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203화 (202/569)

203화

내가 간다

피하고 자시고 할 시간도 없었다.

곽정원은 진천뢰가 화섭자를 때리는 걸 본 순간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내공을 끌어 올려 온몸을 보호했다.

두 팔의 하박으로 안면을 방어함과 동시에 최대한 웅크렸다.

평생의 자랑인 외문기공(外門氣功), 철갑신공(鐵甲神功)을 믿으며.

하지만.

진천뢰는 보통 물건이 아니었다.

콰아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품고 있던 수많은 철편(鐵片)을 사방으로 쏘아냈다.

바로 앞에 있던 곽정원은 첫 번째 제물이 됐다.

“크아악!”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으면 이런 꼴은 안 겪었으련만.

철편에 찢기고 뚫렸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막대한 힘에 떠밀려 형편없이 날아갔다.

“크윽.”

의식은 있으나 신법을 펼쳐 내려서는 건 꿈도 못 꿀 일.

바닥에 처박힌 뒤 나뒹굴었다.

그래도 사마련주가 무당파 잔당 소탕을 맡길 정도의 고수인 그였기에 이 정도로 그친 것이었다.

‘다, 다른 녀석들은…….’

바닥에 엎어져 있던 곽정원은 간신히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봤다.

‘…….’

목불인견의 참상.

진천뢰의 폭발에 휘말린 이들 중 무사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동료들이 방벽 역할을 해주어 살아남은 이들도 멀쩡하진 않았다.

‘흩어지면 안 돼!’

안타깝게도 곽정원은 수하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많은 이들이 넋 나간 얼굴로 주저앉거나 공포에 짓눌려 사방으로 흩어졌다.

‘저, 적은?’

그에 비해 무혈단과 무당파는 냉정했다.

정광이 요구했던 대로 무리하지 않았다.

도주하는 사마련 무인들만 치며 수를 하나씩 줄여나갔다.

정광은 무리하는 것 같지 않은데도 아주 뭉텅이로 줄여 나가고 있었고.

‘……음?’

망연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곽정원이 시선을 돌렸다.

한 장년 도사가 다른 이들과 달리 곽정원을 향해 일직선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대진이었다.

피잉-

그의 검이 번뜩일 때마다 머리통이 허공으로 솟아오르고 가슴이 갈라졌다.

기합도 고함도 없었다.

붉은 눈으로 상대를 노려보며 묵묵히 찌르고 베었다.

간간이 곽정원을 흘깃거렸는데, 그때마다 눈에 어린 혈광이 짙어졌다.

곽정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감히 나를 노려?’

무당소선(武當小仙)이라 불린다 하나 그래 봐야 애송이 아닌가.

꼴을 보아하니 심마에 빠진 것 같은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도주하느라 급급하던 놈이 나대니 어이가 없었다.

“끄응.”

곽정원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찢어지고 부러진 것처럼 아팠으나 그래야만 했다.

안 그래도 작은 그의 눈이 더 작아졌다.

‘검존의 제자인 저놈을 잡아서 인질로 삼자. 그러면 빠져나갈 수 있어.’

내공을 운기해 상세를 살폈다.

겉도 속도 엉망진창이었으나 몇 합 정도는 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확실히 하려면…….’

곽정원은 시산혈해(屍山血海)를 만들며 다가오는 대진을 향해 외쳤다.

“무당소선이라더니 과연! 검존의 제자라 할 만하구나!”

“…….”

“아니, 검존보다 낫지! 사지가 잘린 뒤 목까지 날아간 늙은이와 비교해서 미안하다!”

“……!”

“너는 네 사부처럼 눈물 콧물을 흘리며 살려달라고 빌지 않을 거지?”

대진의 붉은 눈이 더 붉어졌다.

그의 입에서 차가운 고함이 터져 나왔다.

“죽인다!”

“왜? 치부를 말하니 부끄러운가?”

“헛소리!”

대진이 다가오는 속도도, 검을 휘두르는 속도도 빨라졌다.

그만큼 몸의 상처도 늘어났다.

무리하는 대가였다.

‘겨우 이런 격장지계에 흔들리다니. 역시 애송이야.’

이제 겨우 이립을 넘긴 나이.

노강호인 곽정원에 비하면 경험이 턱없이 부족했다.

‘더 빨리 와라. 어서.’

대진은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얼마 안 가 곽정원 앞에 이르렀다.

그리고 다짜고짜 일격을 날렸다.

쉬이익-

유능제강(柔能制剛), 유중유강(柔中有剛)이라.

부드러움은 능히 강함을 이기고, 부드러움 속에 강함이 있다.

무당은 강(强)이 아니라 유(柔)를 중시하는 문파였다.

허나 대진의 검식에 부드러움은 없었다.

오직 일격필살의 기세만 담겨 있었다.

‘좋아!’

저래서야 무당의 현묘한 검식을 제대로 풀 수는 없는 노릇.

곽정원은 내심 쾌재를 부르며 몸을 움직였다.

‘삼초 안에 끝낸다.’

몸 상태를 고려해 봤을 때 반드시 그래야 했다.

‘일초!’

정수리를 쪼개오는 검을 보법을 밟아 피하며 대진의 옆구리에 일장을 날렸다.

대진은 기민하게 반응했다.

검을 내려치던 기세를 이용해 한 걸음 더 나아가 공격을 피했다. 그대로 반 바퀴 돌며 검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이쯤이야. 이초!’

곽정원은 주저앉듯이 몸을 수그리며 반보 내디뎠다. 진천뢰의 파편이 박힌 부위에서 피가 터져 나왔으나 개의치 않고 일권을 내질렀다.

퍼엉-

주먹이 허공을 터뜨리는 소리를 내며 대진의 가슴으로 쇄도했다.

곽정원의 눈에 곤혹스러운 빛이 맺혔다.

‘이런. 너무 강했나?’

몸 상태가 나빠 힘 조절이 제대로 안 됐다.

‘죽어버리면 곤란한데.’

순간, 대진의 양발이 엇갈리며 신형이 뒤로 움직였다.

곽정원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던 대진의 검이 기이하게 꺾였다.

이제까지의 강(强) 일변도가 아닌 유(柔)에 따른 움직임!

아니, 강함을 이용해 억지로 만들어낸 부드러움 아닌가!

“헉.”

곽정원은 헛바람을 토했다.

흘려냈던 검이 다시 돌아와 그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이놈이!’

허공을 후려친 장을 회수하며 몸을 젖혔다.

검이 간발의 차이로 그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삼초다!’

젖혔던 탄력을 이용해 몸을 바로 세우며 주먹을 내지르려 하는데.

‘……!’

지나갔던 검이 작은 원을 그리며 다시 돌아오는 것 아닌가!

‘태, 태극검(太極劍)?’

현묘한 원을 그려 상대를 제압하는 무당의 절기 태극검.

곽정원은 뒤로 또 한 걸음 물러나다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아니, 그런 게 아니잖아!’

허공을 베었던 대진의 검이 기묘하게 찌그러진 원을 그리며 다시 돌아왔다.

엄청난 살기를 품은 채!

“빌어먹을!”

곽정원은 욕설을 내뱉었다.

아무리 보법을 펼쳐도 떨쳐낼 수 없었다.

기괴한 원들이 계속 따라왔다.

몸에 난 상처에서 핏물이 쏟아졌다.

그만큼 몸도 느려졌다.

그리고 결국.

검이 그려내던 원은 무시무시한 선이 되어 곽정원의 목을 갈랐다.

반쯤 깨진 상태였던 철갑신공으로는 저항조차 할 수 없는 괴이한 일격!

“마…….”

촤아악-

그의 머리가 허공에 뜬 채 말을 맺었다.

“……검.”

마검(魔劍)이었다.

* * *

퉁, 퉁, 투르르르-

머리가 땅에 부딪혀 몇 번 튀어 오르다가 굴렀다.

대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것을 노려봤다.

‘더러운 놈. 감히 사부님을 모욕해?’

검존은 최후의 순간까지 당당했다.

저따위 늙은이에게 희롱당할 분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너무 쉽게 죽였군.’

정광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빨리 죽이면 안 된다고 했지. 살점을 한 점씩 바르고 뼈마디도 잘게 토막 내라고.’

죽이는 데 급급했던 게 후회됐다.

‘아니야. 이건 어쩔 수 없었어.’

곽정원은 고수였다.

크게 다친 상태가 아니었으면 자신의 머리가 박살 났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내 무공이 갑자기 강해지지 않았다면…….’

대진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강해지기만 한 게 아니었다.

기존의 무리와 다른 것이 섞여 있었다.

머리는 그 연유를 탐구하려 했으나…….

가슴에서 다른 기운이 올라와 밀어냈다.

‘아쉽구나.’

대진의 눈이 더 붉어졌다.

이 정도로는 갈증을 채울 수 없었다.

‘잠깐. 진옥룡이 그런 말도 했었지.’

복수할 상대는 수없이 많다.

당장 주변에만 해도 병기를 내팽개친 채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는 이들이 있지 않은가.

‘그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면서 하자. 놈들의 공포, 후회, 고통을 느끼고 비웃는 거다.’

지금까진 살의를 담아 죽이기만 했으나 이제부턴 아니다.

최대한 천천히 죽이는 거다.

갈증을 채우기 위해서!

‘이놈부터 할까.’

대진은 바짝 엎드린 채 떨고 있는 사마련 무인에게 다가갔다.

터벅. 터벅.

발걸음마다 피로 물든 족적이 남았다.

하지만 지금부터 뿌릴 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의 살기를 느낀 무인이 공포에 질려 애원했다.

“투, 투항했잖습니까. 제발 이러지 마십시오.”

터벅. 터벅.

“사, 살려주십시오. 제발 살려주십시오!”

쿵. 쿵. 쿵.

무인은 머리로 땅을 찧으며 애타게 빌었다.

터벅. 터벅.

“으아아! 제발 살려달라고 씨발!”

무인의 앞에 다다른 대진이 조용히 말했다.

“고개를 들어라.”

“……네, 네!”

“그렇지. 눈을 봐야 하거든.”

“……네?”

어리둥절해 하는 무인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대진이 치켜든 검 때문이었다.

“아, 안 돼!”

“된다.”

대진이 차갑게 부정하며 검을 내려치려는 그때!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분 말씀처럼 안 되는데.”

“…….”

무인을 내려다보고 있던 대진이 시선을 천천히 돌렸다.

정광이 코앞에 서 있었다.

무당과 무혈단은 더 먼 곳에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고.

“…….”

대진은 다시 고개를 돌려 정광에게 물었다.

“안 된다니. 무슨 말인가?”

“잠시만요. 저기요, 사마련 무인 분.”

“네! 네!”

“저 멀리 가 계실래요? 여기 계시면 이분이 자극받으셔서요.”

“아,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내가 줄행랑치자 정광이 중얼거렸다.

“신법만큼은 괜찮네. 사파는 다 저런가?”

“아직 내 물음에 답을 안 했네만. 자네 말대로 하고 있었네. 무엇이 문제인가?”

정광이 눈살을 찡그렸다.

“아니, 때와 장소를 봐가면서 하셔야죠.”

“……때? 장소?”

정광은 황당한 얼굴로 대진을 바라봤다.

‘진짜 몰라서 하는 소리야?’

가만 보니 그랬다.

대진의 눈에 어린 혈광을 비집고 의아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지 않은가.

‘검은 놈과 흰 놈 양쪽에게 잡아먹히지 않은 건 대견타만.’

이렇게 생각이 짧아서야.

앞날이 깜깜했다.

‘그냥 확…….’

정광은 주먹을 꽉 쥐었다가 풀었다.

‘아니다. 이왕 시작한 일, 키워줘야 나중에 뭐라도 떨어지지.’

조곤조곤 설명해 주면 알아들으리라.

아니면 진짜 확!

“……복수의 끝이 뭘까요?”

“음?”

“설마 다 죽이는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

잠시 침묵하던 대진이 입을 열었다.

“본문을 재건하는 것이지. 예전보다 더 크고 강하게.”

“잘 아시면서 왜 그러세요.”

“무슨 의미인가?”

“그렇게 하려면 제자를 모아야 하잖아요. 능력 있고 똘똘한 애들로.”

“……그렇긴 하지.”

“그 애들이랑 입장 바꿔서 생각해 보세요. 투항한 상대의 살점을 저미고 뼈마디를 부수는 이에게 무공을 배우고 싶겠어요?”

천마신교라면 기꺼이 그러겠지만, 그야 그쪽이니까 그렇고.

“돈 주면서 배워달라고 해도 안 배울 건데.”

“…….”

대진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만큼 정광의 말은 틀린 점이 없었다.

‘……본문은 멸문한 것과 마찬가지다. 제발 제자로 받아달라고 줄을 잇던 이들도 발걸음을 끊을 게 분명해.’

인재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찾아다녀야 할 판이었다.

헌데 살성(殺星)으로 이름을 떨치는 자가 무당에 있으면 누가 좋다고 입문하겠는가.

“표정을 보니까 이해하신 것 같네요.”

“……실수를 막아줘서 고맙네. 하지만…….”

“말씀하세요.”

대진이 괴로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을 수는 없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걸세.”

“묻히세요. 듬뿍.”

“……그건 또 무슨 궤변인가?”

“죽일 때는 가차 없이 죽이시라고요. 그리고…….”

정광의 육성이 전음으로 바뀌었다.

-괴롭히면서 죽이고 싶으실 때는 몰래 하시고요.

“……!”

정광은 대진의 어깨를 토닥이며 격려했다.

“지금까진 좋았어요. 복수를 위해 혼을 불사르는 고독한 마검 같은 느낌?”

“…….”

“사람들은 그런 걸 멋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도장께서 이대로만 잘하시면 제자들이 구름처럼 모일 거예요. 아, 맞다.”

정광이 ‘짝’하고 손뼉을 쳤다.

“기왕 말이 나왔으니 이러는 건 어때요?”

“……?”

“이립이 넘으셨는데 무당소선(武當小仙)이 뭐예요, 소선이. 목 잘린 새우눈 어르신의 유언대로 별호를 마검으로 바꾸시는 거예요. 그냥 마검 말고 무당마검(武當魔劍)으로. 진짜 있어 보이죠?”

무당 장문인 선우가 바람처럼 달려와 외쳤다.

“절대 안 되네!”

“진짜 괜찮은데.”

선우는 계속 결사반대했고 정광은 대충 흘려들었다.

그들의 대화에 신경 쓰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던 대진이 중얼거렸다.

“……멋있으면 제자가 모인다?”

정광이 씩 웃었다.

“네. 내용은 조금 다르지만, 본문의 많은 분들도 그러셨거든요. 예를 들면…… 음. 제 사조님?”

“…….”

선우와 대진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정광의 사조라면 곤륜삼성(崑崙三聖) 중 맏이인 덕성(德聖) 운후 아닌가!

무공이며 덕이며 어찌나 뛰어난지.

무인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진인(眞人) 중의 진인이라 불리는 그가 그랬다니…….’

‘이걸 믿어야 할까?’

정광이 그들의 속마음을 읽은 듯 말했다.

“안 믿으시는 눈치네요.”

“…….”

“와. 이렇게 억울할 수가 있나.”

“…….”

“끝끝내 아니라고 안 하시네.”

정광이 됐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마 곧 오실 텐데. 그때 물어보세요 그럼.”

선우와 대진이 동시에 물었다.

“누가 오신단 말인가?”

정광의 눈에 조금이나마 그리운 감정이 떠올랐다.

“제 사부님요.”

* * *

허청은 말고삐를 계속 내려치며 속으로 부르짖었다.

‘내가 간다! 조금만 기다려라!’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많은 이들과 함께 말달리고 있었다.

‘이 고얀 녀석 같으니!’

제갈세가주 제갈문소의 말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진천뢰로 뭘 하려고! 그 위험한 걸 왜 들고 가?’

허청은 결심했다.

정광을 만나면 평생 들어본 적 없는 회초리를 들기로.

뭐.

때려봐야 아프지도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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