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희롱
장강수로십팔채에서 총채주와 가장 반목하는 일곱 개의 수채에, 그들과 같은 노선을 취하던 연화채주 화진양이 선전포고를 했다.
그것도 더없이 모욕적인 말로!
경악한 건 모욕당한 당사자들뿐만이 아니었다.
화진양의 수하들 역시 입을 떡 벌렸다.
‘이제껏 예의 있게 대하던 채주들에게 늙어 죽지 않는 노물들이라니?’
‘간 보지 말고 빨리 덤비라고?’
‘우리 채주가 언제부터 총채주의 충성스러운 심복이 된 거야?’
언제부터긴.
지금부터였다.
정광은 마혈과 아혈을 짚여 꼼짝도 못 하는 화진양의 어깨를 두드리며 감탄했다.
“채주님! 의기가 대단하시네요!”
“……!”
“모든 걸 바쳐 장강을 원래대로 되돌릴 것임을 천명하시다니, 저도 거들게요!”
“……!”
연화채의 모든 배에서 들릴 정도로 또랑또랑한 목소리였다.
수적들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어갔다.
‘싸우겠다고?’
‘일곱 개의 수채와? 백 척이 훌쩍 넘는데?’
화진양은 이런 정신 나간 짓을 벌일 위인이 아니었다.
허나 분명 그의 목소리가 아니었던가!
‘채주 이 새끼가 미쳤구나!’
‘이제 와서 번복할 수도 없잖아! 싸울 수밖에 없어!’
그제야 화진양은 정광의 속셈을 알아챘다.
‘저들과 싸움을 붙이기 위해 피를 안 보고 협상했던 것인가!’
어쩐지 소문에 비해 온건하다 생각했다.
‘이런 간악한 놈을 봤나! 내 모든 걸 무너뜨리려고 해?’
분노가 솟구쳐올라 정신이 혼미해졌다.
화진양은 의식의 끝을 가까스로 붙잡으며 다시 한번 생각했다.
‘역시 이놈은 양립할 수 없는 놈이야. 너무 위험해!’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
멀리 떨어져 있는 백여 척의 배들에서 입에 담지도 못할 거친 욕설들이 중구난방으로 쏟아져 나왔다.
정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 정도는 돼야 수적이지.’
민초들에겐 악랄하나 나름의 기강이 잡힌 연화채와는 달랐다.
거친 뱃사람들의 향기가 듬뿍 풍기지 않는가.
특히 한가운데 있는 큰 배에서는 다른 배들을 압도할 만큼 큰 욕설들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내공 수위를 보아하니 채주들이구나.’
생김새만 봐도 그랬다.
하나같이 흉악한 게 마음에 쏙 들었다.
‘흩어지기 전에 치자.’
정광은 그들을 주시하며 우경을 불렀다.
화진양의 목소리로.
“군사!”
“네! 채주!”
우경이 바람처럼 달려와 화진양과 정광을 번갈아 봤다.
“역시…….”
시커멓게 죽은 얼굴로 미동조차 안 하는 화진양.
적들을 둘러보며 미소를 머금고 있는 정광.
어찌 된 상황인지 눈치챈 우경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진옥룡. 이럴 계획이었나?”
“여러 계획 중 하나였죠.”
“신묘한 변성술(變聲術)이군. 허나…….”
우경은 아군에서 적이 되어버린 배들을 훑어보며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너무 많아. 이 일을 어쩔꼬.”
“어쩌긴요. 이기면 되지.”
“……어떻게 말인가?”
정광은 그만의 필승법을 알려줬다.
“돌진하는 거죠.”
“……또 소선을 타고 가서 저들이 화살을 소모하도록 할 셈인가? 그 뒤에 우리가 화시(火矢)로 공격하고?”
우경은 자신이 말해놓고도 어이없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진옥룡이라면…….’
이미 한 차례 해낸 일인데 한 번 더 못할 건 또 무엇인가?
“알겠네. 준비하지.”
우경이 무거운 얼굴로 돌아서려 하자 정광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닻줄을 휘돌리는 게 쉬워 보였나?’
직접 해보면 그런 말 못 한다.
손목, 팔꿈치, 어깨가 얼마나 뻐근해지는데 무슨.
“저렇게 배가 많으니 화살도 엄청나게 쏘아대겠죠. 그걸 어떻게 다 막아요.”
“……그, 그러면?”
“저기 가운데 있는 큰 배. 채주들이 전부 저기에 몰려 있으니 저 배만 잡으면 되잖아요.”
“……아!”
“소선이 빨라봐야 얼마나 빠를까. 연화가 연화채에서 제일 빠르죠? 저기까지 저와 단원들을 보내주시면 돼요.”
“……그러면 건너가서 채주들을 제압하겠다는 말이군.”
우경이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침을 꿀꺽 삼킨 뒤 말했다.
“하지만…… 연화에 공격이 집중될걸세. 자네들이 채주들을 잡기 전에 우린 모두 죽을지도 몰라.”
“그야 알아서 잘…….”
정광이 말끝을 흐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적들의 중앙에 있는 큰 배에서 사람들이 뛰어내려 그 밑에 대기하고 있던 소선들로 옮겨 타는 것 아닌가.
‘채주들이 각자의 배로 흩어지는 건가?’
가만히 지켜보니 그랬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게 분명한데 무턱대고 공격해 오진 않네.’
여러 채주들이 저마다의 세력을 지휘해야 하니 저러는 게 정상이긴 했다.
“아. 진짜 실망이네.”
적들의 움직임을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우경이 물었다.
“돌격할 수 없게 돼서 말인가?”
“그것도 그렇지만 사내답지 못하잖아요.”
“……사내답지 못하다?”
“이렇게 숫자 차이가 크게 나면 닥치고 달려와야죠. 저렇게 담이 작아서야 원.”
그렇다기보단 마냥 거칠기만 한 바보들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이러면 귀찮아지는데. 어라?’
북이 울리고 깃발이 휘날리더니 적들이 일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활과 방패를 들고 늘어섰지만 화시를 준비하지는 않네요. 가까이 붙어서 가둔 뒤 섬멸하려는 거겠죠?”
“그럴 걸세. 한 명, 한 명 전부 목을 치고 배는 전리품으로 나눠 가지겠지.”
“바람직한 생각이네요. 덕분에 화시를 걱정하진 않아도 되겠어요.”
“……어차피 내 목은 잘릴 것 같으니 그리 바람직해 보이진 않네만.”
정광은 적선들을 훑어보다가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주먹코 노인이 탄 배였다.
“저 배들요. 다른 배들보다 좀 빠르게 다가오는데 어디 배들이에요?”
“화린채(化燐寨)일세. 채주의 성격이 무척 급한 편이지.”
“급하기만 한가요?”
“으음. 잔인하기로 악명이 높아. 민초들을 수탈하는 것도 제일 심한 편이고.”
“연화채보다요?”
우경의 얼굴이 굳어졌다.
“수적인 주제에 이런 말 하긴 뭣하네만. 우리는 최소한 지킬 건 지켰네. 향주들 중 남몰래 심한 짓거리를 하는 자가 있었을진 모르나 그런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을 뿐이야.”
“뻔한 변명이네요.”
“……그래. 변명이 맞지. 그래도 화린채에 대한 건 사실일세.”
“믿을게요. 개방의 유소협도 그렇게 말했었으니까.”
“후개를 말하는 거군. 다 알면서 왜 묻는 건가?”
“교차검증이죠. 제일 강한 수채는 어디예요?”
우경이 채주들이 타고 있다가 내렸던 큰 배를 가리켰다.
도끼를 등에 멘 덩치 큰 노인이 보였다.
“영화채(榮華寨)라 하네. 채주의 성질머리가 보통이 아니고 무공도 무척 강해.”
“영화채주가 화린채주를 강제할 순 없죠?”
“영향을 행사할 순 있어도 그건 무리지. 엄연히 별개의 수채니까.”
“혹시 사이가 좋나요? 그렇진 않더라도 같은 장강수로연맹이니 최소한의 의리는 있다던가.”
“……자네, 농도 할 줄 아는군.”
정광이 피식 웃었다.
우경의 말처럼 그럴 리가 있나.
수적 주제에 의리가 웬 말인가.
‘다른 수채가 거꾸러지면 신이 나서 삼키려 들겠지.’
지금도 마찬가지일 터.
압도적으로 강한 전력을 가지고 있으니 다른 수채 한둘쯤 가라앉는 건 지켜만 보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러면 성격이 무척 급하다는 놈부터 잡아야겠네.’
정광의 시선이 주먹코 노인에게 향했다.
“화린채부터 잡죠.”
“어떻게 말인가?”
“일단 고수와 신호수에게 북을 치고 깃발을 휘두르라고 해주세요. 별 의미 없는 내용으로요.”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지 알 도리가 없었으나 촌각을 다투는 상황.
우경은 즉시 고수와 신호수에게 지시했다.
“채주께서 그렇게 명하셨다. 어서 해라! 어서!”
수적들은 황당해하면서도 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채주가 그랬다는데 어쩌겠는가.
‘눈을 부릅뜨고 적들을 쏘아보고 있잖아.’
‘진짜 싸울 셈이구나! 나도 모르겠다!’
북이 울리고 깃발이 나부꼈다.
둥! 둥! 두둥! 둥!
휘리릭- 펄럭-
북과 깃발을 이용한 신호는 보안이 생명이었기에 각 수채마다 달랐다.
연화채가 갑자기 바쁘게 신호를 보내자 다른 수채의 수적들은 바짝 긴장했다.
‘어떤 의미지?’
‘놈들은 소수다. 설마 돌파를 강행할 생각인가?’
연화채 수적들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두 시진 뒤에 밥을 먹는다고?’
‘그때쯤이면 밥시간이긴 한데. 그걸 지금 왜?’
적군은 긴장하고 아군은 황당해하는 시간이 잠시 지속됐다.
‘이쯤이면 되겠지.’
정광은 목을 가다듬고 크게 외쳤다.
분노가 가득 담겨 있는 화진양의 음성으로!
“화린채주! 신호를 했잖소! 뭐 하는 짓이오? 약조했던 대로 어서 영화채를 치시오!”
“……!”
우경이 입을 떡 벌렸다.
삼척동자도 안 속을 뻔한 이간계(離間計) 아닌가!
“지, 진옥룡. 이간계가 통할 거라 보는가?”
“아뇨.”
“그럼 왜?”
“이간계가 아니라 격장지계(激將之計)예요. 열 받아서 튀어나오겠죠.”
아니나 다를까.
화린채주인 주먹코가 길길이 날뛰며 고함을 질렀다.
“야 이 능구렁이 새끼야! 음모를 꾸며도 하필 나를 대상으로 꾸며?”
정광도 지지 않았다.
“대체 무슨 말이오? 이제 와서 배를 갈아탄 것이오? 지조 없기는!”
“지조가 왜 나와! 내가 너와 사귀냐?”
“오호라! 영화채주와 붙어먹었군! 그가 함부로 대해서 불만이라더니 내심 즐기고 있었던 것이로구나!”
“……!”
주먹코가 입을 떡 벌렸다.
평소 고상한 척하던 화진양이 이런 질 낮은 희롱을 하다니.
그것도 자신에게!
“이 새끼가 진짜!”
주먹코는 저급한 욕설을 미친 듯이 내뱉다가 수하들을 독촉했다.
“돛을 더 올려서 펼쳐! 노를 젓고! 저 능구렁이 새끼는 내가 죽인다!”
적들 중 그 누구도 정광의 말을 믿지 않았다.
이렇게 도발한다는 건 화린채를 끌어들이겠다는 의미!
정상적인 집단이라면 튀어 나가려는 화린채를 말렸겠지만…….
각각 독립된 수적들인 그들은 화린채를 그냥 보내줬다.
‘그래. 둘이 박 터지게 싸워라.’
‘어느 쪽이 이기든 이긴 놈을 먹어주마.’
연화채를 잡고 나면 총채주와 싸워야 했으나 화린채 하나 없다고 못 이길 거란 생각은 안 했다.
연화채주 화진양은 능구렁이 같은 인물. 그런 자를 잡기 위해 화린채를 희생시키는 건 남는 장사인 것이다.
‘잠깐. 그런데 저 능구렁이가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승산 없는 싸움을 할 놈이 아닌데. 옆에 있는 잘생긴 도사 놈은 또 뭐야?’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진옥룡이라는 별호를 떠올렸을 것을.
정광은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군사님. 뭐 하세요? 화린채부터 잡아야죠.”
“그들이야 어떻게든 이긴다 해도 그 뒤가…….”
“끝까지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인 거 아시면서 왜 그러세요. 연화채의 저력을 보여주시죠.”
제가 그런 상황을 만들어놨으면서 목숨을 걸고 싸우라니!
저력은 개뿔! 숫자부터 상대가 안 되잖아!
우경은 속으로 외친 뒤 마음을 굳혔다.
“빌어먹을! 채주께서 명하신다! 진형을 유지한 채 전진! 적이 가까워지면 일제히 활을 쏜 뒤 전속으로 또 전진이다! 화시는 쏘지 마! 그랬다간 놈들도 쏠 것이야!”
북이 울리고 깃발이 펄럭였다.
연화채 수적들은 이를 악물고 활시위에 화살을 메겼다.
당장이라도 도주하고 싶었으나 불가능한 일.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싸워야 하지 않겠는가.
적선들이 사정거리에 들어오자 우경이 피를 토하듯 외쳤다.
“쏴라!”
푸슝-
수많은 화살들이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막아!”
주먹코가 지시하자 화린채 수적들이 방패를 치켜들어 화살을 막아냈다.
투웅-
“크학!”
화살에 꿰인 이들도 있었으나 대부분 막은 상황.
열이 뻗친 주먹코가 수하들을 돌아보며 명을 내렸다.
“화살을 쏘며 전속 전진! 최대한 빨리 놈들을 잡아! 머리를 직접 쪼개라!”
“채, 채주님!”
“왜!”
“놈들도 전속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뭐?”
주먹코가 다급히 몸을 돌려 연화채를 바라봤다.
수하의 말처럼 미친 듯이 노를 젓는 모습이 보였다.
“……감히 날 우습게 봐? 일단 쏴!”
“네!”
화살이 날아가고 적들이 막았다.
화살이 날아오고 아군이 막았다.
이런 공방을 몇 번 하자 양측은 서로의 이목구비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는 거리까지 가까워졌다.
‘아직 멀어. 조금만, 조금만 더 가까워지면…….’
주먹코가 양손에 분수자(分水刺)를 끼며 도약할 준비를 하는데.
화진양의 옆에 있던 청년이 갑판을 가볍게 박차고 날아올랐다.
‘……아!’
눈처럼 하얀 천에 금사로 수놓은 구름. 그런 우아한 도복을 입고서 이 먼 거리를 날아오는 미청년이라니.
‘……진짜 용 같구나!’
순수하게 감탄하던 주먹코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잠깐. 용? 진짜 용?’
미청년의 얼굴이 확대됐다.
그냥 미청년이 아니고 천하제일미남 아닌가!
“지, 진옥룡!”
“어? 우리 만난 적이 있던가요?”
주먹코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던 정광이 고개를 갸웃했다.
주먹코는 분수자를 하나 던지며 비명 같은 외침을 토했다.
“죽어!”
피잉-
예리한 분수자가 허공을 찢으며 날아갔다.
정광은 운룡대팔식을 펼쳐 가볍게 피해내며 예의 있게 답했다.
“장유유서(長幼有序). 먼저 가시죠.”
화아악-
동시에 그의 허리춤에 잠들어 있던 운룡이 깨어나 금룡으로 화했다.
눈부신 황금빛이 주먹코의 상반신을 할퀴고 지나갔다.
서걱-
“끄아악!”
분수자를 암기처럼 던진 뒤, 어느새 새로운 분수자를 쥐고 있던 주먹코의 오른팔이 사라졌다.
정광은 허공으로 튀어 오른 그 오른팔을 낚아채며 내려섰다.
그리고 주먹코에게 선심 쓰듯 내밀었다.
“저는 필요 없거든요.”
“……!”
“아. 그쪽도?”
“……네놈이 감히 날 희롱해!”
정광이 팔을 대충 내던지며 담담히 말했다.
“희롱하지 않았는데.”
“시끄럽…….”
“장강에서 제일 나쁜 놈이시라면서요?”
“……누가 그따위 소리를! 그렇다면 어쩔 것이냐!”
“지금부터 희롱하려고요.”
“……뭐?”
정광의 눈이 차갑게 빛나고.
화아아악-
금룡이 비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