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마침 기분이 별로
남궁연은 무척 바빴다.
항상 그랬고 자신이 원해서 하는 일이었기에 불만은 없었으나 몸이 피곤한 건 어쩔 수 없는 노릇.
자연스레 후회스러운 감정이 솟았다.
‘수련을 너무 게을리했어. 시간을 조금만 더 투자할걸.’
운기조식에 신경 쓰고 검법을 꾸준히 연마했으면 이렇게까지 힘들진 않을 텐데.
‘아니야.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랬으면 이렇게 일할 시간이 없었으리라.
무공과 일. 둘 중 하나는 소홀히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후우. 어디 보자. 제대로 됐나.’
열심히 놀리던 붓을 내려놨다.
짙은 먹물 향이 코를 찔렀으나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장부의 숫자와 창고에 쌓인 물품을 비교했다.
‘좋아. 끝났어.’
장부 작성은 끝났지만 모든 일이 끝난 건 아니었다.
남궁연은 속으로 한숨을 쉰 뒤 입을 열었다.
“정확하군요. 확인했습니다.”
바짝 긴장하고 있던 중년인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아가씨.”
“아닙니다. 행수(行首)께서야말로 고생하셨지요.”
남궁연은 남은 절차를 마무리한 뒤 탁자 위의 장부들을 들고 일어섰다.
중년인이 화들짝 놀라 손을 내밀었다.
“제가 들겠습니다.”
“행수께서 하실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다음 상행도 잘 부탁드립니다.”
“믿어주십시오.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중년인이 깍듯이 대하는 만큼 남궁연도 그를 예의 있게 대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남궁연은 빠른 걸음으로 창고를 떠났다.
한동안 걷다 보니 피곤함이 더 커졌다.
‘안 되겠어.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집무실에 장부를 내려놓고 침실로 가서 푹 자는 거다.
그러면 피로감도 없어지고 더 열심히 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꿀 같은 숙면이 아니라, 숙면 뒤에 활발히 일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미소를 머금는데.
‘음?’
그녀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황당한 광경을 봐서였다.
‘다들 뭐 하는 거야?’
수많은 사내들이 줄지어 걷는 모습이라니.
그것도 모두 아는 얼굴들, 그녀의 오라비들 아닌가.
‘왜?’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앞에서 걷고 있는 세 여인들 때문이리라.
‘와아. 예쁘긴 정말 예쁘네.’
같은 여자가 봐도 감탄할 만한 미녀들이었다.
자신도 따라가 보고 싶었지만.
이미 뒤를 졸래졸래 쫓고 있는 저 사내들은 그래선 안 됐다.
‘바쁠 때 좀 도와달라 하면 무공을 익히느라 그럴 틈이 없다면서 이럴 시간은 있어?’
하여간 사내들이란.
기가 차서 웃음도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는지 혼인한 이는 안 보이는 게 다행이랄까.
‘저걸 그냥…….’
뭐라 한마디 하려 했으나 너무 피곤해서 그냥 지나치려고 하는데.
소란이 일어났다.
“안내는 내가 전문이오!”
“어허! 내가 할 소리일세!”
“무어라?”
“내가 틀린 말 했는가?”
“…….”
값비싼 푸른 장포에 고풍스러운 검을 멋들어지게 찬 채 아웅다웅하는 모습이라니.
참고 있던 감정이 폭발했다.
“이게 무슨 추태입니까!”
소란이 뚝 그쳤다.
사내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모였다.
“여, 연아!”
“여, 여기는 무슨 일로…….”
남궁연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집무실로 가던 길입니다만. 다들 뭐 하고 계신 건가요?”
“…….”
사내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쭈뼛거렸다.
강호를 떨어 울리는 남궁세가의 검객들이 저런 궁상맞은 모습을 보일 줄이야.
남궁연의 울화가 더 커졌다.
“귀한 손님들이 오신 것 같은데 이런 결례를 범하시다니요. 그만 돌아가세요.”
사내들이 당황했으나, 그들 중에도 인물은 있었다.
당당한 풍채의 한 장년인이 무거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연아. 네가 오해를 하는 것 같구나. 사봉(四鳳) 중 세 분께서 본가를 둘러보고 싶다 하시기에 도와드리려던 참이었느니라.”
“……!”
남궁연의 눈이 커졌다.
‘저들이 그 유명한 사봉 중 셋이라고?’
하긴. 그럴 만도 하지.
그들쯤 되어야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무림맹의 무혈단이 왔다고 했지. 지봉(知鳳)을 제외한 세 사람이구나.’
독봉(毒鳳) 당예지, 권봉(拳鳳) 언의진, 교봉(敎鳳) 혜진임이 분명했다.
남궁연의 눈에 호감의 빛이 떠올랐다.
근래에 천하의 젊은 여협들 중 가장 큰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이들을 만났으니 그럴 수밖에.
‘친분을 맺어야 해.’
남궁연은 무가의 사람이었으나 상가의 혼을 가진 여인.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언제 피곤했냐는 듯 밝은 얼굴로 선언했다.
“제가 안내해 드리지요.”
“……!”
사내들은 놀랐다가 분노했다.
‘어떻게 찾아온 인연인데!’
‘내 생에 사봉 중 셋을 또 볼 기회가 어디 있다고!’
모두 눈을 번뜩이며 굳세게 대항하려 했으나.
남궁연의 말은 그 어떤 쾌검보다 빠르고 치명적이었다.
“제 일을 도울 시간은 없다고 하시더니 여기 모이셔서 서로 안내하겠다며 다투고 계시네요. 이것도 수련의 일환인가요?”
“……!”
“가주님께 말씀드리기 전에 돌아가셔서 진짜 수련에 힘쓰시는 게 어떨까요.”
“…….”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있을 리 있나.
남궁세가 사내들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흩어졌다.
“아. 진영 오라버니.”
“나, 나? 왜 그러느냐?”
벌써 멀리 갔던 남궁진영이 이형환위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남궁연은 그에게 장부들을 건넸다.
“이것 좀 부탁드려요.”
“…….”
“제 집무실 아시죠?”
“……하아아. 물론이지.”
남궁진영이 장부를 들고 떠나자 남궁연은 몸도 마음도 가벼워졌다.
자연히 표정도 좋아질 수밖에.
반가운 얼굴로 세 여인과 통성명을 한 뒤 물었다.
“특별히 가시고 싶은 곳이 있으면 말씀해 주실래요?”
“글쎄요.”
당예지가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남궁세가는 처음인지라 모든 곳이 궁금하군요. 언제 또 올 수 있을지 모르니 외인이 구경하기 힘든 곳에 가볼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고마워요. 덕분에 좋은 추억을 얻을 것 같아요.”
“하하. 뭘요.”
밝게 웃으며 세 사람을 둘러보던 남궁연이 눈을 빛냈다.
언의진이 그녀와 시선을 안 마주치고 눈을 이리저리 굴려서였다.
‘이거 영…… 수상한데.’
의심이 싹트니 다른 것들도 수상해졌다.
‘자기들끼리 나오면 당연히 사내들이 몰릴 거란 걸 알았을 텐데, 왜?’
워낙 미인인 만큼 항상 겪었던 일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번거로운 일을 감수하고 나왔다?
뭔가 노리는 게 있지 않은 이상 그럴 이유가 없지 않은가.
‘본가를 둘러보고 싶다고 했지. 흔치 않은 기회니까 구경하기 힘든 곳이면 좋겠다고. 그럴듯한 말이지만 거꾸로 생각해 보면…….’
금지라 할 만한 곳에 가기 위해 사내들을 경쟁시키려 한 것이리라.
‘설마 본가에서 뭔가를 훔치려고 하는 걸까?’
자신이 생각했지만 말도 안 되는 가정이었다.
남궁세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명가와 명문의 사람들이 그런 짓을 저지를 리가.
‘무혈단주인 진옥룡 그자라면 그러고도 남겠지만…… 아!’
남궁연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럴듯한 가정이 떠오른 것이다.
‘무혈단! 무혈단의 군사! 본가가 그를 숨기고 있을 거라 의심하고 있구나!’
남궁세가에서 실종된 건 면목이 없지만 이건 아니지.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가정일 뿐.
남궁연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당예지에게 말했다.
“그런데 실망하실지도 몰라요.”
“실망이라니요?”
“본가는 광명정대(光明正大)함을 중요시하는지라 특별히 비밀스러운 곳이 없거든요.”
“…….”
언중유골(言中有骨)이라.
그냥 들으면 단순한 가문 자랑이었지만 목적이 있는 당예지에게는 다르게 들렸다.
‘어린 데다 무공 수위도 낮다고 너무 쉽게 봤어.’
남궁세가는 딴 뜻이 있는 너희와 달리 숨기는 게 없다는 말 아닌가.
‘남궁연이라 했지?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인데 머리가 빠르고 혀도 날카로워.’
일이 꼬였는데도 미소가 지어졌다.
‘이런. 나도 단주를 닮아가는 건가?’
계획대로 안 돼도 분노하지 말고 재미를 느껴라.
정광이 간혹 했던 말이다.
‘단주는 말로만 그랬던 게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줬지.’
덕분에 수많은 역경을 헤치며 강호를 질타할 수 있었다.
물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고.
‘가만히 보니 재밌는 아이네.’
당예지의 미소가 더 짙어지고 남궁연의 얼굴은 굳어졌다.
“그럼 광명정대한 곳부터 안내를 부탁드릴게요. 남궁 소저, 괜찮으시죠?”
* * *
정광은 남궁세가에서 제일 높은 전각 지붕에 올라 은신술을 펼치고 있었다.
남궁화인의 집무실도 잘 보이는 위치였는데 솔직히 큰 기대감은 들지 않았다.
‘들쑤셨다고 바로 움직일 만큼 바보는 아니지.’
그래도 지켜봐야 했다.
역(逆)을 노릴 수도 있지 않은가.
‘밤에 움직여 주면 좋으련만.’
잠행술과 은신술을 제대로 펼쳐 지근거리에서 감시하려면 그래야 했다.
‘그런데 그거야말로 헛된 바람이란 말이야.’
무림맹에서 밤에 몰래 뇌물을 뿌리다가 전부 털렸던 남궁화인이다.
그때는 정광의 무위를 제대로 몰라 그냥 지나갔지만, 팔사를 꺾은 소문이 퍼진 지 오래인데 아직까지 의심하지 않는 건 말이 안 됐다.
‘슬슬 소란스러워질 때가 됐는데.’
아니나 다를까.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시끄러운 소리들이 들렸다.
“안내는 내가 전문이오!”
“어허! 내가 할 소리일세!”
“무어라?”
“내가 틀린 말 했는가?”
당예지 일행에게 잘 보이려고 안간힘을 쓰는 남궁세가 사내들의 목소리였다.
정광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 더 떠들어라. 열심히 움직이고.’
어디가 됐든 우르르 몰려다니며 떠들어댈 것이다.
그러면?
남궁세가의 어른들이 뛰어나와 나무랄 터.
남궁화인은 정광이 소란을 일으켰을 거라 의심하고 나올 생각도 안 하겠지만.
‘시작해 볼까.’
정광은 안력과 청력은 물론 기감까지 키워 사방을 관조했다.
‘어서 나와봐, 어서.’
무인은 귀가 밝다.
남궁세가가 아무리 넓다 해도 저런 시끄러운 소리를 못 들을 리가 있나.
여기저기서 사람이 나와 소란이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향할 것이다.
정광은 그 광경을 머릿속에 담아두면 됐다.
사람이 나오는 곳이 아니라 안 나오는 수상한 곳들을.
‘자. 어디냐?’
사방을 둘러보며 눈을 번뜩이는데.
의외의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추태입니까!”
삽시간에 소란이 잦아들었고.
정광의 주먹엔 힘이 들어갔다.
‘텄네.’
밖으로 나오던 사람들이 다시 들어가고 있었다.
기껏 세운 계획이 무너진 것이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려? 얼굴이나 보자.’
솔직히 계획대로 안 돼도 재미를 느끼는 건 상대가 그럴 만한 사람일 때 얘기지.
아무한테나 물을 먹어서야 쓰겠는가?
정광은 잠행술을 펼쳐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삼삼오오 흩어지는 남궁세가 사내들 뒤로 익숙한 얼굴 셋과 낯선 얼굴 하나가 보였다.
‘스물도 안 돼 보이잖아.’
저런 어린 애한테 당할 줄이야.
허탈해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대체 뭐 하는 녀석이길래 한 명도 남김없이 쫓아낸 거지?’
호기심이 솟은 정광은 네 사람의 대화를 듣다가 피식 웃었다.
꽤 치열한 공방 아닌가.
‘머리도 성깔도 있는 애네.’
손에 묻은 먹물과 빈약한 기로 보아 무림이 아니라 상계에 뜻이 있는 녀석임이 분명했다.
‘그래. 돈을 주무르려면 그 정도는 돼야지.’
칭찬은 짧았다.
정광은 이맛살을 좁혔다.
‘이제 어쩐다.’
날이 어두워지면 잠행술을 펼쳐 남궁세가를 전부 뒤져야 하나.
못할 건 없다만 어느 세월에?
‘그냥 확 불을 질러 버려?’
괜찮은 생각이었다.
너도, 나도 다 튀어나올 것 아닌가.
심지어 위진홍을 납치한 자조차 위진홍을 들쳐 메고 나올 만한 묘책!
정광의 눈이 빛났다.
방화할 생각에 흥분해서가 아니라 거대한 기가 다가오는 걸 느껴서였다.
‘이 정도 기면…….’
가주인 남궁화인보다 위다.
그냥 위가 아니라 많이 위!
‘누굴까?’
곧 알 수 있었다.
위엄을 풀풀 풍기는 노인이 어린 여인 앞에 나타나 묻고 있었다.
“연아. 무슨 일이기에 그리 소리를 질렀느냐?”
연이라 불린 어린 여인이 대답했다.
“별일 아닙니다, 태상가주님.”
“허어. 할애비한테 딱딱하게.”
노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당예지 일행을 바라봤다.
“너희가 당대의 사봉 중 셋인가 보구나.”
세 사람이 정중하게 인사하자 노인이 말을 이었다.
“너희의 단주라는 놈, 얼굴 좀 볼 수 있겠느냐?”
“무슨 일로 찾으시는지요?”
당예지가 담담히 묻자 노인이 빙그레 웃었다.
“너는 알 것 없느니라. 놈이나 빨리 불러다오.”
당예지는 물론 언의진과 혜진까지 얼굴을 굳혔다.
놈이라니.
아무리 배분이 높다 하나 너무 심한 호칭 아닌가.
‘이 영감탱이가 진짜!’
성격 급한 언의진이 한마디 하려고 하는데.
마침 기분이 별로 안 좋았던 정광이 은신을 풀고 나타났다.
그러고는 삐딱하게 짝다리를 짚으며 퉁명스레 물었다.
“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