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223화 (222/569)

223화

똑같은 생각

수왕이 들이마신 산공독(散功毒)은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뺨에 칼자국이 있던 독존의 사촌 아우, 사천당가 대원로 당기철이 만든 필생의 역작인 것이다.

‘하지만 그래 봐야 오래 못 가.’

독존을 노리고 만들었으나 독존을 잡을 수 있는 독은 아니었다.

게다가 상대는 수왕 아닌가.

독존보다 한 배분 위의 인물이며 무위를 짐작하기 힘든 강자였다.

‘그래도 시간은 벌어줄 수 있지.’

정광이 크게 숨을 들이마시자마자 강물이 두 사람을 완전히 삼켰고.

정광이 먼저 움직였다.

‘바닥을 디디고 있는 이상 뭍과 크게 다를 것은 없어.’

물론 물의 저항은 문제였지만.

쿠와왓-

운룡이 눈부신 금룡(金龍)으로 화해 회전하며 쏘아졌다.

비릿한 강물이 사정없이 찢어발겨 져 밀려났다.

오만한 빛을 뿌리던 수왕의 두 눈이 살짝 커졌다.

그 사이를 금룡이 꿰뚫었다.

콰앗-

아니, 그런 것처럼 보였다.

꿰뚫린 건 수왕이 남긴 잔상!

콰아아앙!

강물이 터져 나가며 수왕의 뒤에 있던 벽까지 폭발했다.

그러자 벽을 덮고 있던 낡은 벽돌이 사라지고 철벽이 드러났다.

‘역시 쉽진 않겠구나.’

이 벽만 그런 게 아니라 사방의 벽 모두 두꺼운 철벽으로 되어있을 터.

‘그러면…….’

정광은 천근추(千斤錘)를 펼쳐 바닥에 단단히 붙이고 있던 발을 움직였다.

그의 신형이 왼쪽으로 틀어지며 손에 들린 금룡도 함께 돌았다.

금룡이 강물을 양단했다.

촤아아악-

왼쪽에 나타났던 수왕의 신형이 또 사라졌다.

정광의 손이 위쪽으로 급격히 꺾였다.

수왕의 빈자리를 베고 지나가려던 금룡이 강물을 가르며 승천했다.

쿠우우- 쩌엉!

아미자 두 자루를 엇갈려 금룡을 막아낸 수왕이 위로 솟구쳤다.

‘잘리지 않았어?’

정광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오랜 세월 동안 장강을 주물러서 그런지 제법 괜찮은 병기를 갖고 있지 않은가.

‘이건 어떨까.’

금룡이 수왕을 쫓아 비상했다.

정광이 즐겨 쓰는 유룡검(遊龍劍)의 묘리를 풀어내며.

허공을 우아하게 노닐던 평소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마치 수룡(水龍)이 된 듯, 사방에서 압박해 오는 물에 물길을 내며 달린 것이다.

누가 봐도 우아하고 멋진 초식이었으나.

수왕이 지켜만 보고 있을 리 있나.

스으으윽-

사지를 기묘하게 놀리자 그의 신형이 물고기처럼 민첩하게 움직였다.

수룡을 손쉽게 흘려보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정광에게 쇄도했다.

그의 손에 들린 아미자가 정광의 손목을 향해 쏘아졌다.

사람도 병기도 물의 압력을 상관치 않고 움직이는 듯한 모습!

‘물에서만큼은 천하제일인이라더니 과연!’

길고 길었던 전생에서도 만나보지 못한 수공(水功)의 고수라…….

정광은 내심 감탄하며 손목을 꺾었다.

운룡이 함께 꺾이며 아미자를 막아냈다.

쩡!

운룡의 검면을 찍은 아미자가 뒤로 물러나며 또 다른 아미자가 손등을 노렸다.

정광은 이맛살을 좁히며 운룡을 쥔 오른손을 끌어당겼다.

동시에 왼손가락들을 묘하게 구부린 채 내밀었다.

파아앙!

곤륜비전 수공(手功), 옥심인(玉心印)!

다섯 손가락에서 쏘아진 경력이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며 쏘아졌다.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뚫어버릴 기세로!

수왕의 얼굴을 뒤덮은 주름살이 꿈틀거렸다.

양손의 중지에 아미자들을 끼운 채 장력을 내질렀다.

퍼펑!

그의 신형이 뒤로 쭉 밀려났다.

옥심인이 토해낸 경력이 계속 쫓았으나 허사였다.

수왕이 사지를 휘젓자 그의 몸이 순식간에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수왕이라는 별호에 걸맞는 움직임!

순간 정광의 움츠렸던 오른팔이 다시 튀어 나갔다.

곤륜의 수많은 검법 중 강맹함으론 수위에 꼽히는 태허도룡검(太虛屠龍劍)!

베기가 대부분인 태허도룡검 중 몇 안 되는 찌르기 초식이 펼쳐진 것이다!

콰앗!

수룡이 흉포하게 달려들자 수왕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휘이이이잉-

그의 양손 중지에 끼워져 있는 고리.

그 고리에 이어진 아미자들이 놀라운 속도로 회전했다.

수왕이 두 손을 쭉 내밀자 두 개의 아미자가 회전하며 수룡을 막아냈다.

콰콰콰쾅!

정광의 다문 이에 힘이 들어갔다.

재빨리 오른손에 힘을 줘 튕겨 나가려던 운룡을 가까스로 잡았다.

‘슬슬 시작이라는 건가?’

내공을 온전히 쓸 수 없는데도 수왕은 강했다.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운룡을 휘둘러 방어했으나 모두 막아낼 순 없었다.

양 소맷자락이 뚫리고 찢기자 정광의 미간에 골이 생겼다.

‘영 손해인 것 같은데. 여기에선 안 되겠어.’

수왕은 내공을 전부 못 쓰는 상태인데도 물속에서만큼은 천하제일인이라 할 만했다.

전생의 정광이었다면 물이든 뭐든 다 박살 내며 두들겨 팼겠지만 지금의 경지론 무리.

‘마음껏 날뛰어라. 좀 이따 보자.’

일단 밀어내야 했다.

우우우웅-

운룡이 머금고 있던 금빛이 더 짙어졌다.

스으으으-

찬란한 금룡이 작은 원을 그렸다.

쨍!

정광의 목을 노리던 아미자가 금룡에 휩싸여 밀려났다.

‘……!’

수왕이 눈살을 찌푸리며 다른 아미자를 내질렀다.

그때, 정광이 그려냈던 작은 원이 조금 더 큰 원을 그렸다.

아미자는 물론 수왕의 목까지 이르는 궤적의 원!

‘태극!’

수왕이 깜짝 놀라며 두 개의 아미자를 교차했다.

금룡이 그리는 원을 저지할 의도였으나.

스윽-

금룡은 아미자를 살짝 비켜 지나가는 찌그러진 원을 그렸다.

‘태극이 아니잖아!’

수왕의 생각대로였다.

지나쳐 갔던 금룡이 선으로 변해 수왕의 목을 노렸다.

펑!

수왕이 양손으로 장력을 쳐내자 그의 몸이 위로 솟구쳤다.

선이 되었던 금룡이 다시 원이 되어 수왕의 사타구니를 베어갔다.

‘이놈이!’

수왕의 눈에서 불길이 솟았다.

명문정파의 제자인 몸으로 파렴치한 수를 써서가 아니었다.

‘반드시 죽인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이런 무위라니.

무위도 무위지만 임기응변은 더 놀랍지 않은가!

‘흐으읍!’

내공을 끌어 올려 정광에게 난사하려고 하는데.

정광이 더 빨랐다.

수왕의 사타구니를 베어가던 금룡이 우뚝 멈추더니 수십 개의 검으로 변해 찔러 들어왔다.

‘이런!’

맞서느냐, 피하느냐.

판단은 빨랐다.

아직 산공독을 완전히 몰아내진 못한 상태.

정광의 검을 일일이 막아내며 내공을 소모하느니, 멀찍이 피해 산공독을 더 빨리 없애는 게 나았다.

‘내공만 완전히 회복하면…….’

정광이 정녕 고금제일천재라 해도 그의 상대는 아니리라.

펑!

수왕이 양손과 양발을 내밀자 그의 신형이 멀리 밀려났다.

그렇게 정광의 공세를 피해내고 다시 달려들려고 하는 그 순간!

‘이놈이!’

정광이 바닥을 박차고 달렸다.

강물이 쏟아져 들어온 쪽으로!

‘도주하는 것이냐!’

정광의 신형이 방 밖으로 사라졌다.

수왕은 이를 갈며 정광을 쫓았다.

‘잡으면 회를 떠주마!’

지금까지 본바, 자맥질도 제대로 못하는 놈이었다.

천근추를 써서 두 발을 바닥에 붙인 채 손만 놀리지 않았던가.

그런 주제에 강으로 나간다고 뭐가 바뀔까.

‘오히려 더 가라앉을지도…… 엇!’

* * *

정광은 헤엄을 칠 줄 몰랐다.

그래도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하지 않던가.

무혈단원들이 자맥질을 배우는 모습을 하루 동안 지켜봤기에 어떻게 하는 것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운룡을 검집에 넣고 사지를 열심히 움직였다.

그의 몸이 위를 향해 빠른 속도로 올라갔다.

‘이것으론 부족하지.’

양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가 내리며.

퍼엉!

장력을 쏟아냈다.

‘좋아.’

두 발을 끌어올렸다가 내리며.

퍼엉!

내공을 쏟아냈다.

‘확실히 낫네.’

정광의 몸이 맹렬히 올라갔다.

그 뒤를 수왕이 살기를 뿜으며 쫓았다.

어느새 수면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수왕이 안 되겠다 싶었는지 양손에 쥐고 있던 아미자들을 던졌다.

위잉-

아미자들이 강물을 꿰뚫으며 날아왔다.

정광은 운룡을 뽑으려다 말았다.

잠시라도 멈췄다간 따라잡히리라.

‘그러면?’

방법은 하나였다.

몸을 뒤집자 다리가 위로, 팔이 아래로 내려갔다.

장력을 뻗자 신형이 위로 쭉 올라갔다.

아미자들이 지근거리까지 다가온 상태!

양손에 내공을 모아 태청산수(太淸散手)를 펼쳤다.

두 손이 우아하게 움직이며 아미자들을 받아냈다.

콰콱!

‘윽!’

정광은 쏘아져 온 아미자들의 힘을 거스르지 않았다.

손에서 빠져나가지 않을 정도로만 쥔 채 몸을 가볍게 했다.

신형이 빠른 속도로 솟구쳤다.

‘됐어!’

아니었다.

아미자는 많았다.

수왕이 연달아 쏘아내자 정광은 운룡을 쓸 수밖에 없었다.

‘젠장.’

아미자를 놓고 운룡을 뽑았다.

내공을 쏟아부어 아미자들을 쳐내는 동안 수왕이 가까워졌다.

결국 수면 위로 올라가기 전에 수왕이 장력을 꽂았다.

파아앙!

‘큭!’

왼손을 내밀어 막았으나 기혈이 들끓었다.

아미자를 받아냈을 때처럼 그 힘을 이용해 위로 솟구치려 했지만…….

수왕은 집요했다.

후우웅-

살기가 가득 실린 아미자가 가슴을 노렸다.

운룡으로 비껴 막는 사이 다른 아미자가 허벅지를 노렸다.

‘이런.’

왼손을 수도로 만들어 쳐냈으나 방향만 조금 바꿨을 뿐.

그대로 정광의 허벅지를 스치고 지나갔다.

‘……!’

푸른 강물에 붉은 피가 번졌다.

정광은 고통스러워하는 대신 수왕을 향해 연달아 장력을 뿌렸다.

퍼퍼퍼펑!

수왕이 막아내는 틈을 타 정광은 수면 위 허공으로 솟구쳤다.

“후아아!”

오랜만에 숨을 들이마시자 가슴이 탁 트였다.

그만큼 진기 운용도 쉬워졌다.

‘역시 물은 싫어.’

수왕이 수면을 뚫고 올라와 또 다른 아미자들을 던졌으나.

휘리릭-

정광의 신형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양팔을 넓게 벌린 채 오른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

수왕이 감탄을 터뜨리며 도약했다.

그의 신형이 훨훨 날아 강변 방향의 수면에 내려섰다.

정광이 삼십장쯤 떨어져 있는 뭍으로 가는 걸 막겠다는 의미.

정광도 수면에 내려서며 인상을 썼다.

뭍으로 가기 힘들게 된 건 그렇다 치자.

출렁이는 강물을 저리도 가볍게 디디고 서다니.

등평도수(登萍渡水)를 펼치는 것 정도야 이해하지만 너무 수월하게 하지 않는가.

‘산공독을 전부 몰아낸 건가.’

다시 공평해졌다고 볼 수 있으나.

엄밀히 따지면 손해였다.

타다닥.

상처 주위의 혈도를 짚어 출혈을 막았으나 이미 상당히 흘린 상태였다.

‘춥고 졸리네.’

그렇다고 약한 꼴을 보이면 정광이 아니지.

퍼어엉!

도복에 내공을 불어넣어 물기를 남김없이 털어냈다.

스르릉-

태연히 운룡을 뽑아 어깨에 호기롭게 걸쳤다.

“별호가 아깝지 않으시네요.”

“너야말로.”

“하지만 이제 물에서 벗어났군요.”

수왕의 입가에 두꺼운 주름이 잡혔다.

“물 위도 물이다.”

“아미자로 괜찮으시겠어요?”

아미자는 수공에 특화된 병기.

뭍이든 물 위든 장검을 상대함에 있어 적합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수왕에겐 방법이 있었다.

“수룡대주!”

막대한 내공이 실린 외침이 터져 나왔다.

강변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수적들과 무혈단이 나타났다.

“네! 총채주님!”

“흑교(黑鮫)를!”

“여기 있습니다!”

수룡대주가 등에 메고 있던 것을 풀러 수왕에게 던졌다.

길고 거무튀튀한 것이 허공을 가르며 쏘아졌다.

수왕은 그것을 가볍게 받아낸 뒤 좌우로 몇 번 돌렸다.

부웅- 부우웅-

다시 그것을 두 손으로 잡은 수왕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이죽거렸다.

“흑교가 왔군. 네 검보다 더 긴. 이제 됐느냐?”

정광의 눈이 가라앉았다.

“잠시만요. 사제!”

강변을 바라보며 외치자 백승무가 대답했다.

“네! 사형!”

“전표 한 뭉치만 던져!”

“알겠습니다!”

이 급박한 상황에 전표를?

모두 어이없어했으나 백승무는 아니었다.

정광이 황당한 짓을 많이 하지만 항상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았던가.

“사형! 갑니다!”

단전 바닥에 들러붙어 있던 내공까지 박박 긁어내서 던졌다.

전표 뭉치가 빠르게 날아 정광의 손에 안착했다.

“이제 좀 할 만하려나.”

정광이 씩 웃으며 전표를 두 장 떨어뜨렸다.

그리고 양발로 딛고 섰다.

정광의 손에 들린 운룡이 까딱거렸다.

“다시 시작하죠.”

“……그런 식으로 내공 소모를 막을 생각이냐?”

“그것보다 발이 젖는 게 싫어서요.”

“……허장성세를!”

수왕이 먼저 몸을 날렸다.

정광도 피하지 않고 맞섰다.

슈융- 휘잉-

수왕이 작살로 찌르고 휘두를 때마다 공기가 터져 나갔다.

정광은 전표를 뿌려가며 보법을 밟아 피하는 한편, 운룡을 움직여 반격했다.

호각인 승부가 계속됐다.

수왕은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졌다.

‘내 내공이 더 높지만 저놈은 전표를 디뎌가며 소모를 줄이고 있어.’

그래도 내공에서는 우위였으나.

초식에서는 밀리고 있었다.

물속에서 벗어난 정광은 전혀 다른 무인이었다.

‘대체 어떻게 되먹은 녀석이지? 어미 배 속에서부터 무공을 익혔어도 불가능한 일이거늘.’

이렇게 가다간 끝이 안 좋을 게 분명했다.

오래 산 만큼 내공은 두터웠으나 근력만큼은 어쩔 수 없는 일.

힘도, 피로를 회복하는 속도도 정광보다 느릴 수밖에 없었다.

‘빨리 승부를 봐야하는데…… 가만.’

수왕의 눈이 빛났다.

방법을 찾은 것이다!

‘이렇게 멍청할 수가 있나. 놈이 움직일 방향을 스스로 알려주고 있는데.’

정광은 전표를 뿌리고 그것을 딛는다.

그걸 보고 흑교를 내지르면 됐다.

‘바로 지금!’

정광이 전표를 강물에 뿌리자.

수왕은 그 위를 향해 작살을 내질렀다.

‘헉! 아, 안 가?’

하지만 정광은 내디디던 발을 다시 회수하며 씩 웃고 있었다.

“월척을 낚았네요.”

동시에 금광이 번쩍였다.

“이익!”

수왕은 전력을 기울여 간신히 피한 뒤 식은땀을 흘렸다.

‘역시 이대로 가면 안 돼. 또 어떤 간악할 수를 쓸지 몰라.’

빨리 끝내야 했다.

정광도 비슷한 생각 중이었다.

‘반응이 빠르잖아.’

반응뿐 아니라 수왕의 내공은 두텁고 또 두터웠다.

초식 운용 역시 현생에서 만나본 그 누구보다 뛰어났고.

‘또 써봐야 소용없을 테고.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해야 하나.’

수왕 역시 정광과 똑같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두 사람의 신형이 멈추더니.

다시 격돌했다.

부아앙-

쉬이익-

강이 붉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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