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남궁세가(南宮世家)
정광 일행은 쾌속선을 타고 장강을 달렸다.
목적지는 안휘성 안경(安慶).
월광채가 있는 호북성 무한(武漢)에서 대략 천백리(千百里)가 넘는 거리였다.
정광은 단원들에게 수왕과 맺은 약조 중 말할 수 있는 것만 얘기한 뒤, 선수에 서서 시원한 강바람을 맞았다.
‘배를 타고 가니 편하긴 한데.’
그 편함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안경에서 내리면 말을 타야 한단 말이지.’
그리고 관도를 따라 달려야 했다.
남궁세가가 똬리를 튼 안휘성의 성도(省都) 합비(合肥)까지는 또 오백리(五百里)쯤 되려나.
지금껏 다닌 곳들을 생각하면 대단친 않았으나 짧은 거리도 아니었다.
‘그냥 배를 타고 합비까지 갈 순 없을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천하의 주인인 천자라 해도 불가능한 일 아닌가.
몇십 년을 투자해 수로를 파면 가능하겠지만 당금의 천자는 그런 헛짓거리를 할 정도로 바보가 아니었다.
그렇게 명이 길지도 못했고.
정광은 차선을 택했다.
‘그래. 마차를 타자.’
심각했던 표정이 풀렸다.
그러자 근처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왕팔이 툭 내뱉듯 물었다.
“너 같은 녀석도 고민이 있냐?”
“당연하죠.”
“믿어지지가 않는군.”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아무 일 없는데.”
“흐음.”
정광이 왕팔을 빤히 쳐다봤다.
왕팔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딴청 피우다가 두 손을 들었다.
“그래. 있다, 있어. 총채주님과 어떤 약조를 한 거냐?”
“장강에 대한 건데요.”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총채주님께서 말씀 안 하셨어요?”
“안경에 이를 때까지 널 도우라고만 하셨지.”
“마침 잘됐네요.”
정광이 손을 들어 강변 쪽을 가리켰다.
“저기로 가죠.”
“……왜?”
“가면 알게 되실 거예요.”
정광은 수해로 엉망이 된 촌락에 들러 선행을 베풀었다.
장강에 온 이래로 계속 해왔던 일이라 다들 그러려니 했는데.
달라진 점이 있었다.
“아이고. 소신선님. 정말 감사합니다.”
“뭘요. 얼마 안 가 장강수로연맹에서 제대로 도와드리러 올 테니까 조금만 더 고생하세요.”
“……네?”
정광은 어리둥절해 하는 수재민들을 둘러보며 설명했다.
“총채주께서 맹규(盟規)를 어기고 행패를 부리는 수하분들을 정리하셨거든요.”
“……!”
“저보고 좀 도와달라고 서신을 보내셔서 왔는데, 다행히 잘됐어요. 총채주님과 힘을 합쳐 아주 일망타진해 버렸죠.”
수재민들뿐만 아니라 무혈단과 수적들도 황당해했다.
대체 무슨 말이란 말인가?
정광은 한술 더 떴다.
“무량수불. 저희는 백성들을 어여삐 여기시는 황상의 높은 뜻을 받들어 움직인 것뿐이니 황상께 감사하시면 돼요.”
“…….”
“어느 분 덕분이라고요?”
“……화, 황상…….”
“바로 그거죠. 그럼 갈게요. 건강하세요.”
정광은 일행과 함께 다시 쾌속선으로 돌아왔다.
“빨리 가죠. 몇 군데는 더 들러야 하니까.”
왕팔이 정광을 멍하니 보다가 물었다.
“대체 뭐 하는 짓이냐?”
“총채주님을 돕는 건데요. 장강수로연맹도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왕팔이 따지려고 하는데 백기돈이 끼어들었다.
“수재민들에게 황상 덕이라 소문내게 한 이유가 무엇이오?”
“그래야 총채주님과 장강수로연맹이 명맥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요.”
“…….”
백기돈은 수하들에게 출발을 명한 뒤 정광을 노려봤다.
“자세히 듣고 싶소만.”
“간단히 말씀드릴게요.”
정광이 손가락을 하나 들었다.
“하나. 예전에 비하면 천하는 무척 안정된 상태죠. 황상께서 총채주께 내려주셨던 장강을 돌려받고 싶으실 만큼.”
“……!”
“둘. 죽기 싫으면 돌려 드려야겠죠? 최소한의 이권이라도 보장받으면서.”
“…….”
“셋. 그냥 달라고 했다간 목이 떨어질 테고. 황상께서 흡족해하실 만한 일을 하면서 말씀드리는 게 현명하지 않겠어요?”
“…….”
눈만 끔뻑거리는 왕팔과 달리 백기돈은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총채주께서 본맹을 합법적인 사업체로 전환하기로 하셨단 말이군.”
“네.”
“그게 제대로 될 리가…….”
“이미 장강수로제일운방(長江水路第一運幇)을 운영하고 계시잖아요. 그 규모가 훨씬 커진다고 생각하세요.”
“그래도 너무 급작스럽지 않소.”
“황상께서 토벌을 명하시기 전에 해야 하니 어쩔 수 있나요.”
“……붕어(崩御)하시기 전에 손을 쓰실 거라 이거요?”
“짐작하고 계셨나 보네요.”
백기돈은 긍정하지 않고 또 다른 질문을 했다.
“부탁드린다고 황상께서 허하시겠소이까?”
“물론이죠.”
정광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군(軍)과 돈을 소모해 가며 토벌하는 것보단 나으니까요. 설령 그렇게 해서 장강을 되찾는다 해도 관리들이 중간에서 얼마나 뜯어먹겠어요?”
정광의 말대로 탐관오리들의 배만 불리게 될 것이 뻔했다.
“그럴 바엔 장강수로연맹을 합법적인 조직으로 인정하고 세금과 뒷돈을…… 음. 기부금이라는 표현이 낫겠네요. 그걸 받는 게 남는 장사죠.”
“……세금은 적게 책정되겠구려. 기부금은 많고.”
“그렇겠죠. 나라의 곳간보다 황실의 곳간을 채우고 싶으실 테니까요. 제위(帝位)를 물려받으실 황태자 전하께 힘이 될 만큼.”
“……기부금은 지금도 올리고 있소만.”
정광이 씩 웃었다.
“황상께선 천하의 주인. 허나 장강은 아니었죠. 그걸 돌려받으시고 완전해지시는 거예요.”
그것도 강제로 그러는 게 아니라 수왕의 자의에 의해서였다.
“게다가 황상의 덕이 천하를 비추는 예가 되겠죠. 그 약조에 대한 소문, 모르는 사람이 없잖아요.”
수왕은 천자에게 다시 장강을 돌려줌으로써 충신이 되리라.
그간의 죄를 벌하지 않고 바른길을 열어주는 천자는 성군이 될 테고.
“……잘못을 뉘우치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충신과 그간의 죄는 탓하지 않고 노고만 위로하며 상을 내리는 성군이라…….”
“꽤 그럴듯한 미담이 되겠죠.”
“……후우우…….”
백기돈이 복잡한 얼굴로 한숨을 쉬는데 정광이 경고했다.
“정신 똑바로 차리셔야 해요.”
“……무슨 말이오?”
“총채주께서 얼마나 더 사시겠어요.”
“……!”
백기돈이 눈을 크게 뜨고 왕팔이 화를 내려 하는데.
정광에게서 숨이 막힐 정도로 막대한 기세가 흘러나왔다.
“수적이었던 분들이 합법적인 일을 하면서 얼마나 버티실 수 있을까. 총채주께서 살아계실 동안은 이를 악물고 참겠지만, 돌아가시면? 결국 다시 수적질을 하게 되겠죠. 그럼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관군…… 아니, 황군까지 합세해서 토벌할 게 분명했다.
“황상께선 칙령을 내려서 무림맹도 나서게 하시겠죠. 무림의 일이 아니라 민초들을 괴롭히는 수적들을 징치하는 일이니 무림맹으로서도 거부할 명분이 없을걸요.”
백기돈은 물론이요, 왕팔까지 이해할 만큼 명쾌한 설명이었다.
어두운 표정을 짓는 그들에게 정광이 기세를 거두며 말했다.
“잘하실 거라 믿을게요.”
“…….”
“앞으로 잘 부탁드리고요.”
“……?”
두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는데.
“아.”
정광이 강변에 있는 또 다른 촌락을 가리키며 말을 돌렸다.
“저기도 들러야겠네. 어서 가죠.”
* * *
정광은 몇 군데의 촌락에 더 들러 황상의 덕을 퍼뜨렸다.
그리고 안휘성 안경에 도착하자 지금껏 고생한 장강쌍위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무량수불. 수고하셨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돌아서려는 정광을 백기돈이 붙잡았다.
“끝끝내 말 안 할 셈이오?”
“뭘요?”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의미 말이오.”
“아아. 그거요?”
정광이 씩 웃었다.
“장강의 안녕을 부탁드린다고요.”
“…….”
“그럼 이만.”
장강쌍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광이 수왕에게 받아내기로 한 대가와 관련된 얘기인 것 같았는데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정광은 그들에게 손을 흔든 뒤 무혈단과 함께 배에서 내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상당히 번화해 보였다.
“사제.”
백승무가 즉각 대답했다.
“네, 사형.”
“마방(馬房)에 가자.”
“말을 사시려는 거군요. 알겠습니다.”
“마차도.”
“네?”
“좀 편히 가려고. 노잣돈 많이 받았잖아.”
“하하. 알겠습니다.”
“먼저 식사부터 하고.”
자오가 좋은 반점을 찾았다.
무혈단은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즐기게 됐다.
“우걱우걱. 배에서 내리니 살 것 같다!”
철월의 용맹스러운 외침에 팽강휘가 껄껄 웃었다.
“하하. 다양한 요리를 많이 드셔서 살 것 같으신 거로 보이오만.”
“배에서 내리니 살 것 같고, 살 것 같으니 많이 먹을 수 있다! 많이 먹으니 기쁘고!”
철월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기뻐했으나 위장의 크기엔 한계가 있었다.
그를 뺀 단원들은 하나둘 젓가락을 내려놓게 됐고 차를 마시며 피로를 풀었다.
그러던 중, 당예지가 정광에게 물었다.
“단주. 남궁세가까지 곧장 갈 건가요?”
“네.”
“의외군요. 명승고적에 들를 줄 알았는데.”
“그러게 말이에요.”
정광이 순순히 인정하자 단원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사제. 남궁세가의 상황이 안 좋을 것 같으냐? 혹시 사마련이 벌써?”
대사형 정우가 모두의 마음을 대변해 묻자 정광이 부정했다.
“아뇨.”
“그러면?”
“사부가 많이 곤란해하고 계실 것 같아서요.”
“……?”
“남궁가주 그분. 대하기 편한 분은 아니잖아요.”
단원들이 쓴웃음을 지었다.
무례한 말이었으나 동감할 수밖에 없었기에.
하지만.
얼마 안 가 당오군이 의문을 표했다.
“단주가 가면 분위기가 더 안 좋아지지 않겠소?”
언의진도 동참했다.
“그러게요. 남궁가주께서는 단주를 싫어하시잖아요.”
모두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정을 잘 모르는 혜진조차도.
“아미산에도 파다한 소문이지요.”
유정풍이 껄껄 웃었다.
“으하하. 천하에 모르는 이가 없을 거야. 하긴. 이해는 가지. 아우의 활약 때문에 맹주가 못 되셨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나?”
유정풍의 말대로 창천일검(蒼天一劍) 남궁화인은 의기가 있고 겸손한 성품이나, 정광의 얘기만 들으면 눈썹을 치켜세운다는 소문이 퍼진 지 오래였다.
야망을 이루기 위해 본래의 성품을 훌륭히 감춰온 남궁화인이었지만 정광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하.”
정광도 피식 웃었다.
남궁화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시커먼 속과 함께.
‘소문이 그렇게 퍼졌으면 남궁화인 본인의 귀에도 들어갔겠네.’
나쁘지 않았다.
본래 사람이란 자신이 좋아하는 이보다 싫어하는 이의 말을 귀담아듣기 마련이니까.
‘일단 만나서 얘기부터 해보자.’
말이 안 통하면 다른 방법을 쓰면 되고.
정광은 생각을 정리한 뒤 단원들에게 말했다.
“다 드셨으면 가죠.”
“네! 단주!”
“철월은 아직 멀었다!”
“보퉁이에 싸서 가면서 드세요.”
“아! 역시 도사는 똑똑하다!”
정광과 무혈단은 마방으로 향했다.
언제나 그랬듯 백승무가 좋은 거래를 했고, 단원들은 좋은 마차에 앉아 편히 갈 수 있게 됐다.
정광은 은근히 기뻐하는 그들에게 단단히 당부했다.
“괜히 마차를 빌린 게 아닌 거 아시죠?”
단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됐다.
그냥 편하게 가려고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
맞긴 했는데, 다른 이유도 있었다.
“마차에서 운기조식을 하시고 병기를 손질하세요. 싸움이 일어날지도 모르니까요.”
장난기 많은 정현조차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사제. 설마 남궁세가와 싸울 셈이야?”
“아뇨.”
“그럼 왜?”
정광의 이어지는 말에 단원들의 얼굴이 더 굳어졌다.
“남궁세가에서 싸움을 걸지도 모르거든요.”
“……!”
“그럼 이따 봬요.”
정광은 자신의 마차에 들어갔다.
단원들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배정된 마차에 탔다.
정광이 그런 말을 했을 땐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법.
굳이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으니 묵묵히 따르는 게 맞았다.
‘많이 나아졌어.’
정광은 마차의 창문으로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는 질문은 안 하고 해야 할 일을 한다. 무공이 부족한 게 흠인데…….’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무혈단원들은 한때의 인연으로 흘려보내기엔 아까운 인재들이었다.
‘잘 키워서 잘 써먹어야 해. 그럼 곤륜도 나아지겠지.’
천룡단과 사천성의 세 명문만으론 부족하다.
천마신교가 침공하면 중원이 발 벗고 나서서 돕게 만들어야 한다.
‘금전적인 문제도 오래지 않아 해결될 거고.’
정광이 지금껏 곤륜에 보낸 돈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산동의 대지주이자 표국 사업을 활발히 하는 산동악가가 백승무의 본가인 백가상단과 손을 잡고 서역 교역에 투자하기로 했다.
궁벽한 청해성에서 중원 물자를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의미였다.
‘거기에 수왕과의 사업이 제대로 되면…….’
입가에 미소가 절로 맺혔다.
‘천하를 돌면서 놀다가 돈 떨어지면 곤륜에 가서 얻어가게 될지도 모르겠네.’
정광은 좋은 기분으로 운기조식을 했다.
수왕과의 싸움 후 한 걸음 더 나아간 상태였는지라 기분이 더 좋아졌다.
‘좋아. 이대로만 가자.’
고용한 마부들은 비싼 삯을 준 만큼 마차를 잘 몰았다.
오백리를 금세 달려 합비에 있는 남궁세가의 대장원에 도착했다.
여기까진 다 좋았는데.
‘이것 봐라?’
좋았던 정광의 기분이 나빠졌다.
정문을 지키고 있던 남궁세가의 무인이 정광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무례하게 구는 것 아닌가.
“진옥룡?”
“그런데요.”
“흥.”
무혈단원들의 얼굴이 굳고.
정광의 얼굴엔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