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199화 (198/569)

199화

아비규환(阿鼻叫喚)

무림인이란 족속은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 자신의 명성에 흠이 가는 걸 용납하지 않는다.

입 밖으로 낸 말은 반드시 지키는 게 당연하다.

어떤 손해를 보더라도, 목숨을 잃더라도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서로 남기자고?

내가 약조했는데?

웬만한 무림인이라면 불쾌함을 넘어 대노할 수밖에.

지금 나를 모욕하는 거냐며 칼부림을 벌여도 이상하지 않다.

정광은 그런 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개소리를 지껄이는 것들은 양심이란 게 아예 없는 거지.’

보통 양심이 없을뿐더러 잃을 게 없는 놈들이 그러곤 한다.

물론 둘 다 있다고 하더라도 지키지 않는 경우도 있다.

손익을 따져봤을 때 유리한 쪽으로 가고 싶은 게 사람 아닌가.

느껴지는 기운으로 판단하면, 제갈문소는 약조를 지킬 만한 자였으나…….

일이 잘 안 풀리면 정말 칠팔십 년이 걸릴지도 모를 터.

약조한 이가 죽어버리면 정광만 바보가 된다.

제갈문소는 그 뜻을 이해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네만. 진천뢰를 이용하면 시간을 많이 단축할 수 있을 걸세. 그리고 기대만큼은 못 줄이더라도 내가 장수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굳이 문서로 남길 것까지야…….”

“잠깐 진맥 좀 해봐도 될까요?”

“자네의 놀라운 의술에 대해 많이 들었네. 내 수명을 봐주겠다는 말인가?”

“네.”

제갈문소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손목을 내밀었다.

“거참, 은근히 떨리는군.”

손목의 맥문(脈門)은 요혈 중의 요혈이었으나 제갈문소는 거리낌이 없었다.

정광 역시 마찬가지.

지그시 눈을 감고 진맥을 하다가…….

고개를 홱 돌려 제갈린에게 말했다.

“종이랑 붓 좀 부탁해요. 이거, 무조건 써야겠는데요.”

“아니, 이보게. 대체 내 명이 얼마나 남았길래…….”

“당장 돌아가실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저기요, 제갈 소저. 종이랑 붓이요. 네?”

결국 그들은 제갈문소의 집무실로 자리를 옮겨 문서를 작성하게 됐다.

세부적인 내용을 조율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는데 정광이 무리한 이자를 요구하진 않아서 좋은 분위기 속에 진행됐다.

뭐 그래 봐야 눈덩이가 산비탈을 굴러 내려가듯 시간이 지날수록 엄청나게 불어날 테지만.

정광은 문서의 조항들을 꼼꼼히 확인했다.

두 장의 내용 중 다른 건 없는지 확인한 건 물론이다.

“오오.”

제갈세가는 여타 무림 가문답지 않게 문(文)으로 유명했다.

최소 달필이란 얘기.

제갈문소는 달필을 넘어 명필이었다.

“멋진 글씨네요.”

“칭찬 고맙네. 자네의 도호 밑에 수결(手決)을 두게나.”

정광은 우아하게 붓을 든 뒤 호쾌하게 글을 썼다.

“됐죠?”

“……뭐라 쓴 건가?”

“정광(精光)요.”

“……자네 정말 악필이군. 혹 장원 밖에 쓰러져 있던 화려한 옷차림의 노인 말일세. 그의 옷에 쓰인 글씨, 자네 것인가?”

“아. 광서살귀(廣西殺鬼) 황오요?”

“……그게 그런 글씨였나? 사마련이 물러나고 생존자를 확인하다가 봤는데 이제야 알게 됐군.”

“지금 장원에 있어요? 불러서 공증을 받으면 되겠…… 하필이면 살귀네. 좀 그럴듯한 명성을 가진 사람은 없었나요?”

“살(殺), 혈(血), 귀(鬼), 악(惡), 뭐 이런 글자가 들어간 별호를 가진 자들뿐이던데…….”

“그럼 공증은 제가 겸하고. 약식으로 간단하게 조금만 더하죠.”

“……또 무엇을?”

정광은 붓으로 손바닥에 먹물을 가득 먹인 뒤 문서에 찍었다.

“……자네, 지금 뭐 하는가?”

“수인(手印)도 찍어야죠.”

“……허허. 너무 과하지 않나?”

“사제가 중원은 무서운 곳이라 이 정도는 해야 뒤통수를 안 맞는다고 했어요.”

“……금권검협이라는 백 공자 말인가. 돈이 걸리면 사람이 바뀐다더니. 명불허전이로군.”

사실 그런 말을 한 적도 없는 백승무였으나 이렇게 또 악명을 쌓게 되었다.

제갈문소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뒤 손바닥에 먹을 발라 수인을 찍었다.

그리고 정광에게 한 장을 내밀며 무겁게 말했다.

“번잡한 걸 싫어하는 자네가 굳이 이런 귀찮은 일을 한 이유를 아네. 체면을 세워줘서 고맙군. 본가를 위해서라도 최대한 빨리 이행할 테니 믿고 기다려 주게나.”

정광은 경고를 한 것이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철두철미하게 문서를 꾸몄는데 감히 어길 것이냐고.

폭언을 하거나 운룡을 뽑아 위협하지 않은 건 제갈세가에 대한 예우.

제갈문소는 형인 제갈문형을 떠올리며 내심 한숨을 쉬었다.

‘후우우. 형님과의 연 때문에 오늘 큰 도움을 준 것이겠지. 본가의 복이로다.’

사마련이 진천뢰를 썼으면 아무리 제갈세가라 해도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났을 터.

꽤 무거운 빚을 지게 되었으나 못 갚을 정도는 아니었다.

‘진천뢰를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갚을 시기를 비약적으로 당기고 이익도 거둘 수 있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이자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선 반드시 그래야 했다.

그럴 자신도 있었고.

제갈문소는 상념을 털어낸 뒤 중얼거렸다.

“사마련의 사기가 말이 아니겠군.”

“정신을 차리면 또 장원을 공격할지도 모르지만 길어야 내일 아침까지겠죠.”

“방심하지 않고 대처하겠네. 자네는 이제 어떡할 생각인가?”

정광은 제갈문형과 제갈린에게 사천성에서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 줬다.

무림맹으로부터 들은 정보 외의 것들이 나오자 제갈세가 숙질(叔姪)이 눈을 빛냈다.

“자네의 말을 들으니 사마련주가 뭘 노리는지 그림이 맞춰지는군.”

“다른 무언가가 또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진옥룡,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우선…….”

몇 차례 질문과 답변이 오간 뒤 제갈문소와 제갈린은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정리했다.

“보통 일이 아니군. 무림맹에 계신 형님께 바로 전서구를 띄우겠네.”

“본가 식솔들에게도 알려 준비를 해놓을게요.”

“네. 그럼 수고하세요.”

정광은 제갈린에게 부탁해 질 좋은 기름을 먹인 종이로 문서를 몇 겹이나 싼 뒤 일어섰다.

“아. 준마(駿馬) 몇 마리만 얻을 수 있을까요? 셈에서 제해 드릴게요.”

제갈문소가 피식 웃었다.

“최대한 좋은 놈들로 주고 많이 제하는 거로 하지.”

“또 있는데, 우선…….”

정광이 필요한 것들을 더 말하자 제갈문소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우리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군. 자네다운 수야. 정말 자네다워.”

“어째 좀 안 좋은 의미 같네요.”

“린아, 그대로 준비해 주겠느냐?”

제갈문소는 제갈린을 시켜 말과 물건들을 준비하게 했다.

그리고 정광과 단둘이 있게 되자 낮은 목소리로 당부했다.

“제발 몸조심하게. 이미 자네를 중심으로 여러 가문과 문파가 하나로 모인 상황일세.”

곤륜, 하북팽가, 사천당가, 산동악가, 개방, 아미, 청성 등을 말함이었다.

“남궁세가를 위시한 많은 이들이 우리를 견제하고 있지. 헌데 구심점인 자네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어찌 되겠는가?”

남궁세가 세력에서 ‘옳다구나’ 하며 공격할 것이다.

도검은 못 휘두르더라도 쓸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하지 않은가.

정광을 중심으로 모였던 세력은 그에 맞서 싸울 테지만 힘만 놓고 보면 현저히 밀릴 터.

아니, 그전에 자중지란(自中之亂)이나 일어나지 않으면 다행일까.

“거듭 말하네만 조심하게. 한 손으로는 열 손을 당해낼 수 없어.”

“백 손 정도는 가뿐한데요.”

“…….”

“수준이 낮으면 천 손도 괜찮고요.”

“……그래. 알아서 잘할 거라 믿네.”

정광이 씩 웃었다.

“네. 믿으세요.”

* * *

제갈문소의 집무실에서 나오자 웅성거리고 있는 세가 사람들이 보였다.

정광은 그들에게 두 손을 모으며 인사했다.

“무량수불. 안녕하세요, 곤륜의 정광입니다. 제가 좀 바빠서요. 다음에 봬요.”

“…….”

“가주님, 저 갈게요. 안녕히 계세요.”

“무운을 비네.”

정광은 네 필의 준마와 부탁한 물건들을 준비해 놓은 제갈린에게 다가갔다.

“잘 쓸게요.”

“아닙니다. 무혈단원들은 잘 있나요?”

“아마 그런 것 같긴 한데…….”

“……?”

정광은 제갈린의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같이 가고 싶으세요?”

“……!”

제갈린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알았죠?”

어떻게 알긴.

빤히 보이는데.

아주 안달 난 눈빛 아닌가.

‘위진홍만은 못 하지만 머리가 돌아가는 애니까 데려가도 괜찮겠지.’

둘이 붙여놓으면 아웅다웅할 터.

꽤 재밌을 것 같았다.

“가고 싶으시면 가요.”

제갈린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정광을 따라 중원을 질타하고 싶었다.

그가 그려내는 그림의 한 축을 담당해 색을 입히고 싶었다.

‘하지만…….’

제갈린은 천천히 입을 떼었다.

“아니요. 사양하겠습니다.”

“왜요?”

“당신은 너무 뛰어나거든요.”

뛰어난 이의 곁에 있으면 항상 비교되어 묻히기 십상이다.

주도적으로 일을 해나갈 수도 없다.

야망이 큰 그녀에게 정광은 매력적이면서도 피하고 싶은 존재였다.

정광은 바로 이해했다.

“그럼 변룡(便龍)…… 아니, 검룡(劍龍) 남궁 공자와 함께하실 건가요?”

“푸흣. 지금이야 그가 지룡단의 단주고 제가 군사니 함께 행동해야 하겠죠. 하지만 앞으로는 모르겠네요. 다만, 확실한 건…….”

제갈린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당신을 적대할 생각은 없어요. 당신이 나를 적대하면 최선을 다해 저항하겠지만.”

“흐음…….”

정광은 제갈린의 눈에서 그녀의 아비를 보았다.

“무림맹의 군사가 되실 생각이죠? 명목뿐인 군사가 아니라 진짜 군사.”

“……정말 모르는 게 없군요.”

모르는 게 없어서가 아니라 당연한 일이었다.

정파무림의 많은 이들을 봐왔으나 그녀 또래에 그녀만큼 머리가 좋은 이는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렇게 될 만한 자격이 있었다.

‘이대로 잘만 큰다면 말이지.’

돈도 더 빨리 받아낼 수 있으리라.

제갈세가와 곤륜의 사이가 괜찮은 편이니 훗날을 생각해서도 좋고.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정광이 두 손을 모으자 제갈린도 정중하게 화답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정광은 말 위에 올라 예비마들의 고삐를 쥐며 외쳤다.

“그럼 갑니다!”

제갈세가 사람들은 모두 포권을 하며 정광의 무운을 빌었다.

그 속에는 가주인 제갈문소도 있었다.

“가자!”

히히히힝!

정광이 말고삐를 내려치자 그를 태운 준마가 투레질하며 앞발을 치켜들었다.

다시 그 발을 내디디며 땅을 박차려는 그때!

정광이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잠깐!”

히허허헝!

준마가 괴로워하며 울부짖었다.

정광은 말갈기를 대충 쓰다듬으며 제갈문소에게 청했다.

“가주님. 나가야 하니까 기관진식 좀 풀어주시겠어요?”

* * *

서훈은 한오의 목을 치지 않고 풀어줬다.

“바, 방주. 왜……?”

놀란 한오와 달리 서훈의 얼굴은 담담했다.

“네놈이 좋아서 이러는 게 아니다. 한 사람의 손도 부족해서 그러는 것이야.”

한오는 바로 알아들었다.

최후의 무기였던 진천뢰를 뺏긴 상황.

어떻게든 되찾아야 했다.

그래야 그들이 살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방주. 목숨을 걸고 싸우겠습니다.”

한오는 말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마련 무인들 선두에 섰다.

서훈이 그 옆에 자리했다.

“……방주?”

“어떻게든 뚫어야 한다. 제갈세가를 멸하고 진천뢰를 회수해야 해.”

서훈은 뒤로 돌아 수하들에게 외쳤다.

“모두 알 거라 믿는다! 우리가 살길은 단 하나! 제갈세가의 담을 넘어 물건을 되찾는다!”

수하들이 굳은 얼굴로 병기를 움켜쥐었다.

“제갈세가를 멸한다!”

모두 병기를 치켜들며 함성을 질렀다.

“진옥룡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하되, 마주치면 합공을 해라! 제갈세가 내에서 진천뢰를 터뜨릴 수는 없을 터! 그도 한낱 인간임을 명심하라!”

수하들이 병기를 허공에 휘저은 뒤, 자세를 낮추고 땅을 박차려는 그때!

끼이이이익-

제갈세가의 정문이 열리며 말 네 필이 튀어나왔다.

“저, 저건!”

“지, 진옥룡!”

준마에 올라탄 정광이 세 필의 말을 이끌고 달려왔다.

사마련 무인들의 눈에 살기가 떠올랐다.

이 많은 인원을 상대로 정면승부라니!

미치지 않고서야 말이 되는 일인가!

‘아니야. 미친놈이긴 하지.’

‘무슨 상관이랴. 죽이자!’

그래, 죽이면 된다.

저 오만하고 정신 나간 놈을 죽이면 되는 거다!

그 여세를 몰아 제갈세가를 치면 되고!

그런데.

한 예비마의 등에 익숙한 것이 실려 있었다.

“저, 저건!”

“궤, 궤짝이잖아!”

“진천뢰 궤짝이다! 저 미친놈이 또 들고 나왔어!”

애써 끌어 올렸던 사기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서훈의 눈에도 짙은 그늘이 생겼다.

‘이를 어쩌지? 대체 어떡해야…….’

우유부단한 그 대신 필사의 각오를 다진 한오가 외쳤다.

“허장성세다! 빈 상자일 게 분명해! 그 위험한 걸 말에 싣고 저렇게 미친 듯이 달릴 리가 없지 않느냐!”

수하들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진천뢰는 불이 붙어야 폭발하는 기물이지만 사람인 이상 조심스럽게 다룰 수밖에 없다.

헌데 말 등에서 저렇게 충격을 받으며 서로 부딪치게 한다?

이건 말이 안 되는…….

‘아니야. 저 새끼라면 가능해!’

‘미친! 저놈을 계속 보니까 나까지 미친 것 같잖아!’

그래도.

아무리 정광이라도 이번만큼은 아니겠지.

사마련 무인들은 상식적으로 생각했다.

그렇기에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서훈도 덩달아 힘이나 외쳤다.

“저놈의 목을 당장 쳐…… 잠깐! 잠까아안! 취소다, 취소!”

수하들은 그를 욕할 정신도 없었다.

정광이 궤짝에서 진천뢰 하나를 꺼내 든 걸 봐서였다.

“저 악귀가 또!”

“튀어! 보나 마나 불을 붙일 거야!”

사마련 무인들은 미친 듯이 좌우로 갈라졌다.

서로 밀고 밟으며 비명을 지르는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아수라장!

정광은 뻥 뚫린 길을 말달리며 인사했다.

“안녕히 계세요! 다음에 봬요!”

사마련 무인들은 입을 떡 벌린 채 정광의 뒷모습만 바라봤다.

쫓을 엄두도, 그렇다고 제갈세가를 칠 의욕도 나지 않았다.

오직 정광의 마지막 말만이 귓속을 맴돌았다.

‘다음에 봬요!’

* * *

정광은 한동안 달린 뒤 진천뢰를 궤짝 속에 던졌다.

텅- 터덩-

진천뢰가 빈 궤짝 안에서 구르며 둔중한 소리를 냈다.

‘편하게 빠져나오긴 했고.’

십리추종후각신공(十里追從嗅覺神功)을 운공하자, 십리추종향(十里追從香)의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저쪽이네.’

공우와 무혈단이 달려간 방향이었다.

‘잘 쫓고 있으려나. 아니면 버티고 있으려나.’

둘 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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