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197화 (196/569)

197화

상등품(上等品)

사마련 무인들은 제갈세가의 장원에서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위치까지 물러났다.

다친 이들도 꽤 있었으나 움직이는데 별 지장이 없는 경상자들이었다.

중상을 입은 자들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들은 모두 장원 근처에 쓰러져 있었다.

죽은 이들과 함께.

‘금방 끝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거늘…….’

청수한 인상의 노인은 피해 상황을 보고받으며 혀를 찼다.

자신 있게 공격을 시작했건만 계속 손해만 보고 있는 상태.

적지 않은 피해였다.

일을 맡긴 련주의 얼굴을 떠올리자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

‘한 소리 듣겠군. 아니, 손가락 몇 개는 잘릴지도…….’

그것도 제갈세가를 멸해야 경감받을 처벌이다.

이대로 물러났다간 손가락이 아니라 목이 날아갈 터.

청수한 노인, 적우방(積雨幇) 방주 서훈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결국 그 수밖에 없는가.’

련주가 지시했으나 따르고 싶지 않은 방법이었다.

허나 어쩌겠는가.

다른 길이 없는 것을.

그래도 영 찜찜해서 계속 망설이는데…….

그의 의중을 읽은 듯 옆에 시립해 있던 중년인이 조용히 간언했다.

“방주. 련주는 잔인한 사람입니다. 방주를 믿고 일을 맡겼기에 더 큰 벌을 내릴 겁니다.”

“……끄응.”

서훈은 앓는 소리를 냈다.

심복이 말한 것처럼 련주는 그런 자였다.

“총단의 무력대가 몇 대만 있었으면 이런 고생은 안 했을 텐데…….”

“그래도 많은 인원을 방주께 맡기지 않았습니까.”

“그 정도론 안 되니까 말하는 게다. 제갈 놈들이 저렇게 방비를 굳히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느냐.”

“문제는 련주가 그런 것을 참작할 사람이 아니란 것이지요.”

“후우우…….”

“방주,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서훈은 중년인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결정을 강요하지 마라.”

“방주.”

“그만. 네가 오래전부터 내게 충성해 왔기에 아직 죽이지 않고 있는 게야.”

“…….”

서훈은 중년인을 침묵시킨 뒤 조금 더 생각해 봤다.

허나 쓸 만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유일한 길은 련주의 명을 따르는 것이었다.

“……그것을 쓴다. 준비해.”

“네, 방주.”

서훈은 몸을 홱 돌려 자신의 천막으로 들어갔다.

중년인은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 있다가 서서히 폈다.

그의 눈에는 짜증스러운 빛이 떠올라 있었다.

‘망할 영감 같으니. 어차피 이럴 걸 왜 쓸데없이 미적대는 거야.’

중년인 한오는 적우방에 몸을 의탁한 이래로 최선을 다해 서훈을 보필해 왔다.

충성은 무슨, 서훈을 위한 게 아니라 자신을 위해 그런 것이었다.

‘과거엔 괜찮은 배였으나 시간이 갈수록 썩어가는군. 갈아탈 준비를 해야겠어.’

무공이 높으면 뭐 하는가.

판단이 느리고 결정은 더 느린데.

서훈은 무공이 아까울 정도로 보신에만 신경 쓰는 우유부단한 자였다.

‘그래서 련주가 요즘 들어 힘을 실어주는 거겠지.’

서훈 같은 자일수록 받은 명령은 칼같이 지킨다.

윗사람에게 흠잡힐 만한 일은 극도로 기피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무림맹에게 조금씩 밀리는 상황.

련 내부에서 이런저런 불만이 나오는 요즘, 련주가 부리기 좋은 수하는 서훈 같은 자였다.

‘그나저나…….’

한오는 걸음을 옮기며 침을 꿀꺽 삼켰다.

서훈의 천막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천막이 그의 두 눈 속에 가득 맺혔다.

‘저걸 정말 쓰게 될 줄이야…….’

방주가 결단을 내리도록 재촉했으나 막상 그렇게 되니 긴장감이 엄습했다.

천막을 지키던 자들이 예를 표해도 눈에 안 들어올 정도였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지만 천막 안에 들어가자 모두 사라졌다.

한오는 바닥에 있는 궤짝을 노려보다가 천천히 열었다.

끼이익-

경첩의 소름 끼치는 비명과 함께 궤짝 안에 있던 것들이 드러났다.

어린아이 머리통만 한 크기의 구체(球體)들.

한오의 입에서 억눌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천뢰(震天雷)…….”

“와. 이게 그 유명한 진천뢰예요?”

“그렇다. 이게 바로…… 헉!”

얼결에 대답하던 한오가 경악하며 돌아섰다.

코앞에 눈부신 미청년이 있었다.

한오는 지체하지 않고 장력을 날렸다.

“합!”

그리고 확신했다.

어떻게 지척까지 다가왔는진 모르지만, 얼마나 고수인진 알 길이 없으나 이 짧은 거리에서 피할 수는 없으리라고.

“헉!”

그의 생각은 반만 맞았다.

미청년은 피하지 않고 한오의 손목을 한 손으로 낚아챘다.

한오의 몸이 청년에게 끌려갔다.

청년은 다른 한 손으로 한오의 뒷목을 잡고 아래로 끌어당겼다.

동시에 무릎을 올려쳤다.

한오의 시야가 까맣게 변했다.

쾅!

“흑!”

턱을 얻어맞은 그는 그대로 쓰러졌다.

가물거리는 의식 사이로 한 가지 의문이 스며들었다.

‘대, 대체 누구……?’

한 별호가 떠오를락 말락 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의식을 잃은 자가 무엇을 더 생각할 수 있겠…….

짜악!

“큭!”

미청년이 따귀를 한 대 갈긴 뒤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으세요? 정신 차리세요.”

정신이 번쩍 돌아온 한오는 아까 떠올리던 별호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지, 진옥룡!”

미청년 정광이 손가락을 세워 자신의 입술에 댔다.

“쉿. 지금부터 조용히 말하세요. 소리를 차단하기 위해 내공 쓰기 아까우니까요. 우선 밖에서 지키고 있는 분들부터 물러나라고 해주실래요?”

* * *

휙-

탁.

휘익-

턱.

정광은 진천뢰를 위로 던져 올렸다가 받고, 다시 던져 올렸다가 받기를 반복했다.

‘그가 여기에 안 들르고 가버린 건 이걸 믿어서였나 보네.’

사마련주는 제갈세가를 치고도 남을 만큼 많은 인원을 보냈으나 제갈문형의 과감한 투자가 상황을 바꿔 버렸다.

허나 말로만 듣던 진천뢰라면 이 상황을 다시 뒤엎고도 남으리라.

‘그런데 이거, 정말 괜찮은 건가?’

정광은 생각에 잠긴 채 계속 진천뢰를 던져 올렸다 받았다.

한오의 눈이 진천뢰의 움직임에 맞춰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그, 그망…….”

“네?”

한오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간신히 말을 이었다.

턱에 금이 간 것치곤 아주 정확한 발음이었다.

“제, 제발 그만하시오. 그러다 다 죽소.”

“이거, 심지에 불붙여야 터지는 거 아닌가요?”

“그렇긴 하지만…….”

“아. 충격에도 약해요?”

“그런 말은 못 들었으나 그래도 조심해야 하지 않겠소?”

정광은 어이가 없었다.

‘조심을 따지는 놈이 이걸 터뜨리려고 해?’

관(官)이 무림에 상관 안 한다 하나, 선을 넘으면 얘기가 달랐다.

화약은 그 선을 넘어도 한참 뛰어넘은 것.

역모로 다스릴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다.

‘관은 화약의 재료는 물론 제조하는 장인도 엄격히 관리하지. 무림인이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야. 어디서 구한 걸까? 이거 혹시…….’

정광은 대놓고 물어봤다.

“황제랑 친해요?”

“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그쪽 말고 련주요, 련주.”

말이 안 되긴 마찬가지.

황제가 뭐가 아쉬워서 무림인, 그것도 사파무림의 수괴와 연을 맺겠는가.

“역시 아니겠죠. 그럼 고관대작(高官大爵)쯤 되려나? 아니야, 황실의 꽤 높은 인물이 연관돼 있을지도…….”

정광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불쑥 말했다.

“그 정도는 돼야 진천뢰를 관에서 빼돌리고 쓸 마음도 먹을 수 있을 텐데요.”

“나, 나는 모르는 일이오.”

“정말요?”

“무, 물론이외다.”

“한번 확인해 보죠.”

일다경(一茶頃) 후.

정광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오를 칭찬했다.

“정말이네. 믿을 만한 분이시군요.”

“크흑…… 고,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근데 아시는 게 너무 없네요. 방주만큼은 아신다고 소리치시더니 이게 뭐예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조용히 하시면 생각해 보죠.”

“흡!”

정광은 한오를 침묵시킨 뒤 지금까지 얻은 정보를 정리했다.

‘제갈세가를 치는 데 문제가 생기면 걱정하지 말고 쓰라 했다고? 이해가 안 가는 꺼림칙한 말이지만 련주가 거짓말을 한 건 아닐 거야.’

만약 거짓말이라면 사마련은 관의 표적이 된다.

련주가 스스로 제 목을 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직접 강호에 행차했으니 반드시 무당파와 제갈세가를 지워야겠지. 웬만하면 안 쓰는 게 좋겠지만 답이 없으면 쓰라고 한 것도 당연해.’

결국 사마련주가 누구와 선을 대고 있냐가 문제였다.

그리고 그건 련주에게 직접 물어봐야 들을 수 있으리라.

정확히는 련주를 때려눕히고 나서야.

‘일단 알 건 다 알았고.’

그만 나가봐야 했다.

삼엄한 기운이 사방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뭐 어쩔 수 없지. 연유를 파악해야 했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뭐가 그래요. 무슨 말인지도 모르시면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일어나세요.”

“네!”

정광은 한오의 옷매무새를 고쳐줬다.

그리고 빙긋 웃으며 부탁했다.

“저 좀 도와주실래요.”

* * *

서훈은 초조한 얼굴로 진천뢰가 있는 천막을 노려봤다.

‘잔머리는 많이 굴리지만 제 목숨은 끔찍이 아끼는 놈이다. 아직도 저 안에 있다는 건 문제가 생긴 거야.’

그때, 한 중년인이 다가와 보고했다.

“방주, 포위를 마쳤습니다. 명을 내려주십시오.”

“…….”

서훈은 잠시 고민했다.

이대로 칠까, 좀 더 기다릴까.

행인지 불행인지 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저, 저건!’

천막에서 사람이 나오고 있었다.

익히 아는 얼굴, 한오였다.

서훈의 입에서 노성이 터져 나왔다.

“네 이놈! 지금 뭐 하는 짓이냐! 그걸 왜 열고 있어!”

한오는 덮개가 없는 궤짝을 양팔로 껴안고 있었다.

그 속에 담긴 칙칙한 빛깔의 진천뢰들이 서훈의 두 눈을 아프게 찔렀다.

“바, 방주. 저, 저는…….”

“변명하지 마세요. 사내라면 당당해야죠.”

정광이 뒤늦게 나와 한오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 황당한 모습에 서훈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저, 저놈은 또 뭐야? 언제 어떻게 들어온 거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만큼은 알 수 있었다.

저렇게 우아한 도복에 화려한 외모라니.

서훈의 벌어진 입에서 신음 섞인 말이 흘러나왔다.

“진옥룡…….”

정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떻게 만나는 사람마다 딱 보면 알지?”

“네놈이 여긴 웬일이냐!”

“방주님은요?”

“나야 제갈세가를 치려고…….”

“저는 막으려고요. 뻔한 걸 왜 물으세요.”

“…….”

서훈의 눈이 점점 깊게 가라앉았다.

‘놈을 만나면 말을 섞지 말라는 소문이 돌더니. 사실이구나.’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복장이 터지려고 했다.

그야말로 명불허전(名不虛傳) 아닌가!

마음을 가라앉히자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기회군.’

광오하다고 듣긴 했으나 홀몸으로 사지에 뛰어들다니.

지금이 바로 악명 높은 진옥룡을 죽일 기회!

인질로 잡힌 것 같은 한오에겐 관심도 없었다.

제법 똘똘한 녀석이나 어쩌겠는가.

대의를 위해 희생해야지.

서훈은 한쪽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가 힘차게 내려치며 외쳤다.

“저놈의 목을 당장 쳐…… 잠깐! 취소! 취소다! 모두 움직이지 마!”

정광에게 쇄도하려고 한 발 내딛으려던 사마련 무인들이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이런, 썅!’

‘이놈의 영감이 노망났나! 웬 장난질을…… 헉!’

내심 욕설을 내뱉던 무인들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들의 시선은 모두 한쪽에 모여 있었다.

바로 정광의 손에 들린 화섭자(火攝子)였다.

‘미, 미친!’

‘설마 불을 붙이진 않겠지?’

정광은 화섭자의 마개를 열고 후후 바람을 불어넣었다.

화섭자 속에 있던 불씨가 금세 타올랐다.

정광은 그것을 한오가 안고 있는 궤짝에 가까이 댔다.

“명주실을 꼬아 만든 이 심지에 불을 붙이면 되는 건가? 어? 다들 안색이 왜 그러세요?”

“…….”

왜 그러냐니.

네가 미친 짓을 하니까 그렇지!

모두 이렇게 외치고 싶었으나 감히 그럴 수는 없었다.

저 미친놈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아니. 아니야. 아무리 미친놈이어도…….’

‘그래. 불을 붙일 리가 없지. 제 놈도 죽게 될 텐데?’

안타깝게도 정광은 그들이 재단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궤짝에서 진천뢰를 하나 꺼내 들더니 불을 붙이는 것 아닌가!

“모, 모두 도망가!”

“당장 피해라!”

엄청난 소란이 벌어지려는 그때.

정광의 맑은 목소리가 울렸다.

“도망치시는 쪽으로 던질 거예요! 움직이시지 않는 게 좋을걸요!”

정광은 한다고 하면 반드시 하는 자.

그 악명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온 사마련 무인들은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자, 잠깐. 어차피 지금 심지에 불이 붙었잖아!’

‘저런 미친놈을 봤나!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정광은 하고 싶은 걸 다 하며 장수하는 게 목표인 남자.

자진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다들 담이 약하시네.”

피식 웃으며 손날로 심지 중간을 잘랐다.

불붙은 심지 토막이 힘없이 잘려 날아갔다.

“하하. 걱정하지 마세요. 협조만 잘하시면 안 터뜨릴 거니까요.”

이 정도면 안심시키기 충분하다고 생각했건만.

사람들이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절규했다.

“야 이 미친 새끼야!”

“뒈지려면 혼자 뒈져!”

응?

도대체 무슨 말인지.

정광은 그들의 시선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 잘려서 날아갔던 불붙은 심지 토막이 한오가 안고 있는 궤짝 속에 안착해 있었다.

치이이이익-

이미 진천뢰들의 심지에 불이 옮겨붙어 맹렬히 타들어가고 있는 상황!

정광이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뭐가 이렇게 잘 붙어? 상등품(上等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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