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188화 (187/569)

188화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기준

사람의 첫인상이란 건 무척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위진홍은 최악이었다.

광인(狂人)도 꺼릴 만한 옷을 입고 다니는데 누가 좋게 보겠는가.

‘그래도 열린 마음으로 이해해 줬더니…….’

말버릇까지 엉망진창이었다.

쉽게 말해 상종 못 할 놈.

그래서 그냥 죽이고 떠나려 했는데…….

제법 사람 마음을 갖고 놀 줄 아는 것 아닌가.

나이를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몇 살이지? 젊다고 듣긴 했는데.’

정광은 머리를 부여잡고 눈물을 글썽거리는 위진홍에게 물었다.

“몇 살이세요?”

“…….”

“머리 굴리지 마시고요. 수하들이 한 치씩 움직일 때마다 손가락 하나씩 자를 거예요. 입을 열면 발가락을 부수고요.”

정광이 협박하자 위진홍의 기세가 바뀌었다.

아픔이 가신 듯 두 손을 내리더니 고개를 바짝 치켜들며 분노 어린 음성으로 외쳤다.

“모두 움직이지 마라! 입도 다물어! 이자와 할 얘기가 있으니 방해하지 말거라!”

“…….”

“나는 올해로 열일곱이 됐다.”

“……동안이시네.”

“좀 그런 편이지.”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지학(志學)도 안 되어 보이는데 그 나이라고?

‘뭐 그건 그거고.’

협박에 바로 굴하면서도 자존심은 세우는 모습이라니.

황당해하는 건 정광만이 아니었다.

청성 도사들은 입을 떡 벌린 채 석상처럼 서 있었다.

‘수하들은?’

정광은 주변을 둘러보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의외로 말 잘 듣네.’

사마련 무인들은 날카로운 기세를 뿌리며 정광을 주시하고 있었으나, 위진홍의 명대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복색이 가지각색이야. 몰락한 명가와 군소 문파를 긁어모아 이끌고 있다더니…….’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기 마련이거늘.

이렇게 명을 제대로 따른다?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놈이 그냥 정신 나간 놈은 아니란 말이지.’

사파는 이익으로 뭉친다.

정이나 의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게 기본이었다.

‘능력을 신뢰해서 기다려 보는 건가? 아니면…….’

정광은 사마련 무인들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혹시 이분이 죽는 건 좀 그렇고. 몇 대 더 맞기를 원하시는 건가요?”

사마련 무인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무언은 긍정의 의미라고 하던데.”

몇 명이 입을 열려다 겨우 참는 모습이 보였다.

“정말이네.”

“…….”

정광은 고개를 돌려 위진홍과 시선을 맞췄다.

“평소에 좀 잘하시지 그랬어요.”

“내 수하들은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것뿐이다!”

“그렇다 치죠.”

“치다니! 나는 너 같은 놈과 달리 덕이 있는 덕장(德將)…….”

정광은 주먹을 치켜들었다가 내려쳤다.

쾅!

“아악! 왜, 왜 때려!”

위진홍이 머리를 감싸 쥐고 악을 쓰자 정광의 주먹이 또 올라갔다 내려왔다.

쾅!

“억! 이, 이놈이 진짜…….”

욕설을 내뱉으려던 위진홍의 눈이 커졌다.

정광의 손이 자신의 머리 위에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어서였다.

“이, 이제 알겠다. 네게 예를 갖추마.”

“…….”

“히익! 예, 예를 갖추겠소!”

정광은 때리지도 않았는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는 위진홍을 보며 피식 웃었다.

바로 수그리면서도 눈알을 굴리는 모습이 우스웠다.

‘과장스럽게 행동해서 방심시키며 빠져나갈 길을 찾는구나.’

뭐 이런 교활한 놈이 있는지.

전생에 수하였던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역시 귀곡자(鬼谷子)보다는 마뇌(魔腦)와 비슷해. 녀석을 처음 만났을 때보다 어린 나이고.’

정광은 전생의 기억을 밀어냈다.

잠시 대치하고 있는 동안 화마(火魔)가 몰려오고 있었다.

얼마 안 가 이곳도 붉게 불타오를 터.

빨리 매듭을 지어야 했다.

“여기에서 시간 끌어봐야 좋을 것 없는 거 아시죠? 벌써 땀 흘리고 계시잖아요.”

“……덥긴 덥소.”

“빨리 담판 짓죠.”

“무슨 의미요?”

“청성을 그냥 보내주세요. 그럼 그쪽도 살려줄게요. 그리고 최소 오늘 하루 정도? 청성과 사마련이 휴전을 맺는 거죠.”

“…….”

쉴 새 없이 구르던 위진홍의 눈이 멈췄다.

“……그리고 산을 내려간 우리를 당가와 아미로 연달아 치겠다?”

“어라? 눈치 빠르시네.”

위진홍의 기세가 바뀌었다.

산불의 열기 때문에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으나 눈빛만큼은 차가웠다.

“불가.”

“기개 좋네요. 안타까워라.”

“그대 걱정이나 하시오. 아무리 그대라 해도 무사할 것 같소? 청성은?”

위진홍은 날카롭게 쏘아붙인 후 사마련 무인들을 둘러보며 외쳤다.

“내가 죽으면! 이자에게 덤비지 말고 전력을 다해 청성을 멸한 뒤 도주하라!”

“…….”

“왜 대답이 없는가! 다른 길이 없다! 내가 이자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다! 그대들에게 약조한 바를 못 지켜 미안하고…… 구천(九泉)에서 다시 만나자!”

“……네!”

사마련 무인들은 복잡한 표정으로 위진홍을 보다가 대답했다.

병기를 고쳐 쥐는 모습이 정말 그럴 기세였다.

위진홍은 그들에게 포권을 한 뒤 정광에게 시선을 돌렸다.

“우리는 준비가 됐소. 그대는?”

“…….”

정광은 위진홍의 눈을 들여다봤다.

깊은 곳에 단단히 뭉쳐 있는 의지가 보이는 듯했다.

‘진심이네. 대가 센데?’

마뇌처럼 교활하긴 하나 기개가 있다는 점이 달랐다.

한마디로 정광의 뇌 중 하나였던 마뇌보다 쓸 만한 녀석.

‘좀 쉽게 풀 수 있나 했더니. 원래 계획대로 가야겠어.’

위진홍도 그렇지만 사마련 무인들의 각오가 보통이 아니었다.

투웅과 나눴던 대화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진옥룡. 청성산에 오른 이들은 무슨 수를 써서든 공을 세우려 할 것이네. 그래서 불도 지른 것일 테고.’

위진홍이란 모사가 사파무림의 몰락한 명가와 군소 문파를 긁어모은 무리라 했다.

다른 거대 가문이나 문파에 딸려 여러 성으로 흩어졌다간 화살받이 역할만 하다가 죽을 게 뻔한 일.

그럴 바엔 차라리 우리끼리 뭉치자며 위진홍이 나선 것이다.

‘그자가 사마련주와 담판을 지은 거예요? 사천성을 맡겨달라고?’

‘그렇네. 사파무림에서 수위를 다투는 신동으로 유명한 자였으나 그런 제안을 할 줄이야…….’

흥미를 느낀 사마련주는 위진홍의 청을 들어주는 대신 확실한 공을 요구했다.

‘만약 련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하네요.’

그나마 지키고 있던 재산과 터전까지 빼앗길 터.

아니, 죽지 않으면 다행이려나?

정광은 상념을 털어내고 청성 도사들을 바라봤다.

‘성품이야 어쨌든 쓸 만한 전력이니까…….’

멸문하면 곤란했다.

빚을 지워놓고 부려먹어야 했다.

‘일단 이놈이 어떤 놈인지는 파악했으니 빨리 끝내자.’

정광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위진홍은 움찔하면서도 정광을 쏘아봤다.

허나 높이 치켜 올라갔던 손이 내려오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목숨은 아깝지 않으나 아픈 건 싫었다.

‘또 비명을 지르면 안 돼! 없어 보인다!’

이렇게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는데.

예상외로 정광의 손은 부드럽게 내려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토닥토닥.

“거참. 빡빡하시기는.”

“……!”

“세상을 흑(黑)과 백(白)으로만 보면 안 되죠. 회색도 있는데.”

“…….”

정광을 제외한 모든 이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안 가서였다.

의문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렇게 하죠. 싸움을 멈추고 같이 산에서 내려가요. 그리고 헤어지는 거죠. 깔끔하게. 미련 없이. 어때요?”

“……헤어지자?”

“네. 여기 더 있어 봐야 뭐해요. 타죽기나 하지.”

불길이 어느새 코앞까지 밀려오고 있었다.

“……당가가 거의 달려왔을 것 같은데 그들은?”

“그냥 헤어지자니까요. 당가도 좋아할걸요? 귀주원가를 중심으로 한 사마련 무인들과 싸우면서 피해가 꽤 컸거든요.”

“……그들은 어떻게 되었소?”

“죽은 분들도 있고 도주한 분들도 있고 뭐 그렇죠. 가주 그분은 생포되셨고요.”

“……!”

놀란 표정을 짓던 위진홍이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투웅이 죽었다면 모를까, 생포됐다는 걸 믿으란 말이오? 그 싸움꾼이?”

“제가 잡았거든요.”

위진홍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광의 오만함에 기가 질려서였다.

“그야 곧 알게 되겠지. 그보다 그대가 약조를 지킬 거란 걸 어떻게 믿소?”

“약조를 어긴 적은 없는데.”

“소문으로 듣긴 했소만 이번에도 그럴 거란 보장은 없지.”

“하긴. 우리 사이가 좀 그렇죠.”

정광이 피식 웃더니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서로 인질을 잡고 내려가는 건 어때요?”

“……인질?”

“네. 저는 이미 잡고 있고. 사마련에서는…… 잠시만요.”

정광은 고개를 돌려 청유에게 물었다.

“장문인. 잠시 인질 노릇 좀 해주실 수 있으세요?”

청성 제자들이 기겁했으나 청유는 아니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위진홍을 바라봤다.

“본문의 도경과 비급은 어쩔 것인가?”

“흥. 모르는 일이라니까.”

“……언젠가 꼭 알게 해주지. 내 대에서 안 되면 다음 대에서라도.”

청유는 대답도 듣지 않고 정광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빛은 어느새 담담하게 바뀌어 있었다.

“그러세. 내가 이런 쓸모라도 있어 다행이군.”

정광은 육성 대신 전음으로 답했다.

-너무 낙담하지 마세요. 비슷하게 갚아주면 되니까요.

“……?”

정광은 알 수 없는 전음을 한 뒤 다시 위진홍에게 물었다.

“장문인께서 동의하셨네요. 결단을 내리시죠.”

“…….”

위진홍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여기서 타죽거나 싸우다 개죽음당하느니 훗날을 도모하는 게 백배 낫지.’

정광에 대한 두려움이 솟았으나 나중에 생각할 문제였다.

‘청성 장문인을 인질로 삼는다라. 이게 좀 걸리는데…….’

위진홍은 슬며시 청성 도사들의 안색을 살폈다.

장문인이 스스로 인질이 되겠다는데 비분강개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안 좋은 패야. 설령 죽여 버린다 해도 좋아할 놈이 꽤 있을 것 같군.’

그렇다면 더 좋은 패로 바꾸면 될 터.

위진홍은 정광에게 타협안을 제시했다.

“장문인보다는 장로 몇 명이 나을 것 같소.”

“역시 똑똑하시네. 재물을 잔뜩 짊어지고 계신 분들로요?”

“……!”

칭찬을 빙자한 깨우침이라니.

위진홍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대체 왜 나를 도와주는 거지? 아! 청성의 곪은 부분을 도려내려는 건가?’

다들 진옥룡, 진옥룡 하기에 귓등으로 흘리며 비웃었건만.

정말 대단한 자 아닌가.

‘멍청하지만 똑똑한 척하는 놈은 저자가 아니라 나일지도 모르겠구나.’

감탄과 후회는 짧았다.

그는 아직 어렸기에 시간만 주어진다면 더 클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시간을 잡기 위해선 지금의 위기부터 넘겨야 했다.

“……그렇소. 사람도 잡고 재물도 잡는 거지.”

“명쾌하네요. 그러죠.”

정광이 승낙하자 청성 장로들이 기함했다.

“이보게, 진옥룡! 그게 무슨 말인가?”

“우리를 저 악적들에게 넘기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네!”

정광은 짧게 대꾸했다.

“그럼 여기서 다 타죽으실래요?”

“…….”

“산을 내려갈 때쯤이면 당가가 도착할 거예요. 그럼 사마련도 약조를 어기진 못할 테니 그렇게 하시죠. 근데 안 더우세요? 땀도 줄줄 흘리고 계신데.”

“…….”

아닌 게 아니라 덥다 못해 뜨거울 지경이었다.

조금만 더 지체하면 도복에 불이 붙을 상황.

노도사들은 힘없는 얼굴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자. 자. 기운 내서 빨리 가죠. 이러다 밤 되겠어요.”

정광이 손뼉을 치며 독려하자 양측은 재빨리 움직였다.

사마련은 인질이 된 장로들을 둘러싼 채 앞장섰고 청성이 그 뒤를 따랐다.

정광은 위진홍을 어깨에 짊어지고 맨 뒤에서 움직였는데, 앞에서 걷는 자들의 무거운 발걸음과 달리 무척 경쾌하게 걷고 있었다.

침울한 얼굴로 침묵하고 있던 위진홍이 의아해할 정도로.

“……대체 무슨 생각 중이오?”

“별것 아니에요.”

“……그래도 듣고 싶소만.”

“진짜 별것 아닌데.”

정광이 어깨를 으쓱하자 그 위에 있던 위진홍이 굴러떨어졌다.

“헉!”

“으차. 조심하셔야죠.”

정광은 위진홍을 다시 짊어진 뒤 담담히 말했다.

“오래전 느꼈던 것을 떠올리니까 재밌어서요.”

“……?”

“모사재인(謀事在人) 성사재천(成事在天) 불가강야(不可强也). 아세요?”

“…….”

알다마다.

일을 꾀하는 건 사람에게 달렸으나, 일이 이루어지는 건 하늘에 달려서 강제로 할 순 없다.

과거 불세출의 천재인 제갈량이 했던 말이다. 모사인 위진홍이 모를 수 없는 격언 아닌가.

‘나를 무시해서 한 말은 아닐 텐데. 무슨 의미지?’

위진홍이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하는데 정광이 혀를 찼다.

“이런. 말은 아는데 뜻은 모르시나 보네. 무림맹의 제갈 군사시면 이해하셨을 텐데.”

“……!”

“언젠가 아실 날이 오겠죠. 그때까지 살아남으실 수 있으면.”

위진홍은 이를 지그시 문 채 정광이 했던 말을 되뇌었다.

속뜻을 알아내 정광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었다.

정광은 그 모습을 흘깃 본 후 작은 미소를 지었다.

‘계획대로 안 흘러갔다고 의기소침하거나 분노해서야 쓰나. 거기서 재미를 느껴야지.’

세상에 완벽한 계획은 없다.

어떻게든 변수가 생기기에 그때마다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그때의 재미를 아느냐 모르냐가 진짜 모사와 가짜 모사를 가르는 기준.

위진홍이 그걸 깨닫는다면 진짜 진천뇌(震天腦)가 되기 위한 첫걸음 정도는 떼게 되리라.

‘가만. 그러면 죽이기 아까운데.’

정광이 고개를 갸웃하자 어깨에 올려져 있던 위진홍이 또 굴러 떨어졌다.

“어라? 도망가려고요? 용감하시네.”

“…….”

위진홍은 깊은 생각에 잠겨 대꾸조차 안 했다.

정광은 그를 다시 짊어지고 빙그레 웃었다.

‘이런 상황에 이 정도 집중력이라. 재밌는 녀석이야.’

산 아래에도 재밌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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