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214화 (213/569)

214화

안녕하세요

연화채 채주 화진양은 탐욕스러운 자였다.

허나 네 개의 향(香)을 이끄는 당주(堂主) 직위에 만족한 것처럼 지내다가, 채주의 목을 날려 버리고 그 자리를 차지했을 만큼 철두철미한 면모도 있었다.

보통 세월이 지나고 나이가 들면 조금이나마 변하기 마련이거늘.

그는 과거나 지금이나 여전히 똑같았다.

어느 것 하나 내어놓기 싫었다.

그래서 모든 전력을 이끌고 나와 기습을 펼쳤건만…….

‘수귀대(水鬼隊)가 실패한 건가?’

저 앞에 떠 있는 네 척의 배 중 가라앉는 것은 단 한 척도 없었다.

‘향주 놈들은 수귀대를 막을 능력이 없어. 소문에는 그런 내용이 없었지만 진옥룡이 수공에도 능한가 보군.’

뭍과 물은 다르기에 뭍에서 날고뛰던 고수도 물에서는 힘을 못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당연히 진옥룡도 그럴 줄 알았다.

‘흐음…….’

원인이야 어쨌든 놈이 먼저 연화채를 건드린 상황.

곤륜과 무림맹이 껄끄럽지만 이대로 지나갔다간 안 그래도 떨어진 체면이 아예 땅에 처박힐 터.

굳이 일을 키우긴 싫어 조용히 수장시키려고 했는데.

놈이 망쳐버렸다.

“……난 놈은 난 놈인가.”

화진양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리자 옆에 공손히 시립해 있던 군사 우경이 답했다.

“가늠할 수 없는 자라더니 그런가 봅니다.”

“그래도 수귀대를 막을 줄이야. 이제껏 쏟아부은 돈이 아깝군.”

화진양은 진심으로 후회했다.

‘원래 있던 놈들을 죽이지 말고 어떻게든 회유했어야 했나.’

십여 년 전, 전대 채주를 죽이며 심복들까지 깡그리 몰살시켰다.

채주 직속 조직이었던 수귀대도 마찬가지였는데, 뒤늦게 사람을 키워 쓰니 이런 문제가 생긴 것이다.

“조용히 처리하기는 글렀어. 전면전으로 가야 해.”

화진양이 마음을 굳히자 우경이 조심스레 물었다.

“협상하실 의향은 전혀 없으신지요?”

“협상?”

화진양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진옥룡의 행보를 떠올려 보게. 협상이라는 걸 할 놈인지. 아니, 할 수도 있겠군. 허나…….”

“…….”

“말이 협상이지, 제 놈의 뜻을 일방적으로 강요할 걸세. 우리는 모든 걸 잃게 될 거야. 그럴 바엔 싸우는 게 낫지 않은가.”

화진양은 이제껏 일궈온 것들을 포기할 수 없었다.

“총채주(總寨主)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다른 채주들을 설득해 맞서 싸워왔어. 진옥룡이 도사 가균을 꺾었다곤 하나, 한 명의 무인일 뿐. 단 한 명에게 굴복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세.”

“…….”

“지금 뒷감당 따위는 생각하지 마. 당장 살아야 뒤도 있는 것이니까. 알아들었나?”

화진양의 전신에서 무거운 기세가 피어올랐다.

우경은 두려운 얼굴로 허리를 깊이 숙였다.

“물론입니다, 채주.”

“좋아. 원래 계획대로 사냥을 시작하게. 진짜 용이라 불리는 놈을 잡는 거야.”

“네! 채주!”

우경이 목을 가다듬고 힘차게 외쳤다.

“채주께서 명하신다! 반원진(半圓陣)을 유지한 채 전속 전진! 놈들이 도주하기 전에 가두고 화시(火矢)로 불태우는 거다!”

“존명!”

고수(鼓手)가 북을 크게 울리고 신호수(信號手)가 깃발을 복잡하게 흔들었다.

화진양이 탄 거대한 배, 연화(蓮花). 그곳에서 내려진 명을 다른 배들이 따르려는 그때!

정면을 주시하던 우경이 두 눈을 부릅뜨며 더듬거렸다.

“채, 채주. 노, 놈들이…… 놈들이…….”

화진양도 눈이 있었다.

그 역시 눈을 크게 뜨며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저런 미친…….”

소선(小船) 한 척이 쏘아져 오고 있었다.

그 선수(船首)에는 청년 도사가 당당히 서 있었는데, 우아한 도복이며 아름다운 얼굴이며 묻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진옥룡! 소문보다 더 미친놈이구나!”

* * *

연화에서 웅장한 북소리가 터져 나오며 다양한 깃발이 어지러이 휘날렸다.

“저게 무슨 신호죠?”

정광의 물음에 일향주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답했다.

“반원진(半圓陣)을 유지한 채 전속 전진해, 우리가 도주하기 전에 가두고 화시(火矢)로 불태워 죽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허를 찔렀네요.”

“……네?”

“우리가 가고 있잖아요.”

“…….”

네 향주는 속으로 외쳤다.

‘허를 찌르긴 무슨!’

‘죽으려면 혼자 죽지, 우리는 왜 끌고 나온 거야!’

정광은 시원한 바람을 즐기며 네 노잡이를 독려했다.

“좀 느린 감이 있네요. 이렇게 가다간 화시에 꿰여 불타 죽을 것 같은데.”

“……!”

열심히 노를 젓던 향주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울화통이 터지는 건 터지는 거고, 일단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은 단전 바닥에 들러붙어 있던 내공 찌꺼기까지 끌어올렸다.

동시에 전신의 근육을 쥐어짜 노를 미친 듯이 움직였다.

“끄아아아악!”

장쾌풍이 비명을 지르자 정광이 의아한 얼굴로 돌아봤다.

“어? 왜 그러시죠?”

왜?

왜에?

“아, 아닙니다! 몸이 살짝 결려서…… 끄으윽.”

“저런. 잠을 잘못 주무셨구나. 그래도 힘내주세요. 연화라고 쓰인 저 큰 배까지 곧장 가야 하거든요.”

네 향주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먼저 돌진해서 적들을 혼란에 빠뜨리겠다더니!’

‘채주를 바로 치겠다는 말이었나!’

상식적으로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근처에 가기도 전에 화살비를 맞고 죽을 텐데 말이 되느냔 말이다.

그때, 정광이 자신과 상관없는 일을 구경하듯 중얼거렸다.

“채주께서 우리를 보셨네. 어라? 성격이 급하신가. 대화할 생각도 없이 화시에 불을 붙이시고.”

향주들은 입을 떡 벌린 채 이십 척이 넘는 배들을 살펴봤다.

수적들이 죽 늘어서서 활시위에 불화살을 메기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럼 우리도 준비해야겠죠?”

뭘?

죽을 준비?

이런 젠장!

향주들이 악에 받쳐 대들려고 하는데.

정광이 소선에 실은 닻줄 뭉텅이를 들더니 강물에 빠뜨렸다.

그리고 그 끝을 잡고 적선(敵船)들을 바라봤다.

‘……뭐 하는 짓이지?’

‘……낚시라도 하나?’

하도 어이가 없어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데.

거대한 북소리와 함께 푸른 하늘을 수많은 붉은 선이 갈랐다.

불화살의 비가 쏟아진 것이다.

“망할!”

“내가 이렇게 죽다니!”

“진옥룡! 이 개새…….”

향주들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욕설을 내뱉는 그 순간!

“읏차.”

정광이 팔을 가볍게 올리자 물에 잠겨 있던 닻줄이 수룡(水龍)처럼 솟구쳤다.

“핫.”

뒤이어 팔을 휘젓자 수룡이 소선 위에서 맹렬히 회전하며 쏟아지는 화우(火雨)를 모두 쳐내는 것 아닌가!

“저! 저!”

“말도 안 돼!”

향주들이 경악하자 정광이 대꾸했다.

“되는데요. 그보다 아까 저보고 개새끼라고 하신 건가요?”

장쾌풍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맞죠?”

장쾌풍은 일생일대의 임기응변을 펼쳤다.

“개, 개새끼가 아니라 개세영웅(蓋世英雄)이시라고 칭송하려 했습니다!”

“문맥이 안 맞는데.”

“제발 믿어주십시오! 제가 좀 말주변이 없지 않습니까!”

“뭐 그건 나중에 다시 따지죠.”

정광은 적선들을 둘러봤다.

경악하던 수적들이 다시 활시위에 불화살을 메기고 있었다.

“노 안 저으실 거예요? 끝없이 이럴 수는 없는데. 저도 사람이거든요.”

“아!”

향주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죽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솟아났다.

‘어차피 길은 하나야.’

‘좋아. 해보자.’

마음 같아선 뒤로 저어 도주하고 싶었으나 그럴 순 없었다.

그랬다간 화우가 문제가 아니라 수룡에게 처맞아 죽을 게 뻔하지 않은가.

“다들 힘을 내게!”

“저으시오! 어서!”

소선이 광풍처럼 질주했다.

그리고 그 위로 화우가 또 내려앉았다.

* * *

닻줄이 허공에서 둥근 방패를 만들어 화우를 물리치자…….

화시를 쐈던 수적들이 경악하며 외쳤다.

“저게 말이 돼?”

“사람이 아니잖아!”

화진양도 놀라긴 마찬가지.

콰지직!

그도 모르게 손을 올리고 있던 의자 팔걸이를 부서뜨렸다.

‘과연! 명불허전이구나!’

비록 닻줄이 길고 무겁다곤 하나, 한 손으로 잡고 돌리는 건 그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저렇게 물을 잔뜩 먹인 것이라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그것으로 수없이 떨어지는 화시를 하나도 흘리지 않고 쳐낸다?

저렇게 담담한 얼굴로?

‘가까이 다가오게 해선 안 돼.’

화진양이 눈짓하자 우경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계속 쏴라! 일제사격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나눠서 쏴!”

연화채의 군사다운 적절한 지시였다.

한꺼번에 쏘는 것보다 정광의 내공과 체력을 훨씬 더 많이 갉아먹을 수 있지 않겠는가.

북이 울리고 깃발이 휘날렸다.

수적들은 순차적으로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

정광이 탄 소선이 급격히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많은 화살이 빗나갔고 수적들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빌어먹을! 배가 너무 작아 맞추기가 힘들어!’

‘게다가 뭐가 저렇게 빨라?’

‘이걸 노리고 소선을 타고 나온 건가?’

제대로 향한 화살도 정광이 짧게 쥐고 휘돌리는 닻줄에 의해 튕겨졌다.

소선이 점점 가까워졌다.

수적들은 화살을 날리면 날릴수록 두려움을 느끼게 됐다.

‘계속 이렇게 가면…….’

‘곡사(曲射)가 아니라 직사(直射)로 쏴야 할 판인데…….’

‘저놈이 배에 뛰어오르면……?’

선상 전투는 뭍에서의 것과 다르다.

한정된 좁은 공간에서 싸워야 하기에 많은 인원으로 차륜전을 펼칠 수도 없으며 거리를 두고 포위할 수도 없다.

다수의 하수보다 소수의 고수에게 유리하다는 의미.

상대가 선상 싸움에 익숙하지 않다면 희망이 있겠으나, 정신없이 흔들리는 소선 위에서 자유자재로 닻줄을 휘돌리는 정광과는 상관없는 얘기 아닌가.

‘결국엔 수로 밀어붙일 수 있겠지만…….’

‘내가 있는 배로 먼저 뛰어오르면……?’

공포심이 순식간에 번졌다.

그들이 느낀 걸 화진양과 우경이 모를 리 있나.

즉시 지시를 내렸다.

“뒤로! 거리를 벌려라!”

둥! 둥! 둥둥둥!

진풍경이 벌어졌다.

달랑 한 척의 소선을 피해 이십 척이 넘는 대선이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쏴! 계속 쏴라!”

“시간을 끌어 놈을 지치게 해!”

쏘면서 물러나고, 퉁겨내며 쫓아가는 추격전이 계속됐다.

수적들은 팔이 떨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낄 만큼 계속 활시위를 잡아당겼다가 놓았고, 정광은 놀라운 속도로 닻줄을 휘돌렸으며, 네 향주는 온몸이 부서져라 노를 저었다.

수적들은 기가 질렸다.

‘저 악귀는 지치지도 않나?’

정광은 귀찮았다.

‘배도 빠르고 화살도 많네. 생각보다 오래 걸리겠는걸.’

네 향주는 고통스러웠다.

‘크윽! 차,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쏟아지는 화살의 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슬슬 떨어져 가나?’

정광의 생각대로였다.

화살이 떨어진 수적들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우경은 상황을 파악하고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런 식으로 화살을 소비하게 하다니! 저놈이 제갈량의 화신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오래전 적벽대전(赤壁大戰) 당시, 주유가 화살 십만 개를 열흘 내에 만들어달라 하자 제갈량은 사흘 안에 만들겠다고 약조했다.

그리고 안개 낀 새벽, 짚단을 가득 쌓은 배를 타고 조조군에게 다가가 십만 개의 화살을 맞고 돌아왔다.

오늘 정광이 보인 신위와 귀계는 제갈량의 활약에 비해 부족함이 없을 터.

‘이대로 가면 안 돼! 수하들의 사기가 떨어져 칼도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게 된다!’

연화채를 배신한 네 향주의 배도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두 척씩 양측으로 갈라져 오고 있었는데 반원진의 양 끝을 치려는 게 분명했다.

‘요즘 무명을 드날리는 무혈단원들이 배에 뛰어오르겠지. 놈들뿐이라면 문제가 없지만…….’

연화를 향해 똑바로 다가오고 있는 정광이 문제였다.

‘결국 저놈을 잡아야 해.’

우경은 머리를 쥐어짜 최선의 계책을 꺼냈다.

“채주. 귀찮은 진옥룡을 편하게 대하시려면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연화를 더 뒤로 물리고 양측의 배를 앞에 세우시지요.”

화진양의 체면을 생각해 에둘러 말했으나, 결국엔 네 실력으론 안 되니 수하들을 방패로 세워 힘을 뺀 뒤 치자는 의미였다.

화진양은 살심과 경악이 뒤섞인 눈으로 정광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한 상황이었다.

체면 따위보다 확실한 승리가 중요했다.

“그렇게 하게.”

“명을 받들겠습니다!”

우경이 힘차게 말한 뒤 수하들에게 지시하려고 하는데.

쐐애애애액-

정광이 휘돌리고 있던 닻줄이 원을 점점 크게 그리더니, 완전히 펼쳐져 날아와 연화의 돛대를 감아버렸다.

“헉!”

“뭐, 뭐야!”

수적들이 놀라 비명을 지르는 사이, 정광은 팽팽히 당겨진 닻줄 끝을 일향주의 손에 쥐여 줬다.

“화살이 거의 떨어졌으니 안전할 거예요.”

“……네?”

“이거, 계속 당겨 주시겠어요.”

“……네?”

“줄이 느슨해지면 뛰기 불편하거든요.”

“……대,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당황한 일향주가 얼결에 닻줄을 당기며 묻자.

정광이 닻줄 위에 뛰어오르며 말했다.

“말 그대로죠. 다녀올게요.”

“……!”

정말 말 그대로였다.

소선에서 연화까지 이어진, 엄청나게 긴 닻줄을 타고 정광이 달리기 시작했다.

모두 ‘어? 어?’하며 멍하니 바라보는데, 화진양과 우경이 동시에 외쳤다.

“뭣들 하느냐? 쏴라!”

“줄을 끊어야지! 서둘러!”

개중 눈치 빠른 수적들이 화살을 날리고 닻줄을 잘랐으나.

눈부신 속도로 달리던 정광은 닻줄을 박차고 허공으로 뛰어올라 신형을 뒤집고 있었다.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 용행구천(龍行九天)!

마치 용이 꿈틀거리듯 아홉 번이나 몸을 뒤집어 화살을 피한 정광이 연화의 갑판에 우아하게 내려섰다.

“안녕하세요. 인사드리기 힘드네요.”

정광이 두 손을 모았다가 매만지며 화진양을 바라봤다.

“채주님 맞으시죠? 잠깐 얘기 좀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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