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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마협-198화 (197/569)

19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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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대단한 기물(奇物)도 소홀히 다루면 못 쓰게 된다.

기물은 물건 자체의 효능도 중요하지만 제대로 관리를 해야 그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진천뢰(震天雷)들은 상등품임이 분명했다.

어찌나 심지에 기름을 잘 먹였는지, 잘도 타들어가지 않는가.

‘이것들이 터지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되긴.

죽는 거지.

육신의 파편조차 남기지 못할 정도로 처참하게.

정광은 전생보다 오래 살 계획이었다.

궤짝을 안고 있는 한오에게 재빨리 외쳤다.

“움직이지 마세요!”

어차피 한오는 바짝 얼어 미동도 못 하는 상태였다.

기절하지 않은 게 용할 지경.

심지가 타들어가며 튀어 오르는 불꽃이 그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이렇게 죽는 건가…….’

죽음이 닥치면 지난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더니.

개소리.

주마등 따위가 아니라 눈부신 금룡(金龍)이 보였다.

정광의 허리춤에서 포효하며 튀어나온 금룡이 한오의 가슴을 가르고 지나갔다.

“커헉!”

상반신이 양단된 걸까.

금룡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지만 분명히…….

“휴우. 살짝 위험했어.”

분명히…….

“아직도 타네. 어떻게 만들었기에 이런 거야?”

분명히…….

‘……사, 살아 있어?’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오자 정신이 확 깼다.

한오는 정광을 보고 나서야 어찌 된 연유인지 알 수 있었다.

‘말도 안 돼!’

아니,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정광은 검을 수평으로 뻗은 채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검붉은 검신 위에는 토막 난 심지들이 죽 늘어서 있었는데 마지막 불꽃을 태우다가 사그라들었다.

‘몽땅 베었다고?’

한오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안고 있는 궤짝을 내려다봤다.

“……허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진천뢰들의 심지가 사라진 것 아닌가!

원래 그랬던 것처럼 매끈하게!

도저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일검으로 심지들을 전부 벤 것이오?”

정광이 운룡을 손가락으로 튕기자 까만 재가 된 심지들이 날아갔다.

“네.”

“……어, 어떻게?”

“유룡검(遊龍劍)에 쾌(快)의 묘리를 더해서 휘둘렀는데요.”

“……아하.”

아하는 무슨.

이해가 안 갔지만 달리 할 말이 없어 얼결에 말했을 뿐이다.

이런 괴물과 말을 더 섞어봐야 뭐 하겠는가.

정광은 운룡을 검집에 넣은 뒤 주변을 둘러봤다.

모두 입을 떡 벌린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 많이 하셨어요? 그냥 저를 믿으시지.”

“…….”

믿을 놈이 따로 있지.

저런 미친놈을 어떻게!

“뭐 그건 그렇고. 어쩐다…….”

정광은 진천뢰 하나를 위로 던져 올렸다가 받기를 반복하며 생각에 잠겼다.

사람들의 시선이 진천뢰를 따라 오르락내리락했다.

‘아까 수도로 심지를 잘랐던 진천뢰잖아.’

‘저건 심지가 반이나마 남아 있구나. 서, 설마?’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저 미친놈이 또 불을 붙일 게 분명하다고!

정광은 오해를 많이 받는 편일 뿐, 그럴 생각이 없었다.

지금 당장은.

‘심지를 하나 빼고 몽땅 잘라 버려서 써먹지 못하게 됐네.’

물론 하나를 터뜨리면 그 충격으로 다른 것들도 폭발할 것이다.

허나 한곳에 모인 채 터지면 살상범위가 줄어들 수밖에.

사방으로 뿌리는 것보다 훨씬 못한 결과가 나올 게 분명했다.

‘그런 식으로 버리는 건 아깝고. 차라리…….’

생각을 정리한 정광은 화섭자를 꺼내 들었다.

“후…… 후…….”

입바람을 불어넣자 바로 불씨가 타올랐다.

그것을 진천뢰 심지에 붙였다.

치이이이익-

경쾌한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야 이 미친 새끼야!”

“또 붙였어! 또 붙였다고!”

사마련 무인들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수장인 서훈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고통을 당한단 말이냐!’

아마도 꽤 깊은 죄였나 보다.

진천뢰가 우아한 포물선을 그리며 그의 머리로 떨어지고 있었다.

정광이 두 손을 입가에 모으며 외쳤다.

“무량수불! 다들 조심하세요!”

“……!”

제가 던져놓고 무슨 개소리를!

분노가 들끓었다.

마음의 평정을 지켜야 제대로 된 실력을 보일 수 있는 게 무인이건만.

극도의 분노가 솟구치며 삶에 대한 의지도 강해졌다.

서훈을 비롯한 사마련 무인들은 동시에 움직였다.

튀어! 피해라!

이딴 말을 외칠 힘도 아까웠다.

단전의 내공을 박박 긁어내고 육신의 모든 근육을 쥐어짜 신법을 펼쳤다.

그야말로 이형환위(移形換位)에 가까운 움직임!

그것도 단체로!

콰아아앙!

진천뢰가 허공에서 엄청난 소리를 내며 터졌다.

수많은 파편들이 팔방으로 쏘아졌다.

암기 고수가 던진 걸 능가하는 빠르기!

사마련 무인들은 필사적으로 병기를 휘둘렀다.

요란한 소음과 함께 파편들이 튕겨 나갔다.

몸에 박히고, 뚫고 지나가기도 했으나 신음을 흘리는 이는 없었다.

그저 하나하나 피하고 막을 뿐.

사는 게 우선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살아나자…….

“으드득.”

모두 이를 악물었다.

이제 돌려줄 시간이었다.

이런 미친 만행을 저지른 대마두(大魔頭)에게 정의의 심판을!

“진옥료오오오오옹!”

서훈이 한 맺힌 사자후(獅子吼)를 토해내며 정광이 있던 곳을 돌아봤다.

“내 천하를 위해 네놈을 용서치 않겠…… 응?”

두 눈을 비비고 다시 봤으나 그대로였다.

정광이 사라지고 없는 것 아닌가!

한오만 넋이 나간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것도 빈손으로!

정광이 진천뢰 궤짝을 꿰차고 도주한 것이다!

“어, 어느새!”

“어디로 간 거냐!”

“저쪽이다! 저쪽에 있어!”

한 사내가 손가락질하자 다들 목이 부러져라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정광이 어깨에 궤짝을 짊어진 채 제갈세가의 담을 뛰어넘고 있었다.

장창과 화살 세례가 쏟아졌으나 정광의 손에 들린 금룡이 모두 찢어발겼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신위였다.

서훈과 사마련 무인들은 허탈한 얼굴로 하나둘 주저앉기 시작했다.

긴장감이 사라지며 진이 빠졌다.

복수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저런 귀계와 무공을 지닌 자를 어떻게 상대하겠는가?

서훈의 한숨 섞인 중얼거림이 모두의 귀를 울렸다.

“이건 악몽이다. 그래. 악몽을 꾼 거야…….”

* * *

정광은 장원의 담을 뛰어넘으며 아래를 훑어봤다.

핏빛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음양(陰陽)을 역으로 돌리고 구궁(九宮)을 하나씩 옮겨서 살짝 꼬았네.’

정광은 뜻이 서면 몸이 움직이는 경지에 이른 고수.

장원 안에 내려서자마자 발걸음을 옮겼다.

오보 전진했다가 이보 물러나고, 좌로 일보 움직였다 펄쩍 뛰어 삼장(三丈) 너머 착지했다.

흘깃 돌아보자 핏빛 바다가 푸른 잔디밭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나는 됐고.’

한 발 성큼 내딛자 땅이 꺼졌다.

그대로 추락해서 밑에 꽂혀 있는 죽창에 발이 꿰었다.

하지만 그대로 걸음을 내디뎠다.

구덩이에 처박혔던 정광은 어느새 지면에 올라와 걷고 있었다.

아까 것은 환각.

꽤 대단했으나 정광의 부동심을 깰 정도는 아니었다.

‘두 번째도 끝. 다음은…….’

이리저리 이지러지는 길을 그냥 똑바로 걸었다.

방향감각에 혼란을 주어 같은 자리를 맴돌게 하는 진(陣) 따위는 정광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오오. 관리 잘했네. 사조가 봤으면 좋아했겠는걸.’

세 번째 진을 벗어나자 아름다운 화원이 나타났다.

곤륜은 가난해서 제대로 된 화원을 가질 수 없었으나, 지금껏 번 돈의 일부를 보냈으니 이 정도는 가꾸고 있으려나.

정광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운후는 꽃을 사랑하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보나 마나 귀한 사손(師孫)이 보낸 돈을 어찌 헛되이 쓰냐며 빈민구제에나 밀어 넣고 있겠지.’

정광은 운룡을 뽑아 들고 걸음을 옮겼다.

나무에서 암기가 튀어나오고 수풀이 독을 뿜어냈으나 금룡이 만들어낸 벽을 뚫을 수는 없었다.

‘네 번째도 통과. 흐음. 여기부터 진짜인가.’

정광은 눈을 가늘게 떴다.

또 다른 여러 진이 중첩되며 만들어진 뿌연 안개 때문에 시야 확보가 여의치 않았다.

‘귀찮게 하네.’

안 보이면 느끼면 되는 법.

눈을 감고 기감을 키웠다.

진들이 뿜어내는 기운과 그로 인해 변형된 기의 흐름이 손에 잡힐 듯 그려졌다.

그리고…….

익숙한 기운을 발견했다.

“어? 여기 계셨어요?”

“…….”

“나만 반가운가 보네.”

정광이 피식 웃은 뒤 말을 이었다.

“제가 좀 바빠서요. 기관진식 좀 멈춰주실래요? 아니면 전부 파괴해야 하거든요.”

“…….”

정광은 한쪽 방향을 바라보며 어깨 위의 궤짝을 툭툭 쳤다.

“제갈 소저, 왜 그리 과묵해지셨어요. 진천뢰 아시죠? 다 터뜨리면 말문이 트이시려나.”

“……그것만큼은 참아주십시오.”

침착한 목소리와 함께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기관진식이 멈추는 소리였다.

얼마 안 가 안개가 걷히고 주변의 모습이 드러났다.

제갈린과 문사(文士)처럼 차려입은 염소수염의 중년인이 정광을 보고 있었다.

제갈린이 담담한 표정으로 포권했다.

“진옥룡, 제갈세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정말 환영했으면 진작에 진을 거두셨을 텐데.”

“가주께서 조금 더 보고 싶다고 하셔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정광의 시선이 염소수염 중년인에게 옮겨졌다.

“안녕하세요, 가주님. 곤륜의 정광입니다.”

“반갑네.”

“근데 뭐가 그렇게 궁금하셨어요?”

제갈세가 가주 제갈문소가 한숨을 쉬었다.

“후우우. 문형 형님께서 자네를 어찌나 칭찬하시던지. 진옥룡을 조금이나마 알려면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고 하시더군.”

“확인되셨나요?”

“그렇다마다.”

제갈문소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뒤 두 팔을 벌렸다.

“어서 오게나. 진옥룡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하네.”

“감사합니다. 그럼 잘 쳐주실 거죠?”

“……무슨 말인가?”

정광은 짊어지고 있던 진천뢰 궤짝을 바닥에 내려놨다.

쿵!

제갈문소와 제갈린이 움찔했으나 정광은 신경 쓰지 않고 물었다.

“이거 꽤 비싼데. 얼마에 사주실 거예요?”

* * *

사마련 무리들이 물러난 곳에서 폭음이 터졌을 땐 깜짝 놀랐다.

누가 들어도 화약이 폭발하는 소리 아닌가.

그런데 지금, 그것들이 눈앞에 있었다.

제갈문소는 진천뢰들을 보면서 염소수염을 쓰다듬었다.

‘탐이 나긴 하는군.’

이건 돈이 있다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연히 그만큼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잠시 뒤, 그의 시선이 정광에게 향했다.

“자네 것일 리는 없고. 사마련에게서 뺏은 것인가?”

“아뇨. 주웠는데요.”

“주웠다…… 듣던 대로군. 덕분에 살았네. 저들이 이걸 썼으면 위험할 뻔했어.”

“뭘요. 그 값도 쳐주시면 되죠.”

제갈문소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너무 위험한 물건이야. 따로 사례는 하겠네만 그걸 사는 건 무리지. 자네도 멀리하는 게 좋을 걸세.”

“괜히 가지고 있다가 역모를 뒤집어쓰게 되실까 봐요?”

“그렇네.”

“에이. 왜 쓸데없는 걱정을 하세요.”

“설명을 좀 해주겠나?”

정광은 기꺼이 그랬다.

“사마련이 아무리 미쳤다 해도 진천뢰를 털 리는 없죠.”

“동의하네.”

“누군가를 통해 빼내고 써도 된다는 보장을 받았을 거예요. 제갈세가는 관(官)에 발이 넓으시죠? 그걸 좀 더 알아보신 뒤 진천뢰를 잘만 활용하면…….”

제갈세가는 대대로 머리가 좋은 가문이다.

제갈문소는 정광의 말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시간만 쏟으면 진천뢰의 재료와 배합, 제조 방법을 알아낼 자신은 있지.”

“네. 그건 일단 보관하시고. 진천뢰를 빼돌린 건 대역죄니 제갈세가와 이어져 있는 관리들에게 건네면 그들은 큰 공을 세우게 되겠죠.”

“황제가 사마련의 뒷배일 리는 없고. 혹시 황족이라면 머리가 아파질 텐데.”

“그럼 그냥 바로 황제에게 진상하시던가요. 운 좋으면 세금 감면, 아니면 몇 마디 치하를 받고 끝나겠지만 충신이라는 칭호와 명망은 얻으시게 되겠죠.”

세금 감면도 좋으나 정파무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명분과 민심.

관에 굴복하는 게 아니라 역모를 제지하는 거다.

황제의 비호는 물론 민초들의 존경을 받게 될 터.

‘황제가 일을 키우지 않으려고 입을 막으려 들 수도 있지. 하지만 무림맹을 통해 진상하면?’

정파무림을 지울 순 없다.

제갈문소는 내심 빙그레 웃었다.

‘역시. 형님께서 아끼실 만하군.’

형인 제갈문형이 그랬듯이 아우인 제갈문소도 정광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하는 거로 하세.”

“시원시원하셔서 좋네요.”

“그런데…….”

제갈문소가 어깨를 으쓱했다.

“미안하네만, 본가는 지금 속된 말로 개털일세. 기관진식을 증설하느라 전부 쏟아부었거든.”

“아.”

“그러니 좀 나중에 지급하겠네. 어떤가?”

“나중이 언제쯤이죠?”

제갈문소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염치없네만. 한 칠팔십 년 뒤?”

정말 염치없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나 돼야 예전의 성세를 회복할 것 같았다.

진천뢰를 잘 쓰면 시간을 많이 단축할 수 있겠지만 정광이 받아들여야 가능한 일.

‘죽고 나서야 줄 거냐고 화를 내도 어쩔 수 없지.’

내심 각오하고 있는데.

정광이 시원시원하게 받아들였다.

“노후자금으로 쓰면 되겠네요. 그렇게 해요.”

“……괜찮은가?”

“물론이죠.”

제갈문소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정광으로선 당연한 일이었다.

전생에도 백 년이 훌쩍 넘게 살았고, 현생에는 더 오래 살 것이었기에.

이를 짐작조차 못 하는 제갈문소는 숨김없이 감탄했다.

“자네, 소문과 다르게 마음이 무척 넓군.”

“뭘요.”

정광이 한마디 덧붙였다.

“당연히 문서로 남겨주실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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