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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마협-228화 (227/569)

228화

산책

한 중년인이 전각 입구를 막으며 외쳤다.

“진옥룡! 기다리라 하지 않았나! 이 무슨 무례한 짓인가!”

정광은 어이가 없었다.

‘무례? 이게?’

그냥 지나가려 했을 뿐인데.

아직 누군가를 때린 것도 아니고 죽이지도 않았잖아?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아 한 번 더 말했다.

“실례합니다. 잠시 지나갈게요.”

중년인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솟았다.

“그게 안 된다고!”

“왜요?”

“가주께서 자네를 아직 찾지도 않으셨는데 막무가내로 뵙겠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아아.”

정광은 그제야 깨달았다.

‘휘상(徽商)이 제법 장사를 할 줄 안다더니. 헛소문이었구나.’

정광의 관점으로 봤을 때, 남궁세가의 대응은 전혀 상식적이지 않았다.

“그럼 부르실 때까지 계속 기다려요?”

“당연한 말을!”

“남궁세가에서 제 군사가 실종됐는데요?”

“찾고 있네!”

“어찌 그리 당당하세요?”

“무어라?”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중년인이 검자루를 쥐려다 얼어붙었다.

정광의 눈 때문이었다.

‘무, 무슨 놈의 눈이…….’

뱀과 마주친 개구리의 심정이 이럴까.

정광의 번들거리는 눈을 보자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정광의 혀가 뱀처럼 위협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돈을 빌려 드렸는데 잃어버리셔 놓고 오히려 큰소리를 치시는 격이네요.”

“도, 돈?”

“네. 귀가(貴家)를 돕기 위해 온 의인이 귀가에서 실종됐잖아요. 이거, 누구 책임이죠? 실종된 사람?”

“…….”

“채무자인 귀가의 책임 맞죠? 그런데 채권자인 저한테 마냥 기다리라니요. 천하에 이런 식으로 장사하는 곳이 어딨어요?”

“……!”

중년인은 입을 떡 벌렸다.

이치에 맞는지 틀리는지를 떠나 무슨 놈의 표현이 이렇게 저렴한지.

마치 돈을 빌리고 잃은 도박꾼을 전주(錢主)가 힐난하는 듯한 모습 아닌가!

“제 말이 맞죠?”

“…….”

“무언은 긍정이죠. 그럼 들어갈게요.”

정광은 중년인을 지나쳐 걸었다.

황당해서 말을 못했던 중년인이 화들짝 놀라 정광의 팔을 잡았다.

“아야!”

팔을 잡힌 정광이 눈을 크게 떴다.

“이런 독수(毒手)를!”

“도, 독수라니? 그저 가볍게 잡은 것 아닌가?”

“윽. 내공도 밀어 넣으시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게! 내가 언제…….”

“이제부터 일어나는 일, 정당방위예요.”

“……!”

억울해서 항변하던 중년인의 눈이 커졌다.

너무 분노해서 잠시 잊고 있었던 정광의 악명이 떠오른 것이다.

정광이 그의 팔을 떼어내고 주먹을 말아 쥐는 그 순간.

전각 안에서 한 사내가 뛰어나왔다.

“지, 진옥룡. 가주께서 자네를 찾으시네. 마침 와 있었군. 들어가세나.”

정광은 내심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찾기는 개뿔. 들어가려 하니 선수를 치네.’

정광의 시위 때문이 아니라 남궁화인 본인이 원해서 만나는 것이라는 의미였다.

‘체면도 적당히 따져야 그럴듯하지. 없어 보이잖아.’

어쨌든 목적을 이루게 됐으니 그 정도야 넘어가 줄 아량이 있었다.

정광은 사내를 따라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남궁화인의 집무실 앞에 이르자 대기하고 있던 시비(侍婢)들이 문을 열었다.

화려한 의자에 꼿꼿이 앉은 남궁화인이 나타났다.

무척 위엄 있는 모습이었으나 정광의 눈에는 한심해 보일 뿐이었다.

‘인력 낭비가 너무 심해. 고작 문 여닫는데 사람을 두 명이나 써?’

전생에 더 부자였던 정광도 저러진 않았거늘.

문을 여는 시비는커녕 문 자체가 없었다.

시야가 탁 트여야 암습에 대응하기 쉽지 않은가.

집무실 안에 들어서자 문이 닫혔고, 남궁화인의 목소리가 정광을 현생으로 돌려놨다.

“오랜만이군.”

정광은 예의 있게 두 손을 모았다.

“안녕하세요, 가주님.”

“그래, 무슨 일인가?”

“제 군사 때문에 왔죠.”

“찾고 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게나.”

“아직 살아 있나요?”

남궁화인은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말게. 수하를 아끼지 않나 보군.”

“걱정돼서 그러죠. 누가 남궁세가에 들어와 사람을 납치해 갈 수 있겠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식솔분들 중 어떤 분이 손을 쓰신 것 같아서요.”

“본가의 규율은 무척 강하네. 그럴 일은 없어.”

“후우. 의기(義氣) 하나만 가지고 어떻게든 도우러 왔다가 이런 횡액을 당하다니. 군사도 참 복이 없네요.”

정광이 짐짓 한숨을 쉬며 말하자 남궁화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사마련의 사뇌(邪腦)가 의기라. 자네, 농이 많이 늘었군.”

“사뇌가 아니라 무뇌(無腦)로 새롭게 태어났죠.”

“혀는 여전한 것 같던데.”

“완전히 바뀌면 오히려 의심스럽잖아요. 적당한 게 믿음이 가고 딱 좋더라고요.”

“말장난하려고 왔나? 나는 바쁜 사람일세.”

“저도 바쁜데요. 산서성, 섬서성, 사천성, 호북성을 지나 장강을 타고 안휘성에 왔을 만큼요.”

남궁화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대충 듣기만 해도 엄청난 거리 아닌가.

누가 들어도 정광이 남궁화인보다 바쁘다고 인정하리라.

“다시 한번 말하지. 기다리게.”

“언제까지 기다리면 되는지 확답을 주시면 서로 좋을 것 같은데요.”

남궁화인의 머릿속에서 이성의 끈이 툭 끊어졌다.

‘이 망할 놈이 감히! 내게 이런 식으로 압박을 줘?’

하지만 정광이 얼마나 강한지, 얼마나 막 나가는지도 잘 알고 있었기에 끊어진 끈을 재빨리 이어 붙였다.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밖에 못 하겠군.”

“음.”

정광은 남궁화인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분노로 이글거리지만 흔들리지는 않는 모습이었다.

‘본인이 위진홍을 납치하라고 지시하지는 않은 건가.’

음흉한 남궁화인과 안 어울리는 일이긴 했다.

그렇다면 식솔 중 누군가가 손을 썼다는 얘기인데.

‘정말 누군지 모르는 거 아니야?’

찬찬히 보니 남궁화인이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이 눈에 띄었다.

‘이것 봐라?’

정광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주께서는 집무실 의자에 앉아 계실 때도 검을 차고 계시네요.”

“……검사(劍士)라면 이래야지.”

“곤륜에서는 보통 탁자 위에 올리거나 기대 놓거든요. 영 걸리적거려서요.”

“……문파마다 다른 것 아니겠나.”

“무당파분들도 그렇던데.”

“……본가는 속세에 있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이럴 수밖에 없어.”

꽤 타당한 설명이었으나.

정광이 듣기엔 아니었다.

‘전각 주위에 호위 무인도 몇 안 두고 집무실 앞엔 시비만 달랑 둘 놓고선 무슨.’

안휘성의 패자인 남궁세가에 누가 감히 뛰어들까.

게다가 남궁화인은 오만한 성정만큼이나 자신의 무공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자였다.

‘그런데 집무실에서 검을 차고 있다? 말도 안 되지.’

정광을 상대하려고 준비한 것도 아니리라.

남궁화인은 정광과 싸울 수 없었으니까.

그가 싫어하기로 소문난 정광이 그를 돕겠다고 온 상황 아닌가.

검이라도 뽑았다간 수많은 무인들이 손가락질할 게 분명했다.

‘어딘가 가려던 참이었던 것 같은데…….’

남궁화인은 당황한 나머지 실수했다.

그냥 나가려던 참이었다고 말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어딘지를 감추려다 보니 쓸데없는 변명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럴 땐…….’

대놓고 물어야지.

“위험한 곳에 가실 예정이셨어요?”

“……!”

남궁화인의 눈동자가 살짝 커지고.

정광의 입가엔 미소가 걸렸다.

“안휘성 내에 가주께 위험한 곳은 없을 텐데. 장원 안에 그런 곳이 있나 보네요.”

“……허허허.”

남궁화인이 헛웃음을 흘리며 축객령을 내렸다.

“농은 여기까지일세. 그만 나가보게나.”

“네.”

정광이 순순히 대답하자 남궁화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 맞다. 군사는 사흘 안에 돌아오겠죠?”

“확답은 못 준다고 했을 텐데.”

“기다리는 건 성미에 안 맞아서요. 사흘 뒤면 장원 밖에 소문이 퍼질지도 모르고요.”

“……지금 나를 협박하는 겐가?”

“설마요.”

정광은 부들거리는 남궁화인을 보며 씩 웃었다.

“응원하는 겁니다.”

* * *

전각에서 나온 정광은 천룡단 숙소로 곧장 향했다.

“사부님. 다녀왔어요.”

“수고했다. 남궁가주가 뭐라 하더냐?”

정광은 남궁화인과의 대화를 가감 없이 얘기했다.

거기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인 뒤 허청을 설득했다.

“영 의심스러워서 말이죠. 기다리기만 해선 안 될 것 같아요.”

“직접 움직일 셈이냐?”

“네.”

허청은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네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냐만. 먼저 손을 쓰진 말거라.”

“당연하죠.”

허청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믿으마. 내가 도울 건 없고?”

“혹시 일이 커질 수도 있으니 최상의 상태를 유지해 주세요. 천룡단도요.”

“……어째 불길하게 들리는구나.”

“기분 탓이겠죠.”

“……선은 넘지 않을 거지?”

“물론이죠.”

정광이 가슴을 탕탕 치며 호언장담했으나 허청은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제발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장강에선 별일 없었지? 그렇다고 해 다오. 어서.”

“아. 사실은…….”

얘기가 끝났을 때, 허청은 혼이 빠져나간 얼굴이 되어 있었다.

정광은 그를 위로하고 무혈단 숙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무혈단원들에게 사정을 설명한 뒤 유정풍을 바라봤다.

“남궁세가에 혹시 금지(禁地) 같은 곳 있나요?”

“금지라…….”

유정풍은 머리를 북북 긁으며 머릿속의 정보들을 뒤졌다.

“특별한 곳은 없다고 알고 있는데.”

“그럼 금지까진 아니고 사람이 많이 드나들지 않는 데는요?”

“글쎄. 끽해야 가주와 태상가주의 처소 정도? 부인들의 처소도 그럴 거고.”

정광은 실망하지 않았다.

개방이 아무리 정보에 밝다 해도 한계는 있는 법. 그들이 알 정도면 그건 진짜 금지가 아니지 않는가.

“유 소협. 안휘성에도 개방 분타가 있죠?”

“당연하지. 천하에 거지 없는 곳이 어디 있다고.”

“가셔서 정보를 얻어주실래요? 안휘성에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거나 수상한 자가 오진 않았는지. 최근 남궁세가의 움직임이 어땠는지 그런 것들로요.”

“이해했네. 외부에서 무뇌를 납치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남궁세가의 식솔이 도왔을 수도 있고.”

“정문에 있는 자오에게 그만 와서 쉬라고 전해주시고요.”

“그러지.”

유정풍이 떠나자 정광이 단원들에게 당부했다.

“사부님께도 말씀드렸는데,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하셔야 해요.”

모두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녀올게요.”

정광이 일어서자 정우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어딜 가려고?”

“남궁가주를 미행해 보려고요.”

정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너무 위험해. 수왕과의 싸움에서 많이 다치지 않았더냐. 사제야말로 쉬어야 해.”

“괜찮아요. 삼청합일신공에서 작은 성취를 봐서 깨끗이 치유됐거든요.”

“사, 삼청합일신공에서?”

“네.”

정우와 정현의 눈이 커졌다.

같은 곤륜파 사람이지만 입문이 늦은 백승무와 달리 삼청합일신공이 어떤 것인지 알아서였다.

“아아…… 이런 경사가 있나.”

“하하하. 역시 사제야. 역시 사제라고!”

다른 단원들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어쨌든 좋은 일이라는 건 눈치챘다.

“축하하오, 단주.”

“대공(大功)을 이루셨군요.”

“소공(小功)인데요.”

“아미타불.”

정광의 부정에 공우가 부처 같은 미소를 띄웠다.

“단주의 소공은 다른 이에겐 대공이외다.”

“복잡하네요. 그보다…….”

정광은 당예지, 언의진, 혜진을 지목했다.

“세 분. 하실 일이 있는데 괜찮으시죠?”

얼결에 일어선 세 사람 중 당예지가 대답했다.

“단주의 명이라면 따라야지요. 어떤 일인가요?”

“나가셔서 산책하시면 돼요.”

“……산책?”

당예지가 황당해하자 정광이 설명했다.

“세 분이 걸으시면 사람들이 몰릴 거예요. 엄청 많이.”

“…….”

세 사람은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들이 아름답다는 걸 잘 알기에 뭐라 하기 힘든 것이다.

“서로 안내해 드리려고 경쟁이 붙을걸요. 최대한 여러 곳을 다니시며 못 들어가게 하는 곳을 찾아봐 주세요.”

“아! 금지일 법한 곳을 알아보란 얘기군요.”

“네. 군사를 빨리 찾아야죠. 꼴 보기 싫긴 해도 아직 어린애잖아요. 살아 있다면 얼마나 무서워하고 있겠어요.”

세 사람은 위진홍이 두려워하며 떨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아니, 하려고 했는데 되지가 않았다.

‘욕을 하고 있을 것 같은데.’

‘잘난 척하면서.’

그래도 어쩌랴. 동료인데.

당예지가 대표로 말했다.

“지금 가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저도 다녀올게요.”

정광은 말이 끝나자마자 사라졌다.

세 사람도 꺼림칙한 마음을 애써 지우며 밖으로 나갔다.

얼마 안 가 그들 뒤로 줄이 생겼다.

남궁세가 사내들로 이루어진 줄이었다.

‘점점 길어지네.’

언의진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청년은 물론 장년까지 합세하고 있는 상황.

‘왜 다들 눈치만 보고 있어? 말을 걸라고. 음?’

마침 언의진의 눈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그녀가 정광에게 호감을 느낀 줄 알고 정광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쥐어터진 남궁진영이었다.

‘복수하겠다고 단주에게 덤볐다가 두들겨 맞은 남궁진도도 있잖아.’

두 사람은 언의진과 시선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랐다.

언의진은 억지로 미소를 띠며 두 사람에게 부탁했다.

“남궁진영 소협. 남궁진도 소협. 이곳저곳 구경해 보고 싶은데 도와주실 수 있나요?”

“……!”

두 사람의 입이 쭉 찢어졌다.

다른 사내들은 너무 놀라 입을 찢어져라 벌렸고.

“무, 물론이지요!”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두 사람이 기쁜 얼굴로 답하자 다른 사내들도 가만있지 않았다.

“안내는 내가 전문이오!”

“어허! 내가 할 소리일세!”

“무어라?”

“내가 틀린 말 했는가?”

삽시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지는데.

한 사람의 목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이게 무슨 추태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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