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걱정하지 마세요
강호에 기인이사(奇人異士)가 많다고는 하나, 정광만큼 독특한 이는 드물었다.
세간의 평은 보통 하나로 모이기 마련이건만, 정광은 극과 극을 달렸다.
협(俠), 그리고 마(魔).
누군가는 협객이라 칭송했다.
어떤 이는 마귀라며 저주했다.
허나, 다들 입을 모아 동의하는 점이 있었으니.
더없이 오만하다는 것.
정광으로서는 억울한 일이었다.
아니, 항상 예의 있게 상대를 대했는데 무슨.
곤륜에서 나고 자라 갖추게 된 품격이었다.
자고로 여덕위린(與德爲隣)이라 했다. 덕을 베풀면 모두 친해지기 마련인 것이다.
정광은 오늘도 현생의 지론을 실천했다.
“실례합니다.”
콰아앙!
“잠시만요.”
서걱-
“조금만 비켜주실래요?”
콰지직!
사마련 무인들이 정신없이 튕겨 나갔다.
새처럼 아주 훨훨 날아가는 이도 있었다.
정광은 말 위에서 금룡(金龍)을 부리며 거침없이 나아갔다.
오래전 촉한(蜀漢)의 장수 조운이 유비의 아들 아두를 품속에 넣은 채 필마단기(匹馬單騎)로 조조의 대군을 헤집던 모습이 이랬을까?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압도적인 무위!
“조, 조운이다!”
“조운의 현신이야!”
수하들이 공포를 느끼자 새우눈 노인이 피를 토하듯 외쳤다.
“아니! 곤륜마귀(崑崙魔鬼)일 뿐이다! 본련의 대적 앞에서 겁먹은 모습을 보일 것이냐! 물러서지 마!”
수하들은 이를 악물며 병기를 고쳐 쥐었다.
‘그래, 그저 한 놈일 뿐이야!’
‘숫자로 밀어붙이면 돼!’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치던 것도 잠시.
투지를 일으켜 두려움을 털어냈다.
그러자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놈의 행색이 엉망이구나! 지친 게 틀림없어!’
몇 날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말달린 정광이었다.
말이라고 다르겠는가. 예비마를 세 필이나 끌고 출발했으나 모두 지쳐 풀어준 상황.
‘좋아! 숫자의 우위를 이용해 차륜전을 펼치면…… 음? 저건 뭐지?’
정광이 입고 있는 우아한 도복의 가슴 부분이 불룩했다.
‘뭐가 들어 있는 거야?’
‘설마…… 아두?’
‘에이. 그럴 리가…….’
정광은 마치 그들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가 꺼냈다.
어린아이의 머리통 같은 구체(球體)가 드러났다.
“아, 아두다!”
“진짜 조운의 현신이었어!”
사마련 무인들이 경악하는데.
정광이 그것을 번쩍 들어 올리며 설명했다.
“아뇨. 진천뢰인데요.”
“……!”
미친.
차라리 아두가 낫지.
웬 진천뢰?
잠깐, 왜 검을 집어넣고 화섭자를 꺼내는데?
“으아아악! 도, 도망가!”
“비켜! 비키라고!”
엄청난 혼란이 일어났다.
미친 듯이 물러나다가 부딪치고 넘어지며 아수라장이 됐다.
그 속에는 새우눈 노인도 포함돼 있었다.
정광은 유유히 말을 몰아 그들 사이를 지나갔다.
무혈단과 무당파 도사들 앞에 도착한 그는 두 손을 모으며 인사했다.
“무량수불. 잘 계셨어요? 무당파 분들은 처음 뵙네요. 곤륜의 정광입니다.”
홀로 사마련의 포위망을 뚫고 들어온 천하제일미남이 담담히 건네는 인사라니.
게다가 마침 역광이었다.
이보다 인상적인 모습이 어디 있겠는가.
허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 왜 다들 뒷걸음질 치세요?”
“…….”
“저기요. 왜 자꾸 도망가시냐고요.”
“…….”
정광이 의아해하든 말든.
사람들의 시선은 그가 들고 있는 진천뢰에 못 박혀 있었다.
꿀꺽.
모두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평소 버릇없는 데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것으로 명성 높은 위진홍이 간신히 물었다.
“……그거, 진짜 진천뢰요?”
정광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그런데요. 왜요?”
“……!”
사마련 무인들에게서 일어났던 소란이 이쪽에서도 일어났다.
* * *
소란은 오래지 않아 진정됐다.
어쩌다 진천뢰를 얻게 되었는지 대충 설명한 정광은 선우를 비롯한 무당 도사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당오군의 보고를 받은 뒤 그간의 노고를 위로했다.
“음. 그렇게 됐군요. 수고하셨어요.”
“아니오. 단주야말로 고생했소. 헌데…….”
“네?”
당오군의 시선은 정광의 불룩 튀어나온 가슴에 꽂혀 있었다.
“……그 진천뢰. 심지가 없다 하나 정말 안전한 것 맞소?”
“그럴 걸요.”
걸요?
그게 할 말이냐?
당오군은 오랜만에 말을 놨다.
“아우. 당장 버리게.”
위진홍도 거들었다.
“얼음덩어리 말이 맞소. 재수 없으면 다 죽을 것이오.”
“불이 없어도 폭발해요?”
정광의 물음에 위진홍은 미간을 좁혔다.
“소문으로도 서책으로도 그런 사례는 접해보지 못했으나 조심하는 게 낫지 않겠소?”
“흐음. 그렇긴 하죠. 그렇다고 그냥 버리긴 아까운데.”
정광은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시선을 돌렸다.
사마련 무인들이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포위망을 굳힌 채 초조해하고 있었다.
‘겉의 심지는 잘랐지만 속의 것은 남아 있지. 살짝 파서 속 심지에 불을 붙이자마자 던지면 되지 않을까?’
그야 해보면 될 터.
정광은 일단 단원들에게 휴식을 명했다.
“건량과 육포를 든든히 드시고 운기조식하세요. 이각(二刻) 후 치고 나갈 거예요.”
“철월은 자장이의 요리를 먹고 싶다. 시간을 더 줘라.”
철월이 반대하자 위진홍이 이죽거렸다.
“이런 멍청이 같으니. 이각도 후한 거야. 지금이야 저놈들도 정비 중이라 그렇지, 계속 기다려 줄 것 같냐?”
“철월은 멍청이가 아니다! 저놈들이 기다릴 수도 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금쯤이면 무림맹 놈들이 근처를 샅샅이 뒤지고 있을 거다. 저놈들에겐 시간이 없어.”
“무림맹을 욕하지 마라!”
“왜?”
“철월도 무림맹이다! 무뇌도 무림맹이고!”
“…….”
“무뇌는 바보다. 자기 소속도 모른다. 크크크.”
위진홍은 할 말이 없었다.
무혈단은 무림맹의 조직.
사실상 정광의 사조직처럼 굴러가나 원론적으론 그렇지 않은가.
“하아아. 내가 어쩌다가 위선자들의 무리에…….”
“바보 무뇌. 멍청이 무뇌.”
“이 천치가 진짜!”
정광은 위진홍을 도발하는 철월에게 충고했다.
“자꾸 그럴수록 먹을 수 있는 육포의 양은 줄어들 거예요.”
“아! 역시 단주다! 고맙다!”
“군사도 기력 좀 보충하세요. 꽤 치열한 싸움이 될 것 같으니까.”
“후우우. 알겠소. 그러리다.”
정광도 육포를 씹었다.
지난 며칠간 계속 먹던 것이라 지겹긴 했으나 이거라도 있는 게 어딘가.
장이의 모친이 잔뜩 만들어줬던 맛있는 육포여서 다행이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그럴듯한 객잔에 가서 거하게 한 상 차려 먹어야지. 술도 제대로 걸치고…… 음?’
정광은 육포를 씹으며 고개를 돌렸다.
무당파 장문인 선우가 복잡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드실래요?”
“……괜찮네.”
“벽곡단(辟穀丹) 같은 거 백날 드셔봐야 힘을 못 쓰실 텐데.”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겠는가?”
정광은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 선우 앞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곤륜 비전 운룡금나수(雲龍擒拿手)를 펼쳐 선우의 품속에 육포 꾸러미를 넣었다.
무방비 상태로 있던 선우가 놀란 표정을 짓자 정광이 속삭였다.
“됐죠? 돌려서 말씀하시지 말고 편하게 하세요. 맛은 보증합니다.”
“……이런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었네.”
“어? 그럼 뭔데요?”
선우의 눈이 암울하게 가라앉았다.
“내 대의 무당은 끝났어.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그래도 도관(道觀)은 온전하잖아요.”
“……어떻게 알았나?”
“사마련이 황제의 비위를 거스를 리 없으니까요.”
“……그렇지.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도관이야 사람만 많으면 다시 세울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을 키우려면 정말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의 무당에는 사람이 너무 없었다.
“……성세를 회복하려면 몇 대가 지나야 할지 모르네. 하긴, 그것도 오늘 살아남아야 가능한 일이군.”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자네가 왔으니까?”
“네. 역시 장문인이시네요. 바로 알아들으시고.”
“…….”
선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동의했다.
“그래, 자네를 믿네. 오늘은 살 수 있을 게야.”
“근데 왜 고개를 저으셨어요?”
“그건…… 어쨌든 앞날이 문제일세. 멸문에 가까운 화를 입은 문파가 세를 회복하려면 젊고 뛰어난 인재가 있어야 하네. 그런 이를 중심으로 뭉쳐서 나아가야 한다는 말일세.”
“그야 그렇죠.”
“헌데…… 본문엔 인재가 없어. 있었지만 사라져 버렸다고 해야겠지.”
선우는 슬쩍 시선을 돌려 대진을 바라봤다.
바닥에 주저앉아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 무척 음울해 보였다.
“극도로 분노해서 심마에 빠졌었는데…… 정신을 차리더니 계속 저러고 있네. 불러도 들은 척도 안 하고 아무런 말도 안 해.”
“원래 좀 내성적이신 건 아니고요?”
“……절대 아니지.”
“흐음. 안됐네요.”
“그래서 말인데…….”
선우가 간절한 얼굴로 부탁했다.
“자네의 의술이 대단하다고 들었네만. 어떻게 안 되겠는가?”
“마음의 병은 치료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역시 그렇군. 후우우우.”
선우는 장탄식했다.
대진이 안타까워서, 무당이 걱정돼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정광의 이어지는 말에 구멍이 뚫렸다.
“스스로 털고 일어날 수 있게 도와줘야죠.”
“어, 어떻게 도우면 되는가?”
“음. 장문인께서는 안 될걸요.”
“자네는 된다는 말이군! 대진을 구해주게. 내 어떻게든, 반드시 사례하지.”
“잘될지 어떨지 모르는데요.”
“시도라도 해주겠나? 제발 부탁하네.”
북숭소림(北崇少林), 남존무당(南尊武當).
외가(外家)의 소림과 내가(內家)의 무당.
소림과 함께 중원 무학의 태두(泰斗)로 불리는 무당의 장문인이 이리도 간절히 청하다니.
그야말로 전 무림이 경악할 만한 일이었으나…….
정광은 시큰둥했다.
‘청성보다도 못한 처지가 된 무당이 뭘 줄 수 있겠어.’
청성은 사람이 있기에 시간이 걸리더라도 치고 올라갈 일만 남았다.
그와 달리 무당은 계속해서 떨어질 터.
사람이 없으니 세가 약해지고, 세가 약해지면 사람이 안 모인다.
문파가 망해가는 전형적인 수순이었다.
“장문인. 그냥 원시천존 모시고 조용히 사시는 건 어때요? 고개를 돌리면 피안(彼岸)이거늘, 무(武)라는 헛된 집착에 매몰돼 번뇌하는 건 곤란하잖아요.”
“……자네, 불경도 공부했나?”
“도경이나 불경이나 그 나물에 그 밥이죠.”
정광은 중도 도사도 기함할 말을 툭 던진 뒤 어깨를 으쓱했다.
“뭐, 한번 해볼까요.”
“저, 정말인가? 고맙네.”
“뭘요. 나중에 안 됐다고 욕하지나 마세요.”
“무량수불…….”
“대답을 피하시네요.”
“자네를 믿네.”
“그냥 믿지 마시죠. 서로를 위해서.”
“……그러지.”
“그럼 가볼게요. 에구구.”
정광은 자리에서 일어나 대진을 향해 걸었다.
‘무당 장문인은 이제 허수아비야. 판돈을 걸려면 실무자에게 걸어야지.’
도박의 종류는 무궁무진하기에 극악의 확률을 자랑하는 것들도 있다.
정광은 재미 삼아 한번 놀아볼 생각이었다.
* * *
사부가 피를 흩뿌리며 쓰려졌다.
깔끔하게 잘린 장문인의 팔이 허공을 날았다.
과할 정도로 잘해주던 사숙들과 노사형들이 갖가지 병기에 꿰여 피를 토했다.
자신을 믿고 따르던 사질들이 꽃망울도 채 피워보지 못한 채 구천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나는 살아 있지.’
마음속 깊은 곳에 억눌러 놨던 검은 기운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너도 죽었어야 했어.
‘……알아.’
-하지만 살았으니 할 일을 해야 하지 않겠어?
‘……복수 말이냐?’
검은 기운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찔러! 베어! 모두 다 죽여 버리는 거야! 그래야 먼저 떠난 이들이 눈을 감을 수 있다!
양손으로 감싼 대진의 눈에 혈광(血光)이 맺혔다.
‘그래. 복수해야 해. 이렇게 처져 있을 순 없어.’
그러자 억지로 붙잡고 있던 하얀 기운이 빛을 토했다.
-안 돼! 그들이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야! 네가 살인귀가 되면 얼마나 슬퍼할지 생각해 봐.
‘……그래도…….’
-복수는 헛된 거야. 막상 하고 나면 어떡할 건데? 피로 물든 네 두 손으로 무당을 일으킬 수 있을 것 같아?
‘……대체 어쩌라고!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
대진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허나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 있었기에 밖으로 말이 새어 나오진 않았다.
그를 양분하고 있던 검은 기운과 하얀 기운이 다투기 시작했다.
-이 위선자! 복수가 어때서!
-결국엔 파멸뿐이야! 어리석은 짓이라고!
대진은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눈에 맺혀 있던 혈광이 더 진하게 물들었다.
전형적인 심마의 증상이었다.
‘알아! 안다고! 둘 다 일리가 있어! 그래서 더 모르겠단 말이다!’
-내가 옳아!
-아니! 나지!
검은 기운과 하얀 기운이 또다시 치열하게 싸우려는 그때.
맑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다 죽여 버리고 싶은데 그러면 결국 허무해질 것 같죠?”
‘……!’
“허무하긴 개뿔. 그냥 하세요. 얼마나 통쾌하고 짜릿한데. 꼭 안 해본 것들이 미사여구로 거짓말을 늘어놓는다니까.”
검은 기운이 신이 나서 떠들었다.
-거봐! 그렇다잖아! 그냥 눈 딱 감고 확…….
“복수할 땐 상대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하세요. 그곳에 서린 공포, 후회, 고통을 비웃으면서요.”
-…….
“혹시 몰라서 말씀드리는데. 빨리 죽이시면 안 돼요. 살점을 한 점씩 바르고 뼈마디도 잘게 토막 내세요. 상대의 눈은 간절함으로 바뀔 거예요. 제발 죽여달라고.”
-……아니, 그렇게까지는…….
“절대 죽이지 마세요. 최대한 오래 이어가세요.”
-……그건 너무 심한…….
“그러다 결국 놈이 죽으면…….”
-……아, 안타까울까?
“잠시나마 기분이 좋아질 거예요.”
-……자, 잠시 그런 거면 허무할 것 같은데.
“그렇다고 걱정하지 마세요.”
-……꿀꺽. 왜, 왜?
“복수할 상대는 수없이 많으니까.”
복수할 상대는 수없이 많으니까.
이 말이 내면 깊은 곳에 갇혀 있던 대진의 귀를 울렸다.
그 울림은 점점 켜져 내면의 벽을 흔들기 시작했고, 얼마 안 가 무너뜨렸다.
내면을 깨고 나온 대진은 얼굴을 감싸고 있던 두 손을 내렸다.
은은한 혈광이 어린 눈이 드러났다.
그 눈에 화려한 외모의 청년 도사가 담겼다.
청년 도사가 두 손을 모으며 씩 웃었다.
“무량수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