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연화채(蓮花寨)
장강(長江)은 그 길이만 해도 일만오천리(一萬五千里)가 훌쩍 넘는, 중원을 관통하는 거대한 강이다.
장강에서 갈라져 나온 지류(支流)들이 남북으로 잘게 뻗어 있었기에 수운(水運)이 발달했고, 인접한 토지는 비옥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만큼 수해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으니.
역대 모든 황조가 치수(治水)에 힘썼으나 대자연의 이치를 거스를 수는 없는 법.
비가 많이 내리면 순식간에 강이 불어나 비옥한 논밭을 휩쓸었고 그때마다 수많은 수재민이 발생했다.
지금 정광의 앞에 있는 이들이 그런 이들이었다.
“근데. 뭐 좀 여쭤봐도 될까요?”
정광의 별것 아닌 듯한 말에 촌락 사람들은 황송하다는 듯 허리를 숙였다.
“여, 여쭈시다니요.”
“무엇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자신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의복과 식량까지 내려준 소신선에게 무엇을 못 할까?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싶어 경쟁이 붙었다.
사람들은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정광의 입술만 바라봤다.
정광은 그들의 반응에 만족하며 입술을 움직였다.
“장강수로십팔채(長江水路十八寨) 중 연화채(蓮花寨) 분들이 가끔 들르신다던데. 언제쯤 오세요?”
“……!”
어떤 질문이든지 간에 당장 대답할 기세였던 사람들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말씀하시기 곤란하신가 보네요.”
다들 눈치를 보는 가운데 늙수레한 촌장이 나섰다.
“소, 소신선님. 송구하오나 소인이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송구라니요.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촌장은 몇 번을 망설이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말씀드렸다간 저흰 모두 죽은 목숨입니다. 제발 이 천한 것들의 사정을 헤아려 주십시오.”
지켜보던 천룡단과 무혈단의 표정이 변했다.
정광이 왜 수적들의 행방을 묻는진 몰랐으나 수재민들이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자 분노가 솟았다.
‘연화채라 했겠다? 평소 이들을 어떻게 대했기에 이리도 두려워한단 말인가.’
‘우리가 무림맹에서 나온 걸 알면서도 함구하려 하다니. 대체 얼마나 잔인한 놈들이길래?’
다행히 천룡단과 무혈단에는 수재민들의 사정을 상관 않고 자신의 자존심을 세울 만큼 못난 이는 없었다.
그저 묵묵히 바라볼 뿐.
정광도 그랬다.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소문보다 심한 놈들인가 보네.’
유정풍에게 장강수로십팔채 중 제일 악랄한 놈들로 골라달라 했더니 제대로 해낸 듯싶었다.
정광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빙그레 웃었다.
“어르신.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네?”
“아무런 일도 없었던 거예요. 어디 보자…….”
정광은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의복과 식량은 어느 정도 된 것 같은데 집이 문제네.”
“……?”
“조금이나마 손봐 드릴게요.”
“……대,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정광은 토사(土沙)에 삼분지 일쯤 묻혀 갸우뚱하게 서 있는 집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운룡을 뽑아 휘둘렀다.
고수와 싸울 때처럼 황금색 빛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묘한 느낌을 주는 검붉은 검신이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움직였다.
“헉!”
“이, 이런 기사가 있나!”
수재민들은 입을 떡 벌리며 경악성을 토했다.
검붉은 검이 집을 덮친 토사를 저 멀리 날려 버리고 있었다.
“흐음. 이쯤이면 됐나.”
정광은 운룡에 묻은 토사를 도복 소매에 문질러 닦아냈다.
물을 잔뜩 먹고 있던 놈인지라 화려한 백색 도복에 더러운 자국이 남았다.
“다음은…….”
운룡을 검집에 넣은 뒤 기울어진 집의 기둥을 두 팔로 안고 어깨에 댔다.
“으쌰.”
끼이익-
어깨를 밀자 기둥이 바로 섰다.
“흡.”
쿠쿵-
두 팔에 힘을 주자 기둥이 땅에 단단히 박혔다.
“어디 보자.”
정광은 몇 걸음 물러나 집 상태를 확인했다.
“괜찮은 것 같긴 한데. 저기요, 이 집 주인분 계세요?”
정광을 멍하니 바라보던 한 중늙은이가 깜짝 놀라 외쳤다.
“네, 네! 소신선님! 소인입니다요!”
“단단히 박느라 집이 조금 낮아졌는데 괜찮으세요? 괜찮으시면 나머지 기둥도 다 박으려고요.”
“……!”
중늙은이와 수재민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아무리 촌무지렁이라 해도 알건 알았다.
무인에게 병기는 목숨과 같다 들었거늘.
그런 소중한 병기로, 딱 봐도 이깟 촌락 수백 개쯤은 사고도 남을 명검으로 더러운 토사를 치워주다니.
세상 그 무엇보다 희고 아름다웠던 도복과 손에 더러운 진흙을 묻히면서 말이다.
“마음에 안 드시나?”
그럴 리가 있나.
중늙은이는 겨우 입을 열었다.
절대 아니라고, 감사하다고 말하려 했으나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건 흐느낌이었다.
“크흑. 흑흑.”
“어? 우세요?”
중늙은이는 펑펑 울기 시작했다.
눈물과 어울리지 않게 그의 얼굴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크흑. 네. 소인은 울고 있습니다.”
“아. 역시 너무 낮나.”
정광이 박아 넣은 기둥을 다시 두 팔로 안자, 중늙은이가 놀란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어이쿠! 소신선님, 아닙니다요! 딱 좋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나머지도 그렇게 갈게요.”
정광은 다른 기둥들도 바로 세운 뒤 땅에 깊숙이 박았다.
토사가 치워지고 바로 선 집은 무척 남루했으나 사람이 살기엔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음. 하나는 됐고.”
정광은 다른 집들도 손봤다.
수재민들은 감격했고 천룡단과 무혈단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도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아차. 이럴 때가 아니지.’
‘진옥룡이 저리 나서는데 나는 무얼 하고 있단 말인가.’
무인은 괜히 무인이 아니다.
더구나 정파무림의 내로라하는 중진과 후기지수들 아닌가.
지저분한 토사가 사라지고 무너져가던 집이 바로 섰다.
수재민들은 놀란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다급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집이다.
무림의 협객들이 이렇게 큰 도움을 주는데 지켜보고만 있을 염치없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삐걱-
“으음. 안쪽도 문제구나.”
아이를 등에 업은 아낙네가 집 안까지 치우려는 허청을 말렸다.
“에구구. 이런 사소한 것은 못 본 척해주십시오. 쇤네가 하면 됩니다.”
“그래도 너무 심하지 않소. 내 조금만 더 하리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진인. 저도 조금이나 돕고 싶으니 물리치지 말아주십시오.”
“하하. 주인께서 말씀하시는데 객이 어찌 거절하겠소?”
서걱- 스윽- 사삭-
“…….”
촌락 꼬마들이 송문검(松紋劍)을 휘두르는 대진을 보며 감탄했다.
“우와! 대체 어떻게 저렇게 하시는 거지?”
“빛만 번쩍번쩍하는데 뎅겅뎅겅 잘리잖아!”
“빨간 눈 도사님 멋져요!”
“야! 빨간 눈 도사님이라니! 무당혈선이시라고!”
“아! 맞다! 무당혈선! 까먹지 말아야지. 헤헤.”
“…….”
물론 모든 일이 잘되는 건 아니었다.
스윽. 스윽.
“아 진짜. 천하를 경영할 이 몸이 왜 이런 짓을 해야 하는 건데.”
순박하게 생긴 청년이 손에 묻은 흙을 노려보며 투덜대는 위진홍을 말렸다.
“고, 고생하셨습니다. 제가 할 테니 그만…….”
“내가 그렇게 약해 보이느냐? 놔라. 이깟 일, 금방 해치워주지.”
더 심한 경우도 있었다.
우지직!
“……어?”
“…….”
“철월은 잘못 없다! 집이 문제다!”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기둥을 부러뜨려놓고 발뺌하는 철월을 위로했다.
“어차피 쓰러질 집이었습니다. 마음 쓰지 마십시오.”
“그, 그런가?”
“물론이지요. 토사를 치워주신 것만 해도 너무 감사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좋아! 철월은 더 일한다!”
“아, 아니. 이제 그만 좀 쉬시는 게 어떠실지…….”
철월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기운차게 일했다.
촌락은 얼마 안 가 예전의 모습을 어느 정도 되찾았다.
정광은 주변을 둘러본 뒤 대충 됐다 싶자 작별을 고했다.
“그만 갈게요. 안녕히 계세요.”
수재민들은 눈시울을 글썽이며 촌락 밖까지 배웅했다.
연신 허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는 모습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들어가세요. 아직도 하실 일이 많은데.”
정광의 말에 아까부터 고민에 빠져 있던 촌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소, 소신선님. 연화채와 원한이 있으신 겁니까?”
“아뇨.”
“……그럼 왜 물으셨는지……?”
“소문이 너무 안 좋아서요. 손 좀 봐주려고 그랬죠.”
“…….”
촌장이 계속 망설이자 정광이 고개를 저었다.
“억지로 말하려고 하지 마세요.”
“……네, 네?”
“저는 어차피 떠날 몸. 어르신을 평생 지켜 드릴 순 없거든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광은 허리를 계속 숙이는 촌장을 말린 뒤 물었다.
“수해를 당한 촌락이 많나요?”
“그렇습니다. 장강을 따라 수없이 이어져 있을 겁니다.”
“근방에 묵을 만한 객잔은 있죠? 되도록 좋은 곳으로요.”
촌장은 굳은 머리를 맹렬히 굴리다가 대답했다.
“마음에 차진 않으시겠지만 동북쪽으로 이십리쯤 가시면 몇 개의 객잔이 모여 있습니다. 수부(水夫)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곳인데, 수해 때문에 배가 많이 없으니 대협들께서 묵으실 수 있을 만큼 비어 있을 겁니다.”
“거기서 묵어야겠네. 고마워요. 안녕히 계세요.”
정광 일행은 수재민들의 환송을 받으며 말달렸다.
이십리는 금방이었다.
허름하지만 더럽진 않은 객잔이 나타났다.
“사부님. 어떠세요?”
정광의 물음에 허청이 웃었다.
“어떻긴. 몸을 누일 수만 있으면 됐지. 오늘은 특히 더 그렇구나. 안 먹어도 배부르겠어.”
허청뿐만 아니라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힘없는 이들을 위해 협행을 한 만족감 때문이었다.
그렇게 미소 짓던 천룡단원들 중 몇 명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가만. 본단의 수장은 허청 도장이거늘.’
‘왜 우리가 진옥룡의 말을 따르고 있지?’
어느샌가 그들은 정광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다고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저 나이면 혈기에 취해 자신의 만족감을 위한 협을 행하기 마련인데.’
‘상대의 사정을 헤아리고 정확히 필요한 만큼만 베푸는구나.’
‘수해를 입은 촌락들이 더 없는지는 왜 물었지? 설마?’
인원이 많기에 여러 개의 객잔에 나눠 묵어야 하는 상황.
이대로 들어가면 궁금한 점을 풀지 못할 터.
산동악가의 한 중년인이 정광을 불렀다.
“이보게, 무혈단주. 하나 물어봐도 되겠는가?”
“네. 악 대협. 말씀하세요.”
“오늘 일은 무척 인상적이었네. 다른 촌락들도 돕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내 생각이 맞나?”
정광은 바로 대답했다.
“물론이죠.”
“허어. 대단하군. 대단해.”
정광을 바라보는 천룡단원들의 눈에 감탄과 호감이 떠올랐다.
잠시 후, 그들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했다.
“단주. 정말 훌륭한 제자를 두셨소이다.”
“이렇게 부러울 수가 있나. 세상 복은 혼자 다 가지셨소.”
허청의 허리가 태산처럼 우뚝 서고 양어깨는 바다보다 넓게 펼쳐졌다.
“허허. 불민한 제자를 좋게 봐주셔서 고맙소이다.”
“불민하다니요? 항상 고금제일(古今第一) 제자라고 자랑하시면서.”
“그, 그거야 그냥…….”
“와하하하!”
더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으나.
초조해하는 이도 있었다.
남궁세가의 무인이었다.
“단주. 본가에 당장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진 않으나 이대로 가다간 너무 늦어질 것 같소. 천추의 한이 될까 두렵소이다.”
“으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대소를 터뜨리던 천룡단원들이 굳은 얼굴로 동의했다.
“남궁 형의 말이 옳소.”
“이곳 사람들의 사정도 딱하나 우리가 달려온 목적은 따로 있지 않소이까.”
허청은 정광을 흘깃 본 뒤 입을 열었다.
“물론이외다. 오늘은 늦었으니 푹 쉬고 날이 밝으면 배를 구하러 갑시다.”
“단주. 내 욕심만 내세워 미안하오.”
“허어. 미안하다니요. 당연한 일 아니오.”
남궁세가 무인이 미안하면서도 고마운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정광도 그랬다.
원래 이러기로 돼 있었기에.
* * *
정광과 무혈단은 한 객잔에 묵게 됐다.
평안객잔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안 좋은 곳이었으나 뛰쳐나가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
정광은 더러워진 옷을 갈아입고 식사를 마친 뒤 단원들에게 말했다.
“내일부터 우리는 따로 움직일 거예요.”
단원들은 바로 알아들었다.
“천룡단은 남궁세가로 가고, 우리는 이곳에 남아 어려운 이들을 돕는다는 말이군요. 저는 좋습니다.”
오랫동안 산에서만 살다가 끔찍한 수해현장을 목격한 혜진이 그녀답지 않게 먼저 말했다.
“헌데 사형. 왜 그러시는 겁니까?”
“응? 무슨 말이야, 사제?”
백승무가 의아함을 숨기지 않고 말을 이었다.
“돈을 너무 많이 쓰셨습니다. 사형께서 어려운 이들에겐 다르게 대하시는 건 아나, 궁금해서 그럽니다.”
“우와. 날 뭐로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정광이 두 팔을 벌리며 동의를 구했으나 다른 단원들도 의아해하긴 마찬가지였다.
“사제. 나도 궁금하구나.”
“대사형마저!”
정우가 빙그레 웃자 정광도 피식 웃었다.
“어려운 분들을 도와서 연화채를 만날 방법을 알아내려 했어요.”
유정풍이 끼어들었다.
“아우. 그들에 대해 알려달라 해서 알아왔네만. 왜 그러는 건가?”
“후개께서는 공과 사를 왔다 갔다 하시네요.”
“지금은 사적인 물음일세. 어서 말해주게나. 궁금해 죽겠어.”
정광은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그들을 이용해 장강수로십팔채랑 담판을 지으려고요.”
담판? 장강수로십팔채와?
무혈단원들은 입을 떡 벌렸다.
부단주인 당오군이 대표로 물었다.
“단주. 설마 총채주(總寨主)인 수왕(水王)을 만나려는 것이오?”
“네. 문제 있나요?”
있다마다.
장강수로십팔채는 단순한 수적 무리가 아니었다.
장강을 움켜쥐고 무림맹과 사마련의 간섭을 불허하는 막강한 조직이었다.
게다가 수왕이라니.
정사(正邪) 중간의 무림인 중 최고수인 오왕(五王)에서도 윗줄에 있다는 자 아닌가.
위진홍조차 안색이 변했다.
“오왕은 강한 걸 떠나서 평소 어디에 머무는지 알려지지도 않은 자들이오. 만나기 정말 힘들단 말이외다. 알고 계시오?”
“아니까 연화채를 이용하려 하죠.”
“단주의 실력이야 인정하지만…… 수왕을 무공만으로 평가해선 안 되오. 건드려선 안 될 자란 말이오. 사마련주도 모르는 척할 정도인데…….”
“저도 몇 번 들었어요.”
“……그런데 왜?”
“앞으로를 위해 그래야 하거든요.”
정광이 확실히 말하지 않을 땐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법.
때가 되면 알려준다.
단원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눈앞의 일에 집중해야 할 터.
당예지가 이마를 좁히며 말했다.
“수재민들을 도와서 정보를 얻으려는 거군요.”
“네.”
“차라리 아까 촌장에게 묻지 그랬어요? 말하려던 것 같았는데. 안전이 걱정되면 다른 곳으로 이주를 시켜줘도…… 아!”
“눈치채셨어요?”
“네. 그러면 또 돈이 드네요.”
“아, 진짜. 그런 거 아니거든요. 어차피 몇 군데 이상 돌면서 도울 생각이었어요. 그래야 수왕이…….”
정광은 해명을 하다 말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엇!”
“어디로 간 거지?”
정광은 아까의 촌락으로 이어지는 길을 눈부신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마주 오던 작은 인영이 비명을 질렀다.
“으악! 귀, 귀신!”
정광은 작은 소년을 안아 들며 고개를 저었다.
“아까는 소신선님이라더니.”
“헉! 소, 소신선님!”
“그래, 무슨 일이지?”
“그, 그게…… 그게…….”
소년은 덜덜 떨 뿐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정광은 진기를 불어넣으며 소년의 몸을 살폈다.
어두운 밤에 이십리나 되는 길을 달려오느라 넘어지고 부딪쳤는지 상처투성이였다.
“이제 괜찮아. 말해도 돼.”
소년이 한결 편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도, 도와주세요. 원래는 오는 날이 아닌데, 연화채가 갑자기 나타나서 행패를 부리고 있어요. 소신선님께서 내려주신 것들을 모두 빼앗고…….”
정광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의도한 바와는 다른 방향이었으나.
연화채로 이어지는 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