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동업
정광의 손에 들린 운룡이 금룡으로 화했다.
금룡(金龍)이 놀라운 속도로 팔방을 점했다.
그러곤 금빛 구(球)가 되어 정광의 몸을 감쌌다.
이렇게 쾌(快)로 만들어낸 환(幻)이, 조여져 오던 남궁학의 검기와 부딪혔다.
금빛 구체와 백색 구체의 격돌이었다.
콰쾅!
“쿨럭.”
정광의 입에서 핏방울이 튀어나왔다.
내공에서 밀려 작게나마 내상을 입은 것이다.
분명 손해를 본 상황이었으나 핏물이 맺힌 그의 입술은 둥글게 휘어 있었다.
‘조금이나마 밀어냈으니 이 정도면 싸게 먹힌 거지.’
그 생각을 부정하듯, 밀려났던 백색 구체가 다시 조여왔다.
하지만 정광이 더 빨랐다.
한 걸음 내디디며 금룡을 내질렀다.
스으윽-
날카롭게 날아간 금룡이 백색 구체를 꿰뚫었다.
남궁학에 비해 부족한 내공이지만, 면을 점으로 찔렀기에 가능한 일.
정광은 그대로 나아가며 구체에 박힌 금룡을 움직였다.
스으읍- 드드득-
흡(吸) 구결로 잡아당겨 와(渦)의 수법으로 돌린다.
금룡이 구체의 일부를 물은 채 세차게 회전했다.
퀴이이이익-
귀를 찢는 듯한 소음과 함께 정면을 가로막고 있던 부분이 찢겨 나갔다.
“……!”
그 구멍 사이로 남궁학의 놀란 눈이 보였다.
무척 보기 좋았으나 감상할 시간이 있을 리 있나.
백색 구체가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합!”
정광은 호신강기(護身罡氣)로 몸을 보호하며 비좁은 구멍을 뚫고 뛰쳐나갔다.
도복 곳곳이 찢겨 나갔으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백색 구체가 뒤에서 덮쳐 오고 있었다.
‘반응이 빨라.’
바로 도약해서 남궁학을 치고 싶었으나 이미 늦은 상태.
뒤돌아서며 금룡을 수직으로 내려쳤다.
콰지직!
금룡의 날이 백색 벽을 한 자쯤 파고 들어가다 멈췄다.
벽은 금룡을 단단히 문 채 정광을 다시 둘러싸려 했다.
정광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하!”
금룡이 검신 가득 머금고 있던 정광의 내공을 토해냈다.
탄(彈)의 묘리로 폭발시킨 내공이 백색 벽에 균열을 일으켰다.
쩌저적-
그러자 금룡을 물고 있던 벽의 이빨이 벌어졌다.
“이익!”
금룡에 힘을 주어 헤집자 백색 벽이 무너져 내렸다.
파가각-
이쯤이면 됐다 여겼거늘.
좌우를 돌아 감싸오던 백색 기운이 수없이 많은 검으로 화했다.
정광은 금룡을 휘둘러 수많은 변초를 뿌려냈다.
파캉! 펑!
변(變)에 변을 거듭하며 백색 검의 숫자를 줄였다.
내공이 빠른 속도로 소모됐다.
정광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검식을 변화시켰다.
부우웅-
이제까지의 변화무쌍한 검초가 아닌, 부드러운 움직임.
쿵!
맹렬히 쏘아진 백색 검과 부딪히는 순간 손목을 틀었다.
금룡이 백색 검의 방향을 살짝 돌려 다른 쪽으로 흘렸다.
휘리릭-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였다.
유(柔)의 무리(武理)를 품은 금룡이 백색 검들을 부드럽게 감쌌다.
작은 원이 계속 이어지며 큰 원을 그려냈다.
거기에 휩싸인 백색 검들은 의지를 잃고 끌려 다닐 뿐이었다.
그리고.
“하압!”
내공을 끌어올려 금룡을 강(强)의 수법으로 휘두르자.
콰아아앙-
남궁학의 검기는 엄청난 폭음과 함께 산산이 흩어졌다.
“후욱. 후욱.”
정광은 가쁜 숨을 애써 가라앉히며 신형을 돌렸다.
원래의 거만한 표정이 아닌, 경악한 얼굴을 한 남궁학이 보였다.
“…….”
정광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상태로 그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쿵.
다시 또 한 걸음.
쿵!
발자국이 깊어졌다.
걸음을 내디딜수록 남궁학의 또 다른 기가 조여오는 압력이 강해졌다.
‘큭.’
정광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하지만 미소만큼은 여전했다.
결국, 일장하고도 반 거리까지 이른 정광은 운룡을 잡은 채로 포권했다.
더 이상 접근하는 건 무리였기에.
“고생하셨습니다.”
“…….”
남궁학은 묵묵히 바라보기만 하다가 기를 풀었다.
정광은 금빛 광채가 사라진 운룡을 어깨에 척 걸쳤다.
마음 같아선 당장 패고 싶었으나 내공과 기력을 보충할 시간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남궁학이 아니라 정광이.
뭐 속도 긁을 겸 품평도 좀 하고.
“아주 중(重)이라는 한 우물만 판 장인이시네요.”
“…….”
“그런데 그렇게 막대한 검기를 허공을 격하며 다루느니, 그냥 검에 담고 발 좀 놀리면서 휘두르시는 게 편하지 않나요?”
정광은 실컷 이죽거리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 멋지긴 했지만요.”
그제야 남궁학의 입이 열렸다.
“멋도 그렇지만 일대일 싸움에서 이만한 것은 없지.”
“방금 깼는데. 다시 확인해 볼까요?”
“터무니없는 소리.”
남궁학의 표정이 원래의 거만함으로 돌아왔다.
“나는 아직 여유가 있다만, 너는 힘이 부치는 형편 아니냐.”
“이런. 들켰네.”
“하지만…….”
남궁학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너라면 금방 회복할 것 같구나. 싸우는 중에라도.”
정광이 피식 웃었다.
“이젠 녀석에서 너로 격상됐네요.”
“너는 그만한 자격이 있다.”
“그럼 일각만 쉬었다 다시 하죠. 태상가주님께서도 기혈 몇 군데는 막히셨잖아요.”
“…….”
남궁학은 정광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건방지기는.”
말은 그랬으나 마음은 좀 달랐다.
아까 말했듯이 정광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무인이었다.
‘진옥룡, 진옥룡 하더니 과연.’
나이에 비해 말도 안 되는 무위는 그렇다 치자.
정광의 무공은 다른 의미로 놀라웠다.
‘이렇게 균형을 갖춘 무인을 본 적이 있었나?’
기억을 더듬어봐도 딱히 떠오르는 이가 없었다.
그나마 소림의 불존(佛尊)이 가까웠는데, 그 역시 강(强)을 위주로 한 무공을 구사하지 않았던가.
‘세상엔 수없이 많은 무리가 있으나 그 모든 것을 섭렵할 수는 없다. 어떤 문파도 어떤 가문의 무공도 그럴 수밖에 없거늘…….’
당연히 그 무공을 배운 이들도 그렇게 된다.
한두 가지, 많아 봐야 서너 가지를 중점으로 하는 무공을 익히는 것이다.
남궁학은 치밀어 오르는 의문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네가 풀어낸 형을 보니 곤륜의 무공뿐만이 아니라 많은 것을 익힌 것 같은데…… 맞느냐?”
“네. 저 운기조식해도 돼요?”
“……조금만 이따가. 그 많은 것을 어찌 어긋남 없이 익혔느냐?”
“열심히 노력해서죠.”
“…….”
“진짠데.”
남궁학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수많은 무리를 이해하고 펼치기 위해선 자질도 자질이거니와 엄청난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다들 몇 가지만 붙잡고 시간을 투자하는 게야. 깊이 갈고닦아 더 빨리 강해지기 위해.”
“태상가주님께서도 그러셨죠? 중(重) 위주로.”
“그렇다.”
“그러면 처음엔 빠르지만 결국엔 더 늦어지는데.”
“네가 그걸 어찌 아느냐?”
“경험해 봤으니까 알죠.”
“말도 안 되는 소리라니까.”
“저는 된다니까요.”
“…….”
남궁학은 정광을 노려보다가 씹어뱉듯 말했다.
“네가 좀 빨랐다곤 하나, 네가 했는데 내가 못 할 리는 없지.”
정광은 입을 떡 벌렸다.
“……좀 빨라요?”
“그래.”
남궁학이 돌아서며 축객령을 내렸다.
“내일 다시 오너라. 그때까지 다른 것들도 올려놓으마.”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제 군사는…….”
“내일부터 찾으면 돼. 약조는 지킬 테니 걱정 안 해도 된다.”
“그래도…….”
“그만한 대가는 주마. 내일 말하거라.”
“조심히 들어가세요.”
“…….”
남궁학은 정말 자신의 거처로 들어가 버렸다.
정광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갸웃했다.
‘무슨 놈의 자신감이 저렇게 넘치지?’
비록 무거움에 치우친 무공을 익혔으나 다른 묘리에 문외한이 아닌 것은 안다.
저 정도 경지에 오르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이치는 다 깨쳤을 터.
허나 그걸 하루 만에 다 끌어올리겠다고?
평생을 바쳐 익혀온 중(重)의 묘리만큼?
‘감을 잡고 기틀이라도 다지면 다행이지.’
되든 말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
내일이 기다려졌다.
‘어차피 다른 방법이 없으니 밤이 되면 남궁화인이나 감시하자.’
정광은 생각을 정리하고 가려다 남궁연에게 눈길이 미쳤다.
‘제법 똘똘한 것 같은데…….’
신분도 들어맞고.
그리고 있던 그림의 일부분을 맡아줄 적임자를 찾았다.
‘이만하면 성품도 괜찮은 편이지.’
닳고 닳은 이보단 나을 수도 있으리라.
“남궁 소저, 가죠.”
놀란 얼굴로 정광을 보고 있던 남궁연이 깜짝 놀라 물었다.
“어, 어딜 말입니까?”
“저희 숙소요.”
“그, 그곳에는 왜……?”
정광이 씩 웃었다.
“소개해 드릴 사람이 있거든요.”
* * *
정광은 찢어진 도복부터 갈아입은 뒤 진지하게 말했다.
“남궁 소저. 이쪽은 제 사제 백승무예요. 금권검협이라는 별호로 강호를 질타하는 소영웅이죠.”
“…….”
“사제. 이분은…….”
얼굴이 벌게진 백승무에게 남궁연을 소개하려는데, 당사자인 남궁연이 말을 잘랐다.
“진옥룡.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소개요.”
“……그러니까, 그 이유 말입니다. 혹시?”
“역시 똑똑하시네요.”
정광이 감탄하자 남궁연의 얼굴도 빨개졌다.
“하, 하지만 저는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이런 건 시간을 두고 천천히 생각해야…….”
“시간은 누구에게나 소중하죠. 그리고 천천히 생각하나 빨리 생각하나, 솔직히 최종 결정은 처음 생각한 대로 가기 마련이잖아요.”
남궁연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백승무를 힐끔 본 그녀는 굳은 얼굴로 사양했다.
“죄송하지만 그럴 틈이 없습니다. 제겐 가문의 일이 더 중요합니다.”
“가문의 일인데.”
“……네?”
눈을 크게 뜬 남궁연과 달리 정광은 태연했다.
“상계에 뜻이 있으시죠? 가문에서 그쪽 일을 맡고 계시고.”
“그, 그걸 어떻게?”
정광이 그녀의 손에 묻은 먹물을 가리켰다.
“……글공부를 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바로바로 손을 씻으시겠죠. 성현의 말씀이 어떻고 청결한 몸을 유지해야 정신도 어쩌고 하시면서.”
“……정말 대단하십니다.”
남궁연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후우. 헌데 왜 저에게 이러십니까? 아직 어린 데다 중한 직책에 있지도 않습니다만.”
“겸손하시기는.”
“네?”
“가주님에게 놈이라고 하시는 태상가주님께서 아끼시던데요. 그럴 만한 능력이 있어서 그러시는 거잖아요.”
“…….”
남궁연은 긍정도 부정도 못 했다.
맞다고 하면 자신의 얼굴에 금칠을 하는 격이요, 아니라 하면 남궁학의 안목이 잘못됐다고 하는 꼴 아닌가.
정광이 그러면 그렇지 하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서론은 그만하고. 일 얘기를 하죠.”
“어떤……?”
“소금과 차를 사고 싶어요. 벼루, 먹, 종이 같은 것들도 조금요.”
정광이 화두를 던지자 남궁연이 이맛살을 좁혔다.
“아무 상인에게서나 사시면 되는 것 아닙니까?”
“양이 좀 많아서요. 한두 번으로 끝낼 생각도 아니고요.”
“얼마나 필요하시길래?”
“청해, 서장, 운남에 풀 만큼?”
“……!”
“왜요? 안 되나요?”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남궁연이 고개를 저었다.
“다른 것들은 차치하고. 소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소금은 나라에서 전매(專賣)하지요. 그걸 아무나 살 수 없다는 건 아시지요?”
“그럼요. 나라에서 주는 염인(鹽引)이 있는 상인만 살 수 있죠.”
“맞습니다. 휘상(徽商) 중 염인이 있는 상단이 많긴 하나 독점을 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요?”
“청해와 서장은 산서성(山西省)의 진상(晋商) 몫이지요. 운남은 광동성(廣東省)의 조상(潮商)이 잡고 있습니다. 저희가 끼어들기엔 가격부터 경쟁이 안 되는 상황이란 말입니다.”
정광이 백승무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제. 가격을 맞추려면 뭐가 제일 중요하지?”
백승무는 바로 대답했다.
“운송비입니다만…… 아!”
“이해했어?”
“그렇습니다, 사형.”
“역시 사제. 잘해봐.”
백승무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남궁연이 의아해서 물었다.
“진옥룡,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운송비를 줄일 방법이 있거든요.”
“불가능합니다. 수많은 육로가 있으나 대동소이…….”
“육로가 아니에요.”
“……네?”
“장강을 타면 빨리, 많이 나를 수 있지 않을까요?”
“……그 말씀이었군요. 하지만 장강수로십팔채가 걷는 통행세가 너무 비싸 의미가 없습니다.”
정광은 자신이 마치 수왕이라도 되는 양 통 크게 말했다.
“그거, 대폭 낮춰 드릴게요.”
“……네?”
“우선 같이 상단을 하나 만들죠. 동업이라 할까?”
“……!”
“남궁세가에서…… 아니지, 누구 좋으라고. 그냥 남궁 소저께서 관리하세요. 물건을 대고 운반도 하시고. 아, 판매도요.”
“…….”
“투자금은 제가 대고 지분만 조금 챙길게요. 어때요?”
“…….”
남궁연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그 눈으로 정광을 빤히 바라봤다.
“……허언을 하시는 건 아닌 것 같군요. 그럴 만한 방도를 이미 마련하신 것 같습니다만.”
“물론이죠.”
남궁연의 몸에서 기세가 일어났다.
그것은 무인이 아닌 상인의 것이었다.
“자세한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저희 측에서 그 많은 일을 다 맡고 움직여도 될 만큼의 가치가 있는지.”
“남궁세가는 빼고 남궁 소저와 거래하고 싶은데요.”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서로에게 좋은 일이 아닙니다. 본가가 뒤에 있어야 제가 움직이기 쉽고, 제가 혹 실수를 하게 되면 진옥룡께서 책임을 물을 대상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광의 얼굴에 미소가 피었다.
‘잘 골랐네.’
남궁연은 정말 제법이었다.
“그럼 남궁세가도 일정 부분 참여하는 것으로 하죠. 단, 가주님이 아니라 태상가주님의 힘으로.”
정광은 일의 전말을 설명했다.
장강수로연맹이 어떻게 됐고 어떤 변화의 바람이 불 것인지.
경악하면서도 중심을 잡고 있던 남궁연이 투지를 불태우며 제안했다.
“그럼 투자금 규모와 이익금 배분에 대해 대략적으로나마 논의해 볼까요?”
정광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백승무를 끌어당기며.
“사제. 아까 잘하겠다고 했지?”
“……네?”
정광은 백승무의 어깨를 힘주어 두드렸다.
“잘 얘기해 봐. 아주 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