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200화 (199/569)

200화

파죽지세(破竹之勢)

호북성 균현(均縣) 무당산(武當山).

대진(大津)은 일곱 살에 그곳에 올라 정식으로 도호(道號)를 받고 무당파(武當派)의 진산제자(眞山弟子)가 되었다.

모두가 부러워하며 축복했으나 당사자인 대진은 아니었다.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어렵기만 한 사형들.

너무 적게 나서 불편하기 짝이 없는 사질들.

좌불안석일 수밖에.

무당을 넘어 정파무림의 검(劍)이라 불리는 검존(劍尊) 선휴. 그가 배분을 건너뛰어 사손뻘인 대진을 제자로 거둬서 생긴 일이었다.

매일같이 압박감에 시달렸다.

사람들은 그를 일러 기린아(麒麟兒)라고, 무림의 별이 될 거라며 추켜세웠다.

‘숨 막혀. 도망칠까?’

대진은 버티다 못해 사부인 검존을 찾아 물었다.

‘사부님. 시장통에서 빌어먹던 저를 왜 거두신 건가요?’

‘네가 도기(道器)라서.’

‘너무 과분하게 보시는 것 같은데요.’

검존은 빙그레 웃었다.

‘농이다. 내 수양은 그걸 알아볼 만큼 깊지 않아. 그저 내 마음이 그리 시킨 것이지.’

‘그냥 그러고 싶으셨단 말씀이에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

도무지 알 수 없는 늙은이라고 내심 투덜대는데.

검존이 말을 이었다.

‘너도 네 마음이 가는 대로 하거라.’

‘네?’

‘단, 그 마음이 잘못된 건 아닌지, 정말 원하는 것인지는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으나 일단 하고 싶은 대로 해보기로 했다.

‘선계(仙界)가 따로 없구나.’

온종일 늘어져 자고.

토끼처럼 작은 짐승을 사냥해 몰래 먹었다.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도둑질하고 반나절은 두들겨 맞던 시절과 비교하면 너무나 행복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지루해.’

그날그날 살기 위해 치열하게 애썼던 기억이 그를 간지럽혔다.

뭐라도 몰두해야 할 것 같았다.

‘해볼까.’

글을 배우고 무공을 익혔다.

도경을 탐구하고 도를 갈구했다.

그는 자질이 있었다.

들인 시간과 노력이 항상 성과와 비례하지는 않는다지만 얻는 것들이 많았다.

그렇게 이십 년.

대진은 무당소선(武當小仙)이라 불리는 도사이자 무인이 되었다.

그리고 또 이십 년. 아니, 삼십 년이 흐르면.

자신만의 도를 깨닫고 등선(登仙) 해서 별이 되리라 다짐했는데…….

‘……꿈인가.’

대진은 얕은 잠에 들었다가 눈을 떴다.

칠흑보다 어두운 밤하늘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별 하나 없군.’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마치 그의 마음을 보는 것 같았다.

마음을 그렇게 어지럽힌…… 아니, 갈가리 찢은 자들이 떠올랐다.

‘사마련!’

주먹이 저절로 쥐어지고 살기가 솟았다.

그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는 무당을 짓밟다니!

죽어 악귀가 되어서라도, 절대로 용서치 않으…….

“대진아.”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대진의 분노를 끊었다.

“마음을 가라앉혀라.”

“장문인.”

대진은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무당 장문인 선우가 가부좌를 튼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주무시지 않고……?”

“네게 할 말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살짝 긴장한 대진과 달리 선우의 어조는 담담했다.

“아마 오늘이 마지막이 될 것 같구나.”

“어찌 그런 말씀을…….”

“아니다. 내 생각이 맞을 게야.”

“…….”

대진은 부정하고 싶었으나 그러질 못했다.

그가 봐도 그랬기에.

“장강(長江)이 코앞이다. 일부러 이쪽으로 몬 것이겠지.”

“…….”

운 좋게 장강을 넘어봐야 죽음이다.

그쪽은 사마련의 텃밭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싸워야 해.”

“장문인.”

대진이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무당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싸우겠습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내가 그런 다짐을 들으려고 네게 온 줄 아느냐?”

“…….”

대진은 마음속으로 빌었다.

제발 그것만은 아니었으면.

그런 잔인한 짓을 시키지는 말아줬으면.

허나, 선우는 잔인했다.

“떠나거라.”

“사숙!”

“사숙이라. 오랜만에 듣는구나. 장문의 직을 맡은 뒤론 처음인가.”

“어찌 그런 명을 내리십니까. 제발 거둬주십시오.”

선우는 간절히 청하는 대진을 외면한 채 어두운 밤하늘을 응시했다.

그의 입에서 허허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형은 지금쯤 저기에 계시려나. 검존이라는 헛된 명성에는 관심이 없고 어찌 죽느냐도 상관없다 하셨지. 다만 하늘을 나는 신선만큼은 되고 싶다 하셨었는데…….”

사부인 검존의 얘기가 나오자 대진의 눈이 붉게 충혈됐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사부께서는 그렇게 비참하게 돌아가셔야 할 분이 아니셨으니까요.”

“사형은 다르게 생각하실 게다.”

“네?”

선우의 시선이 대진에게 향했다.

“너야말로 비참하게 죽어서는 안 된다고 하시겠지.”

“허나…….”

“무당의 맥이 이렇게 끊기기를 원하실 것 같으냐?”

“…….”

선우의 얼굴에 추상같은 위엄이 실렸다.

“장문인으로서 명하노니. 대진은 반드시 살아남아 무당을 다시 일으켜라.”

대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항변하려는 순간.

멀리서 번(番)을 서고 있던 도사가 고함을 질렀다.

“모두 일어나십시오! 적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피해야 합니다!”

“이런!”

내공을 끌어올려 청각을 키우자 은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안력은 키울 필요조차 없었다.

수많은 횃불들이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벌써…….”

두 발로 뛴 무당과 달리 말을 탄 사마련의 추적은 무서웠다.

침음성을 흘리던 선우가 내공을 모아 외쳤다.

“무량수불! 마지막 밤이다! 이 밤을 최대한 길게 가져간다! 제자들은 전심전력으로 시간을 벌어라!”

“네! 장문인!”

무당 도사들은 이를 악물며 검을 뽑았다.

선우의 명을 따라 대진을 살려야 했다.

‘막내 사제만 살아남으면 희망이 있다!’

‘대진 사숙이라면 무당을 다시 일으킬 수 있어!’

백 년이 걸릴지 천 년이 걸릴지는 모를 일.

하지만 믿을 만한 이는 대진뿐이었다.

그의 자질과 집념, 하루가 다르게 늘어난 도(道)라면 언젠가는 반드시 무당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선우의 외침이 그들의 기운을 북돋웠다.

“선 자 배는 진무진(眞武陣)을 펼쳐라! 대 자 배는 칠성검진(七星劍陣)을! 지 자 배는…….”

무당 도사들은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순식간에 무당을 대표하는 여러 개의 진이 만들어졌다.

지금까지의 싸움에서도 그랬듯이, 잔뜩 지친 데다 숫자도 형편없이 적은 무당이 내세울 건 이것들밖에 없었다.

“뭐하느냐! 어서 떠나지 않고!”

선우의 외침에 대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분했다.

너무 분해서 입술이 찢어져 피가 흘러내릴 지경이었다.

‘사부…….’

사마련주에게 오십초(五十招) 만에 목이 잘린 검존이 떠올랐다.

‘사숙…….’

한쪽 팔이 잘렸는데도 몸을 꼿꼿이 세운 채 빨리 떠나라고 재촉하는 장문인이 보였다.

‘그리고…….’

이미 죽어버린 이들과 곧 죽을 이들이 머릿속에서 겹쳤다.

‘크윽…….’

그 모든 형상들이 얽히고설켜 뒤틀리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그것은 어두운 형태로 자리를 잡았다.

대진의 눈에도 짙은 어둠이 어렸다.

표정을 물론 입에서 튀어나온 말마저 그랬다.

“사숙! 모두 죽일 것입니다! 무당을 능멸한 사악한 놈들을 한 놈도 남기지 않고 죽여 버릴 겁니다!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부터!”

그야말로 한 맺힌 절규.

선우는 가슴이 철렁했다.

‘심마에 빠진 것인가? 안 돼. 빨리 풀어줘야…….’

허나 그럴 시간이 없었다.

적들이 말을 타고 짓쳐 들고 있었다.

횃불이 일렁이며 이지러지는 그들의 형상이 마음을 짓눌렀다.

‘하늘이 무당을 버렸는가.’

한없이 기특하고 자랑스러웠던 어린 사질은 빠져나갈 생각도 없고, 설령 있다 해도 시간이 없었다.

필시 여기에서 함께 죽게 될 터.

선우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이렇게 된 이상 할 일은 단 하나!

악독한 적의 숫자를 하나라도 더 줄이고 산화하리라!

선우가 내공을 끌어 올려 크게 외치려는 그때!

“으아악!”

“쿨럭! 크아악!”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적들의 좌측 방면에서 비명과 고함이 울려 퍼졌다.

“독이다!”

“암기도 있어! 피해!”

선우는 눈을 부릅뜨며 안력을 돋웠다.

적들의 좌측 후방에서 일단의 기수(騎手)들이 달려와 적들의 측면을 깎듯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대로 선우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왔다.

기수들의 중심에서 말달리던 괴이한 복색의 미소년이 외쳤다.

“뛰어! 이 말코 도사들아!”

“……!”

“이 몸이 살려주려고 왔잖아! 날 믿고 뛰어!”

지가 뭔데.

수양 깊은 선우도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기회다!’

어쨌든 적은 아니지 않은가!

선우는 급히 제자들에게 명했다.

“뛰어라! 어서!”

모든 제자들이 그의 명을 즉시 따랐으나.

눈이 검은 기운에 먹힌 대진은 거부했다.

“싫습니다! 소질은 사마련 놈들을 남김없이 죽일 것입니다!”

“대진아! 지금 너는 심마에 들었다! 이지(理智)가 흐려진 상태라 제대로 싸우지도 못할 게야!”

“아닙니다! 누구라도 죽일 수 있습니다! 반드시 그럴…… 컥!”

항변하던 대진이 머리를 감싸며 쓰러졌다.

말달리며 거대한 도의 도면으로 대진의 뒤통수를 후려친 청년이 선우를 스쳐 지나가며 외쳤다.

“장문인! 팽가의 팽강휘입니다! 서두르십시오!”

“……!”

뒤따라 달려오던 중년인이 기절해 쓰러진 대진을 낚아채 예비마의 등에 실었다.

실로 놀라운 기마술!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더 놀라웠다.

“장문인!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무림맹 무혈단 소속, 자오라고 합니다! 단주 진옥룡의 명을 받고 무당을 도우러 왔으니 의심치 마시고 저희와 함께…….”

어찌나 말이 많은지 뒷얘기는 들리지도 않았다.

중년인은 이미 한참 멀리서 말달리고 있었다.

선우는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무당 제자들은 모두 그의 지시대로 기수들을 따라 달리고 있었다.

‘……가자!’

선우는 유운신법(流雲身法)을 펼쳐서 달리며 들었던 소문을 정리했다.

무혈단.

그리고 그 조직을 이끄는 자의 악명을.

‘……다른 수가 없다. 지금은 그들을 믿어야 해.’

없는 내공을 쥐어짜 달렸다.

그의 신형이 쭉쭉 나아갔다.

달리고 있는 제자들이 보였다.

기수들은 말을 멈춘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중 차가운 인상의 귀공자가 물었다.

“장문인. 상황이 급하니 인사는 다음에 드리겠습니다. 말을 탈 줄 아십니까?”

“모르네. 평생 산에서 도만 닦아서…….”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먼저 가십시오.”

“자네들은?”

“적들을 지연시켜야 합니다. 곧 뒤따라 갈 테니 어서 가십시오. 무당은 장문인께서 이끄셔야 합니다.”

선우는 놀란 눈으로 귀공자를 바라봤다.

무척 먼 길을 다급히 달려왔는지 행색도 엉망이고 안색도 안 좋았다.

‘그런데 남겠다고? 본문을 위해?’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솟구쳤다.

무당산에서 칩거하며 억누르고 있던 열기.

바로 협(俠)이었다!

“아니! 그럴 순 없지. 나도 함께하겠네.”

귀공자는 시간을 끌지 않았다.

“그럼, 말에 오르십시오. 자오 대협. 장문인을 부탁드립니다.”

“알겠소, 부단주.”

말 많던 중년인이 선우를 예비마에 태웠다.

그리고 그 고삐를 왼손으로 쥐었다.

오른손은 이미 대진이 실린 말의 고삐를 쥐고 있는 상황.

“장문인. 말이 놀라지 않게 몸을 맡기십시오. 간단히 설명해 드리자면…….”

귀공자가 제지했다.

“자오 대협. 먼저 가십시오.”

자오라 불린 중년인은 짧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말 옆구리를 발로 찼다.

“가자!”

히히히힝!

말 세 마리가 거친 숨을 뿜으며 달렸다

선우는 말 등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애썼다. 그러면서도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기수들이 조금 느리게 뒤따라 오고 있었다.

‘말들의 체력을 안배하는 건가?’

그래서 될 일이 아닐 텐데.

그들 너머, 새까맣게 달려오는 적들이 보였다.

그때, 괴이한 복색을 한 버릇없는 소년이 소리쳤다.

“부단주와 당 소저는 독! 나머지는 철질려(鐵蒺藜)!”

무혈단원들은 그의 지시를 충실히 따랐다.

독분(毒粉)이 뿌옇게 뿌려졌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포대에 들어 있던 철질려를 바닥에 쏟았다.

그들 근처까지 접근했던 사마련 무인들이 독분을 들이마시고 피를 토했다.

말들은 철질려를 밟자마자 고통스러운 소리로 울며 쓰러졌다.

그렇게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시작됐다.

선우는 지친 와중에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대단하구나!’

버릇없는 꼬마의 신묘막측(神妙莫測)한 귀계(鬼計)!

젊은 영웅들의 빛나는 투지와 무공!

사기(邪氣)를 줄줄 흘리는 거한의 놀라운 외공까지.

‘이게 무혈단인가!’

이쯤 되자 단주인 정광이 궁금해졌다.

그는 어떤 자일까?

대체 어디에 있는 건가?

허나 그런 생각을 하기엔 상황이 너무 위급했다.

선우와 무혈단은 무당 제자들을 앞서 보낸 뒤 사마련을 유인해 지연시키고, 다시 무당 제자들을 찾아 함께 달리다가 또다시 사마련을 막기 위해 방향을 틀어야 했다.

그렇게 장강 주변에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추격전을 펼친 지 이틀째 되는 날.

선우는 장탄식하게 되었다.

‘이제 정말 끝이구나…….’

고개를 돌려 혈도를 짚인 채 말 등에 묶여 있는 대진을 봤다.

이제야 제정신이 돌아왔는지 무거운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래도 맑은 정신으로 귀천하게 되어 다행인가.’

그들은 장강을 등진 채 사마련에게 완전히 포위됐다.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내가 아무리 뛰어나면 뭐해! 손발이 엉망인데!”

괴이한 복색의 소년이 투덜거리자 무혈단원들이 주먹을 치켜들었다.

소년은 바로 입을 다물었으나 사마련은 아니었다.

새우눈을 한 노인이 그들을 노려보며 외쳤다.

“우릴 이렇게까지 물 먹여? 한 놈도 남김없이 죽여주마! 여봐라! 모두 저놈들을 쳐…….”

콰지직!

“아아악!”

“잠시 지나갈게요.”

난데없이 들려오는 둔중한 타격음과 비명!

그리고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담담한 목소리!

노인은 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의 새우눈이 철전(鐵錢)만큼 커졌다.

“저, 저건!”

눈부시게 잘생긴 청년 도사가 밖에서 포위망을 뚫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야말로 파죽지세(破竹之勢)!

모두의 머릿속에 한 사내의 별호가 떠올랐다.

“진옥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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