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227화 (226/569)

227화

제발 살려주세요

안휘성(安徽省)은 중원의 여러 성 중 작은 편에 속했고 산지가 많아 농사에 적합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곳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 결과 상업에 매진하는 이가 늘어났다.

절박함 때문이었을까, 자질이 있었던 걸까.

안휘성 상인들은 중원 전역을 돌며 차와 소금을 팔아 부를 축적했다.

휘상(徽商)이라 불리며 산서성(山西省)의 진상(晋商), 광동성(廣東省)의 조상(潮商)과 함께 중원을 대표하는 상인 집단으로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이다.

그런 안휘성의 대호족(大豪族)인 남궁세가 역시 가문의 주력 사업은 상업일 수밖에.

게다가 명가 중의 명가인 칠대세가의 일원인지라 예를 칼같이 지키기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진옥룡?”

“그런데요.”

“흥.”

정광을 대하는 남궁세가 무인은 불손하기 짝이 없었다.

‘초면에 이런 실례를!’

기분이 상한 무혈단원들 중 직설적인 팽강휘가 따지듯 물었다.

“너무 무례하지 않소이까?”

“지금 무례하다 했소?”

“들어놓고 왜 물으시오?”

팽강휘가 더 화나서 언성을 높이자 비슷한 연배의 남궁세가 무인도 화를 냈다.

“본가가 받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오만.”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알아듣게 얘기를 해보시오.”

“입에 담기 싫소이다.”

“아니, 말을 해야 알 것 아니오?”

“싫다하지 않았소.”

“이거야 원. 벽 보고 얘기하는 기분이군.”

답답해하는 팽강휘와 달리 정광은 듣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위진홍이 버릇없게 굴었나?’

한동안 예의를 지키라고 했는데도 사고를 치다니.

그럴 거라 예상하긴 했지만 아주 거하게 쳤나 보다.

‘일단 여기까진 잘됐는데. 눈빛이 영 마음에 안 드네.’

정광은 그에 맞는 대응을 생각한 뒤 남궁세가 무인을 향해 두 손을 모았다.

“무량수불. 군사가 실례되는 언행을 했나 보네요.”

“…….”

“제 사람의 잘못은 제 잘못이죠. 죄송해요.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

남궁세가 무인의 표정이 많이 누그러졌다.

‘오만하기 짝이 없다고 들었건만 소문과 다른 면이 있구나.’

예의에는 예의로 대해야 하는 법.

정중하게 포권하며 고개를 숙였다.

“본가를 방문하신 손님께 결례를 저질러 미안하오. 아직 수양이 얕아 욱하는 마음을 참지 못했소.”

“이해해요. 군사가 좀 그렇잖아요.”

“……많이 그렇더이다.”

정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교화시키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도 잘 안 되네요. 사파인은 어쩔 수 없는 건가.”

“그러게 말이오. 하여간 사파인들이란…….”

“아. 여기 이분, 자오는 예외예요. 본성 자체가 선해서 많은 분들께 대협이라는 칭호를 듣고 있거든요.”

“……!”

남궁세가 무인은 당황했다.

‘저 평범한 중년인이 다설범협(多舌凡俠) 자오?’

이런 실수를 하다니.

사파 출신인 자오의 면전에서 대단한 실례를 저지른 것 아닌가.

즉시 미안한 얼굴로 사과했다.

“대협께서 힘없는 이들에게 행하신 선행들에 대한 소문, 많이 들었습니다. 좀 전에 제가 한 실언은 잊어주십시오.”

자오가 대답하려 하는데.

정광의 전음이 들려왔다.

-자오. 편하게 말씀하세요. 아주 원 없이요.

-아, 알겠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정광이 지시했으니 따를 수밖에.

안 그래도 입이 근질거리던 참이었다.

자오는 남궁세가 무인을 보며 점잖게 말문을 열었다.

“괜찮소이다. 그보다 한 말씀 드려도 되겠소이까?”

남궁세가 무인이 자세를 바로 하며 대답했다.

“그러십시오. 세이공청(洗耳恭聽) 하겠습니다.”

“본디 사람의 본성은 가지각색이고 자라온 환경에 따라 또 달라지기 마련이오. 편견을 가지고 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나 그럼으로써 상대에게 상처를 주기도…….”

귀를 씻고 공손히 듣겠다고 한 남궁세가 무인은 귀를 떼어버린 뒤 도주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은 죄가 있는 데다 듣겠다고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정광은 그를 보며 소리 없이 웃다가 다른 남궁세가 무인에게 물었다.

“자오는 더 있어야 할 것 같네요. 저희는 들어가도 되죠?”

그저 옆에 있던 죄로 자오의 음공에 시달리며 진저리를 치던 무인이 환한 얼굴로 답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안에 기별을 넣고 안내해 드리겠소이다.”

정말 잠시 뒤.

자오를 제외한 무혈단은 남궁세가의 대장원에 들어가게 됐고…….

‘흐음.’

정광은 주변을 둘러보며 견적을 냈다.

‘안휘성의 패자라더니. 돈을 안 처바른 데가 없구나.’

바닥에 깔린 돌에서부터 곳곳에 세워진 전각까지. 보이는 모든 것에서 돈 냄새가 풀풀 났다.

남궁화인이 무림맹주가 되기 위해서 뿌린 벽곡단 항아리를 털면서도 느꼈지만, 남궁세가는 진짜 부자였다.

마치 이왕 온 거, 더 털라고 손짓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안내된 전각도 고급스러웠다.

남궁세가 무인이 근처에 있는 또 다른 전각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천룡단의 대협들께서는 저곳에서 묵고 계시외다. 가주께서 곧 찾으실 테니 그때까지 말씀이라도 나누시오.”

“네. 수고하셨어요. 자오가 할 말 다 하면 이쪽으로 안내해 주시겠어요? 두 시진 정도면 끝날 거예요.”

“두, 두 시진!”

“그것도 짧게 잡은 건데.”

“헉!”

남궁세가 무인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었다.

자오의 수다를 동료 옆에서 함께 들어야 한다니.

대체 어떻게 버틴단 말인가!

“흐으으…….”

남궁세가 무인은 비틀거리며 떠났고, 정광은 단원들과 함께 천룡단의 숙소에 갔다.

“사부님. 저 왔어요.”

“저, 정광이냐?”

문이 활짝 열리며 허청이 뛰어나왔다.

“어? 안색이 왜 그러세요?”

“이, 일단 들어가자꾸나.”

허청이 무혈단을 전각 안으로 이끌었다.

천룡단원들이 수심 깃든 얼굴로 환영했다.

‘뭐야 진짜?’

정광은 아예 대놓고 물었다.

“혹시 사고 치셨어요?”

천룡단원들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허청이 깊은 한숨을 내쉰 뒤 겨우 입을 열었다.

“위, 위진홍이…….”

“위진홍이?”

“……납치됐단다.”

* * *

허청의 방.

허청의 얘기를 다 들은 정광이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갑자기 사라졌다, 이 말씀이죠?”

“그렇지.”

허청은 위진홍이 안 보이자 바로 움직였다.

남궁세가의 경비를 책임지는 수호당주(守護堂主)에게 위진홍이 장원을 나가는 모습을 봤냐고 물은 것이다.

“하지만 수호당주는 그런 일은 없었다고 했고요.”

“그래. 정확하다.”

허청은 남궁가주 남궁화인에게 가서 따졌고, 남궁화인은 왜 자기에게 그러냐며 역정을 냈다.

위진홍이 남궁세가 안에서 실종된 건 사실인지라 결국 남궁화인이 한 수 접으며 찾아보겠다 했지만, 며칠이 흐른 지금까지 위진홍의 행방은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흐음. 정문을 지키는 무인들은 모르는 것 같던데. 은밀히 찾고 있나 보네요.”

“수치스러운 일이니 널리 알리기 싫겠지.”

“정말 찾고 있긴 할까요?”

허청이 고개를 저었다.

“알 도리가 없어. 정광아, 정말 면목이 없구나.”

“뭘요. 사부님 잘못도 아닌데.”

“아니야. 내 잘못이다. 내가 좀 더 주의를 줬어야 했어.”

“군사가 건방지게 굴었어요?”

“나와 천룡단원들에겐 안 그랬지만 남궁세가 사람들에겐 그랬지.”

“좀이요?”

허청은 정문을 지키던 자와 비슷한 표현을 썼다.

“많이.”

“잘했네요.”

“그래, 너무 심했…… 응?”

허청의 눈이 커졌다.

“지금 뭐라 그랬느냐? 위진홍이 잘했다고?”

“네.”

허청의 커졌던 눈이 가늘어졌다.

“건방지게 굴 거란 걸 알고 있었구나.”

“그렇죠. 사부님과 천룡단 분들에겐 억지로라도 예를 지켰겠지만 본성이 어디 가나요.”

“아예 그러길 바란 것 같은데. 이유가 무엇이냐?”

“남궁세가 무인들에게 사파인에 대한 반감을 심어주기 위해서요. 아주 사파인이라면 학을 떼게 만들어주고 싶었거든요.”

허청이 뒤통수를 얻어맞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남궁가주가 휴전을 주장하더라도 식솔들이 반발하게 하려고 그런 건가.”

“네. 그리고 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남궁가주가 사마련주와 손을 잡았다면 곧 행동을 시작할 거예요. 그러면 식솔들은 더 반발하겠죠.”

“허어…… 그런 생각을…….”

허청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정광이 어깨를 으쓱했다.

“생각은 생각일 뿐이죠. 틀어졌잖아요. 군사가 스스로 사라졌을 리는 없고. 실종된 게 뻔하니 남궁세가의 누가 왜 손을 썼는지부터 알아봐야 할 것 같아요.”

“짐작 가는 점이 있느냐?”

“음…….”

정광의 머리가 빠르게 움직였다.

‘대충 몇 개 떠오르긴 하는데. 확실하지가 않네.’

무엇보다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직접 발로 뛰며 알아봐야 했다.

“일단 남궁가주부터 만나볼게요.”

“지금 바로?”

“숙소로 안내해 준 무인이 남궁가주가 곧 찾을 거라 했지만 빨리 만나는 게 낫겠죠.”

“그래. 네 말이 옳다.”

허청이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화났느냐?”

“아뇨. 왜요?”

“정황상 남궁세가가 위진홍을 납치한 게 분명하지 않느냐.”

정광이 피식 웃었다.

“어떻게 보면 잘됐죠. 군사는 고생 좀 해봐야 해요.”

“거참. 이걸 다행이라 해야 하나.”

허청은 말과 달리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정광의 이어지는 말에 다시 불안감에 빠졌다.

“다행이긴 한데…….”

“……!”

정광의 눈은 어느새 깊게 가라앉아있었다.

“군사가 죽거나 다쳤으면 화가 나긴 할 것 같네요.”

* * *

“무어라?”

무척 화난 남궁화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직도 못 찾았다는 게 말이 되냔 말이다!”

소리뿐만이 아니었다.

탁자에 놓여 있던 벼루를 집어던졌다.

무서운 속도로 날아간 벼루가 수호당주의 뺨을 스치고 벽에 부딪혔다.

콰장창!

남궁화인은 그래도 분이 안 풀렸는지 수호당주에게 성을 냈다.

“허청만 해도 귀찮거늘, 진옥룡 그놈이 왔어! 살살 긁는 말투로 또박또박 따질 게 뻔해! 나보고 그걸 참으라고?”

수호당주가 뺨에서 피를 흘리며 부복했다.

“가주. 최선을 다했으나 종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찾으라니까! 없으면 만들어오기라도 해!”

“그, 그런…….”

“어서 나가! 변명할 시간에 찾으라고!”

“아, 알겠습니다.”

남궁화인은 수호당주가 나가자 거친 숨을 가라앉혔다.

‘빌어먹을 녀석 같으니.’

지금껏 잘 참아왔거늘.

정광만 생각하면 감정 통제가 안 됐다.

‘내게 그따위 놈을 보내?’

그나마 정광은 경어를 써가며 속을 뒤집어놓았지만 위진홍은 말투마저 싸가지 없었다.

‘그래도 아슬아슬하게 선은 지키기에 몇 번이나 베려다가 참았는데.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위진홍은 무공을 몰랐다.

그런 놈이 스스로의 의지로 사라질 수는 없었다.

‘정말 본가 사람이 납치한 건가?’

남궁화인의 이마에 굵은 주름들이 잡혔다.

외부 인물이 침입해서 그랬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십존이나 팔사쯤 되야 가능하려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식솔 중 누군가가 손을 썼을 거란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유는?’

이유야 차고 넘쳤다.

남궁세가에서 위진홍을 노려보며 주먹을 부르르 떨지 않은 이는 없었으니까.

‘가볍게 손보려다가 죽여 버려서 벌써 파묻었을지도.’

마음이 영 불안해졌다.

‘깨끗이 처리했으면 그나마 낫지만, 실수로 흔적이라도 남겼으면 곤란한데.’

사실 최악의 상황은 따로 있었다.

‘설마…… 아니야. 그건 아닐 거야.’

스스로를 세뇌하는데도 불안감이 더 커졌다.

‘망할. 한번 가봐야겠군.’

남궁화인은 벌떡 일어섰다.

허리에 애검을 차는 것도 잊지 않았다.

‘좋아. 가자.’

그리고 방문을 나서려는데.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 가주님!”

“왜 그러느냐?”

“지, 진옥룡이 막무가내로 들어오려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명을 내려주십시오!”

남궁화인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 * *

의자에 앉은 위진홍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함을 질렀다.

허나 입에 재갈이 물린 상태라 고함은 신음이 되어 흘러나왔다.

“읍. 으읍.”

그 소리에 등을 보이고 앉아 있던 중년인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삭막한 눈이 차갑게 빛났다.

“기다리라 하지 않았더냐.”

“읍! 읍!”

“재촉하지 마라. 준비가 끝났으니까.”

“……!”

“이번엔 기대해도 좋아. 자신 있거든.”

“……!”

중년인이 재갈을 풀자 위진홍의 눈에 공포가 떠올랐다.

“자,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눈은 아니라고 말하는데?”

“아닙니다! 진심입니다! 제발 믿어주십시오!”

“나도 믿고 싶긴 한데…….”

중년인은 손에 쥐고 있던 것을 위진홍의 입에 쑤셔 넣었다.

“네가 행동으로 보여줘야 믿지. 안 그래?”

“커헉!”

위진홍은 눈을 부릅떴다.

어떻게든 참아보려 해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우웨엑!”

그의 입에서 중년인이 넣은 것이 튀어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괴이한 빛깔로 빛나는 당과(糖菓)였다.

위진홍이 눈에서 독기를 흘리며 외쳤다.

“씨발! 맛없어! 사람이 먹을 게 아니라고, 이 미친 새끼야!”

중년인이 삭막한 눈을 빛내며 당과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한 입 맛본 뒤 고개를 갸웃했다.

“맛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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