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서먹서먹
당영중은 개과천선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잘못을 저질러 놓고 고치긴커녕 적반하장으로 우기는 이가 더 많아서였다.
무림인의 경우엔 더 심했는데 힘이 있고 자존심이 강한 족속들이다 보니 이미 저지른 잘못을 더 큰 잘못으로 덮으려는 자도 있었다.
예를 들면 그의 아비 당기황처럼…….
“……진옥룡. 내 솔직히 말하지. 사뇌(邪腦)가 개과천선했다? 못 믿겠네.”
“왜요?”
“사람이란 이렇게 빨리 변하는 게 아니니까.”
“자오는 변했는데요.”
“물론 예외는 있지. 게다가 그는 스스로를 증명하지 않았나?”
못마땅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위진홍이 끼어들었다.
“그딴 멍청한 까마귀와 나를 비교하다니 어이가 없군. 천하의 당가주도 안목이 영…….”
“사뇌, 내게 버릇없이 굴지 말아라.”
“내가 왜…….”
“한마디만 더하면 사흘 내내 측간에서 살게 해주마. 아니, 그곳에서 살아야 하지만 못 가게 해주지. 진옥룡도 그쯤은 이해해 줄 거다. 이보게, 안 그런가?”
“음. 지금까지의 자신을 비워내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거네요. 괜찮은데요.”
정광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하자 위진홍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당영중은 위진홍을 한 번 더 노려본 뒤 정광에게 시선을 돌렸다.
“창사의 제자인 우이정도 믿지 않아. 다만 생포한 사마련 무인들을 다루는 데 도움이 되어 두고 보고 있을 뿐이지.”
“아. 저도요.”
“그럴 것 같았네.”
“쓸 만하죠?”
“천하 어디에 던져놔도 밥은 먹고 살겠더군.”
당영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 이었다.
“철월을 거뒀을 때도 별말 안 했네만 이번엔 좀 해야겠어. 조심하게. 자네를 적대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상기하게.”
정광을 직접 치긴 힘드니 위진홍을 빌미로 음해하려는 자들이 있을 거란 충고였다.
“나는 사뇌를 믿지 않으나 자네는 믿네. 당연히 자네의 보증도 신뢰하지. 뜻대로 하게나. 다만 명심해 줬으면 좋겠군. 나와 반대인 이들이 더 많을 게야.”
“네. 그럴게요. 안 믿는 분들은 믿게 만들어 드리고요.”
“……되도록 주먹 말고 말로.”
“노력하죠.”
정광은 씩 웃으며 대답한 뒤 위진홍을 옆 방으로 보냈다.
위진홍이 애써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나가자 당영중이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똑똑해도 애는 애군. 자네와는 하늘과 땅 차이야. 아니, 자네가 이상한 건가.”
“칭찬이죠?”
“……사마련과의 싸움은 쉽진 않았으나 대승으로 끝났네. 청성도 나름의 몫을 했고 아미는…….”
당영중은 아까의 싸움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정광은 묵묵히 듣다가 물을 건 물으며 앞으로의 일을 떠올렸다.
‘큰 그림 안에서 무리 없이 흘러가고 있어. 결국엔 사마련주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달렸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윤곽이 나올 터.
그때까지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하며 기다리면 됐다.
“……그리고…….”
“말씀하세요.”
당영중은 정광을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철월 말일세.”
“네.”
“완치는 장담할 수 없으나 손을 써볼 만한 방도가 있을 것 같다고 말했었지.”
“그러셨죠. 찾으셨나요?”
“그렇네.”
“오오. 역시 당가.”
정광은 정말 감탄했다.
머리가 모자란 자를 고칠 방도를 찾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뛰어난 개인의 재능도 집단이 유구한 세월 동안 쌓아온 지식에는 못 미칠 때도 있구나.’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몇 번 느껴보지 못한 패배감이었으나 기분 나쁘진 않았다.
그저 신선할 뿐이었다.
‘그래. 이래야 환생한 보람이 있지.’
지금 모자라면 훗날 앞서면 된다.
정광은 그럴 만한 자질은 물론 자신도 있었다.
“궁금하네요. 빨리 말씀해 주세요.”
“…….”
“가주님?”
“음…….”
정광은 갑자기 싸한 기분을 느꼈다.
당영중의 나무토막 같은 얼굴이 기괴하게 뒤틀리는 것 아닌가.
‘이거 설마…….’
안 좋은 예감은 틀리는 경우가 드물었다.
“영초(靈草)와 영물(靈物)이 좀 필요하네.”
“……영초와 영물요?”
“그렇네.”
“……좀?”
당영중이 정광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중얼거렸다.
“조금 많이.”
“……일단 말씀해 주세요.”
당영중은 괜히 방 안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청혈화(靑血花)와 습암균(濕巖菌)이 각각 한 소쿠리.”
“……네?”
“용린어(龍鱗魚) 암수 한 쌍.”
“…….”
“그리고…….”
정광은 황당해서 입만 떡 벌렸다.
안 좋은 기억이 있는 것들 아닌가.
앞에 나온 것들이 그랬기에 뒤에 이어진 백사(白蛇)나 하수오(何首烏) 같은 것들은 그냥 그러려니 할 정도였다.
‘……반선단(半仙丹)의 재료들이잖아!’
빠진 것들도 있었으나 주재료는 같았다.
아니, 그게 지금 왜 나와?
반선단은 단전이 깨진 데다 천수를 다한 운후를 살리기 위해 만든 영단인데.
정광의 눈치를 살피던 당영중이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이름은 거창하나 공청석유(空淸石乳), 천년하수오(千年何首烏)처럼 엄청난 것들은 아니니 안심하게.”
“청혈화는 푸른색 꽃이란 꽃은 다 따서 짜봐야 하고 습암균은 습기 많은 땅을 일장 이상 파야 하는데요.”
“…….”
“용린어는 황하(黃河)에서 십 년에 한두 마리 잡히는 놈이고요.”
“……정말 모르는 게 없군. 그것들이 별것 아니라 한 건 마지막 것에 비해 그렇다는 말일세. 쌍각사룡(雙角沙龍)의 피 한 말이 필요한데…… 이게 좀 많이 까다로울 것 같네.”
“……하하. 하하하.”
정광은 하도 황당해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고생 좀 하면 구할 수 있는 것들이니 그러려니 하자.
그런데 그걸로 바보를 치료할 수 있다고?
어떻게?
‘가만. 이거 혹시?’
반선단과 겹치는 재료들.
그리고 그 외의 것들.
조합하면 결국 몸을 과하게 보하다 못해 생을 억지로 붙잡는 효능을 발할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진짜 치료법은 따로 있을 터.
‘이것들은 결국 그 치료법을 쓸 때 철월이 죽지 않게 하기 위한 것들이구나. 대체 어떤 수법이기에?’
정광은 바로 물었다.
“얼마나 대단한 대법을 써야 하기에 그런 과한 구명약(救命藥)이 필요한 거죠?”
당영중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대번에 본질을 꿰뚫는구나. 역시 진옥룡이야. 그래도 이걸 말하면 크게 실망할 텐데…….’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미 연 입, 끝까지 말해야 했다.
“마교의 마공이네.”
“……네?”
“먼저 아까 말했던 재료들로 영단을 만들어 철월에게 먹인 뒤, 문헌으로 전해지는 마교의 역혈대법(逆血大法)으로 그의 피와 진기를 역행시키는 거네.”
전생에 천마신교의 교주였던 정광은 역혈대법이 무엇인지 당연히 알았다.
“광인으로 만들어 안 좋은 기운을 표출하게 하겠다는 말씀이네요. 영약으로 목숨을 붙잡고.”
“……자네는 정말 모르는 게 없군. 그렇네. 그 상태에서 본가의 반혼침법(返魂鍼法)을 펼치는 걸세. 구명 침법이라 잠시나마 제정신이 돌아오게 하는 효능이 있지. 그리고 정신이 돌아오면…….”
“돌아오면?”
“……역혈대법을 멈추고 정종(正宗) 내공을 밀어 넣어 나쁜 기운을 소멸시키는 걸세. 그러면 제정신을 지킬 수 있을 것이야.”
“…….”
“……아마도.”
“…….”
정광은 눈을 크게 뜨고 당영중을 바라보기만 했다.
당영중은 내심 부끄러움을 느꼈다.
이론상으론 그럴듯하나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얘기여서였다.
영단의 재료를 구하는 것도 가능할지 모르는 판에 마교의 역혈대법은 무슨 수로 행한단 말인가.
사기와 마기를 소멸시킬 만큼 정순한 정종 내공은 또 누가 불어넣고.
정광이 제정신이라면 ‘아, 그렇군요. 수고하셨습니다. 한번 해볼게요’라고 말할 리 없다.
‘아버님이 함부로 한 약조 때문에 본가의 체면이 땅에 떨어지게 되었구나.’
당영중이 깊이 탄식하는데.
정광이 조용히 말했다.
“가주님.”
“……정말 미안하…….”
“그럴듯한데요.”
“……응?”
“일리 있는 이론이에요. 발상의 전환도 좋고요. 반드시 치료하려 하지 말고 되든 안 되든 해보기나 하자. 하하. 한 수 배웠습니다.”
당영중은 입을 떡 벌린 채 정광을 바라봤다.
비꼬는 게 아니라 진심인 것 같았다.
“……이보게, 진옥룡. 그 모든 조건을 채운다 해도 성공 확률은 삼할 정도밖에 안 될 걸세.”
“에이. 이할이 될까 말까 하겠죠.”
“……그럴지도.”
“뭐 그 정도면 할 만하네요. 내 몸도 아닌데. 수고하셨습니다. 한번 해볼게요.”
“……그, 그러게나.”
당영중에게는 정말 다행스럽게도 정광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 흐름이라면…… 좋아. 내친김에 물어보자.’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하는 법.
기분도 좋아 보이는데 이 정도쯤이야.
“그런데 내 아버님 말일세. 집에만 계시게 하고 싶은데 방법이 있겠나?”
정광은 시원시원하게 대답한 뒤 방을 나갔다.
“그야 쉽죠. 가주님이 태상가주님 옆에 붙으셔서 말벗이 되어주세요. 항상, 언제나요.”
* * *
정광은 정말 기분이 좋았다.
‘그래. 반드시 살려야 한다, 이런 생각만 하다간 이게 걸리고 저게 걸려서 답이 안 나오지. 내가 정파 물을 너무 많이 먹었나? 당연한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어.’
운후처럼 깊은 연이 있는 관계도 아니다.
철월을 치료하고자 했던 건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반드시 해낼 필요도, 굳이 깊이 신경 쓸 필요도 없는 것이다.
‘어디 보자. 재료가…… 다 청해성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꽤 귀찮네.’
곤륜 도사들에게 해달라고 했다간 모두 도망가 버릴 게 뻔했다.
‘아. 수적과 산적이 있지.’
한번 싹 밀어버렸으나 빈자리에 다시 기어들어 온 놈들이 있을 터.
점잖게 협조를 구하면 되리라.
‘쌍각…… 무각사룡은 탑극랍마간(塔克拉瑪干) 사막에 가서 부르면 되고.’
당가의 반혼침법이야 어차피 구명 침법의 일종, 정광도 그런 것쯤은 열 종류 이상 알고 있었다.
‘역혈대법과 정종 내공. 내가 다 할 수 있지. 좋아. 곤륜에 돌아갈 일이 있으면 그때 가서 생각해 보자.’
아주 나중이 되어서야 시도해 볼 일.
정광은 지금까지의 생각을 머리 한편으로 밀어둔 뒤 옆방으로 가서 위진홍을 불렀다.
“가죠.”
“……무슨 대화를 나누었기에 그리 기분이 좋소?”
“안 될 가능성이 높지만 어떻게 될 가능성도 있는 얘기?”
“……기분 좋을 일이 아닌 것 같소만.”
“그게 나와 당신의 차이죠.”
“……!”
“뭐 해요? 가죠.”
“……알겠소.”
위진홍은 정광을 따라 걸었다.
하지만 모든 신경은 정광이 했던 말에 쏠려 있었다.
‘대체 무슨 의미일까? 일할의 승산이라도 있으면 그것을 키워 상대를 이길 생각을 하며 기쁨을 느낀단 말인가?’
완벽하다고 자신했던 계획이 무너져 실의에 빠진 것도 잠시. 왜 그렇게 됐는지, 어떻게 대응하는 게 나았을까 되돌아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던 중이었다.
‘……진옥룡은 지금 즐거운 게 분명해. 아! 내가 느꼈던 그 묘한 감정이 즐거움이었던가!’
되든 말든 대충 해보자는 마음을 먹어 기분이 좋아진 정광이었다.
허나 위진홍은 그 모습을 오해하고 정광이 기대했던 진짜 모사(謀士)의 길을 어렴풋이 엿보고 있었다.
‘왜 즐거운 거지? 복수를 할 생각에? 발전할 내 모습 때문에?’
골똘히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는데.
정광이 어깨를 두드리며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예요.”
“아.”
그곳은 당가가 마련해 준 무혈단의 숙소였다.
무혈단원들은 숙소에 붙은 후원에서 무혈진(無血陣)을 수련하고 있었다.
위진홍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 모습을 바라봤다.
저깟 진법 때문에 생각이 깨진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위진홍의 눈이 커졌다.
‘저, 저건!’
공(攻)인가 했더니 수(守)로 전환된다.
수(守)가 계속되는가 했는데 공(攻)이 불쑥 튀어나온다.
공수(攻守)가 하나로 되어 움직이는 놀라운 진이었다.
‘대체 어떤 기인이 이런 절진(絶陣)을…… 서, 설마?’
시선이 저절로 정광에게 향했다.
“……혹시 당신이 만든 진이오?”
“네. 왜요?”
“……아니오.”
위진홍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간신히 올려놨던 자존심이 다시 바닥을 쳤다.
‘내 쓸모를 인정해서 함께하자 한 것이라 믿었거늘, 저런 진을 창안하는 자에게 다른 뇌가 필요할까?’
그때, 정광이 무혈단원들을 불렀다.
“그만요! 이쪽으로 모여주세요!”
무혈단원들이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정광은 그들과 인사를 나눈 뒤 위진홍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소개했다.
“이쪽은 무림에서 사뇌라 불리던 위진홍 소협…… 잠깐만요. 저기요. 소협이 좋아요, 공자가 좋아요?”
“……편한 대로 하시오.”
“네. 위진홍 공자예요. 무혈단에 들어오게 됐으니 모두 힘차게 환영해 주세요.”
짝짝짝.
허나 손뼉을 친 건 정광 혼자였다.
“어? 다들 왜 그러시죠?”
왜 그러긴.
당연한 반응 아닌가.
사파무림에서 제일 음험하고 간교하다는 사뇌를 천하의 어떤 정파 무인이 동료로 삼고 싶겠느냔 말이다!
자오조차 이건 아니라는 듯한 얼굴로 정광에게 눈짓하고 있었다.
심지어 한쪽에 주저앉아 육포를 뜯고 있던 철월도 반대했다.
“도사! 철월은 사뇌가 싫다!”
오만한 표정으로 단원들을 둘러보던 위진홍이 이맛살을 좁혔다.
“진옥룡. 저 바보도 단원이오?”
“철월은 바보가 아니다!”
정광도 부정했다.
“아뇨.”
“그런데 왜 여기 있는 곳이오?”
“음. 심심해서?”
황당한 얼굴로 정광을 보던 위진홍이 딱딱하게 말했다.
“나도 무혈단에 들어가기 싫소.”
“왜요?”
“바보들과 함께하기 싫으니까.”
위진홍의 얼굴에 다시 오만함이 떠올랐다.
“내겐 철두(鐵頭) 저자나 여기 있는 다른 자들이나 똑같은 바보천치일 뿐이오.”
성격 좋은 무혈단원들의 관자놀이에서 핏줄이 툭 불거졌다.
본성 자체가 안 좋은 자오는 주먹을 움켜쥐었고.
바보 철월은 대월(大鉞)을 뽑아 들며 욕설을 내뱉었다.
오직 정광만 웃고 있었다.
“하하. 다들 서먹서먹하죠? 인사 좀 나눠봐요. 그럼 친해질 테니까.”
장내의 분위기는 험악했다.
모두 말이 아니라 손발과 병기로 인사를 나눌 기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