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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마협-215화 (214/569)

215화

지난 일은 강물에 흘려보내고

화진양은 정광이 갑판에 내려서자마자 직감했다.

‘이길 수 없어.’

정광이 닻줄을 휘둘러 수룡(水龍)으로 변모시킨 신위 때문이 아니었다.

닻줄에서 갑판으로 뛰어내리며 선보인 무림일절(武林一絶) 운룡대팔식 때문도 아니었다.

기세. 아니, 어렴풋이 느껴지는 기운이라 할까.

총채주(總寨主)인 수왕(水王)을 대할 때처럼 손을 쓸 엄두가 안 났다.

‘소문보다 더한 놈이군.’

게다가.

‘수왕은 대화로라도 싸울 수 있지, 이놈은 말이 통할 상대가 아니야.’

그런 정광이 할 말이 있는지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인사드리기 힘드네요.”

“…….”

“채주님 맞으시죠? 잠깐 얘기 좀 할까요?”

“…….”

얘기하자면서 왜 시정잡배가 양민을 위협할 때처럼 양손을 매만지는지.

손발로 대화를 나누자는 것일 터.

화진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런 버릇없는 놈을 봤나.’

이것만큼은 소문과 똑같았다.

아무리 열세인 상황일지라도, 이런 모욕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으면 그 누가 그의 명을 듣겠는가.

‘놈이 지쳤을 수도 있어. 허장성세인 건 아닌지 확인도 할 겸…….’

남들 모르게 다른 이를 시켜 손을 쓰게 하면 되리라.

-구소. 지켜만 볼 것이냐?

-……!

정광의 놀라운 무위에 넋을 잃고 있던 구소가 정신을 차렸다.

그는 채주인 화진양을 호위하는 호연대(護蓮隊)의 대주.

정광이 두려웠으나 그간 화진양을 호위하며 느껴온 두려움이 더 컸다.

‘지금 진옥룡을 치지 않으면 일이 잘 풀려도 나는 결국 죽어!’

어차피 죽을 바엔 힘이라도 써보고 죽는 게 낫다.

그도 화진양과 비슷한 생각을 했다.

‘어쩌면 지금이 적기일지도.’

정광이 놀라운 무위를 선보였으나 그런 말도 안 되는 짓들을 하면서도 힘과 내공이 여전할 것 같진 않았다.

잘하면 정광을 잡아 명성을 드높일 수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지금까지 수적질을 하며 누렸던 권력과 쥐었던 재물보다 더 많은 걸 얻게 될 것이 분명했다.

‘까짓것, 가자!’

구소는 단창 두 자루를 곧추세우며 수하들을 둘러봤다.

“호연대! 우리는 강하다! 지금 당장 저 악적을 쳐…… 어?”

뭔가 희끗거린다 싶더니 정광의 주먹이 날아와 턱을 후려갈겼다.

콰직!

“끄헉!”

구소는 하늘을 훨훨 날아 배 밖으로 사라졌다.

풍덩-

그가 강물에 빠지는 소리와 함께 정광의 목소리가 사람들의 귀에 박혔다.

“강하다고 하시더니 약하시네.”

“…….”

“아니, 그보다 얘기 좀 하자는데 다짜고짜 싸우려고 하는 건 또 뭐야? 강호의 도리가 있지, 저래서야 쓰나?”

“…….”

수적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호연대주가 약한 게 아니라 네가 너무 강한 거잖아!’

‘다짜고짜는 무슨! 기습은 제 놈이 해놓고서!’

‘정파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간악한 놈이로다!’

정광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구소를 한 방에 날릴 수는 없다.

수적들은 정광이 기습을 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무공이 높은 화진양은 보는 눈도 생각도 달랐다.

‘……정말 무서운 놈이구나.’

이길 수 없다는 직감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만큼 정광이 펼친 일초는 단순하면서도 신묘했다.

‘이제 어쩐다?’

머리를 맹렬히 굴리는데 정광의 시선이 그에게 돌아왔다.

“채주님. 혹시 저분, 채주님이 시키셔서 저러신 거 아니에요?”

“……그럴 리가. 호연대주는 원래 충성심이 강한 편이지. 스스로 나섰을 뿐일세.”

“충성심이 강한 분은 보내 드렸으니 대화하실 마음이 드세요?”

화진양은 정광을 노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진옥룡을 만나게 되어 영광이네만, 말로 하는 대화가 아니라면 사양하겠네.”

“당연히 말로 하는 건데요.”

“그럼 손은 왜 계속 매만지는가?”

“말로 안 될 때 쓰려고요.”

“…….”

화진양의 이마에 잡힌 주름이 더 깊어졌다.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서 나를 흥분시킨 뒤 검을 뽑을 심산인가.’

보나 마나 명분을 취하려고 저러는 것일 게다.

‘홀로 싸우면 필패야.’

합공 역시 별 소용이 없을 게 뻔했다.

‘차라리 뭍이었으면……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이야.’

연화가 비록 큰 배라 하나 뭍처럼 넓을 순 없다.

이 한정된 공간에서 합공을 해봐야 몇 명이나 손을 쓸 수 있겠는가?

그래서 계속 물러나며 화살을 쏟아부었는데, 자신이 있었는데…….

장강수로십팔채가 무림맹과 사마련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물 위에서일 때다.

그들보다 빠른 배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화살로 공격해 승리한다.

물에서 질주하는 자가 뭍에서 구르는 자를 이기는 필승법인 것이다.

그 방법이 실패하자 다른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른 이에게 생각하게 하면 된다.

이럴 때 써먹으려고 그간 대우해 주지 않았던가?

-우경. 방법을 생각하게.

-……!

바짝 얼어서 정광만 바라보고 있던 우경이 화들짝 놀랐다.

‘방법은 무슨! 저 악귀를 사람이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그는 머리가 똑똑한 만큼 머리의 한계도 잘 알았다.

압도적인 힘 앞에선 아무리 신묘한 계책도 무용지물이 되는 법.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조언은 단 하나였다.

-일단 들어보시지요.

-겨우 그걸 방법이라고 내놓다니…….

화진양이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자 우경의 전음이 빨라졌다.

-대신 수하들을 모두 물리십시오. 진옥룡의 요구가 채주께 이로운 내용은 아닐 겁니다. 만약 그 요구를 어느 정도 들어줘야 하면 수하들이 못 들은 상태에서 받아들이고 행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쉽게 말해 싸우는 것은 불가.

합공해 봐야 소용없으니 수하들을 물리고 체면을 지키라는 의미였다.

‘……역시 이 수밖에 없는가.’

마음에 안 들지만 어쩔 수 있나.

우경의 조언을 받아들인 화진양이 정광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한번 들어나 보세. 군사!”

“네! 채주!”

우경이 크게 대답한 뒤 수하들에게 명했다.

“채주께서 대화를 나누시겠다고 하신다! 자리를 비워 드려라! 다른 배들도 대기하라 하고!”

“존명!”

수적들이 내심 안도하며 물러났다.

그들이 북과 깃발로 신호를 보내자 다른 배에 탄 수적들도 움직임을 멈췄다.

양쪽 끝에 있는 배까지 접근해, 갑판에 뛰어올라 싸우려던 무혈단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단주!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오?”

당오군의 물음에 정광이 답했다.

“대화 좀 하려고요!”

“지금 멈추기엔 좀…….”

당오군이 곤란한 얼굴로 말끝을 흐리자 정광이 씩 웃었다.

“무슨 말씀인지 알아요! 여기까지만 하고 다들 잠시만 기다려 주실래요? 거기 네 분도요!”

눈치를 보다가 잽싸게 도주하려던 네 향주가 목놓아 외쳤다.

“물론이지요, 진옥룡님!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런 것치곤 아까보다 좀 멀어지셨네요.”

“가, 강물에 떠내려가서 그렇습니다! 자네들, 지금 뭐 하는 겐가? 어서 노를 저어 진옥룡님께 가까이 가세!”

“아. 선주님들! 아까 강에 빠진 분도 좀 건져 주시고요!”

“역시 진옥룡님이십니다! 아무리 악한 놈이라 해도 살리고 봐야지요!”

소선이 눈부신 속도로 다가오자 정광이 시선을 돌렸다.

“채주님. 이제 준비되셨죠?”

“……말해보게.”

“별것 아니에요. 그저…….”

“……그저?”

정광의 이어지는 말에 화진양이 눈을 크게 떴다.

“총채주를 뵙고 싶거든요. 안내 좀 해주실래요?”

“……!”

“그분, 진짜 뵙기 힘든 분이라 들었는데 채주께서는 알고 계시죠? 제일 큰 적이니까 어떻게든 동정을 파악하고 계시겠죠.”

한동안 침묵하던 화진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적이라니. 총채주께서는 장강을 이끄시는 분일세. 내가 왜 그분을 적대하겠는가?”

“에이, 십 년 전쯤 연화채를 꿀꺽하신 뒤 다른 채주들을 부추겨 총채주와 대립하고 계시잖아요.”

“세간에 떠도는 오해를 자네도 하고 있군. 흔히 우리를 장강수로십팔채라 부르나 정확히 말하면 장강수로연맹(長江水路聯盟)일세.”

“무슨 차이죠?”

“총채주가 독단으로 이끄는 조직이 아니란 말이지. 수채마다 사정이 있고 사람도 많다 보니 견해도 제각각일 수밖에 없네. 총채주와 대립하는 게 아니라 보다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의견을 활발히 나누는 것뿐이야.”

정광이 미소지으며 화진양을 칭찬했다.

“정치 잘하신다는 소문만큼 말씀도 잘하시네요. 뭐 그건 그렇다 치죠. 어쨌든 만나게 해주세요. 가능하시죠?”

“…….”

화진양은 정광을 노려보며 머리를 굴렸다.

‘왜 그를 보려고 하지? 대체 왜?’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럴듯한 답이 안 나왔다.

“그를 왜 만나려고 하는가?”

“비밀인데요.”

“…….”

화진양은 꿈틀거리는 눈썹을 억지로 가라앉히며 물었다.

“알려주고 싶지 않은가 보군. 나도 싫다면 어쩔 심산이지?”

“아시면서.”

어깨를 으쓱한 정광이 은근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총채주, 마음에 안 드시죠?”

“…….”

그런 당연한 걸 말이라고.

허나 그렇다고 말할 순 없었다.

“저도 마음에 안 드시고요.”

“……!”

이건 정말 말하고 싶었으나.

절대로 말할 수 없었다.

“자. 채주께서는 이렇게 두 사람을 싫어하세요. 그런데…….”

“……?”

“그런 두 사람이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좋게 끝나진 않을 것 같은데.”

“……!”

이렇게 설득력이 넘칠 수가 있나.

화진양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래. 고루한 노친네와 파격적일 정도로 미친놈이 만난다? 절대 좋은 일이 벌어질 순 없지.’

정광의 의도를 알 수는 없었으나 만나서 차나 한잔하려고 이러는 건 아닐 터.

게다가 이따위 버르장머리로 총채주를 대하면 자존심 강한 총채주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뭍이면 어찌 될지 모르지만 물에서라면…….’

정광의 무공을 직접 견식했으나 총채주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이놈이 마냥 당하기만 하지는 않겠지. 그 늙은이에게 중상을 입힐지도 몰라.’

이이제이(以夷制夷)라.

오랑캐를 이용해 오랑캐를 친다.

둘 중 누가 이기든 심각한 부상을 당하지 않겠는가.

아니, 경상이라도 좋다.

다른 채주들을 이용해 상처 입은 범을 잡으면 되니까!

‘만약 싸울 기색이 없으면 총채주를 부추기면 돼. 이 미친놈이 우리를 모욕했다고, 이 치욕을 씻어야 한다고 하면 장강에 평생을 바친 그 늙은이가 가만히 있을 리 없지.’

생각보다 나쁜 요구는 아니었다.

연화채를 전부 동원하고도 패해 체면이 깎였으나 만회하고도 남을 기회였다.

‘피해라 해봐야 구소의 턱이 깨진 것밖에 없고. 좋아. 여기서 마무리 짓자.’

평상시라면 군사인 우경에게 한 번 더 물어본 뒤 정했겠지만, 이번 싸움에서 아무런 역할도 못 한 그를 존중할 만큼 화진양의 마음은 넓지 않았다.

어차피 승낙하지 않으면 당장 물고기 밥이 될 판 아닌가.

“한 가지만 약조해 주겠나? 곤륜을 걸고.”

정광이 제멋대로이긴 하나 사문인 곤륜을 아낀다는 건 유명한 얘기.

나중에 어떻게 돌변할진 모르지만, 이보다 더 큰 맹세를 하게 할 순 없었다.

“뭔데요?”

“총채주를 만나게 해줄 테니 나와 연화채에게 위해를 가하지 말게.”

총채주를 어떻게 대하든, 다른 수채들이 어떻게 되든 다 필요 없고 나와 내 세력만 안전하면 된다는 얘기.

정광이 나지막이 감탄했다.

“참 뻔뻔하시구나.”

“……그 덕에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지.”

“참을성도 강하시고요. 수염이 부르르 떠는데도 안색에는 변화가 없으시네요.”

“……그래서. 약조하겠는가?”

정광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러죠. 제가 직접 손을 쓰진 않을게요.”

“……남에게 사주하겠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제가 그러지 않아도 가만히 있지 않을 분들이 많으셔서 이렇게 말씀드리는 건데요.”

“…….”

화진양은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곤륜과 무림맹을 말하는 것이구나.’

그들은 시시비비를 가리는 걸 떠나, 장강을 돌며 선행을 베푼 정광을 공격한 것 자체를 문제 삼을 게 분명했다.

‘이놈이 그걸 노리고 수재민들을 도운 건가.’

장강수로십팔채로서도 할 말이 없는 일이었다.

원래 장강 사람은 그들이 도와야 하는 것이었기에.

허나 그 기조를 바꾸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화진양은 이대로 쓰러질 생각 따윈 없었다.

‘이놈과 총채주를 싸움 붙이면 돼. 그리고 내가 장강을 먹는다. 관(官)과 새로 협상을 하면 곤륜이든 무림맹이든 두려워할 필요 없어.’

화진양은 무거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좋아. 그렇게 하세.”

“대신 지금까지 피해 입으신 것 가지고 꼬투리 잡으시면 안 돼요.”

“물론이지. 나를 뭐로 보고 그러나?”

“역시 채주시네요. 통이 크시다니까. 자오! 그만 올라오세요!”

정광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자오가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동시에 제일 오른쪽에 있는 배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뭐, 뭐야!”

“으악! 배가 기울어진다!”

화진양이 놀라 돌아보니 배가 점점 기울어지고 있었다.

‘갑자기 어떻게 된 거야!’

헌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번엔 그 옆에 있던 배에서 똑같은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미친!”

“배에 구멍이 났다! 배에 구멍이 났어!”

한 척, 두 척, 세 척.

연이어 일어난 비명은 네 척 째가 돼서야 멈췄다.

“제기랄! 빨리 뛰어내려! 어서!”

“이러다 다 죽는다!”

수적들이 비명을 지르며 강으로 뛰어들고, 옆으로 기울던 배는 완전히 쓰러져 버렸다.

콰아앙! 촤와아아악!

엄청난 굉음과 함께 집채보다 큰 물보라가 순차적으로 솟구쳤다.

입을 떡 벌린 채 그 광경을 바라보던 화진양은, 안 돌아가는 목을 억지로 돌려 정광을 노려봤다.

“……자네 수하가 한 짓인가?”

“수하가 아니라 단원인데요.”

“……어쨌거나. 우리에게 위해를 끼치지 않겠다고 약조해 놓고?”

화진양이 부들부들 떨며 묻자 정광이 고개를 갸웃했다.

“배에 난 구멍은 지금 난 게 아닌데요. 이제야 물이 차서 저렇게 된 거지.”

“……!”

“설마 지난 일을 꼬투리 잡으시는 거세요? 약조 위반인데.”

“……이익!”

화진양은 극도로 분노했지만 뭐라 받아칠 수가 없었다.

확실히 그렇게 약조를 하지 않았던가.

“자. 자. 지난 일은 강물에 흘려보내고요.”

토닥토닥.

정광은 화진양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가죠. 총채주 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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