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202화 (201/569)

202화

진짜가 나타났다

도사답지 않은 과격한 언행.

천하제일미남이 분명한 얼굴.

대진은 은은한 혈광이 어린 눈으로 정광을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자네가 곤륜의 진옥룡인가?”

“네.”

“과연. 무당의 대진일세. 심마(心魔)에 갇힌 날 구해줘서 고맙네.”

“원하시던 걸 말씀드리니까 스스로 깨고 나오신 거죠. 정확히는 아직도 그쪽에 반쯤 걸치고 있으시다고 해야 하나.”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군.”

대진은 자신이 변한 걸 느낄 수 있었다.

이게 끝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변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사부께서 지금의 날 보시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절대 기꺼워하시지는 않을 터.

대진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어루만졌다.

사부인 검존에게서 받은 송문검(松紋劍)이었다.

‘사부. 제자는 그들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떠난 사부가 당장에라도 달려와 말릴 것 같았다.

괜찮다고. 이미 지난 일이니 신경 쓰지 말고 너를 위해 살라고.

그게 바로 나를 위하는 일이라며 말이다.

‘그래. 그러실 거야.’

지금껏 사부가 베푼 은혜를 생각하면 이래선 안 된다.

허나 비참하게 죽어간 사부를 떠올리자 살심(殺心)이 솟았다.

대진의 눈에 맺혀 있던 혈광이 진해졌다.

그리고 불안정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길이 맞다고 생각해?

-아니! 맞다!

-어떻게 확신하는데?

-그야 당연히…….

쫓아낸 줄 알았던 하얀 기운과 검은 기운이 또다시 부딪혔다.

대진은 그들에게 짓눌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이번에도 정광이 그의 숨통을 틔워줬다.

“마음 가는 대로 하세요.”

“……!”

대진의 붉은 눈이 살짝 커졌다.

언젠가 들어본 말.

어린 시절의 그에게 크나큰 변화를 주었던 사부의 가르침과 같은 말이었다.

“단, 그 마음이 잘못된 건 아닌지, 정말 원하는 것인지는…….”

심지어 뒷말까지 같다니.

대진은 저도 모르게 정광의 말을 이었다.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두 기운을 뚫고 나와서.

“……한 번 더 생각해 봐야겠지. 진옥룡, 그 말을 어디서 들었는가? 사부께서 내리셨던 가르침과 똑같군.”

“어? 그래요? 검존 어르신, 대단한 분이셨네요. 그냥 제 생각을 말한 건데.”

“…….”

“어쨌든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거. 꼭 지금 당장 할 필요는 없어요.”

“무슨 의미지?”

“하아아아.”

정광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대체 어떻게 말해줘야 이 소심한 녀석이 알아들을까?

이립(而立)을 갓 넘은 나이.

무공 실력은 또래 중 발군이라 할 만했으나 부족한 점이 너무 많았다.

‘이거, 괜한 짓을 벌인 거 아니야?’

재미 삼아 건 도박이었으나 질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모자라면 억지로라도 넣어서 채워주면 되는 법.

정광은 친절히 설명했다.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복수할 상대는 수없이 많다고.”

대진에게 바짝 붙어 속삭였다.

“하나씩 목을 쳐가면서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

“생각이 너무 많으면 아무것도 못 하죠. 실천하면서 생각하는 겁니다. 이제 정리됐죠?”

“……궤변이군.”

“정론인데.”

대진은 고개를 살짝 젓다가 수긍했다.

“상관없겠지. 내 마음이 그러자고 말하고 있네.”

“검은 놈이 그래요?”

“……!”

대진은 정광을 한참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것들을 어찌 아는 거지?”

“지겹게 봤었으니까요.”

“……자네도 심마에 들었었나?”

“네?”

정광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나를 뭐로 보고 이따위 말을.’

혼을 스스로 단련해 마(魔)를 품고, 그것을 바탕으로 마공을 수련해 정점에 섰던 정광이다.

어디 비빌 게 없어 심마 따위를 들이민단 말인가.

‘대충 넘기자.’

설명하기도 귀찮고 해봐야 알아듣지도 못할 터.

정광은 돛을 돌려 방향을 틀었다.

“제가 먼저 여쭸잖아요. 검은 놈이 그랬어요?”

대진은 정광의 눈을 응시하다가 딱딱하게 대답했다.

“아니. 나 자신의 생각일세.”

정광도 대진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던 혈광이 다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흠. 어느 정도 안정이 되셨네요.”

“이제 내 물음에 답을…….”

“지금처럼 앞으로도 계속 중심을 잡으세요.”

“…….”

“둘 중 어느 놈에게도 흔들리시면 안 돼요.”

양쪽의 성질을 다룰 능력이 없는 대진이기에 반드시 그래야 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어찌 되는가?”

“폐인이 되거나, 악귀가 되거나.”

정광은 간단히 답한 뒤 으르렁거렸다.

“그렇게 되시면 목을 베어드리죠.”

알아서 잘 좀 해봐, 응?

이런 의미로 한 말이었지만.

대진은 다르게 받아들였다.

‘추한 꼴은 면하게 해주겠다는 뜻인가…….’

고마웠다.

‘무공 실력이 소문의 반만 돼도 가능하겠지.’

부러웠다.

‘허나, 그런 일은 절대로 없도록 해주마.’

고맙고 부러운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대진은 무당소선(武當小仙)이라고 칭송받던 무인이자 도사.

자존심이 용납지 않았다.

게다가 무당 재건이라는 막중한 책무도 짊어지고 있지 않은가.

그의 입이 천천히 열리며 무거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네가 내 목을 노릴 일은 없을 걸세.”

“그랬으면 좋겠네요.”

정광은 어깨를 으쓱해 보인 뒤 가부좌를 틀었다.

“짧게나마 운기조식하시죠.”

“알겠네.”

대진도 정광을 따라 지그시 눈을 감았다.

태극신공(太極神功)을 운기하자 단전에서 익숙한 진기가 솟아났다.

그저 익숙한 것일 뿐 완전히 똑같진 않았으나…….

그 차이가 너무 미세해 대진은 알아차릴 수 없었다.

물론 정광은 알았다.

‘뭐 저 정도는 괜찮지.’

신경을 끊고 운기조식에 몰두하는데 무당 장문인 선우의 전음이 들려왔다.

-이보게, 진옥룡. 대진은 괜찮아진 건가?

-아까보다는요.

-……그럼 앞으로는?

-무량수불.

정광은 다시 운기조식에 집중했다.

선우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늘이 내려앉았다.

* * *

정광은 상쾌하게 운기조식을 마친 뒤 일어서며 손뼉을 쳤다.

“자. 자. 이제 슬슬 싸울 준비 하시죠.”

“우물우물. 철월은 아직 다 못 먹었다.”

“그럼 씹으시면서 싸우세요.”

“아! 도사는 똑똑하다.”

철월이 엄청나게 큰 육포를 씹으며 정광에게 다가갔다.

다른 이들도 굳은 얼굴로 모였다.

“도사. 지금 바로 칠 거냐?”

“아뇨.”

“응?”

철월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이들도 비슷했다.

언의진이 대표로 물었다.

“단주. 아까 이각(二刻) 후 치고 나갈 거라 하지 않았나요?”

“하여간. 다들 멍청하기는.”

정광이 아니라 위진홍이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이죽거렸다.

“저쪽에서 들으라고 그랬던 거지.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한테 유리한데 뭐 하러 먼저 공격을…… 억!”

언의진은 위진홍의 머리를 쥐어박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아. 시간을 끌려고 그랬던 거구나. 원군이 올 때까지.”

“크윽. 설마 그렇게 딱 맞춰 오겠소? 시간도 끌고 적을 혼란시키려고 그러는 것이오.”

위진홍의 말대로였다.

저 멀리서 정비하고 있던 사마련 무인들 사이에서 소요가 일어나는 게 보였다.

정광도 인정했다.

“군사의 말이 맞아요.”

“그것 보시오. 내 말대로…….”

“그런데 마음이 바뀌었죠.”

“……엉?”

위진홍이 황당해하는데 정광이 진천뢰를 꺼내 들었다.

순식간에 정광을 중심으로 넓은 공터가 생겼다.

“아, 진짜. 왜 다들 그렇게 겁이 많으세요?”

모두 마음속으로 항변했다.

우리가 겁이 많은 게 아니라 네가 없는 거라고.

그런데.

정광이 소운룡을 꺼내 쥐더니 진천뢰의 표면을 살살 긁는 것 아닌가!

‘겁이 없는 게 아니잖아!’

‘미쳤어! 그냥 미친 거였어!’

공터가 더 커졌다.

바보 철월도, 충성스러운 자오도 계속 뒤로 물러났다.

오직 대진만이 정광 곁에 남아 있었다.

“지금 뭘 하는 건가?”

“심지가 드러나게 하려고요.”

“흐음.”

정광은 작업에 집중했다.

머지않아 속에 묻혀 있던 심지 끄트머리가 드러났다.

‘더 팔까?’

잠시 고민하던 정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호신강기(護身罡氣)를 일으켜 몸을 보호하곤 있으나 구태여 위험을 더 자초할 필요는 없었다.

‘불을 붙이자마자 던지면 되겠지.’

너무 멀면 날아가는 도중에 터지리라.

적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던져야 했다.

‘이거 혹시 불을 붙이자마자 터지는 거 아니야?’

정광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진에게 진천뢰를 내밀었다.

“도장(道長)께서 쓰시죠. 복수하시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사양하겠네.”

“왜요?”

“너무 위험해. 그리고…….”

대진은 옆구리에 찬 검을 툭툭 쳤다.

“내겐 사부께서 내려주신 검이 있네.”

“누군 검 없나.”

정광은 다른 이를 물색했다.

‘철월은 마혼철신신공(魔魂鐵身神功)이 있으니까 좀 나으려나.’

하지만 그것은 사혼철신신공으로 이름이 바뀐 가짜.

하루에 한 번, 한 시진 반밖에 유지 못 하는 허접한 외공인데 철월은 오늘 이미 쓴 상태였다.

‘그냥 내가 하고 말지. 아, 그렇게 하면 되겠네.’

정광은 다시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진천뢰를 비수로 후볐는데도 터지지 않자 마지못한 표정으로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정광은 그들에게 계획을 설명했다.

“적들 한복판에서 진천뢰가 터지면 무척 당황하겠죠?”

“…….”

“그때 돌진하지 마시고 겁먹은 얼굴로 튀어나오는 사람만 치세요. 외곽에서 깔짝거리면서 수를 줄이는 거예요. 질문 있으신 분?”

모두 사마련 무인들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정광을 보며 같은 생각을 했다.

‘네가 그걸 던지기도 전에 터지면?’

‘뼈마디조차 수습 못 하게 될 텐데?’

차마 대놓고 물을 수는 없어 망설이는데.

정광은 다르게 받아들였다.

“완벽하죠? 그럼 가요.”

* * *

새우눈 노인 곽정원은 초조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했다.

정광과 정파 떨거지들이 한데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하더니 자신이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간악한 놈들. 또 무슨 음모를 꾸미는 것이냐!’

위선이라는 껍질을 벗어던진 정파는 무서웠다.

같은 사파가 아니란 게 고마울 정도로.

무엇보다 진옥룡.

저 괴물을 어찌 상대해야 한단 말인가!

‘어쩐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 나왔다.

‘……역시 믿을 건 숫자밖에 없어.’

다른 놈들은 다 떨거지다.

정광만 잡으면 알아서 무너질 놈들이었다.

‘포위해서 차륜전을 펼친다. 피해가 크더라도 반드시 잡아야 해.’

이대로 물러났다간 련주에게 죽는다.

아니, 그전에 후퇴하는 도중 신출귀몰한 정광에 의해 야금야금 전력이 깎이다가 말라 죽을 게 뻔했다.

그나저나.

‘진천뢰는 어쩌지?’

제갈세가를 치러 간 동료들에게서 뺏은 것 같은데.

놈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진 알 바 아니고, 진옥룡 저 미친놈이 저걸 던지면 어떡해야 하나 걱정이었다.

‘피해가 크더라도 그냥 맞을 수밖에.’

자신만 아니면 됐다.

생각을 정리한 곽정원은 수하들에게 명했다.

“놈들이 움직일 것 같다! 방비를 단단히 하라! 다른 놈들은 알아서 상대하고 진옥룡만큼은 차륜전을 펼쳐서 반드시 죽인다! 진천뢰를 터뜨리기 전에!”

“네!”

상처를 치료하고 요기도 했다.

짧게나마 쉬며 운기조식도 하니 수하들의 사기는 괜찮았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진천뢰를 터뜨리기 전에 진옥룡을 무슨 수로 죽여.’

‘자기만 멀리 피해 있을 모양이군.’

‘나만 아니면 된다. 제발 다른 놈한테 던져라!’

이렇게 다들 속으로 비는데.

정파 놈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진옥룡은 엄청난 빠르기로 앞서 오고 있었다.

“전투 준비!”

곽정원이 외치자 사마련 무인들은 병기를 고쳐 쥐었다.

손바닥에 잔뜩 고인 땀 때문이었다.

‘이쪽으로 오지 마!’

‘저쪽으로 가란 말이다!’

‘그냥 사라져줘! 제발!’

그들의 바람이 하늘에 닿은 걸까?

달려오던 정광의 몸이 흐릿해지더니 사라져 버렸다.

“뭐, 뭐야!”

“어디 간 거지?”

“위! 위다!”

사마련 무인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정광이 비조처럼 하늘에 떠올라 있었다.

마치 신선과 같은 모습.

정말 아름다웠다.

정광이 진천뢰와 화섭자를 꺼내 들 때까진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저 미친 새끼가!”

“던진다! 반드시 던져! 피해!”

피할 시간도 없었다.

신선처럼 솟아오른 정광이 팔을 크게 휘둘렀다.

그의 손에서 출발한 물체가 눈부신 속도로 날아왔다.

사마련 무인들은 절망에 빠졌다.

‘너무 빨라!’

‘어디로 던진 거야!’

뭐가 보여야 피하든 말든 하지.

이대로 죽는 건가?

다들 체념한 그 순간.

뻑!

“어억!”

무리의 중앙에 있던 곽정원이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크흑. 뭐, 뭐냐!”

곽정원은 자신의 이마를 때린 뒤 바닥에 떨어진 물체를 바라봤다.

“……화섭자? 이걸 왜?”

그뿐만 아니라 다들 어이없어하는 그때!

정광이 뒤이어 던진 진짜가 나타났다.

쿵!

진천뢰는 놀라운 속도로 날아와 화섭자를 정확히 때렸고.

파각-

화섭자는 산산이 조각나며 불씨를 흩뿌렸다.

치직-

그리고 그 불씨 중 하나가 코털만큼 삐져나와 있던 진천뢰의 심지에 옮겨붙었다.

콰아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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