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정(情)
사마련 무인들의 수는 제갈세가의 거대한 장원을 포위하고 있을 정도로 많았다.
허나 사마련주가 직접 행차한 것 치고는 많은 수가 아니었다.
위진홍은 그들을 둘러보다가 중얼거렸다.
“너무 적어. 련주는 먼저 내려간 건가…….”
정광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왜 그랬을까요?”
“알면서 왜 묻소?”
“아시나 싶어서요.”
위진홍은 얼굴을 찌푸렸다가 한숨을 쉬었다.
“후우우.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그랬을 것이오.”
“자세히요.”
“……무림맹이 예상보다 빨리 움직여서 뒤를 칠 수도 있고, 장강 이남의 본거지에서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지. 그에 대한 대비책은 마련했겠으나 그래도 확실한 게 낫지 않겠소.”
무혈단원들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맹이 있는 하남성(河南省) 남양(南陽)에서 제갈세가까지는 대략 삼백리(三百里) 정도의 거리.
언제 무림맹에서 원군이 올지 모른다.
사마련은 느긋하게 장기전을 벌일 수 없는 처지였다.
머리를 벅벅 긁으며 뭔가 생각하던 유정풍이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이보게, 무뇌. 거기까진 알겠네만, 전력을 집중해서 제갈세가를 빨리 치고 떠나는 게 낫지 않은가?”
“흥. 멍청하긴.”
“……무어라?”
유정풍이 눈을 부릅뜨며 주먹을 쥐자 위진홍의 말투가 조금 정중해졌다.
“멍청하시긴. 련주는 저들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오.”
“충분하긴 무슨. 저게 어딜 봐서?”
유정풍의 말대로였다.
사마련은 무척 고전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게 다 뭐야!”
“피, 피해! 으아악!”
거친 고함과 비명이 난무했다.
모두 사마련 무인들이 장원의 담을 넘다가 지르는 것들이었다.
유정풍이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사마련주야말로 멍청하군. 이런 패착을 두고 말이야.”
위진홍이 냉소를 흘리며 또 면박을 주려고 하는데 정광이 끼어들었다.
그냥 뒀다간 유정풍이 주먹을 날릴 게 뻔해서였다.
“뭔가 또 믿는 게 있을지도 몰라요. 제갈 군사께서 뛰어나신 탓도 있고요.”
“제갈 군사?”
“네. 무림맹에 있을 때 얘기를 나눴었는데, 만약 사마련이 장강을 넘으면 제갈세가부터 칠 가능성도 있다고 하셨었어요. 준비를 하셔야 한다고.”
“……준비라. 저걸 말하는 건가?”
유정풍이 손가락으로 장원을 가리켰다.
장원 벽에 있는 작은 구멍에서 사람 키만 한 장창이 쏘아져 나와 사마련 무인들을 꿰뚫고 있었다.
“네. 기둥뿌리를 뽑아야 할 것 같다고 탄식하시더니 제대로 하셨네요.”
정광의 말대로였다.
제갈세가는 신묘한 기관진식(機關陣式)으로 명성을 떨치는 가문이었으나 사마련의 공격을 대비해 대대적인 보강을 했다.
쏟아지는 화살도 날아가는 장창도, 모두 제갈문형이 탄식할 정도로 막대한 돈을 쓴 결과인 것이다!
위진홍은 오만한 얼굴로 구경하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제갈문형이라. 무엇이 중요한지는 아는 자군.”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해 재산을 쏟아붓는 건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만큼 다시 벌 자신이 있으면.
가문을 지킬 수만 있다면 그깟 돈이야 뭐가 대수겠는가.
제갈문형과 제갈세가는 그런 사실을 아는 자들이었다.
“나와 비견될 만한 모사라더니. 완전히 헛된 소리는 아닐지도…….”
위진홍의 오만한 말을 정광이 정정했다.
“아뇨. 제갈 군사가 낫죠.”
“……!”
“아직은요, 아직은.”
“…….”
위진홍은 입술을 깨물며 화를 참았다.
다른 이면 모를까, 정광이 한 말이었다. 그가 뭐라고 반박할 수 있겠는가.
정광은 위진홍의 어깨를 두드려 준 뒤 무혈단원들에게 설명했다.
“저들은 금방 일을 끝낸 뒤 떠날 예정이었을 거예요. 무림맹에서 원군이 오기 전에요. 하지만…….”
전황을 보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갈세가는 장원에 웅크리고 앉아 사마련 무인들의 수를 야금야금 줄이고 있었다.
상대도 이대론 안 된다고 느낀 걸까?
사파인답지 않게 청수한 인상을 지닌 노인이 크게 외쳤다.
“물러나! 잠시 물러나라!”
사마련 무인들은 수장의 명을 즉각 따랐다.
빠르게 물러나면서도 대열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면 오합지졸은 아닌 것 같았다.
‘하긴. 련주가 직접 이끌고 온 자들이니 그럴 수밖에.’
정광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사마련의 피해를 가늠했다.
‘대단친 않은데 적지도 않구나.’
사마련이 열 받기 딱 좋을 정도.
공격과 후퇴를 몇 번은 반복했는지 장원 주위에 쓰러져 있는 시신의 수가 꽤 많았다.
‘원래는 장원 밖에도 진(陣)이 설치돼 있었네.’
진에 빠져서 죽은 듯 일정한 방향을 따라 깔려 있는 시신들이 인상적이었다.
‘사람을 밀어 넣어 진을 파괴한 건가. 무식하지만 효과적인 방법이야.’
인원이 많다면.
그리고 시간만 충분하다면.
하지만 사마련에겐 시간이 없었다.
‘기껏해야 오늘에서 내일 정도까지만 저러다가 물러나겠는걸.’
시간이 갈수록 더 거센 공세를 퍼붓겠지만…….
제갈세가는 전 재산을 때려 박아 기관진식을 늘렸다.
그들이 돈이 아까워서 못 하면 못 했지 마음만 먹으면 뭘 못 하겠는가.
그렇다고 무적은 아니었기에 시간만 끌 뿐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무림맹은 가까웠다.
그들이 달려올 때까지만 버티면 되는 것이다.
‘일단 제갈세가는 제쳐두고…….’
정광은 단원들에게 명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확인 좀 하고 올게요.”
“무슨 확인을…… 어?”
의아해하던 유정풍이 눈을 끔뻑거렸다.
정광의 몸이 사라졌다.
그것도 대낮에, 순식간에 말이다!
‘이, 이럴 수가!’
‘이건 대체 무슨!’
무혈단원들은 전율했다.
정광의 놀라운 무공 때문이 아니라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저러는지 두려워서!
* * *
정광은 세간의 평보다 상식적인 사람이었다.
자신의 추론을 확신하지 않고 직접 확인하려고 할 정도로.
‘어디 보자. 누가 좋을까.’
어느새 장원 근처에 다다른 그는 주위 풍경과 동화된 채 걸으며 적당한 대상을 물색했다.
‘이놈도 아니고, 저놈도 아니고.’
바닥에 널린 시신들 중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이들을 찾던 그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그래. 이놈이 딱이네.’
옷차림과 병기만 봐도 부티가 좔좔 흐르는 노인이었다.
정광은 노인의 머리맡에 주저앉아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허억! 쿨럭. 쿨럭.”
간신히 살아 있던 노인이 깜짝 놀라 피를 토했다.
분명 목소리는 들리는데 모습은 안 보인다니.
죽을 때가 되어 사신(死神)이 찾아온 걸까?
‘……설마, 환청이겠지.’
아니었다.
“이런. 많이 아프세요?”
“크흑…… 커허헉. 크학.”
의외로 사신은 무척 상냥했으나 놀랍긴 마찬가지였다.
노인의 입에서 피가 아주 폭포수처럼 흘러나왔다.
“안타까워라. 잠시만요.”
“……?”
정광은 노인의 단전에 손을 얹고 내공을 불어넣었다.
노인은 더없이 편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호흡을 고를 수 있었다.
“……누, 누구요? 사람이오?”
“정광인데요.”
“……지, 진옥룡?”
“네.”
“크허헉! 쿠화악!”
“아 진짜. 왜 또 피를 토하세요. 몸이 허하시네.”
정광은 내공을 넣어 노인의 내기(內氣)를 다스렸다.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쭤봐도 돼요?”
조금 호의적이었던 노인의 음성이 차갑게 변했다.
“날 죽여도 못 들을 것이다!”
“그거야 당연하죠. 죽으셨는데 어떻게 말씀을 하시겠어요.”
“그 말이 아니잖아! 절대로 말 안 한다고!”
“같이 확인해 보죠.”
“……무어라?”
“아. 마음껏 비명 지르셔도 돼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내공으로 차단하고 있으니까요.”
“……!”
철골빙심(鐵骨氷心)의 사내라 해도 정광에게 걸리면 웬만한 성현(聖賢)보다 솔직한 이가 되기 마련.
잠시 뒤, 광서성(廣西省)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귀로 악명을 떨치던 노인은 순한 양이 되었다.
순하지만 굉장히 빨리 말하는 양이었다.
“저기요, 좀 천천히 말씀해 주실래요?”
“아닐세! 아니야! 할 말이 무척 많아 반도 못 했네!”
“네. 그럼 그냥 빨리하시고 끝내죠.”
정광은 가만히 듣다가 의심스러운 대목마다 손을 써가며 확인했다.
비명을 질러가며 모든 사실을 토설한 노인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헉. 이, 이게 끝일세. 정말이야. 내 명성을 걸고 맹세하지.”
“살인귀가 명성은 무슨.”
“미, 미안하네! 하라는 대로 했으니 살려주게나! 제발!”
숨은 붙었으나 움직일 기력은 없는 노인이 처절하게 외쳤다.
어찌나 구차하게 비는지.
죽이려던 마음이 달아나 버릴 지경이었다.
‘살려주자.’
정광은 작은 돌을 들어 노인의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듬뿍 찍었다.
그리고 노인의 옷에 일필휘지(一筆揮之)로 글을 썼다.
[광서살귀(廣西殺鬼) 황오.]
“이, 이보게. 뭐라고 쓴 건가?”
“어르신 명호랑 존함이오.”
“그, 그건 왜……?”
“동료인 분들은 구해 드릴 생각이 없는 것 같고. 제갈세가 사람이 보면 어르신에게 걸맞는 대접을 해드릴 거예요.”
“아, 안 돼!”
정광이 싱긋 웃었다.
“아뇨. 돼요.”
* * *
정광은 무혈단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 노인이 했던 말을 들려줬다.
위진홍과 철월을 제외한 모든 이가 경악했다.
“무, 무당의 검존(劍尊)께서 사마련주에게 오십초(五十招) 만에 패하시고 목이 잘리셨단 말이오?”
팽강휘의 물음에 정광이 어깨를 으쓱했다.
“네. 사마련주의 무공이 생각보다 높은가 봐요. 거짓말인가 싶어 두 번 더 물어봤는데도 똑같이 말하더라고요.”
“한쪽 팔이 잘린 무당 장문인께서 얼마 안 되는 제자들을 이끌고 도주 중이시라니…… 무량수불…….”
정현이 도호를 중얼거리자 정광이 덧붙였다.
“사마련이 추격 중이라는데 얼마나 더 버티실지 모르겠네요.”
“사제.”
정우가 무거운 얼굴로 물었다.
“사마련이 세 갈래로 갈라졌는데 어느 쪽을 택할 것이냐?”
제갈세가를 공격하는 무리.
총단으로 향하는 련주 무리.
마지막으로 무당의 생존자들을 쫓는 무리.
셋 중 하나를 골라야 했다.
“군사, 뭐가 좋을까요?”
정광이 묻자 위진홍은 이마를 좁혔다.
“어차피 무당 쪽으로 갈 생각 아니오?”
“왜 그래야 하는지 설명해 주세요.”
“아니, 알면서 왜 자꾸…….”
“저기요.”
담담하던 정광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단원들에게 능력을 보여주겠다면서요. 기회를 주는데 왜 계속 거부해요?”
“……!”
위진홍은 정광을 노려보다가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단 여기 남아 제갈세가를 돕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오. 외부에서 싸우자니 중과부적인 상황이라 손해가 클 거고, 장원 내부로 들어가 봐야 뭘 하겠소? 우리가 없더라도 하루 이틀 정도는 막아낼 듯하오. 그리고…….”
위진홍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련주 쪽도 아니오. 그가 총단 밖으로 나온 건 큰 기회지만, 뒤늦게 따라잡으려면 엄청난 고생을 해야 할 거요. 함정을 준비한 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고.”
“불가능하진 않다는 말이잖소.”
백승무의 물음에 위진홍이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따라잡으면? 우리만으로 뭘 하겠다고?”
“사, 사형께서…….”
“흥. 진옥룡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그 많은 무인들을 뚫고 련주 앞에 설 수 있겠소?”
백승무 대신 정광이 흥미로운 얼굴로 물었다.
“야간에 암습하면요?”
“그만 좀 시험하시오. 당신의 무공이 측량할 수 없을 만큼 높으나 사파무림 최강자인 련주에게 몰래 다가갈 정도라 생각하지는 않소. 가능하다 쳐도, 그가 기척을 눈치채고 소리라도 지르면? 련주를 일수에 제압하면 문제없겠지만, 그게 더 현실성 없는 얘기겠지.”
무혈단원들은 똑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정광이 수많은 적들에게 둘러싸여 분투하다가 쓰러지는 모습이었다.
정광도 인정했다.
“내가 죽을 가능성이 높겠죠.”
위진홍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걸 인정하는 것이오?”
“네.”
“……왜?”
“사실이니까요. 지금은.”
정광은 눈살을 찌푸린 채 단원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군사의 말대로예요. 련주를 못 잡아 아쉽지만 무당이라도 구해야죠.”
광서살귀의 말에 따르면 무당은 남쪽으로 도주했다.
사마련 총단 방향이었으나 그나마 뚫기 쉬운 길이 그쪽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으리라.
“무당이 제정신이면 아무리 쫓긴다 해도 장강을 넘지는 않겠죠. 그 전에 빨리 찾아야 해요.”
넘으면 바로 사마련의 세력권이다.
죽여달라고 목을 내미는 꼴.
“차라리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싸우면 싸웠지, 절대 그럴 리 없다는 말이군.”
정우의 말에 단원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들이라도 그럴 것이기에.
정광은 다른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당에 빚을 단단히 지우자. 청성과는 무게가 다른 자들이니 제대로 받아낼 수 있을 거야.’
뭐 이건 작은 이유고.
‘무당을 살려서 그들 스스로 무림 문파 간의 싸움이었음을 천명하게 해야겠지.’
그렇게 되면 황제가 개입할 명분이 사라진다.
정파무림도 마찬가지.
무당이 멸문하면 반강제로 떠밀려 죽도록 싸워야 한다.
허나 생존자가 있으면 화 좀 내고 싸울 때 힘 좀 더 쓰는 것으로 넘어갈 수 있지 않은가.
‘정파무림이 적극적으로 싸워서 사마련주를 끌어내야 하지만 황제가 개입하는 시기는 최대한 늦춰야 해.’
그게 안 되면 죽 쒀서 개 주는 꼴.
장강을 넘어온 사마련주를 손대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무당을 살리면 그의 권위를 실추시킬 수 있다.
거창하게 행차해 놓고 일도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한 꼴이 되니 얼마나 우습게 보이겠는가.
‘그렇게 되면 투웅도 움직일 수 있지.’
뿐이랴.
가균 그 영악한 놈과 후위진도 목소리를 높일 수 있으리라.
‘내부에 균열이 제대로 일어나면 사마련주는 진짜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어.’
생각이 정리됐다.
정광은 당오군에게 명했다.
“부단주가 인솔하셔서 무당을 쫓으세요. 가시면서 수소문을 하시든, 다른 수든 쓰시면서요.”
“어떻게 따라오려고 그러시오?”
정광은 품속에서 작은 병을 하나 꺼내 하얀 가루를 조금 덜어냈다.
그리고 당오군의 옷에 문질렀다.
“……십리추종향(十里追從香)?”
당오군이 어이없어하자 정광이 병의 마개를 닫은 뒤 건넸다.
“아시죠? 십리 마다 조금씩 떨어뜨리세요. 냄새 맡고 따라갈게요.”
“……이걸 이런 용도로 쓸 생각을 하다니…… 아니, 그보다 대체 무얼 하려고 남는 것이오?”
정광은 사마련 무인들이 모여 있는 곳을 바라보며 두 손을 모았다.
“무량수불. 그냥 가면 정(情) 없잖아요. 이왕 온 김에 선물도 좀 하고…….”
“……선물?”
“확인할 것도 좀 있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