맨날 백 소협, 백 소협 하는데 이름을 어떻게 기억하겠어.”
“사형!”
백승무가 폭발하자 정광도 폭발했다.
“내게 대들 줄도 아는 녀석이 왜 여인들 앞에서는 숙맥인데! 유모가 울겠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아. 둘째였지. 그럼 상관없네. 일 얘기 해봐.”
“…….”
백승무는 입을 떡 벌렸다가 남궁연과 나눈 대화를 설명했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듣던 정광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사제, 아주 인정사정없구나. 돈독 오른 장사치 같은걸.”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궁 소저가 워낙 철두철미하고 날카로워서…….”
“그래. 잘했어. 연애 따위 해서 뭐 해. 일이 우선이지.”
“…….”
“그만 방에 가서 쉬어. 아. 유 소협에게 부탁해야 한다고 했지? 같이 가자.”
정광은 백승무와 함께 유정풍을 만났다.
“유 소협. 나가셨던 일은 어떻게 됐어요?”
“새로운 세력이나 수상한 자를 보지는 못했다더군. 남궁세가에서도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고. 더 제대로 알아보라 했네.”
“고생하셨어요.”
“뭘 그런 걸 가지고.”
“또 고생 부탁드릴게요.”
“……무슨 말인가?”
백승무가 나서서 필요한 정보를 늘어놨다.
유정풍의 얼굴에 내려앉은 눈그늘이 더 짙어졌다.
“하아…… 보통 일하기 싫어 거지가 되건만, 나는 쉴 틈이 없구나.”
“기운 나게 해드리죠.”
정광은 무혈단원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어떤 사업을 할 예정인지 설명하자 단원들은 감탄하면서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대단하긴 한데…….’
‘……그걸 왜 말하는 거지?’
정광은 남에게 자랑하는 유형의 사람이 아니었다.
‘잠깐. 이거 혹시…….’
‘……설마 우리에게도?’
그들이 생각했듯.
정광은 자신의 사람을 챙길 줄 아는 사내.
단원들에게 조금씩이나마 지분을 주겠다고 천명했다.
“……이렇게 가요. 피땀을 흘렸으면 보상을 받아야죠.”
“우와아아아!”
“아직 확정된 건 아닌데.”
“진옥룡! 진옥룡!”
모두 기뻐했다.
돈 앞에서 초연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정광의 능력을 대충이나마 알았기에 일이 성사되지도 않았는데 환호성을 지를 수 있었다.
“아. 그리고 좀 후하게 드리고 싶은 분이 있는데요.”
정광은 멸문 지경에 이른 무당의 대진에게 다른 단원들보다 더 많은 몫을 주겠다고 했다.
단원들은 진심으로 축하했고 대진의 눈에 어린 혈광은 물기에 젖어 아름답게 빛났다.
“단주, 그리고 모두…… 고맙네.”
“뭘요.”
대진은 작은 희망을 느꼈다.
일이 잘 풀린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나, 사문인 무당에 안정적인 수입이 생긴 것이다.
‘……진옥룡이 준 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갚아야 한다. 부단히 노력해야 해.’
이제껏 받기만 했는데 또 받다니.
정광이 장강에서 그려낸 신비한 태극에 대해 묻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으나 차마 물어볼 염치가 없었다.
‘묻는다고 대답해 줄 리도 없고. 때가 되면 먼저 말해주겠지.’
정말 중요한 일이었지만 어쩔 수 있나.
그간 겪어본바, 정광은 그런 이였다.
한편, 기뻐하던 다른 단원들도 저마다의 생각에 잠겼다.
‘아버님께 고해 우리 젊은 세대가 독을 연구하는 비용으로 사용하면 되겠군. 남는 것은 가문의 행사에 쓰고.’
‘아미타불. 어려운 이들을 도울 수 있게 되었구나. 부처님의 복이로다.’
‘흐흐. 사부에게 대부분 뺏기겠지만 가끔 동냥을 쉬고 실컷 먹고 마시는 데는 무리가 없겠는데.’
‘아미산에서 내려온 뒤 금전적인 문제를 걱정했건만. 내 힘으로 설 수 있는 자금이 생기게 됐어. 본사에도 도움을 드릴 수 있고.’
‘이렇게 큰돈을 벌게 될 줄이야. 어머니가 손에 물을 묻히지 않으셔도 돼. 감사합니다, 진옥룡. 흑흑.’
철월은 생각이라는 걸 하기 힘든 사내이기에 말을 했다.
“도사! 철월은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된다!”
“좋은 거예요. 평생 배부르게 먹고 마실 수 있을 만큼.”
“철월은 이해했다! 도사는 착하다!”
“그렇긴 하죠.”
정광은 단원들을 둘러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혼자 먹으면 체하는 법이지. 이렇게 가면 돼.’
장강의 수운을 독점하다시피 하며 소금과 차를 서쪽 변방으로 나를 예정이었다.
일이 제대로 시작되면 수많은 시기와 질투를 받게 될 게 분명했다.
‘그때가 오면…….’
이들이 속한 가문과 문파가 가만히 있을 리 있나.
열과 성을 다해 변호하리라.
정광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자. 자. 저녁 먹어야죠. 갈까요?”
“네! 단주!”
남궁화인은 천룡단과 무혈단이 남궁세가 식솔들과 자주 마주치는 걸 원하지 않았기에 때가 되면 극진히 대접한다는 핑계로 요리를 가져다줬다.
덕분에 무혈단은 자신들의 숙소에서 편하게 먹고 마실 수 있게 됐다.
정광도 마음껏 고기를 뜯으며 술을 즐길 수 있었고.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배를 채울 무렵. 정광이 단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오늘은 군사를 못 찾았지만 반드시 찾을 거예요.”
“…….”
“그러니 만반의 준비를 하고 계셔야 해요.”
단원들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봬요.”
유정풍은 정보를 얻으러 밖으로 나갔고 백승무는 이런저런 계산을 할 생각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단원들이 운기조식을 하러 각자의 방으로 흩어지자 정광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침상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밤이 깊어지자 잠행술을 펼쳐 남궁화인의 처소로 향했다.
정광은 그곳이 잘 보이는 한 전각 위에 올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번(番)이 꽤 많네.’
무림맹에서 뇌물을 털렸던 기억 때문에 단단히 방비하는 것이리라.
‘근데 영 어설프잖아.’
많은 무인이 나름의 진세를 펼치고 있었으나 가장 중요한 곳은 텅텅 비어 있었다.
‘제대로 지키려면 지붕 위를 점해야지. 나를 끌어들여 잡을 속셈인가?’
기감을 확장하자 익숙한 남궁화인의 기가 느껴졌다.
‘일단 본인은 안에 있고.’
더 확장하자 지붕 밑에 은신해 있는 자들이 느껴졌다.
‘꽤 훈련을 받은 실력인데. 뒤가 구린 일들을 맡은 놈들인가 보네.’
자오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준이었으나, 저렇게 촘촘히 있으면 아무리 정광이라 해도 비집고 들어가기 힘들었다.
‘불청객은 아예 오지 말라는 의미군. 더 있어 봐야 시간 낭비야.’
정광은 다시 숙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자오를 불러 임무를 내렸다.
“최소 십장 이상 거리를 유지한 채 남궁가주를 감시해 주세요. 특이한 움직임이 감지되면 바로 알려주시고요. 가능하시죠?”
“물론입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발각되면 장 밖으로 도주하시고요. 제가 바로 가서 도와드릴게요.”
자오가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말씀하셨던 대로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제 장기가 첩보와 암살인 데다, 그간 진옥룡의 가르침을 받아 일취월장…….”
“아. 혹시 거만함이 가득한 노인에게 발각되면 그냥 제가 보냈다고 하시고요. 태상가주는 만만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알겠습니다. 주의하지요.”
정광이 경각심을 주자 자오가 신중한 얼굴로 사라졌다.
정광은 눈을 감고 운기조식을 했다.
그의 머리 위에 세 개의 꽃이 떠올라 밝은 빛을 뿌렸다.
‘기대되네. 아주 조금이나마 늘었으려나.’
날이 밝으면 남궁학을 만나 또 싸워야 했다.
‘거만한 만큼 뭔가 보여주겠지.’
세 개의 꽃이 꽃잎을 활짝 열었다.
* * *
자오는 동이 트기 전에 돌아왔다.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아침 드시고 푹 주무세요.”
정광은 단원들과 함께 식사를 즐겼다.
백승무는 새벽에 돌아온 유정풍에게 받은 정보를 토대로 이것저것 계산하느라 바빴고.
차를 마시고 해가 높이 솟자 남궁연이 찾아왔다.
“진옥룡, 태상가주님께서 찾으십니다.”
“네. 가요.”
“백 소협도 보고 싶으시다 하셨습니다만.”
“오!”
정광이 놀란 눈으로 남궁연을 바라봤다.
“남궁 소저, 설마……?”
“네. 그 사업에 관심을 표하셨습니다. 실무자가 어떤 이인지 직접 확인하시고 싶다고…….”
“하아아.”
“……왜 그러시는지요?”
정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가죠.”
정광은 평생 홀로 살 것 같은 두 사람과 함께 남궁학의 거처로 향했다.
그리고 남궁학을 보게 되자 눈을 크게 떴다.
‘밤을 새웠나?’
남궁학의 얼굴엔 유정풍의 것보다 더 짙은 눈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두 눈만큼은 뜨겁게 일렁이고 있었다.
“왔군. 기다리고 있었다.”
“좋은 일이 있으셨던 것 같네요.”
“별것 아니니라.”
“당장 보여주고 싶어 하시는 것 같은데요?”
남궁학의 입가에 오만한 미소가 걸렸다.
“너라면 이걸 볼 자격이 있지.”
정광도 싱긋 웃었다.
“잘 볼게요.”
전날에 이어 다시 격돌이 시작되려는 순간.
정광과 남궁학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한 사내가 전각 지붕에 걸터앉으며 그들을 내려다봤다.
“재밌어 보여서요. 저는 신경 쓰지 말고 할 일 하세요.”
사내의 말에 남궁학의 눈썹이 솟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