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늦었어요, 사부.
허청은 마음이 무척 무거웠다.
말달리던 도중에 만난 이들이 모두 한목소리로 증언하는 것 아닌가.
‘무당의 신선님들이 다급히 달리시더이다.’
‘흉악한 자들이 그분들을 쫓고 있었습니다요. 수도 많고 얼마나 살벌한지, 어이구.’
그들은 모두 간청했다.
무당을 도와달라고, 제발 부탁드린다고.
호북성의 민초들은 무당을 지극히 공경한다더니 과연.
허청은 최선을 다하겠다 답하며 계속 말달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다른 사실도 알게 됐다.
‘청년들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말달리더군요.’
‘어찌나 빠른지 원. 행색을 보면 잘사는 댁 자제들 같던데…….’
허청은 확신했다.
무혈단이구나.
그들이 무당을 구원하기 위해 애쓰고 있어.
한참을 달리다 보니 또 다른 증언이 나왔다.
‘아. 그리고 한 절세미남을 봤는데…… 아니, 소신선이라 해야 할까요? 말을 몇 마리나 끌면서 질풍처럼 달리시는 모습이 마치 천신과 같았습니다.’
‘…….’
허청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런 이가 또 있겠는가?
그의 자랑스러운 제자지.
정광에 대한 걱정은 크게 들지 않았다.
원래는 그래야 했는데…….
‘진천뢰는 왜 가져간 거야!’
그런 흉악하기 그지없는 물건이 더없이 흉악한…… 아니, 자랑스러운 제자의 손에 들어갔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조차 못 하는 상황.
‘빨리 만나야 해.’
허청은 쉼 없이 말을 재촉하며 달렸다.
덕분에 그를 따르던 이들도 그래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말도 사람도 지쳐갈 수밖에.
계속 예비마를 갈아탔으나 사람들의 안색은 나빠졌다.
아무리 고수라 해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허청은 천룡단(天龍團)의 단주로서 단원들의 사기를 북돋워야 했다.
“조금만 더 힘을 냅시다! 무당은 우리보다 더 힘들 것이오! 무혈단은 또 어떻소? 우리가 질 수는 없는 일 아니오!”
똑같은 말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들리는 법.
듣는 이가 많이 지치고 괴로운 상태라면 더욱 그렇다.
허청이 그간 쌓은 인망이 적지 않았는지 단원들은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호기롭게 외쳤다.
“단주! 무슨 그런 당연한 말을 하시오?”
“어서 가서 악적들을 물리칩시다!”
“좋소!”
다행히 흔적은 뚜렷이 남아 있었고 목격자도 많았다.
천룡단은 달리고 또 달렸다.
이리로 갔다, 저리로 갔다, 장강 주변을 빙빙 돌며 개고생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정광 일행과 사마련이 격돌했던 장소에 이르렀다.
‘이럴 수가!’
천룡단은 경악했다.
화약이 폭발한 흔적이 남아 있는 것 아닌가!
커다란 봉분도 있었다.
정광이 투항한 이들을 시켜 사마련 무인들의 시신을 묻은 것이었으나 천룡단이 그 사실을 알 수는 없는 노릇.
천룡단원들은 떨리는 눈으로 봉분을 쓰다듬었다.
이 속에 그들의 사질이, 질자가 묻혀 있을지도 몰랐기에.
당장 땅을 파서 확인해 보고 싶었으나 망자에 대한 예우가 아닐 터.
마음속으로 피의 복수를 다짐하는데…….
한 개방 고수가 황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 후개(後丐)가 본방의 암어를 남겼소!”
개방뿐만이 아니었다.
제대로 살피자 당가, 언가, 팽가 등 많은 곳의 암어들이 봉분에 새겨져 있었다.
게다가.
곤륜의 것도 있었다.
심력을 쏟아서 노려봐야 겨우 알아볼 수 있는 악필로!
[급(急)! 당양(當陽)!]
허청의 눈에서 불길이 일었다.
천하에 이런 필체를 가진 이는 오직 하나, 그의 애제자인 정광!
어찌 된 연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무척 급한 상황인 게 분명했다.
허청은 신법을 펼쳐 말 위에 뛰어오르며 외쳤다.
“어서 당양으로 갑시다!”
지금까지 달려온 것보다 더 빠른 질주가 시작됐다.
무림맹의 정예 무력단인 천룡단이라고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오래 말달린 후유증으로 사타구니는 물론이요, 허벅지까지 아려왔지만 억지로 참으며 달렸다.
멸문 위기에 처한 무당을 위해서.
의협심 하나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을 무혈단을 위해서.
시간이 흘러 당양에 도착했을 때, 천룡단의 행색은 말이 아니었다.
그나마 병기를 차고 말을 탔기에 망정이지, 그마저 없었다면 어딜 남의 구역에 기어들어 와서 구걸하냐고 당양 거지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했을 정도.
“혹시 도사들을 보셨소이까? 일단의 청년들은?”
허청이 묻자 사람들은 벌벌 떨었다.
‘행색도 무서운 데다 기세도 심상치 않구나.’
‘어떤 도사를 말하는 거야?’
‘몰려다니는 청년들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허청은 영민한 사람이었기에 바로 방법을 바꿨다.
“무량수불. 마음이 급해서 실례했습니다. 혹 천하제일미남을 보신 적은 없는지요?”
옳은 판단이었다.
사람들은 한목소리로 ‘평안객잔’이라는 이름을 외쳤다.
“감사합니다! 원시천존께서 함께하시길!”
천룡단은 열심히 달려 평안객잔에 도착했다.
‘이곳인가!’
맞았다.
그들을 발견한 점소이들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달려 나왔다.
“혹시 무림맹 천룡단의 대협들이십니까?”
“……그렇소만.”
“어서 오십시오!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말에겐 질 좋은 건초와 물을 배불리 먹이겠습니다! 당양 최고의 마방(馬房)에서 전문가도 청해 보살피게 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안으로 드시지요!”
“…….”
천룡단은 얼결에 평안객잔으로 들어갔다.
‘……화려한 객잔이군.’
‘……이렇게 큰 데 묵는 이가 없나?’
내부를 둘러보며 의아해하는데 살이 투실투실한 중년인이 구르듯 튀어나와 인사했다.
“귀인들을 뵙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그는 단원들을 후원으로 안내했다.
아름다운 꽃과 나무들을 배경으로 한 떼의 선남선녀가 치열한 격론을 펼치고 있었다.
“역시 무당혈혼(武當血魂)이 맞지 않소!”
“아니지! 무당참수(武當斬讐)가 나아!”
“며칠을 생각해 봐도 무당고독검(武當孤獨劍)이 나은 것 같습니다만.”
“당 소저. 다섯 글자는 반칙이외다. 무당혈협(武當血俠)으로 갑시다.”
“푸훗.”
“……팽 소협. 지금 웃었소? 어째 비웃음으로 들리는데?”
“제발 그만들 좀 하시오. 다들 너무 흥분했소이다. 싸우려고 모인 게 아니잖소. 진정하고 들어보시오. 천상천하유아독존천지진동무당(天上天下唯我獨尊天地震動武當)…….”
“그게 제일 아니라고 몇 번을 말씀드립니까!”
“철월은 배고프다! 그만하고 밥 먹자!”
대체 뭐 하는 짓인지.
허청과 천룡단원들은 정파무림이 자랑하는 후기지수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우리는 뭐 하러 죽을 둥 살 둥 달려온 거야?’
그때.
정파무림을 넘어 천하를 진동시키고 있는 한 청년이 일어서며 손을 흔들었다.
바로 정광이었다.
“사부! 오셨어요?”
“……네 이 녀석!”
허청이 날 듯이 달려가 정광의 앞에 섰다.
한동안 정광을 훑던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상한 곳은 없어 보이는구나.”
“당연하죠. 뭐 하러 그런 걱정을 하세요.”
“사부의 마음이란 그런 거다. 헌데…….”
허청은 도인이자 대협의 풍모를 가진 자.
낯선 이들이 보였지만 일단 넘어갔다.
무슨 장난질이냐고 호통을 치지도 않았다.
슬픈 눈빛으로 무당의 안위부터 물었다.
“무당분들이 안 보이시는구나. 설마……?”
“아. 잠시만요.”
정광이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한 별채를 향해 외쳤다.
“저기요! 도장님!”
삐걱-
문이 열리며 눈에서 혈광을 뿌리는 대진이 나왔다.
정광은 그를 가리키며 허청에게 소개했다.
“무당혈선(武當血仙) 대진 도장이세요. 다른 분들은 무당산으로 떠나셨고요.”
“……무당…… 뭐?”
“혈선요, 무당혈선. 근사하죠?”
허청과 천룡단원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대진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왔다.
분명 무당소선(武當小仙)이었는데?
다들 황당한 눈빛으로 대진을 바라보자…….
대진의 안색이 눈에 어린 혈광보다 더 붉어졌다.
* * *
천룡단원들은 기뻐했다.
헛고생을 한 건 화났으나 후배인 무혈단이 무사하고 무당 도사들도 많이 살았다 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정광이 푹 쉬는 김에 겸사겸사 그들을 위해 준비한 평안객잔은 무척이나 훌륭한 곳이었다.
주인과 점소이들이 천룡단원들에게 달라붙어 각자의 방으로 안내했다.
“대협. 목욕부터 하시겠습니까, 식사를 즐기시겠습니까? 아니면…….”
“……꿀꺽. 아니면?”
점소이가 나직이 속삭였다.
“술상을 넣어드릴까요?”
“……아아…….”
“네?”
“……흠. 흠. 아닐세. 씻으면서 술도 한잔하고 싶구먼.”
“따뜻한 목욕물과 깔끔한 안주, 혀에 감기는 명주를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불편한 점이 있으시면 언제라도 불러주십시오. 성심성의껏 모시겠습니다.”
“……고, 고맙네. 수고하게나.”
평안객잔의 접객은 극진했다.
모두 백승무가 주기적으로 뿌려온 은자의 위력이었다.
고객이 늘어나면 매출과 수고료도 늘어나는 법.
재신의 수가 불었는데 어찌 최선을 다하지 않겠는가.
천룡단원들은 궁금한 점도 많고 따질 것도 많았으나, 긴장이 풀리자 극도의 피로감을 느꼈다.
‘이제야 쉴 수 있겠군.’
‘잠깐. 아직 단주의 명이 없었는데.’
‘이런. 내가 너무 성급했구나.’
허청이 그간 가꿔온 천룡단은 여타의 정파 조직과 다르게 단주의 명을 우선시했다.
허청이 대단한 능력을 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행히 그들의 마음을 아는 허청은 반나절의 휴식을 명했다.
“너무 지쳤소이다. 이 상태론 아무것도 할 수 없겠구려. 만일을 위해 푹 쉬고 저녁이나 함께 듭시다.”
“허물을 덮어주어 고맙소, 단주.”
“감사하오, 이따 봅시다.”
천룡단원들이 기쁜 표정을 지으며 각자의 방으로 사라졌다.
허청은 그들과 달리 정광을 끌고 자신이 배정받은 방으로 갔다.
내부를 둘러본 그는 헛웃음을 흘렸다.
“너무 과하구나.”
“뭘요. 부족하죠.”
“그래. 고맙게 쓰마. 헌데 대체 어찌 된 일이냐?”
정광은 조곤조곤 설명했다.
“무당혈선이 제일 나은데 단원들의 뜻이 중구난방으로 갈리네요. 혈선 좋잖아요. 복수심과 위엄, 높은 무공과 신선 같은 풍모를 단 두 글자로 축약했죠. 다수결로 하려고 했는데 그냥 밀어붙이려고요. 이럴 땐 수장이 결정하고 오롯이 책임져야죠.”
뜻이 갈릴 땐 수장이 결정하고 오롯이 책임진다라…….
허청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이렇게 대견할 수가 있나.
겨우 이깟 일에 그런 말을 하는 건 좀 아니었지만.
“장하구나. 그런데 그걸 물은 게 아니야. 지금까지의 경과 말이다.”
“아. 그것들은 별것 없는데.”
정광은 그간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말했다.
때론 감탄하며, 때론 분노하며 듣던 허청이 중간에 말을 잘랐다.
“……그러니까, 진천뢰가 너무 위험해서 그냥 버렸다?”
“네.”
“……그런데 마침 그 버린 곳에 불이 나서 우연히 터졌고?”
“그렇죠.”
“……끄응. 이건 일단 넘어가자꾸나. 그래서?”
정광이 말을 이었다.
얼마 안 가 얘기가 끝났다.
허청은 정광의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했다.
“고생했다.”
“그렇죠?”
“아주 잘해줬어. 세 가지만 빼고 말이다. 대체 왜 빨리 오라고 한 것이냐?”
“천천히 오시라고 하는 건 이상하잖아요.”
그렇기야 한데.
그래도 뭔가 좀…….
“사부.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최대한 빨리 모여야죠. 쉬면서 힘도 비축하고요.”
“맞는 말이긴 하군. 그럼 두 번째. 앞으로 진천뢰는 쓰지 말아다오. 너무 위험해.”
“구하지도 못할 텐데요 뭐.”
“그래서 쓸 거냐, 안 쓸 거냐?”
“쓸 일이 생기면 조심히 다룰게요.”
“허허…….”
허청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도 그의 말이니까 이 정도 대답이라도 이끌어 냈지, 다른 이가 그랬으면 귓등으로 흘렸을 걸 알아서였다.
“그것 때문에 다치면 가만있지 않을 거다. 회초리를 들 게야.”
“하나도 안 아플 건데.”
“내 마음이 아프겠지.”
“…….”
정광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잘 이해는 안 가는데 기분이 이상하네요. 어쨌든 안 다칠게요.”
“…….”
허청은 정광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녀석…….’
그의 제자는 보통 사람과 달랐다.
그의 말에 뭔가 이상한 감정을 느낀 것만으로도 한 걸음 나아간 것과 마찬가지였기에 마음이 흐뭇했다.
‘역시 강호에 보내길 잘했어. 그래, 더 많이 보고 겪고 느껴라. 사부는 너를 믿는다.’
그 흐뭇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마지막 세 번째는요? 저도 자고 싶은데.”
“……철월과 사뇌 말이다. 교화할 자신이 있어서 받아들였겠지만 자오 때처럼 걸고넘어질 이들이 많을 게야.”
정광의 명성은 과할 정도로 높았다.
그만큼 시기하는 이들도 많을 수밖에.
“당가주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었는데.”
“많은 이들이 너를 걱정한단다. 언행을 조금만 더 신중히 해줬으면 좋겠구나. 사부는 네가 무림을 미워하길 원하지 않아.”
정광이 해를 당할까 봐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정광이 그들에게 화를 낼 것 같아 두려웠다.
지금껏 한 번도 화낸 적이 없는 제자가 분노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사부의 말을 이해했느냐?”
“네.”
“그래. 네가 잘해줄 거라 믿으마.”
허청이 안심하는데 정광이 씩 웃었다.
“그런데 늦었어요, 사부.”
“……무슨 말이냐?”
정광은 얼굴도 본 적 없는 사마련주를 떠올렸다.
무림맹의 몇몇 인물들과 함께.
“튀어나온 날카로운 못을 때리고 나무가 쪼개지게 할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게 무슨 의미냐?”
정광의 눈이 시리게 빛났다.
“안팎에서 저를 때리고 무림맹이 반으로 갈라지게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