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이유 있는 선행
허청은 가슴이 철렁했다.
안팎에서 정광을 때리고 무림맹이 반으로 갈라지게 할 거라니.
밖에서 그럴 이는 사마련주겠지만, 안에서는 대체 누가?
‘설마…….’
짐작 가는 이가 없는 건 아니나 믿기 힘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남궁가주가 그렇게까지 할까?’
창천일검(蒼天一劍) 남궁화인은 무림맹주가 되기 위해 나섰다가 하북팽가주 팽수관에게 밀렸다.
앙심을 품고 칼을 갈고 있는 건 알고 있었으나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정광의 생각은 달랐다.
“남궁가주 그분. 많이 탐욕스럽잖아요.”
“…….”
“속은 어찌나 좁은지. 밴댕이 소갈머리보다…….”
“과하구나. 조금 야망이 있고 편협한 면이 있다고 해두자.”
“조금요?”
“……크흠. 조금 많이.”
허청이 마지못해 인정하자 정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왜 그렇게 모든 걸 좋게만 보려고 하세요.”
“혹시라도 모를 오해를 줄이기 위해서다. 너는 왜 그리 부정적으로 보느냐?”
“부정적이라뇨. 제가 얼마나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데요.”
“허허. 거참.”
허청은 어이없어했으나 정광의 말은 사실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항상 최악을 가정하고 생각하며 움직였던 전생과 달리, 현생은 얼마나 밝게 보고 있는데.
“제 시각이 잘못된 게 아니라 남궁가주 그분, 그럴 만한 분인데.”
“…….”
허청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사마련주야 네게 원한을 가졌을 테니 이해한다만. 남궁가주가 네 명성이 너무 커진 걸 질시해서 때릴 거란 말이냐?”
“네.”
“네 말이 맞다고 가정한다면. 사마련주는 무력으로, 남궁가주는 머리로 그러겠구나.”
“그렇죠.”
“으음.”
앞에서 찔러오는 칼은 피하기 쉬우나 뒤에서 때리는 철퇴는 막기 힘든 법.
정광의 말이 현실이 된다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맹주를 포함해 너를 아끼는 이들이 많다. 남궁가주가 역풍을 맞게 될 텐데?”
정광이 세운 공은 대단했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오히려 그게 문제였다.
“절 고깝게 보던 건 남궁가주 혼자가 아니잖아요. 그쪽은 그쪽대로 뭉치겠죠.”
“……끄응. 정말 무림맹이 반으로 갈라질지도 모르겠군. 하필이면 이 중요한 시기에 왜…….”
“지금이 아니면 너무 늦으니까요.”
“무슨 의미냐?”
“산서성과 섬서성에서 사마련을 몰아냈고 사천성도 곧 그렇게 될 거예요. 여세를 몰아 전력을 집중시키면 사마련 총단을 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죠.”
“……그러니 그 전에 막아야 한다? 사마련주야 그러길 원하겠지만 남궁가주는 왜?”
“사부. 너무 좋게 보지 마시라니까요.”
“……?”
정광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허청은 뛰어난 자였으나 음험한 정치판에서 구를만한 자질은 없었다.
“무림맹이 사마련에게서 항복을 받아내면 맹주의 위상이 올라갈 게 뻔하죠. 무혈단원들이 속한 곳들. 예를 들어 본문, 팽가, 당가 같은 문파와 가문들의 영향력은 더 강해질 거고요.”
“……남궁세가 세력은 그 반대로 되겠지. 확실히 그는 그런 상황을 용납할 자가 아니야. 허나 명분이 없지 않느냐? 네 행실을 문제 삼아 무림맹을 두 동강 내면 엄청난 비난을 받을 텐데…… 아!”
경우가 조금 다르지만, 과거 금(金)나라에 대해 주전론을 펼쳤던 송(宋)의 명장 악비와 주화론을 주장했던 진회의 예가 떠올랐다.
정광이 허청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듯 말했다.
“정파무림은 오랫동안 큰 싸움 없이 살아왔죠. 지칠 때도 됐어요.”
“조금만 더 하면 되는데…….”
“이 정도에서 만족하고 그만두고 싶은 사람들이 더 많을걸요.”
허청은 반박할 수 없었다.
역사를 되돌아봐도 주전론의 악비가 아니라 주화론의 진회가 이겼기에.
지금도 마찬가지. 정파무림 여기저기에서 상당한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었다.
‘심정은 이해한다만, 길게 보면 옳은 일이 아니거늘.’
정광의 이어지는 말에 허청의 안색이 더 어두워졌다.
“무림맹에서 휴전을 제의하면 황제의 중재까지 노렸던 사마련주는 얼씨구나 하고 받아들이겠죠. 그 전에 먼저 움직일 가능성이 더 크지만.”
“……어떻게?”
“사마련주가 남궁가주에게 힘을 실어주는 거죠. 당신이 휴전을 요구하면 어느 정도 양보하면서 받아들이겠다고. 그러면 남궁가주는 꽤 많은 이들에게 영웅이 될 걸요.”
“…….”
허청은 복잡한 표정으로 지금까지의 얘기들을 되새겼다.
다소 비약이 있는 것도 같았으나 그럴듯한 내용이었다.
“또 다른 게 있느냐?”
“정보가 너무 적어서요. 떠오르는 건 있는데 말씀드리긴 좀 그렇네요.”
순간, 허청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설마…… 별것 아니라 생각해 나중에 물어보려 했는데…….’
지금이 물어봐야 할 때였다.
“무림맹에서 출발하기 전, 제갈 군사가 묻더구나. 왜 사마련이 무당파와 제갈세가를 쳤는지 궁금하지 않냐고. 사마련의 세력권이 둘러싸고 있는 남궁세가가 더 치기 편했을 텐데라고 말이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의표를 찌른 게 아니냐고 말했지. 제갈 군사가 빙그레 웃으며 너를 만나면 꼭 물어보라더군. 재밌는 얘기를 해줄 거라면서.”
“하하. 그분 진짜 능구렁이 같다니까요. 그쪽 준비는 알아서 하고 계시겠네요.”
정광이 피식 웃자 허청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제갈 군사도 그렇고. 네 얘기도 그렇고. 설마 남궁가주와 사마련주가 벌써?”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그래서 굳이 말씀 안 드린 거고요.”
“으음. 믿어지지 않는구나.”
“최악을 가정하면 그래요. 적의 적은 동지인데, 사마련과 남궁세가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면 잠깐이나마 손을 못 잡을 이유가 어디 있겠어요.”
“…….”
허청은 한동안 고민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지금의 형국은 정광의 말처럼 최악을 가정하고 움직여야 했다.
“여기서 끝내게 되면 똑같은 일이 또 반복되겠지. 앞으로 어찌할 생각이냐?”
“사마련주가 무당과 제갈세가의 일이 어긋났다는 걸 알려면 며칠 걸릴 거예요. 남궁가주도 마찬가지고요.”
“그래. 그사이에 빨리 움직여야겠구나.”
“사부께서 천룡단을 이끌고 늦지 않게 와주셔서 다행이에요.”
정광의 난데없는 말에 허청이 눈을 크게 떴다.
“내가 그렇게 도움이 된단 말이냐?”
“아마도요.”
“허허. 허허허.”
허청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너무 뛰어난 제자인지라 이제껏 도움이라 할 만한 것들을 주지도 못했건만.
빈말일지라도 기분이 좋았다.
‘아니지, 실제로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애쓰면 돼.’
지금껏 나눴던 얘기대로 된다면 정광이 같은 정파에게 화를 내게 될지도 모를 터.
최대한 그런 일이 없도록 사부인 자신이 나서야 했다.
“좋아! 무엇부터 할까?”
허청이 의욕에 가득 차 묻자 정광이 씩 웃었다.
“많이 드시고 푹 주무세요.”
“……무어라?”
정광이 덧붙였다.
“그리고…….”
* * *
천룡단은 맛있는 요리와 명주를 즐기며 푹 쉬었다.
무혈단원들의 무용담은 훌륭한 안줏거리였다.
“하하. 벌써 그런 대단한 일을 하다니.”
“이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있나. 잘했네. 아주 잘했어.”
천룡단은 무혈단에게 그간의 일들을 들으며 감탄하고 칭찬했다.
허청은 정광을 신경 쓰느라 소홀히 한 백승무를 달래느라 바빴고.
어쨌든 더없이 편하고 화기애애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단 하루뿐.
허청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마련이 무당파와 제갈세가를 쳤소. 이게 끝이 아닐지도 모르오. 사마련의 세력권인 강서성(江西省)과 절강성(浙江省)에 인접한 남궁세가가 걱정이외다. 사마련도 전열을 정비해야 할 테니 바로 일을 벌이거나 하진 않겠으나, 가보는 게 좋지 않겠소?”
천룡단에는 남궁세가의 무인도 있었는데 얼굴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단주의 말이 맞소.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외다.”
다른 단원들도 동의했다.
“미리 대비해서 나쁠 건 없지.”
“맹에서 나온 지금, 천룡단의 지휘권은 온전히 단주에게 있소. 뜻대로 하시구려.”
허청은 정중하게 두 손을 모았다.
“고맙소. 피곤할 테지만 그만 출발합시다. 대신 장강에서 배를 타고 움직입시다. 속도도 빠를 것이고 노고도 줄일 수 있을 것이오.”
그 먼 거리를 말달리지 않아도 되다니.
천룡단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무혈단도 마찬가지였다.
“일각 내로 준비하고 모여주시오. 바로 출발하겠소.”
정확히 일각 뒤.
무혈단과 천룡단은 객잔을 나섰다.
천룡단원들은 아쉬움이 담긴 눈빛으로 객잔을 돌아봤다.
‘덕분에 정말 잘 쉬었군.’
‘언젠가 또 들르고 싶을 정도야.’
훌륭한 요리와 시설. 그에 뒤지지 않는 접객까지.
마지막까지 그랬다.
평안객잔의 주인과 점소이들은 대문 좌우에 늘어서서 떠나는 고객들을 배웅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대협들의 무운을 빕니다!”
“평안객잔의 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다음에 또 뵙기를! 학수고대하고 있겠습니다!”
천룡단원들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래. 이게 바로 접객이지.
아니, 감동이라 할까.
특히 주인 되는 이는 어찌나 슬퍼하는지 보는 이의 가슴이 뭉클해질 정도였다.
모두 돈의 위력이었지만 그러면 또 어떤가.
피곤이 절로 사라지는 것 같은데.
천룡단과 무혈단은 정중하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리고 말에 올라 떠났다.
‘허어. 거참.’
천룡단원들은 한 번 더 놀랐다.
평안객잔에서 어찌나 관리를 잘했는지 골골대던 말들이 아주 펄펄 나는 것 아닌가.
‘제대로 싸울 수 있겠어. 이래서 돈을 그렇게 많이 쓴 건가.’
‘속으로 책망했던 게 미안해지는군.’
덕분에 정광에 대한 인식도 바뀌었다.
‘이해가 안 가는 언행을 보이나 알고 보면 다 이유가 있다더니 과연.’
‘편견으로 바라본 것 같구나. 주의해야겠어.’
내심 고개를 끄덕이던 천룡단원들 중 한 무인이 허청에게 물었다.
“단주. 장강으로 곧장 가는 것이오?”
“그렇소. 하지만 주변도 돌아봅시다. 사마련이 비록 패주했다곤 하나, 장강 이북에 잔당이 남아 있을 수도 있잖소. 도움이 필요한 이들도 있을 테고.”
“과연. 맞는 말씀이오.”
“어차피 가는 길이고 시급을 다투지도 않는 상황이니 그럽시다.”
천룡단은 쉽게 납득했다.
누가 들어도 당연한 말 아닌가.
허청은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휴우우. 어찌어찌 되는구나.’
남궁세가를 도우러 가는 게 아니라 남궁화인이 헛짓거리를 못 하게 하려고 가는 길이었다.
게다가 중간에 벌어질 일들을 생각하니 속이 벌써 쓰려 왔다.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잖는가. 정광이 했던 말 중에 틀린 건 하나도 없으니…….’
허청은 옆에서 말달리는 잘난 제자를 흘깃 바라봤다.
정광이 씩 웃으며 시선을 맞췄다.
-사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잘 될 거예요.
-……내가 걱정하는 건 일의 성패가 아니라 네 손속의 무거움이야.
-그런가요? 뭐 조금 덜어내죠.
-오할?
-오푼요.
-…….
그들은 한참을 달려 장강에 인접한 지강(枝江)에 도착했다.
정광이 뭐라 말하자 유정풍이 날 듯이 달려갔다.
일행이 식사를 하는 도중에 돌아온 유정풍이 정광에게 전음을 보냈다.
-알아왔네. 그리 멀진 않아.
-수고하셨어요. 늦기 전에 조금이라도 드시…….
유정풍은 정광이 권하기도 전에 요리를 입에 쓸어 담고 있었다.
“우물우물. 가세. 들고 가면서 먹으면 돼.”
“……훌륭하십니다.”
유정풍이 길잡이로 나선 일행은 얼마 안 가 장강과 맞닿아 있는 한 촌락에 도착했다.
그들은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이리 행색이 안 좋지?’
‘아! 수해가 휩쓸고 지나갔구나!’
촌락 사람들은 경계 어린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을 탄 무인들이 이렇게 많이 몰려왔으니 그럴 수밖에.
정광은 호기심과 두려움을 동시에 표하는 그들에게 외쳤다.
“무량수불! 축원을 받거나 제를 지내고 싶은 분 계신가요?”
“……!”
“소림의 고승도 계시고 무당의 진인도 계신데.”
“오오오!”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다른 곳도 아니고 소림과 무당이라니!
‘어느 분이지?’
‘스님도 도사님도 꽤 많은데.’
정광이 공우를 가리켰다.
“먼저 소림의 기대주이자 구룡사봉 중 고룡이신 공우 스님!”
나이는 좀 젊었으나 고룡이란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와아아!”
“자. 다음은 무당의 중진이시자 천하에 명성을 떨치실 예정인 무당혈선(武當血仙) 대진 도장!”
천하에 명성을 떨칠 예정?
눈은 또 왜 저렇게 빨개?
무당…… 뭐? 혈선?
사람들이 침묵하자 정광은 머리를 긁었다.
‘안 먹히는 건가?’
그때.
구경꾼들 사이에 있는 꼬마들이 보였다.
그들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대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광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맺혔다.
애들에겐 먹히는 것이다!
“자! 자! 저도 도사니까 오세요. 빨리해야 많은 분께서 받으실 수 있잖아요. 아. 여기 계신 제 사부님은 곤륜파 허 자 배의 대사형이십니다. 대단하죠?”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그들의 눈은 허청이 아니라 정광에게 향해 있었다.
한 아낙네가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서 물었다.
“고, 곤륜산 허청 도장의 제자시면…… 호, 혹시 진옥룡 되십니까?”
“네. 그런데요?”
“헉!”
무인이든 아니든, 천하에 정광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하도 잘생겨서 설마설마했거늘.
진짜라니!
사람들이 폭발적인 환호성을 지르며 몰려들었다.
“모두 질서를 지켜주십시오! 그러면 더 많은 분이 혜택을 보실 수 있습니다!”
“연세가 드시고 몸이 불편하신 분들부터 모시겠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자오와 백승무를 비롯한 무혈단원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사람들을 안내했다.
천룡단에도 승려와 도사인 자들이 적지 않았는데 무척 바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녹록하지 않은 일이었으나 마음은 뿌듯했기에 사람들의 안색은 모두 밝았다.
“네? 수해를 입어서 피죽도 드시기 힘들다고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도와드릴게요.”
정광은 돈을 풀었다.
정확히는 백승무가 상인들에게서 의복과 식량을 사들였는데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그것을 모두 수재민들에게 나눠줬다.
죽은 눈으로 망연히 있던 그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정광을 칭송했다.
정광은 겸손한 얼굴로 그들을 다독이다가 지나가듯 말했다.
“근데. 뭐 좀 여쭤봐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