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무당만 괜찮다면요
정광의 활약 덕분에 사마련은 대패했다.
수많은 주검이 쌓였고 도주한 이들도 꽤 있었다.
투항한 자들의 수도 많았는데…….
정광은 의외의 결정을 내렸다.
“이대로 놓아드리죠.”
“……!”
무혈단원들은 깜짝 놀랐다.
투항한 이들을 죽이는 건 도의적으로 봤을 때 꺼림칙한 일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아무 대가나 처분도 없이 풀어주는 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보나 마나 다시 적이 되어 나타날 텐데.’
‘그것도 그렇지만, 큰 화를 당한 무당이 받아들일까?’
무혈단원들은 무당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봤다.
‘도의고 뭐고 당장 목을 치고 싶겠지.’
‘아량을 베푼다면 단전을 파괴한 뒤 사지의 근맥을 자르는 정도일 거고.’
전자는 좀 그랬으나 후자는 전혀 문제없었다.
정파의 관점에서 봐도 그랬다.
무림은 그런 곳이었다.
칼날 위에 서서 자신의 생을 걸고 타인의 목을 탐하는 무림인이라면 받아들일 만한 처벌인 것이다.
‘그런데 이대로 놓아주자니.’
‘무당이 어떻게 나올까?’
무혈단원들의 시선이 한곳에 모였다.
무당 장문인 선우는 그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정광만을 바라봤다.
“……전부 말인가?”
“네. 괜찮으시죠?”
“…….”
선우는 내심 탄식했다.
무당을 존중해 주는 듯한 말이었으나 무당은 정광의 제안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러기엔 너무 많은 걸 받았어.’
지금까지의 것들만 따져도 언제 갚을 수 있을지 요원했다.
선우의 대에서는 불가능한 일.
정말 운이 좋으면, 대진이 죽기 전에나 가능하려나.
‘아니. 그 이후로 봐야 해.’
대진이 너무 무거운 짐을 지게 해선 안 됐다.
정광의 말에 따르면 아직도 심마에 반쯤 걸친 상태.
적의 수괴를 죽인 무공도 깨달음을 얻은 것인지, 사도(邪道)에 빠진 건지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정광이 아마 괜찮을 거라며 미심쩍은 보장을 했으나 앞날은 모르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응하자니, 다들 복수심에 불타고 있을 텐데…….’
시선을 슬쩍 돌려 무당 제자들을 훑어봤다.
대부분의 제자들이 입을 꾹 다문 채 눈빛으로 간청하고 있었다.
제발 거절해 달라고.
진옥룡에게 받은 은혜가 태산과 같으나 이것만큼은 안 된다며.
‘대진은?’
그는 아까부터 홀로 떨어진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정광이 말한 ‘멋있음으로 제자를 모은다’라는 화두를 붙잡고 고민 중인 듯했다.
과거의 대진이었다면 웃으며 넘길 말이었으나, 간절함이 너무 크기에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리라.
실제로 타당한 면도 있었고.
‘……그래. 진옥룡이 이러는 건 본문의 명예를 위함일 터. 아니, 옳지 않은 결정이라 해도 따라야 해.’
반대하면 그러자 할지도 모른다.
허나 그것은 또 빚이 될 터.
마음을 굳힌 선우는 무당 제자들을 둘러보며 무겁게 말했다.
“내 너희들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
“…….”
“허나 진옥룡의 말이 옳아. 무릎을 꿇은 자들에게 화풀이를 해서 뭐 하겠느냐? 분노를 삼켰다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게 토해라. 그것이 정파인이자 도인인 우리에게 맞는 길이다.”
무당 제자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승복하는 이도, 아닌 이도 있는가 하면 혼란스러워하는 자도 많았다.
그래도 정파 명문 무당의 제자들답게 장문인에게 따지는 이는 없었는데…….
정광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이건 좋은 게 아니었다.
‘이렇게 끝내면 시간이 지날수록 곪잖아. 터뜨릴 건 터뜨리거나 완전히 승복시켜야지.’
정광은 한마디 하려다 말았다.
이런 귀찮은 일 좀 처리하라고 극진히 모신 군사가 있지 않은가.
나서라고 눈짓으로 종용했다.
위진홍은 인상을 쓰며 버텼으나, 정광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양손을 매만지자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잽싸게 떠들었다.
“무당산에 처박혀 마음을 비우다 보니 머리까지 비었나. 장문인 빼고 다들 왜 이렇게 멍청해?”
“……!”
무혈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미친놈.’
‘무당이니까 망정이지. 팽가나 당가였으면…….’
다 떠들기도 전에 이빨이 몽땅 털렸거나 시퍼렇게 중독됐을 터.
무당 제자들은 대체 얼마나 수양을 쌓은 걸까?
주먹을 움켜쥐거나 검자루에 손을 댄 채 용케 참고 있었다.
그렇다고 말까지 참은 건 아니었는데 한 중년 도사가 굳은 얼굴로 나무랐다.
“그런 무례한 말을! 그대의 능력은 잘 봤다만, 누구기에 감히 본문을 능멸하는가!”
위진홍은 가슴을 펴고 턱을 치켜들었다.
“흥. 내가 바로 천하를 떨어 울리는 진천뇌…….”
“무뇌다! 우리 군사는 무뇌다!”
“철월! 닥쳐라!”
“할 말이 없으면 닥치라 한다! 우리 군사는 비겁한 무뇌다!”
“……이게 진짜!”
위진홍은 극도로 분노했다.
정광에게 들어도 화날 판에, 바보 천치에게 이따위 말을 듣다니!
철월을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할 귀계를 수십 개가 넘게 떠올리는데.
정광의 시선이 느껴졌다.
무척 한심하다는 눈빛이었다.
“됐어요, 군사. 내가 말할게요.”
“아, 아니오. 내가…….”
“저리 가서 철월과 노세요. 둘이 아주 딱 맞네.”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무혈단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정광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아까의 중년 도사에게 조곤조곤 말했다.
“저분들을 모두 죽이고 싶으세요?”
“솔직히 그렇네. 허나…… 그래선 안 되겠지.”
“그럼 불구로 만들고 놔주시려고요?”
“…….”
중년 도사가 무언으로 긍정하자 정광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무당을 재건하기 힘들어지는데.”
“……그, 그건 또 무슨……?”
“사람을 모아야 할 판에 악명(惡名)을 키우시면 안 되죠.”
“……악명이라니? 정당한 복수 아닌가? 무인이라면 다들 이해할 걸세.”
정광은 손가락을 하나 세워 흔들었다.
“무인이라면 그렇겠죠. 하지만 아직 무인이 아닌 어린아이들이라면요?”
“……?”
“고수가 되어 협객으로 이름을 날리길 꿈꾸는 아이들.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세요. 복수야 당연히 해야 하는 거죠. 온갖 고통과 역경을 딛고 마침내 복수에 성공하는 무인. 아이들이 꿈꾸는 협객의 모습일 거예요. 하지만…….”
“……아!”
“눈치채셨나 보네. 그 아이들이 생각하는 복수란 건 상대에게 깨끗한 죽음을 내리는 거지,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폐인으로 만드는 건 아닐걸요. 혹시라도 그런 걸 상상할 만한 나쁜 아이는 사파에나 가야죠, 어딜 정파 명문 무당에 발을 들이겠어요.”
“…….”
“무당에 걸맞는 아이들을 받으시려면 참는 모습도 보여주셔야 할 거예요. 아까 장문인께서 멋진 말씀도 해주셨잖아요.”
“……분노를 삼켰다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게 토해라, 이 말씀을 이르는 것이군.”
“네.”
“…….”
중년 도사는 잠시 침묵하다가 부끄러운 얼굴로 포권했다.
“진옥룡, 내 모자람을 용서해 주게나. 덕분에 크게 깨달았네.”
포권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무당 제자 전원이 정광에게 사과와 감사를 전했다.
정광은 씩 웃으며 예를 표한 뒤 선우에게 물었다.
“장문인, 이제 다 보내줘도 되죠?”
“무량수불. 고맙네. 뜻대로 하게나. 헌데…….”
“말씀하세요.”
선우는 바로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사마련 무인들을 눈짓하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저들이 다 들었는데…… 소문이 나면 어떡할지, 도인으로서 무척 부끄럽구먼.”
죽이고 싶다느니 폐인을 만들겠다느니 하다가 놓아주게 됐다.
정파 명문으로서 무척 체면이 깎이는 일이었다.
“아. 뭐 그런 걸 가지고.”
정광은 사마련 무인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친 자들은 머리를 땅에 찍으며 구슬프게 애원했다.
“제발 살인멸구(殺人滅口)만은!”
“살려주십시오! 제발 살려주십시오!”
정광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이분들이 진짜. 사람을 뭐로 보고 이러세요?”
그들은 제대로 보고 있었다.
특히 새 머리 같은 두상을 한 노인은 아주 필사적이었다.
“집에 노모와 병든 아내가 있네! 노부가 이대로 죽어버리면 그들도 모두 죽게 될 터. 제발 사정을 봐주게나!”
“저런. 부인 되시는 분 존함이 어떻게 되세요?”
“……어? 어…… 음. 추, 춘영이?”
“혼인도 안 하셨네.”
“하, 할 거네! 할 예정이야!”
정광은 노인의 양 뺨에 새겨진 흉악한 문신을 보며 중얼거렸다.
“다음 생을 노리시는 게 나을 텐데.”
“헉! 호, 혼인 따위 안 해도 되네. 다음 생이란 없지. 현생에 만족하고 있어.”
정광은 흥미로운 얼굴로 노인을 뜯어봤다.
“평소 말이 많으신 편이죠?”
노인은 정광의 옆에 있는 자오를 힐끔 본 뒤 부정했다.
“아닐세. 무척 과묵한 편이지.”
정광이 고개를 돌리자 자오가 즉시 설명했다.
“저자는 흉면활취(凶面滑嘴)라고 불리는 노괴(老怪)입니다. 수괴인 곽정원…… 아, 새우눈 노인의 이름이지요. 그자가 죽었으니 남은 이들 중 우두머리라 할 수 있겠군요. 말이 많고 소문 퍼뜨리기를 좋아하는데 생긴 것과 다르게 꽤 정확한 사실을 떠드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예는 사양할게요. 자오와 비교하면 어때요?”
자오가 정색했다.
“단주. 저는 말을 하는 데 있어 상대가 오해하지 않게 논리적으로 말할 뿐이지 결코 말이 많은 건…….”
“자오보단 못하다는 말이네요. 알겠어요.”
정광은 다시 흉면활취를 바라봤다.
“혀를 가만두지 못하시나 봐요.”
“자, 자를까? 좋아! 자르세!”
“아뇨. 계속 그러세요.”
“당장 깨물기라도…… 응?”
흉면활취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정광은 그 입속에 있는 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거. 마음껏 놀리세요. 단, 있었던 일 그대로.”
“어, 어째서……?”
정광은 무당 도사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무당이 얼마나 인재를 원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사마련과의 싸움에 임할지 천하에 알려야 하거든요.”
“…….”
“장강 위로는 알아서 할 테니까, 아래를 부탁드려요.”
“……꿀꺽. 최, 최선을 다하겠네.”
정광은 흉면활취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댔다.
“더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최대한 멋져 보이게요.”
“그, 그럼! 그렇고말고!”
“침 튀니까 작게 얘기하시죠.”
“흐읍.”
“만약 소문이 다르게 들리면…….”
“……드, 들리면?”
정광은 안면에 발했던 호신강기를 풀고 흉면활취의 손목을 잡았다.
너무나 우아하고 멋진 금나수였기에 흉면활취는 두 눈을 빤히 뜨고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꽤 남으셨네. 돌아가시기 전에 인사드리러 갈게요. 꼭.”
* * *
흉면활취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사마련 무인들을 인솔해 떠났다.
타고 왔던 말도 뺏기고 터덜터덜 걸어가는 모습이라니.
위진홍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작게나마 한 방 먹였군.”
“무슨 뜻이에요?”
한껏 비웃음을 날리려던 위진홍은 질문을 한 상대가 언의진인 걸 보자 안색이 바뀌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오.”
“왜요? 바보한텐 알려주기 싫어요?”
위진홍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언의진의 주먹에 박힌 굳은살을 봤다.
“……설마 그럴 리가. 단주가 일을 이렇게 처리한 건 또 다른 이유가 있소. 투항하면 살려준다는 걸 보여줬으니 저들이 돌아가면 소문이 퍼질 것이오.”
“아아. 그렇겠네요. 그래도 적으로 다시 만날 건데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니지 않나요?”
참고 있던 위진홍이 폭발했다.
“이런 멍청한! 말이 안 통하잖아!”
“멍청해서 미안하네요. 더 미안해지게 좀 알려줘 봐요.”
위진홍이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전신에서 태산과 같은 건방짐이 피어올랐다.
“저들은 단주에게 단단히 당했소. 머릿속에 그밖에…… 나와 그밖에 없을 테지. 그런 이들이 전장에서 단주를 다시 만나면 어찌 될까?”
“음. 대단한 혼란이 일어나겠군요. 도망치고 울부짖고, 아주 난리겠어요.”
“아주 멍청하진 않아 다행이오. 그렇소, 저들은 오히려 적들 속에 있어야 우리에게 유리하오.”
“이해가 가네요. 그런데 사마련주도 그걸 알아채지 않을까요? 저들이 보고할 때 아주 벌벌 떨면서 할 것 같은데.”
위진홍이 눈에 이채를 띠며 언의진을 칭찬했다.
“머리가 장식은 아니었구려.”
“주먹도 그렇답니다.”
“커헉!”
언의진은 위진홍의 머리를 쥐어박은 뒤 정광에게 물었다.
“단주. 이제 어떡할 건가요?”
“사람들을 모아주실래요.”
무당파의 주요 인물들과 무혈단이 모였다.
정광은 그들을 둘러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북쪽으로 올라가죠.”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장강 코앞.
사마련의 세력권과 너무 가까웠다.
“빨리 움직여야겠군. 사제, 어디가 좋겠느냐?”
정우의 물음에 정광이 답했다.
“당양(當陽)요.”
당양은 장강에서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현이었다.
“사마련이 또 올라오면 미리 인지하고 싸우거나 후퇴하기도 쉬운 위치로 가자는 건가요? 역시 단주답군요.”
당예지가 중얼거리며 감탄했다.
위진홍이 한마디 하려고 했으나 유정풍이 입을 막으며 끼어들었다.
“아우의 예상대로라면 무림맹에서 출발한 분들이 곧 도착할 테니 쉬면서 힘을 비축했다가 그분들과 합류하면 되겠어.”
무혈단원들은 대부분 정파무림 최고의 후기지수들.
위진홍만은 못하나 단서가 주어지면 적절한 추론은 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당오군이 단원들을 대표해 말했다.
“단주의 뜻대로 합시다.”
“네. 그런데…….”
정광의 시선이 선우에게 향했다.
“무당은 어떡하실 거예요? 우선 무당산으로 돌아가셔야겠죠?”
선우가 어두운 얼굴로 답했다.
“자네 말대로일세. 무림맹에서 사람을 보냈겠지만 가야 하지 않겠나.”
생존자를 찾고 제자들의 시신도 수습해야 했다.
비급처럼 중요한 것들은 모두 비밀스러운 곳에 넣어놨으나 제대로 있는지 확인도 해야 했고.
선우는 정광과 무혈단원들에게 정중히 예를 표했다.
“무당은 자네들의 도움을 잊지 않을 걸세.”
뒤이어 무당 제자들도 외쳤다.
“정말 감사하오!”
“이 은혜, 꼭 갚으리다!”
정광이 꼭 그래야 한다고 당부한 뒤, 작별 인사를 하는데…….
계속 묵묵히 있던 대진이 선우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장문인, 저는 남겠습니다.”
“……!”
“진옥룡, 날 받아주겠나?”
다들 깜짝 놀랐지만 정광은 아니었다.
“당연히 남으셔야죠. 명성을 높이시고 소문도 퍼뜨리셔야 하는데.”
“잘 부탁하네.”
대진이 음울한 목소리로 부탁하자 정광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최대한 멋있게 보이실 수 있게 해드리죠. 멋진 별호도 만들어 드리고요.”
그리고 덧붙였다.
“뭐, 무당만 괜찮다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