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물갈이
수왕은 정광이 현생에서 만난 무인들 중 가장 강한 자였다.
‘수공이라는 거, 꽤 오묘하네. 다른 무공들도 나쁘지 않고.’
그저 수적이라 평하기엔 장강수로십팔채의 역사는 길고도 길었다.
본래 수적질을 하던 이들에 명문정파에서 도주한 자, 군에서 퇴역한 이 등 수많은 이들이 다양한 무공을 지닌 채 합류했을 터.
수많은 지류가 모여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냈으리라.
그 흐름에 딱 들어맞는 성품과 자질을 지닌 이가 수왕일 테고.
‘재밌었어.’
지금의 정광으로선 죽일 수 없는 자였다.
뭍에서 싸운다 해도 산공독에서 벗어난 그를 꺾는 건 무리였다.
‘어디 보자. 통할 만한 독이…….’
후위진을 현인으로 만들었던 당예지의 역작 현인산(賢人産)이 있었으나, 백 살이 넘은 수왕에게 쓸데없이 뭐하러 쓴단 말인가.
‘당분간은 이기기 힘들 것 같은데. 그럴 바엔 차라리…….’
수왕의 형편도 그리 좋진 않았다.
어느 정도 얘기를 나눠볼 토양이 마련된 것이다.
그래서 제안했고.
수왕은 깊이 고심하다가 받아들였다.
세부적인 조정을 마친 뒤 두 사람은 손바닥을 내밀어 세 번 부딪혔다.
짝.
“싸움은 여기서 끝이에요.”
“서로 약조를 어기지 않는 한.”
짝.
“새로 줄 대시려던 거, 바로 취소하시고요.”
“대신 네가 무림맹을 확실히 움직여야 해.”
짝.
“물론이죠. 제 부탁 잊으시면 안 되는 거 아시죠?”
“그럴 수밖에 없게 만들어놓고 무슨.”
이렇게 진옥룡과 수왕의 삼약(三約)이라 불리게 될 약조가 끝났다.
정광은 상처에 금창약을 두껍게 바르며 투덜댔다.
“진작 제 말을 들으셨으면 좋았을 것을. 이게 뭐예요.”
“너도 나를 힘으로 굴복시키려 하지 않았더냐.”
“그런 성품이시니까요.”
“내가 할 말이야.”
수왕도 금창약을 꺼내 바르고 옷을 찢어 묶었다.
대화를 통해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은 두 사람은 즉시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혹시라도 상대가 뒤통수를 칠 거란 걱정은 안 했다.
바보천치가 아닌 이상에야 그럴 리가 없었기에.
정광은 삼청합일신공(三淸合一神功)을 운공하다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사투를 벌이느라 텅텅 비어버린 단전이 오늘따라 유난히 넓게 느껴졌다.
‘이 느낌은…… 좋아.’
전생에서도 경험했던 일이기에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때가 온 것이다.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까다롭단 말이지.’
삼청합일신공은 곤륜의 개파조사가 창안했으나 지금껏 익힌 이가 전무하다 알려진 괴공(怪功)!
하지만 정광은 달랐다.
뜬구름 잡는 소리를 늘어놓은 구결들을 전부 정리해서 그 진의를 파악하고, 구결마다 넘쳐나는 개파조사의 자화자찬에 학을 뗀 뒤, 그 정도야 참고 넘어갈 정도로 정심하고 깨끗한 진기를 모을 수 있게 됐으나…….
‘내 식대로 탈바꿈시키려니 손댈 곳이 너무 많아.’
차라리 새로 하나 창안하는 게 나을지도.
‘일단 가자.’
어차피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었기에 쓸데없는 잡념을 지워 버렸다.
‘치밀하게. 끊임없이.’
정광은 그렇게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정교하면서도 긴 호흡을 통해 받아들인 기가 텅 빈 단전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정광의 머리 위에 꽃송이가 피어났다.
하나…… 둘…… 셋…….
꽃의 수가 늘어난다거나 하는 괴사는 일어나지 않았으나.
무척이나 뚜렷하고 아름다운 꽃들이었다.
‘……이건?’
운기조식을 하던 수왕은 뜻밖의 기운을 느끼고 눈을 떴다.
‘…….’
그의 눈이 커졌다.
정광의 머리 위에 떠오른 꽃들을 본 것이다.
‘삼화취정(三花聚頂)이라. 가지가지 하는 놈이로구나.’
정광의 나이를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나, 그와 생사결을 벌였던 수왕이기에 그 정도는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내가 저 경지에 오른 게 언제였더라?’
그리 오래되지도 않은 시절을 떠올리던 수왕은 헛바람을 토할 뻔했다.
‘이럴 수가! 그 정도가 아니잖아!’
정광의 꽃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마치…… 만개(滿開)하는 것 같구나.’
자신의 머리 위에 있는 것들과 굳이 비교해 볼 필요도 없었다.
크기는 작지만 훨씬 더 활짝 피는 꽃이라니.
‘이게 어떤 의미일까? 내공의 깊이는 모자라나 정순함은 더 뛰어난 건가?’
듣도 보도 못한 기사에 놀란 것도 잠시.
살심이 일어났다.
‘위험해. 너무 위험한 놈이야.’
당장에라도 운기조식을 멈춘 뒤 쳐 죽이고 싶었다.
장강에서 계속 군림하고픈 욕심보다 강한 질투심이 들끓었다.
‘이런.’
수왕은 곧 이성을 되찾고 눈을 감았다.
이러다간 심마에 빠질 게 자명한 일, 우선 운기조식부터 제대로 끝내야 했다.
시간이 흐르고, 내공을 갈무리한 뒤 눈을 뜨자.
정광이 그를 보며 웃고 있었다.
“……왜 웃느냐?”
“현명하셔서요.”
“…….”
수왕은 내심 장탄식했다.
‘훗날을 기약해야겠군.’
아니, 이미 늦었을 지도.
그때의 정광은 얼마나 성장해 있을까?
“……그만 가자.”
“그러죠. 할 일도 많은데.”
“남은 게 또 있느냐?”
“우선 약조를 문서로 남겨야죠.”
“……그리고?”
정광이 정중하게 두 손을 모았다.
“무량수불. 혹시 수공을 가르쳐 주실 수 있으신지요?”
* * *
뭍으로 돌아온 수왕은 수하에게 지필묵을 대령케 했다.
그리고 직접 붓을 들었다.
그의 필체는 무척 정갈하면서도 힘이 있었다.
“의외네요.”
“수결(手決)이나 두거라.”
정광이 일필휘지(一筆揮之)로 붓을 놀리자 수왕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약조를 안 지킬 셈인가?”
“네?”
“대체 뭘 그린 게냐?”
“정광(精光)요.”
“…….”
수왕이 침묵하다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장난질을 받아줄 만큼 한가하진 않아.”
“장난이라뇨? 진짜 진지한데.”
정광이 억울함을 토하며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질 좋은 기름을 먹인 종이뭉치였는데, 그것을 풀자 글자가 빼곡히 적힌 종이가 나왔다.
정광은 글자 대부분을 가리며 수결을 둔 부분을 가리켰다.
“이거, 제갈세가 가주님과 계약한 서류거든요.”
고급스러운 재질의 종이에 뛰어난 필체로 제갈문소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요 밑에 보세요. 아까 것과 똑같이 정광이라고 쓰여 있잖아요.”
수왕은 날카로운 눈으로 양쪽의 글자를 비교했다.
“……같은 모양이긴 하군.”
“정광 맞다니까요. 왜 그렇게 의심이 많으세요?”
“…….”
제 필체가 그따위라 그런 건데 뭘 어쩌라는 건지.
말을 듣고 형상을 꿰어 맞추다 보니 ‘정광’처럼 보이는 듯하기도 했다.
“……어쨌든 끝났구나.”
“수공은요?”
“……다시 싸우고 싶은가 보군.”
“아뇨. 밥만 먹고 갈게요.”
정광은 기름종이를 얻어 서류를 곱게 쌌다.
이러면 제갈세가의 것처럼 물에 빠져도 안전할 터. 품속에 넣으니 마음이 든든해졌다.
‘이제 배가 든든해질 차례인가.’
장이를 부르려고 하는데.
수많은 시선이 느껴졌다.
‘뭐야?’
수적들이 조심스러운 눈초리로 힐끔거리고 있었다.
정광이 삼화취정의 경지에 오른 걸 목도했으니 그럴 수밖에.
그들만큼은 아니었으나 무혈단원들도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정광은 할 일을 했다.
“장이 소협. 준비 끝났나요?”
“네, 단주.”
“그럼 먹죠.”
장이는 수적들에게 솥을 빌려 건량과 육포를 넣고 죽을 쒔다.
수적들이 솥에 허튼수작을 부렸는지 당 씨 남매가 이미 확인했기에 그냥 먹으면 됐다.
“괜찮네요.”
정광의 칭찬에 장이가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자장이! 한 그릇 더!”
철월의 주문에 장이가 눈을 크게 떴다.
“처, 철월. 이제 괜찮으십니까?”
철월은 생긴 것답지 않게 뱃멀미를 지독하게 앓았다.
장강에 온 후로 반쯤 시체나 다름없었던 그가 용맹하게 부활했다.
“물론이다! 철월은 강하다!”
철월은 물론 모든 단원들이 걸신들린 사람처럼 죽을 퍼먹었다.
그만큼 길고 힘든 하루였다.
씹고 삼킬 때마다 기력이 보충되는 걸 느낄 정도로.
정광이 이제 생각났다는 듯 백승무의 어깨를 두드렸다.
“사제. 아까는 잘했어.”
“사형께서 시키시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아니야. 순간적으로 소액전표 뭉치를 던졌잖아. 아주 훌륭했다니까.”
무혈단원들이 입을 떡 벌렸다가 소리 죽여 웃었다.
그 사형에 그 사제 아닌가.
‘슬슬 갈까.’
정광은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수왕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이제 가는 것이냐?”
“네.”
수왕이 손짓하자 수하가 폭죽을 쏘아 올렸다.
우경의 선단과 대치하고 있는 월광채주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싸우지 말고 돌아오라 했다.”
수왕의 말대로 저 멀리 있는 월광채주의 선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광은 그 모습을 확인한 뒤 수왕에게 작별을 고했다.
“안녕히 계세요.”
“다신 오지 말거라.”
“노잣돈은요? 전표 엄청 많이 썼는데.”
“다 들었다. 소액전표 아니었더냐?”
“소액의 기준이 다르죠. 저 꽤 부자거든요.”
“…….”
수왕은 섭섭지 않게 많은 노잣돈을 안겨줬다.
“잘 쓸게요. 맞다. 우경 군사가 이끄는 선단은 용서해 주실 거죠?”
이는 연화채는 물론 반기를 든 일곱 수채의 권한까지 우경에게 주라는 의미.
수왕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머리를 너무 쓰는구나.”
“총채주님만 할까요.”
“어차피 그러려고 했던 걸 알지 않느냐? 우경에게 전해라. 선단을 정리하고 열흘 후에 오라고. 그때 확실한 지위를 내리마.”
“네. 그럴게요.”
정광과 무혈단은 수왕이 내준 배에 올랐다.
장강쌍위가 복잡한 눈빛으로 그들을 맞았다.
“두 분, 잘 부탁드립니다.”
마지못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왕팔과 달리 백기돈은 정중하게 대답했다.
“최선을 다하겠소. 기를 올려라!”
날렵하게 뻗은 쾌속선의 선수에 큰 깃발이 걸렸다.
장강수로제일운방(長江水路第一運幇)의 특선(特船)임을 의미하는 깃발이었다.
배는 순식간에 뭍을 떠났다.
처절한 절규를 뒤로하며.
“초, 총채주님! 속하는 절대로 사특한 마음을 품지 않았…… 끄아아악!”
무혈단원들은 놀란 얼굴로 돌아봤으나 정광은 아니었다.
‘수왕이 수룡대주를 용서할 리가 없지.’
장강쌍위도 미리 언질을 받은 듯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착잡한 눈빛으로 정면을 주시할 뿐이었다.
쾌속선은 월광채주의 선단을 지나 우경이 타고 있는 연화에 이르렀다.
“금방 다녀올게요.”
정광은 신형을 날려 연화로 건너갔다.
그리고 우경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우경은 안색이 몇 번이나 바뀌다가 간신히 물었다.
“……총채주가 나를 정말 살려주려고 하는 겐가?”
“네.”
“……왜?”
정광은 아직도 선수에 우뚝 서 있는 연화채주 화진양을 가리켰다.
“저분과 좀 다르게 이용하려고 하시는 거죠.”
“……나를 부려서 연화채와 다른 일곱 수채를 관리하려는 거군.”
“잘 아시네요.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아시죠?”
우경이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충성밖에 더 있겠나.”
“대신 높은 자리에 앉으셨으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죠.”
우경은 수왕의 명을 따라 열흘 뒤에 돌아오기로 했다.
“이보게, 진옥룡.”
“네?”
우경이 옷매무새를 바로 한 뒤 정중히 포권했다.
“정말 고맙네.”
“뭘요.”
“이 은혜, 절대 잊지 않을 것을 천지신명께 맹세하네.”
“저도 잊지 않을게요.”
“……허허. 그래, 혹시 충고해 줄 점은 없는가?”
정광은 백여 척이 넘는 배들을 둘러봤다.
시선이 마주친 수적들이 깜짝 놀라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보였다.
“장강은 새롭게 태어날 거예요. 그러려면 그에 걸맞는 사람만 남아야겠죠.”
잠시 생각에 잠겼던 우경이 답했다.
“그러면 사람이 너무 모자랄 것 같군. 절대 안 어울리는 자들만 치우면 안 되겠나?”
정광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야 군사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죠.”
“걱정하지 말게. 차차 기준을 높여 나갈 걸세. 그러면 언젠간 자네가 고개를 끄덕일 만한 이들만 남게 되겠지.”
“흐음.”
제일 악한 놈들부터 제거한 뒤 그다음으로 악한 자들을 죽인다.
이런 과정을 반복해서 물갈이하겠다는 의미였다.
‘제대로만 된다면야.’
우경이 한 생각은 수왕의 뜻과 일치했다.
천자에게 받았던 권리를 돌려주고 합법적인 조직으로 거듭나기 위해선 반드시 그래야 했다.
‘뭐 알아서 잘하겠지.’
정광은 협객이 아니었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수왕이 살길을 알려줬을 뿐.
장강의 일은 장강이 알아서 해야 했다.
“그럼 또 봬요.”
“기다리고 있겠네. 언제라도 오게나.”
정광은 다시 쾌속선으로 갈아탔다.
그사이 우경의 명을 받은 호연대주(護蓮隊主) 구소가 자신이 모셨던 화진양을 죽였다.
정광을 기다리고 있던 백기돈이 우경을 흘깃 본 뒤 물었다.
“진옥룡, 이제 출발하면 되겠소?”
“네.”
“알겠소이다.”
백기돈이 손을 번쩍 들며 명했다.
“돛을 올려라! 노를 저어! 목적지는 안휘성(安徽省)이다!”
“존명!”
쾌속선이 달렸다.
안휘성의 남궁세가를 향해서.
정광의 머릿속에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부, 허청이었다.
‘못 본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러지?’
정광은 이유를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했다.
* * *
허청도 정광을 떠올리고 있었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이 일을 대체 어쩐단 말인가.’
정광이 곧 올 것이거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정광이 자신을 생각해서 붙여준 위진홍이 납치당한 것이다!
그것도 남궁세가 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