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219화 (218/569)

219화

조심히 가세요

‘돌고래와 자라라…….’

정광은 난데없이 나타나 훼방을 놓은 두 사람을 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출렁이는 강물 위에 뜬 옷조각.

그것을 밟고 있는 그의 두 발이 살짝 젖어 있었다.

‘찝찝하잖아.’

아까 받아낸 방패 때문이었다.

등나무 줄기에 대나무 껍질을 엮어 만든 등패(籐牌)였는데, 재질이 그렇다 보니 질기긴 하나 무거운 것은 아니었다.

‘이걸 그런 기세로 던졌다고?’

단단한 땅을 딛고 그랬다면 그냥 그러려니 하겠으나, 물속에서 던졌는지라 호기심이 솟았다.

‘거기에 그놈을 등에 태우고 자맥질을 하는 것도 모자라 허공으로 솟구치는 놈까지 있다니.’

수공에 특화된 자들인 걸까.

그런 자들이 물 위에 둥둥 뜬 채 정광을 주시하고 있었다.

‘재밌는 놈들이네.’

연화채주와 영화채주를 슬쩍 보니 양측 모두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내는 총채주 측의 사람일 가능성이 클 터.

‘얘기를 좀 해봐야겠어.’

정광은 등패를 강물 위에 띄운 뒤 그 위에 올라섰다.

이렇게 편한 게 있는데 굳이 옷조각을 디디며 내공을 소모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더없이 현명한 판단이었으나 땅딸막한 사내의 생각은 달랐다.

“이놈이! 내 등패에 더러운 발을 올려? 이거나 먹어라!”

사내가 등에 지고 있던 등패를 또 던지려 하자 정광이 반색했다.

“안 그래도 두 발로 디디기엔 좀 좁았는데.”

“…….”

“어서 던지세요. 어서. 네?”

“……이익!”

땅딸막한 사내는 성품이 더러웠으나 멍청하지는 않았다.

기습적으로 던진 것도 대수롭지 않게 막아낸 정광인데, 하나 더 던진다고 달라지겠는가?

사내는 이를 갈며 등패를 다시 등에 멨다.

“잘 참았네.”

돌고래를 닮은 사내가 땅딸막한 사내를 칭찬한 뒤 정광에게 물었다.

“진옥룡 맞으시오?”

“네.”

“하긴. 물어볼 필요도 없지. 귀하의 명성을 귀가 따갑게 들었소만 실제로 겪으니 더 대단하구려. 조금 전엔 실례했소이다. 백기돈(白鱀豚)이라 하오.”

백기돈이란 장강을 누비는 민물 돌고래를 칭하는 것.

정광은 장강을 질주하며 봤던 백기돈과 사내의 외모를 비교하며 감탄했다.

“똑같네요. 본명인가요?”

“그럴 리가. 별호요.”

“적절하네요. 등패를 던지신 분은요?”

땅딸막한 사내가 콧방귀를 뀌었다.

“흥. 네깟 놈이 들을 수 있을 만큼 가벼운 별호가 아니야.”

“예의상 물었던 건데. 그럼 그냥 넘어가죠.”

“내 별호는 반별의협(斑鼈義俠)이다! 반.별.의.협! 귀에 똑똑히 박혔느냐?”

“그렇긴 한데…….”

정광이 시선을 돌려 우경에게 물었다.

“저분. 총채주의 사람이죠?”

우경이 꺼림칙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총채주를 호위하는 장강쌍위(長江雙衛) 중 한 명일세.”

“쌍위면 다른 한 분은 백기돈이라는 저분이시겠네요. 이분은 진짜 별호가 뭐예요?”

“장강왕팔(長江王八)…….”

“반별의협이라니까!”

땅딸막한 사내가 펄쩍 뛰었으나 정광은 신경 쓰지 않았다.

‘왕팔이라. 과연…….’

장강왕팔이라면 장강에 사는 자라를 말하는 것.

사내가 주장하는 반별도 장강에 서식하는 거대한 자라를 말하는 것이었으나 뒤에 의협이 붙은 게 우스웠다.

‘수적 주제에 무슨.’

장강왕팔이라는 별호가 부끄러워 스스로 만든 것이겠지.

왕팔에는 자라라는 뜻 말고도 여러 의미가 있었다.

“부모님께 잘못을 좀 많이 하셨나 봐요. 아니면 부인 되시는 분이 바람나셨는데도 모르셨다거나…….”

“이 새끼가! 나는 소문난 효자다! 혼인은 하지도 않았어!”

“근데 별호가 왜 그 모양이죠?”

“내가 어떻게 알아!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반별의협이라고!”

“흐음. 그냥 생긴 것 때문에 붙으신 별호인가. 쯧쯧. 정말 다들 너무하네. 배려심이 없어.”

“아니라니까!”

사내의 진짜 별호는 우경이 말한 대로 장강왕팔이었다.

장강에서 제일 성질이 더러운 후레자식이란 뜻.

그런 평을 듣는 자가 이런 모욕을 받고 가만히 있겠는가?

“너! 죽인다!”

왕팔은 말뿐이 아니라 실행으로 옮기려 했다.

왼손에는 등패가, 오른손에는 단창이 들렸다.

백기돈이 말리기도 전에 그의 등을 박차고 뛰어오르려는 그 순간!

정광의 손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무언가가 눈부신 속도로 날아왔다.

“헉!”

뻑!

등패를 비껴들어 간신히 튕겨낸 왕팔이 경악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처, 철전(鐵錢)으로 이런 위력을…… 어억!”

첫 번째 철전만으로도 등패를 든 왼팔이 쩌릿쩌릿하거늘.

두 번째, 세 번째 것을 어찌 막아내랴.

콰직!

뒤이어 날아온 철전들에 왕팔의 등패가 박살 나며 흩날렸다.

“크윽! 이, 이럴 수가!”

왕팔이 망연한 얼굴로 신음을 흘리자 정광이 고개를 갸웃했다.

‘등딱지가 떨어져 나갔네. 이제 뭐라 불러야 하나. 집 잃은 왕팔?’

수적들 사이에서 비슷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꼴좋군.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집 없는 자라새끼가 됐어.”

“누가 아니래.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구먼.”

그러면 그렇지.

정광은 왕팔의 평소 행실을 확실히 알게 됐다.

“말씀 좀 곱게 하세요. 그러시다 진짜 장강에 가라앉아 떠오르지 않는 자라가 되시면 어떡해요.”

왕팔이 부들부들 떨다가 고함을 질렀다.

“이게 진짜!”

“근데 뭐 하러 오셨어요? 저와 싸우려고?”

정광은 백기돈에게 물었다.

성질만 버럭버럭 내는 왕팔이 아니라 침착한 백기돈이 책임자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소.”

백기돈은 정광에게 양해를 구한 뒤 왕팔에게 말했다.

“가만히 좀 있게나. 진옥룡이 사정을 봐준 걸 알지 않나.”

“아니, 그래도 저 새끼가…….”

“가만히 있으래도. 총채주의 명을 어길 셈인가?”

“……끄응.”

백기돈은 왕팔을 진정시킨 뒤 용건을 꺼냈다.

“그대와 싸우러 온 게 아니라, 그대가 영화채(榮華寨)를 비롯한 수채들과 싸우는 걸 막으러 왔소.”

“왜요?”

정광이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제가 이분들과 싸우면 싸울수록 총채주님께 유리할 텐데.”

확실히 그렇긴 했다.

비공식적으로 월광채에 순시를 나온 총채주를 노리고 몰려온 이들이다.

좋은 의도로 왔을 리가 없지 않은가.

허나 백기돈의 대답은 의외였다.

“장강의 일은 장강이 해결해야 한다는 게 총채주의 뜻이오. 그 뜻을 존중해 주시길 바라오.”

“와아.”

정광은 정말 감탄했다.

‘수왕이 고루한 늙은이라 듣긴 했지만, 이건 좀 심하잖아.’

백기돈의 안색과 어조로 미루어 보아, 거짓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정광은 호기심이 솟았다.

“혹시 총채주님, 노망드셨나요?”

“아니오!”

“헛소리!”

“근데 왜 그러시죠?”

“아까 말했듯이 장강의 일은 장강이 해결해야…….”

“네놈이 총채주의 깊은 뜻을 알 리가 없지. 그분은…….”

두 사람이 열심히 떠들었으나 정광은 귓등으로 흘리며 말을 이었다.

“정말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우시네. 두 분도 총채주께서 그러시는 거 별로죠?”

“……!”

“연화채주께서 협의 깃발을 높이 들지 않았다면, 그에 감복한 저와 무혈단이 돕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

“영화채를 비롯한 일곱 수채가 이미 총채주를 공격하고 있을 걸요. 두 분은 지금처럼 입이 아니라 온몸을 놀리며 싸우고 계실 테고.”

“…….”

“설령 총채주께서 불손한 무리를 쳐내기 위해 안배를 하고 계셨다 쳐도 저희 덕분에 피를 덜 흘리게 되신 거잖아요. 왜 그렇게 생각이 꽉 막히셨대요?”

“…….”

백기돈과 왕팔은 할 말이 없었다.

정광의 말이 다 맞지 않는가.

단 두 가지만 빼고.

‘연화채주가 협의 깃발을 들어?’

‘그걸 감복해서 돕는 중이라고?’

그들은 연화채주 화진양이 어떤 위인인지 잘 알았다.

정광에 대한 소문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둘 다 그럴 리가 없지.’

게다가 총채주의 눈은 온 장강에 깔려 있었다.

정광이 벌인 짓을 다 아는 것이다.

‘화진양을 겁박해서 싸움을 일으켰으면서.’

‘화진양 저 능구렁이 새끼. 제압당해서 눈깔만 희번덕거리잖아.’

하지만 총채주도, 그들도 모르는 것이 있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설마 장강을 먹으려고?’

선자불래(善者不來) 내자불선(來者不善)이라.

뭐가 됐든 좋은 의도로 왔을 리는 없다.

정광이 수재민들에게 선행을 베풀었다곤 하나, 장강수로연맹을 겁박하고 있는 건 엄연한 사실 아닌가.

백기돈이 무거운 얼굴로 한 번 더 청했다.

“어쨌든 싸움을 멈춰주시오.”

“불가능해요.”

“끝끝내 본맹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을 것이오?”

정광이 어깨를 으쓱했다.

“영화채주께서 계속 싸우려고 하시는데 제가 무슨 힘이 있나요.”

“……!”

백기돈과 왕팔은 정광 때문에 잠시 잊고 있던 이름을 듣고 흠칫했다.

급히 영화채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영화채주가 번쩍 들어 올렸던 손을 내리며 흉악하게 외쳤다.

“다 죽여!”

수많은 화살비가 정광과 두 사람에게 쏟아졌다.

“이런!”

“썅!”

백기돈은 왕팔을 등에 태운 채 놀라운 속도로 잠수했다.

직사로 쏘아진 화살들이 뒤를 쫓았으나, 강물의 저항과 너무나 빠른 그의 자맥질 때문에 결국 힘을 잃고 멈춰 버렸다.

-젠장! 저 미친 늙은이를 깜빡하고 있었어!

왕팔의 전음에 백기돈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나 말일세. 그에게도 확실히 경고해야 했는데 진옥룡 때문에 정신이 팔려서…….

-그 뺀질거리는 놈. 화살 밥이 됐을까?

-그렇지는 않겠지. 그래도 꽤 고전하고 있을 걸세.

-어떡할 거야?

-첫 번째 명을 지키지 못했으니 두 번째 명이라도 지킬 수밖에.

백기돈이 결연한 얼굴로 말하자 왕팔이 씩 웃었다.

-좋아! 영화채주 그 늙은이의 멱을 따자고!

싸움을 말리지 못하면 영화채주의 목을 직접 베어라! 그것이 본맹의 체면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라!

두 사람은 총채주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떠올리며 내공을 끌어 올렸다.

-준비됐는가?

-물론!

백기돈은 왕팔을 등에 태운 채 사지를 폭발적으로 움직였다.

그들의 몸이 놀라운 속도로 물살을 갈랐다.

순식간에 영화채주가 탄 배의 밑을 지나 반대편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하압!”

돌고래처럼 수면을 찢고 솟구쳤다.

어찌나 높이 뛰어올랐는지 거대한 배의 갑판이 한눈에 내려다보일 정도!

-다른 자들은 신경 쓰지 말고 영화채주를…… 엇!

-미친! 저게 뭐야!

그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 * *

수적들이 화살을 쏘아내자마자.

정광이 딛고 있던 등패를 박차고 뛰어올랐고.

운룡은 검집을 뛰쳐나와 현묘한 원을 그렸다.

부우우웅-

그 원에 닿은 화살들은 운룡이 도는 대로 빙글빙글 돌다가 화살을 쏘아낸 자들에게 다시 돌아갔다.

더 빠르고 강하게!

슈우욱-

“으악!”

“끄억!”

수적들이 고꾸라지는 사이, 정광은 갑판에 올라섰다.

“아까도 안 됐는데 이번엔 될 거라 생각하셨어요?”

“어차피 이걸로 죽일 생각이었다!”

영화채주가 이를 부서져라 깨물며 도끼를 휘둘렀다.

정광은 한 걸음 물러나 피한 뒤, 다시 한 걸음 내디디며 운룡을 경쾌하게 내찔렀다.

“겨우 이거냐!”

너무나 시기적절한 일검이었으나 영화채주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 나서며 도끼를 내려쳤다.

어깨가 운룡에 꿰이더라도 정광을 두 쪽 내고야 말겠다는 기세!

“좋은 수예요!”

정광은 그를 칭찬하며 운룡을 박아 넣었다.

콰직!

“윽!”

운룡이 영화채주의 어깨뼈를 뚫고 절반이 넘게 들어갔다.

“흐으. 내 차례다!”

영화채주는 어깨 근육에 힘을 줘서 운룡을 조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검을 빼기 힘들 거다. 포기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어!’

지금 내려치는 도끼를 정광이 피하지 못할 거란 생각은 안 했다.

그저 검을 놓고 물러서기만 하면 됐다.

‘검 없는 검수는 아무것도 아니지.’

정광이 모든 무공에 능숙하다는 소문을 들었으나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아무리 천재여도 사람일 뿐인데,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하지만 정광은 원래 말이 안 되는 존재였다.

“여차.”

부우우웅- 콰앙!

정광이 운룡을 쥔 채 옆으로 반보 내딛자 도끼가 그를 스쳐 지나가며 갑판을 박살 냈다.

“흡.”

화아아악-

거의 동시에 운룡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내공을 밀어 넣었다. 운룡이 금룡이 되어 영화채주의 어깨에서 가슴으로 이동했다.

실로 놀라운 괴력과 내공!

서거거걱-

어깨에서 가슴까지 완벽하게 절단된 영화채주가 끔찍한 비명을 토했다.

“끄아악!”

그의 몸은 물론 입에서도 핏줄기가 터져 나왔다.

정광은 왼손을 우아하게 휘저어 그것들을 막아낸 뒤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상대할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라 하셨죠? 이 정도면 됐나요?”

“크흐…… 쿨럭. 쿨럭.”

기침을 하며 피를 게워낸 영화채주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된 정도가 아니라 넘쳤어.”

정광도 웃자 영화채주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웃지? 쿨럭. 커헉.”

정광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왜 웃긴.

죽음 앞에서도 당당한 악인을 보자 전생이 생각나서 그런 거지.

“남길 말은요?”

상체가 거의 반 동강 난 상태.

영화채주는 살 가망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꼿꼿했다.

“유언은 개뿔. 죽여.”

“조심히 가세요.”

정광은 운룡에 힘을 줘서 영화채주의 몸을 완전히 갈랐다.

그리고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는 두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싸움을 말리실 필요가 없어졌네요. 마침 끝났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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