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189화 (188/569)

189화

익숙한 느낌

뒤에서 화마(火魔)가 쫓아와도.

절대 우세했던 상황에서 판이 뒤집혔는데도.

사마련 무인들은 빠르고 질서정연하게 하산했다.

‘괜찮네.’

정광은 뒤에서 그들의 움직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군(軍)도 아닌 일개 무림 조직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훈련깨나 시켰나 본데. 그 훈련을 따르게 하려면 그럴 만한 능력을 보여서 승복하게 해야 했을 거고.’

모두 정광의 어깨 위에 얹힌 채 생각에 잠겨 있는 위진홍이 해낸 일일 터.

그래, 여기까진 좋다.

허나, 그렇기에 딱 거기까지일 수밖에 없다.

‘다 왔네.’

산에서 내려오자 사마련 무인들의 표정이 변했다.

당가 무인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 아닌가.

종일 고생을 해서 그런지 기세가 무척 흉흉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심한 자가 있었다.

당연히 당기황이었다. 어찌나 시끄럽게 소리치는지 상념에 빠져 있던 위진홍이 정신을 차릴 정도였다.

“저 봐라! 벌써 내려왔잖아! 진작 올라갔으면 불길에 가둬놓고 몰살시킬 수 있었는데!”

아비와 달리 아들인 당영중은 침착했다.

“진옥룡이 백리연화를 터뜨려야 산에 오르기로 했잖습니까.”

“장수라면 전장의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해야지!”

“믿을 만한 이의 말을 믿었을 뿐입니다. 아버님 말씀대로 했다면 뒤에서 내려오던 청성이 화마에 휩쓸렸겠지요. 애초에 사마련을 멸하는 게 아니라 청성을 구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당기황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렇게 물렁물렁해서야 원. 내려왔으니 치자. 제자야! 너도 좋지?”

정광은 즉각 대답했다.

“아뇨.”

“왜!”

“잠시 휴전하기로 했거든요.”

“……휴전? 어째서?”

정광은 산에서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가만히 듣던 당기황이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니까. 포로를 교환해야 한다?”

“네.”

“……어떤 덜떨어진 놈이 사로잡혀서 민폐를 끼친단 말이냐?”

정광은 고개를 돌려 사마련 무인들에게 외쳤다.

“잠시만 좌우로 갈라져 주실래요?”

사마련 무인들이 움직이자 그들에게 포위돼 있던 청성 장로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정광은 그들을 가리키며 당기황에게 말했다.

“저분들요.”

“…….”

당기황은 기가 차다는 듯 장로들을 훑어봤다.

장로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산불의 열기 때문이 아니라 수치심을 느껴서였다.

“도, 독존. 오해하지 마시오.”

“생포돼서 휴전을 맺은 게 아니라 휴전을 맺기 위해 사로잡힌 것이외다.”

당기황은 그들을 노려보며 냉소를 머금었다.

“벌건 얼굴로 잘도 말하는구려.”

“…….”

“됐소. 내 그대들의 마음을 짐작하고도 남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

당기황은 의아해하는 장로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정광을 바라봤다.

“제자야. 네가 모르는 게 있다. 청성의 장로씩이나 되는 이들이 풀려나길 바라겠느냐? 당장 자진하고 싶을 정도로 수치스러울 게야. 그러니 그냥 치자. 그게 저들을 위하는 거다. 이해했지?”

“음. 그것도 그렇네요.”

정광이 수긍하자 장로들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었다.

‘짐작하고도 남는다더니 무슨!’

‘이해하긴 뭘 이해한다는 거야!’

장로들은 극심한 분노를 느꼈다.

당사자도 아닌 주제에 왜 남의 마음을 넘겨짚는단 말인가!

그렇다고 삿대질하며 논리정연하게 따졌다간…….

‘독존 저 미친놈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그나마 덜 미쳐 보이는 진옥룡에게 말해야 해.’

실로 엄청난 판단착오였으나.

정광이 주재자인 건 맞았다.

“이, 이보게 진옥룡! 부끄럽고 참담한 건 사실이나 이대로 죽을 수는 없네!”

“수치스럽더라도 살아남아 본문을 재건하는 데 힘을 써야 하지 않겠나!”

“할 몫을 다하고 나면 우리 스스로 생을 마감할 터. 기회를 주게나! 청성에게 기회를!”

장로들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간청했다.

표정이며 말이며 어찌나 절절한지.

당가 무인들과 무혈단원들이 동정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청성 제자들은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였고.

허나 정광만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청성을 재건하고 생을 마감하시겠다고요?”

“그렇지! 바로 그걸세!”

“백 년 이상은 걸릴 텐데. 그때까지 사시겠다는 말씀이네요.”

“…….”

활활 타다 못해 잿더미가 되어버린 청성이다.

재건은커녕 맥을 잇기도 힘든 상황.

백 년도 무척 후하게 쳐준 시간인 만큼 장로들은 뭐라 반박할 도리가 없었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돈도 많이 쏟아부으셔야 할 텐데.”

“…….”

“지금 짊어지고 계신 것들로는 한참 모자랄 게 뻔하고.”

“…….”

정광의 말이 이어질수록 청성 제자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애써 부정하던 사실을 들으니 마음이 괴롭기 짝이 없었다.

‘아아. 그의 말이 맞다. 본문은 끝이야.’

‘이 와중에도 저런 비굴한 꼴이라니!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구나!’

청성 제자들이 실의에 빠졌다가 분노하는데.

장문인 청유가 무거운 얼굴로 나서서 정중히 포권했다.

“진옥룡. 못난 모습을 보여 미안하네. 본문을 구해준 은혜, 절대로 잊지 않겠네.”

누가 봐도 말이며 자세며 진심이 넘쳐흘렀다.

정광 역시 그랬다.

“뭘요. 기대할게요.”

많은 이들이 입을 떡 벌리고 정광을 바라봤다.

‘겸양하는 듯하더니 기대한다고?’

‘뭐가 이렇게 노골적이야?’

하지만 청유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마음에도 없는 겸양보단 솔직한 게 낫지. 오늘 많이 배우는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정광의 전음이 들려오는 것 아닌가.

-장로님들이 망신을 당하셨으니 청성을 이끌기 편해지시겠죠?

정광의 말대로였다.

장로들을 바라보는 청성 제자들의 눈에는 깊은 실망과 멸시의 빛이 담겨 있었다.

‘허허. 자기들도 그리 잘한 건 없거늘, 저런 눈빛을…….’

청유는 작게 한숨을 내쉰 뒤 허리를 세웠다.

어찌 됐든 그나마 나은 자들 아닌가.

한 번에 물갈이는 못 하더라도 조금씩 조금씩 바꿔 나가면 되리라.

-그렇군. 고맙네. 자네가 제일 썩은 부분을 도려내 줬어.

-뭘요. 그것도 달아두세요.

-……허. 알겠네. 반드시 그러지.

청유는 조금 당황하더니 진심 어린 얼굴로 답했다.

정광의 눈매가 살짝 휘어졌다.

‘우유부단하다고 들었는데 아니잖아. 산에서도 그랬지만 내려오니 또 변했어.’

어차피 청성이 무너지면 좋을 게 없다.

살려서 써먹어야 하는데 청유의 언행을 듣고 보니 믿고 밀어줘도 될 법했다.

‘그럼…….’

정광은 당영중에게 전음을 보냈다.

-가주님. 어떠세요?

-뭐 말인가?

-청성 장문인요.

당영중은 정광의 의중을 알아챘다.

-그가 계속 장문인직을 맡는 게 좋겠군. 청성에 인물이라 할 자가 따로 없는 것 같네.

-어느 정도 밀어주실 건데요?

-흐음. 절반 이상은 회복되는 정도로? 여러 문제가 생기고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청성이나 본가나 감수해야겠지.

-청성의 사업을 많이 뺏으실 거예요?

-뺏기 전에 저절로 굴러들어 올 걸세.

-하긴. 그렇긴 하죠.

정광이나 당영중이나 생각은 같았다.

사천성은 중원의 서남단에 있으나 토지가 넓고 비옥하기 그지없었다.

이 거대한 솥을 당가, 청성, 아미라는 세 개의 솥발이 지탱하고 있던 상황.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처럼 거창한 것은 아니었으나 사천성을 감당하려면 앞으로도 최소 세 개의 문파가 필요했다.

-당가가 문호를 개방해 몸집을 키우면 이러실 필요는 없을 텐데.

-어쩌겠나. 본가는 독과 암기의 가문. 함부로 사람을 받아들일 순 없네.

독과 암기는 은밀하기에 두려운 것이다.

당연히 사람을 엄격히 가릴 수밖에.

사위도 데릴사위만 받는 당가 아니던가.

‘아미 역시 불문이라 제자를 받는 데 한계가 있고. 도문인 청성도 마찬가지지.’

대부분의 사람은 쾌락을 원한다.

속세를 등지고 본산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자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원한다 해도 그럴 만한 자질을 가진 자들은 거의 없고.

‘그래서 속가제자를 받고 속가제자들이 만든 문파를 지원하지만…….’

그들 간의 분쟁을 중재하고 힘을 빌려주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청성 같은 경우엔 본산의 이득을 너무 따지다가 속가문파들이 등을 돌리기까지 했다.

‘결국 외부의 적을 막거나 새로운 세력이 대두하는 걸 방지하려면 여태껏 해왔던 것처럼 세 문파가 있어야 하는 거지.’

생각을 정리한 정광은 청유에게 물었다.

“포로 교환부터 할까요?”

“부탁하네.”

정광은 위진홍의 마혈을 푼 뒤 바닥에 내려놓았다.

“다 들으셨죠? 빨리 끝내죠.”

“…….”

“뭐 해요? 빨리 가서 장로님들 보내주시지 않고.”

“……나를 먼저 보내고 돌려받으시겠다?”

“네.”

“……내가 약조를 어길까 두렵진 않소?”

정광이 씩 웃었다.

“그러세요. 재밌겠네요.”

“…….”

위진홍은 정광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정광의 눈 속에서 일렁이는 열망을 느껴서였다.

‘……미친. 정말로 그러길 원하는 것 같군.’

나는 약조를 지킬 테니 네가 어겨라.

정광은 눈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자존심이 강한 자야. 애초에 속였으면 속였지, 스스로 뱉은 말을 어기진 않는 자.’

그래도 한 번 더 확인해야 했다.

당가의 무인들도 듣게.

“진옥룡. 오늘 하루는 휴전인 게 맞소?”

“네. 약조했잖아요.”

“그렇소. 약조했지.”

위진홍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머지않아 해가 저물 것 같았다.

‘얼마 안 남았군. 빨리 가서 방비를 굳혀야 해.’

본거지로 돌아가면 당가와 청성의 합공도 어느 정도 막아낼 자신이 있었다.

‘허나 아미가 합세하면…….’

기관진식(機關陣式)은 충분했으나 사람이 부족했다.

당장 사람을 보충하려니 떠오르는 이들이 두 무리 있었다.

‘아미로 갔던 이들은 어떻게 됐을까? 진옥룡이 이렇게 빨리 온 걸 보면 전멸한 건 아닐 텐데.’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지만 정광은 놀랄 만큼 빠르게 왔다.

싸움을 피하고 달리는 데 집중해서 그런 것이리라.

‘그들을 인솔한 침주사로(郴州四老)는 약하지 않아. 살아 있다면 진옥룡을 추적해 이곳으로 오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여기서 떠나자마자 사람을 보내서 데려오자. 그리고…….’

위진홍은 눈만 살짝 움직여 당가 무인들 사이에 있는 투웅을 확인했다.

‘……진짜 사로잡았구나.’

그냥 생포된 것도 아니었다.

얼마나 맞았는지 엉망인 몰골로 말 등에 꽁꽁 묶여 있었다.

‘머리만 몇 대 맞고 잡힌 게 다행인가.’

살짝 몸을 떤 위진홍은 생각을 굳혔다.

‘투웅이 이끌던 무리의 중심은 귀주원가의 무인들. 대가 센 자들이지. 그들을 거두려면 투웅이 필요해. 그러려면…….’

그에 걸맞는 걸 내줘야 할 터.

아니, 정광이 만족할 만한 것이 있어야 했다.

‘돈을 밝힌다 했지?’

위진홍은 정광에게 지나가듯 물었다.

“귀주원가의 가주는 어떡할 것이오?”

“저분요? 생각 중인데요. 왜요, 사실래요?”

위진홍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흐음. 얼마면 되겠소?”

“어라? 진짜요? 이럴 성품이 아니시던데.”

위진홍은 누가 누구를 평하냐고 소리치려다가 참았다.

“고수의 수가 부족해서 그러오.”

“에이. 그도 그렇지만 도주한 귀주원가의 무인들을 모으려는 거잖아요. 아미로 왔던 분들이야 그렇다 치고 귀주원가를 다루려면 가주가 필요하니까요.”

“…….”

위진홍은 내심 탄식했다.

‘하늘은 어찌 나를 낳고 저자까지 낳았단 말인가.’

나이로 따지면 반대였으나 주유가 제갈량에게서 느꼈던 패배감을 알게 된 위진홍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눈에 열기가 어렸다.

‘아니, 난 주유가 아니라 위진홍이다!’

몰락한 가문에서 태어나 자신의 머리만으로 기어 올라온 그는, 진천뇌(震天腦)라는 별호를 스스로에게 붙이며 했던 다짐을 되새겼다.

‘반드시 살아남아 올라가 주마. 없으면 없는 대로 하면 돼.’

마음을 굳게 먹고 돌아서려 하는데.

정광의 말이 그를 붙잡았다.

“돈 말고 다른 거로 하죠.”

“……!”

“왜요, 싫어요?”

그럴 리가 있나.

위진홍은 꿀꺽 넘어가려는 침을 겨우 참으며 물었다.

“무엇을 원하시오?”

“청성의 도경과 비급요.”

청유를 비롯한 청성 제자들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그에 비해 위진홍의 눈은 가늘어졌다.

“나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라 했소만.”

정광이 싱긋 웃으며 전음을 펼쳤다.

-청성을 봉문시키긴 글렀는데 뭐 하러 챙겨요. 투웅을 풀어줘 은혜를 입히고 세를 불리는 게 낫지 않나요?

“…….”

-아. 전음을 못하시지. 아니, 무공 자체를 못 익히는 몸이죠?

“……!”

-놀랄 필요 없어요. 짊어지자마자 알겠던데.

“…….”

위진홍은 정광을 노려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정말 귀신이 따로 없었다.

‘……침착하자. 그깟 것 알아낸 게 무슨 대수라고.’

유일하게 열등감을 느끼는 부분을 간파당했으나 억지로 참았다.

정광이 왜 청성을 이렇게까지 도우려는지 알아내 한 방 먹이고 싶었다.

‘……투웅과 귀주원가를 얕보는 건지도 모르겠군. 이미 한번 이겼던 상대니까. 청성에 제대로 빚을 지우려는 건가? 그렇게밖에 생각이 안 돼.’

사실 도경은 없어도 된다.

중요한 건 비급!

비급을 되찾아주면 목숨을 구해준 것보다 더 큰 은혜를 베풀게 되는 것이다.

청성을 얼마나 이용해 먹으려고 이러는 건지 치가 떨릴 정도였다.

‘……주자. 살기 위해선…… 아니, 이기려면 귀주원가가 필요해.’

위진홍은 결단을 내렸다.

“훔치진 않았소만, 무언가 들어 있는 보퉁이들을 줍기는 했소. 그게 그것들이면 좋겠군.”

“그러게요. 장문인, 확인 좀 해주실래요?”

잠시 후.

청유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 * *

“……가주. 지금 뭐라 했소?”

“진옥룡이 창사 선배와 부사 선배를 죽였네.”

“……확실하오?”

“그분들의 병기를 지니고 있더군.”

“…….”

투웅은 경악하는 위진홍과 사마련 무인들을 둘러본 뒤 중얼거렸다.

“모두 나처럼 모르고 있었나.”

“…….”

“일단 수하들을 모아 오겠네. 그 뒤에 자세한 얘기를 하지.”

“…….”

“우리나 자네들이나 련주의 눈 밖에 났어. 잘 협력해야 살 수 있을 걸세.”

투웅은 스무 명의 무인을 지원받아 떠났다.

위진홍은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가 크게 외쳤다.

“련주는 원래 우리를 믿지 않았다! 투웅의 말은 잠시 잊자! 그보다 미안하다! 내가 모자라 진옥룡에게 패하고 말았어! 앞으로는 절대 패하지 않을 테니 나를 한 번만 더 믿어다오!”

“…….”

수하들은 침묵을 지켰다.

위진홍은 가슴이 답답하다 못해 터질 듯한 기분을 느꼈다.

‘내게 실망한 건가? 하긴. 나라도 그러겠지.’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히는데.

수하들이 하나둘 입을 열기 시작했다.

“승패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고 항상 말하지 않았소?”

“어차피 모두 죽을 목숨이었소이다. 한번 구했으면 계속 용을 써서 구하시오.”

“내 말이. 원래대로 재수 없는 게 낫지, 왜 이렇게 풀이 죽었담?”

“…….”

위진홍은 눈을 치켜떴다.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막기 위해서였다.

“……고맙다! 반드시 그대들을 살리마!”

“말만 말고 행동을 하시구려.”

“물론! 달려라! 최대한 빨리 돌아간다!”

수하들이 그의 명을 충실히 지켰기에 날이 넘어가기 전에 본거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위진홍은 거대한 장원에 들어서자마자 외쳤다.

“기관진식을 발동하라!”

“네!”

공을 들여 설치했던 진(陣)과 기관(機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재 중의 천재로 이름 높은 위진홍이 안배한 것들이었다.

‘시간과 비용 문제로 완벽하게 하진 못했으나 이 정도면…….’

기관진식으로 유명한 제갈세가에는 못 미치나 다른 어느 곳보다도 강한 위력을 발휘할 터.

‘귀신같은 진옥룡 그놈도 못 들어오겠지. 아미로 갔던 이들이 무사하면 좋을 텐데.’

사람을 보냈으니 살아 있다면 이리로 오리라.

‘좋아. 수하들을 데리러 간 투웅만 합류하면 이곳은 철옹성이 된다. 당가, 청성, 아미가 한꺼번에 들이닥친다 해도 한동안은 막아낼 수 있어.’

위진홍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아직도 이런 안일한 생각을 하다니.’

정광의 얼굴을 떠올리자 이가 갈렸다.

‘다시는 그런 꼴을 당하지 않아.’

볼모로 잡혀 열심히 꾀했던 계책이 허사가 될 줄이야.

투웅이 했던 말도 떠올랐다.

‘팔사 중 둘이나 당했다 했지. 그런데 련주는 그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았고.’

투웅은 거짓을 말할 자가 아니다.

련주는 그런 중요한 정보를 왜 숨긴 걸까?

원래 차갑고 비열한 성품을 가진 위인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위진홍 그 자신이나 투웅이라는 좋은 패를 쉽게 버릴 자가 아니었다.

‘단순히 체면 때문은 아닐 텐데…….’

위진홍은 수하들에게 명해 단단히 번(番)을 서게 한 뒤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참을 수 없는 졸음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몸도 피곤한 데다 얼마나 심력을 썼는지.

내공이 없는 위진홍은 금세 곯아떨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응?’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의 어깨에 실린 느낌이었다.

‘……서, 설마!’

애써 아닐 거라고 부정하는 그때.

전음으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어라? 벌써 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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