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멍청하지만 똑똑한 척하는 놈
정광도 전생에 진천마였던 시절, 좀 과한 옷을 입기는 했다.
검은 악귀의 형상을 수놓은 핏빛 장포(長袍)였는데…….
‘내가 원해서 입었던 건 아니거든.’
천마신교 소교주의 복색이 원래 그랬다.
가끔 거추장스러워서 벗으려고 했었으나.
수하들이 위엄을 위해 입어야 한다고 난리를 쳤다.
그래서 그냥 입은 것이다.
그들을 다 죽여 버리는 것보단 입고 마는 게 편하지 않은가.
허나 위진홍은 달랐다.
‘어깨를 너무 펴서 부러지는 거 아니야? 시선을 즐기고 있잖아.’
우스꽝스러운 학창의야 그렇다 치자.
그걸 걸쳤으면 백우선(白羽扇)…… 아니, 학창의가 흑색이니 흑우선(黑羽扇)이라도 들어야 균형이 잡힐 것이거늘, 노도사나 찰 만한 고풍스러운 검은 또 뭔지.
한숨이 절로 나왔으나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지금까지의 대응은 제법 괜찮았으니까 뭐.’
악취미가 있다 해도 능력만 있으면 되지.
정광은 그깟 허물은 덮어줄 만큼 열린 사람이었다.
그런데, 위진홍이라는 꼬마의 악취미는 보통이 아니었다.
“청성의 진인이란 자들이 꽁지가 빠지게 튀고 있구나! 나 진천뇌(震天腦)는 한숨이 절로 나오니라!”
“…….”
정광이야말로 한숨이 나왔다.
오만한 얼굴로 내려다보며 노인 같은 말투로 외치는 꼴이라니.
그래 봐야 애 목소리지, 무슨 위엄이 있겠는가.
게다가 진천뇌?
사뇌(邪腦)가 아니고?
‘……하늘을 울리는 뇌라니. 듣는 사람이 창피해지네.’
스스로 만든 별호인 것 같은데 복색처럼 끔찍하긴 마찬가지였다.
‘보기도 듣기도 괴로워. 그냥 죽이고 떠나자.’
괜히 기대했다 생각하며 몸을 드러내려고 하는 순간.
청성 장문인 청유가 외쳤다.
“사뇌 위진홍! 본산에 불을 지르는 것으로도 모자라 끝을 보려는 것인가?”
정광은 살짝 감탄했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반말로 지껄이는데 욕설로 응수하지 않다니.
청성을 무시했거늘, 장문인은 뭔가 달라도 달랐다.
‘하지만 별로 좋은 수는 아닌데.’
역시 위진홍은 싸가지 없게 대응했다.
“그야 그대들에게 달린 것이지. 이대로 죽어 원혼이 될 것이냐, 아니면 내 말을 따라 목숨을 부지할 것이냐?”
청유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청성 제자들이 고함을 질렀다.
“감히 장문인께 그런 불경한 말을!”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불손한 자라 들었는데 정말 그렇구나!”
위진홍이 빙그레 웃었다.
“하늘이 높다 하나 얼마나 높을까. 내 능력과 의지가 그에 미치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
청성 제자들은 입을 떡 벌렸다.
제정신이 아니란 건 익히 들었다만 이 정도일 줄이야.
설령 알고 있었다 해도 놀랐을 터.
위진홍은 정말 대단한 놈이었다.
청유 역시 놀란 건 마찬가지였으나 한가하게 그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본성이 이런 건가? 아니면 도발해서 심기를 흐트러뜨리려는 걸까.’
둘 중 무엇이 진짜든 간에 상대하기 힘든 건 마찬가지.
침착해야 했다.
단련이 되었는지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사마련 무인들처럼.
청유는 손을 들어 올려 제자들을 조용하게 한 뒤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대의 뜻을 말해보게. 들어보고 판단하겠네.”
억지로 입을 닫았던 청성 제자들이 난리를 쳤다.
“장문인! 그게 무슨 말이오!”
“저런 악적에게 목숨을 구걸하다니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청유가 진정시키려 했으나 제자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터전을 버리고 몸을 피하는 건 명분이라도 있지, 사파의 말에 따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수치스러운 짓이었다.
“조용히 하게! 일단 말이라도 들어보려는 것 아닌가!”
“장문인! 요설 따위를 들어서 뭐 한단 말이오! 지금도 귀를 씻고 싶은 심정이외다!”
“허어…….”
안타깝게도 청유에게는 그들을 침묵시킬 힘이 없었다.
청성을 떠날 때야 위급상황인 데다 처음으로 화를 내서 따랐지만, 위진홍의 망언을 듣자 장문인의 명보다 자신들의 자존심을 내세우고 있었다.
청유는 깊이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속세의 이권은 탐하면서도 유연성은 없구나. 안 좋은 것들만 두루 갖추고 있어. 이걸 이제야 제대로 보게 되다니…….’
답답한 건 그만이 아니었다.
적인 위진홍도 그랬다.
“답답하네 진짜. 장문인은 그래도 어떻게든 해보려고 하는데 아랫놈들은 왜 이 모양이야? 그냥 다 죽여줄까? 목 위가 무거워? 앙?”
“…….”
걸쭉한 욕설에 도사들이 경악하자 위진홍은 헛기침을 했다.
“흠. 흠. 입이 거친 무부(武夫)라면 참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겠지. 허나 나는 진천뇌. 그대들의 장문인이 불쌍해서라도 이해할 수 있게 풀어서 말해주마.”
위진홍은 청성 제자들이 황당해하든 말든 말을 이었다.
“십 년 동안 봉문(封門) 하겠다고 약조하면 이대로 놓아주겠다. 거부하면 바로 목을 치고. 자. 어떡하겠느냐?”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마련 무인들이 병기를 뽑았다.
수도 많을뿐더러 기세가 어찌나 흉흉한지 청성 제자들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막상 죽음이 눈앞에 닥치자 위축된 것이다.
오직 청유만이 침착했다.
“본문과 싸우면 귀련도 피해가 클 텐데?”
“청성을 멸하는 대가라면 아주 나쁜 건 아니지.”
“그보다 나은 방법이 본문의 봉문이라는 것 아닌가. 도경과 비급을 모두 훔쳐가 놓고 무리한 요구를 하는군.”
위진홍은 누가 봐도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저런. 도경과 비급을 털렸나?”
“…….”
“누가 그런 엄청난 거사를…… 안타까운 일이군. 내가 힘써보지. 봉문에 응하면 해마다 십 분지 일씩 찾아다 주마.”
“이미 가지고 있으면서 무슨…….”
“호오. 증거는? 직접 보기라도 했나?”
청유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뻔뻔하게 나오는데 반박해봐야 뭐하겠는가.
‘봉문을 하면 오명을 뒤집어쓰겠지만 제자들은 살릴 수 있다. 비급은 돌려준다 해도 필사하고 난 뒤에나 그럴 터. 본문 무공의 뿌리부터 뒤흔들리게 돼.’
외부로 유출된 비급은 더 이상 비급이 아니다.
훗날 봉문을 풀고 강호에 나갔을 때, 사파인이 청성의 무공을 쓰고 있으면 어떡한단 말인가.
‘절대 응할 수 없어. 이건 봉문이 아니라 멸문과 마찬가지다. 결국 싸워야 하는가.’
청성의 무공이 악하게 쓰이는 꼴을 보느니 죽는 게 나을 터.
분개하던 청유는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잠깐. 저 요악한 자가 이렇게 터무니없는 요구를 할 리가…… 무슨 꿍꿍이지?’
그의 짐작이 맞았다.
위진홍이 선심 쓰듯이 크게 말했다.
“죽는 것보단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낫지 않나? 통 크게 그대들이 짊어지고 있는 재물도 뺏지 않고 보내주지. 그러면 봉문 좀 한다 한들 먹고사는 데 문제가 없음은 물론이요, 세를 키우는 것도 무척 쉬울 거야.”
“……!”
청성 제자들, 특히 노도사들의 눈빛이 변했다.
그것은 생에 대한 갈구, 그리고 재물을 향한 탐욕이었다.
청유는 내심 탄식했다.
‘끝까지 저런 추한 모습을 보이는구나…….’
자고로 나이가 들면 들수록 생에 대한 집착이 강해지는 법.
꼬장꼬장한 자존심 때문에 아닌 척해왔으나 죽음이 눈앞에 있으면 본성이 나오기 마련이다.
더구나 재물에 맛 들인 그들에게 부(富)까지 보장해 준다니. 마음이 흔들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위진홍의 간사한 말을 믿지 않는 이들도 많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을 지울 수는 없을 터.
게다가 뒤에서는 화마(火魔)가 다가오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없다 보니 판단력이 흐려질 수밖에. 권토중래(捲土重來)라는 말로 스스로를 설득하며 검을 놓는 이가 나오리라.
‘……게다가 명분도 있지.’
장문인인 자신이 반드시 살아남으라고 명했었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러란 말은 아니었으나 이미 입 밖으로 나간 지 오래인 것이다.
‘생을 도외시하고 싸우는 이보다 무릎을 꿇는 이가 더 많겠구나. 청성이 이렇게 끝나는가.’
사뇌의 간악함은 익히 들었건만 이런 수를 쓸 줄이야.
청유는 이를 악물었다.
그런 일이 벌어지더라도 보지 않은 채 죽고 싶었다.
“……싸우거나. 봉문하거나. 길은 그 두 개밖에 없는 것인가?”
“분명 그렇게 말했을 텐데.”
“…….”
청유가 혹시 모를 원군을 기대하며 시간이라도 끌어보려 하는데, 위진홍이 속을 들여다본 듯 손가락을 세워 흔들었다.
“장문인. 시간을 끌려는 생각은 말아라. 아미? 온다 해도 너무 멀어. 당가? 그대들과 앙숙이고. 정광이라는 놈이 좀 문제이긴 한데…….”
“……진옥룡?”
“그건 너무 과분한 별호야. 어쨌든 좀 하는 놈인 건 맞지. 길목을 막아두긴 했는데 뚫고 나올지도 모를 만큼.”
“……진옥룡이 본산으로 오고 있다는 말인가?”
“그럴지도. 아주 바보는 아닌 듯하니 만약 온다면 당가와 함께 오겠지. 독존 늙은이는 죽었겠지만 작지 않은 전력이야. 그러니까…….”
“……?”
“귀찮아지기 전에 빨리 정해라. 죽을 테냐, 봉문할 테냐? 원군은 우리도 있어. 더 빠를 테고.”
청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내공을 끌어모아 웅혼하게 외쳤다.
“불가(不可)! 본문은 그런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
“장문인! 조금 시간을 두고…….”
노도사들이 깜짝 놀라 만류하려 했으나 청유의 목소리가 더 컸다.
“살아봐야 생포되거나 무림의 수치가 될 게 자명하다! 아까의 명을 거두노니! 대청성의 제자들이여! 청성을 위해, 천하를 위해, 악의 무리를 쳐라!”
그는 명령만 내리지 않았다.
직접 검을 빼 들고 달렸다.
청성 제자들이 당황해 머뭇거리는 사이, 그는 선두에 서 있는 중년인 셋과 이미 검을 부딪치고 있었다.
채앵-
“……!”
청유는 간신히 신음을 참았으나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세 중년인의 내공이 만만치 않아서였다.
‘수도 많은 데다 무위까지…….’
그래도 의기소침하지는 않았다.
등 뒤에서 청성 제자들이 투기를 일으키는 게 느껴졌다.
‘그래. 승패를 떠나 최선만 다할 수 있다면 무엇을 더 바라랴.’
그때, 위진홍의 목소리가 울렸다.
“죽고 싶은 자는 어쩔 수 없고. 봉문에 응할 자는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나라. 약조를 안 지킬까 봐 걱정되나?”
“…….”
청성 제자들이 움찔하자 위진홍이 피식 웃었다.
“믿으란 소리는 안 하마. 정 걱정되면 되도록 많은 이가 봉문에 응하는 게 나을 거야. 그러면 내가 약조를 어겨도 제대로 된 전력으로 싸울 수 있을 테니까.”
“……!”
몇몇 젊은 제자들을 제외하고, 모두의 눈에 망설임이 떠올랐다.
“내 말이 틀렸나? 더없이 합리적인데.”
“…….”
위진홍의 말대로였다.
일단 굽혔다가 약조를 어기면 그때 다시 싸우면 되는 일 아닌가.
‘이대로 가면 안 돼! 어떻게든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
청유는 위진홍의 간교함에 치를 떨며 내공을 끌어 올렸다.
천지일기공(天地一氣功)으로 쌓아온 정심한 내공이 혈도를 타고 달렸다.
그리고 죽음을 향하기 전에 분노 어린 외침을 터뜨렸다.
“이 간악한 놈! 그 더러운 혀를 뽑아버리기 전에 닥쳐라!”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럴 시간도 없었고.
세 중년인뿐만 아니라 사마련 무인들이 그를 포위했다.
갖가지 흉악한 병기들이 그를 겨눴다.
일촉즉발의 순간.
그래도 배분값을 하려는지 청성 노도사들이 목이 쉬어라 외쳤다.
“장문인! 잠시 멈춰주시오!”
“생각 좀 해보는 게 어떻소! 이렇게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외다!”
참고 있던 청유가 폭발했다.
“쉽게 결정하다니! 당연한 일 아닌가! 저자의 요망한 혀에 홀린 건가? 부끄러운 줄 아시게!”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적나라한 비난에 노도사들이 되레 성을 내려고 하는데.
위진홍이 더 화를 냈다.
“이 망할 늙은이야! 아까부터 자꾸 나보고 간악하다느니, 요망하다느니 하는데 진심이냐?”
청유는 말도 섞기 싫다는 듯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성 제자들도 얼결에 그랬다.
심지어 사마련 무인들까지 동의하는 눈치였다.
위진홍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욕설을 내뱉었다.
“이런 미친 늙은이를 봤나! 병법 몰라, 병법? 회유책과 이간계에 격장지계까지 절묘하게 섞었거늘 그따위로밖에 표현 못 해? 그런 저렴한 표현은 정광이라는 그 멍청하지만 똑똑한 척하는 놈한테나 쓰는 거야! 사람 똑바로 보고 지껄이라고!”
“내가 간악하고 요망해요? 멍청한데 똑똑한 척하고?”
“정광 그놈이 그렇다고! 넌 또 누군데 헛소리를…… 응?”
위진홍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두 눈을 끔뻑거렸다.
은은한 광택이 흐르는 하얀 도복에 금사(金絲)로 수놓은 우아한 구름 문양.
그 고급스러운 도복보다 화려한 얼굴을 가진 청년이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 아닌가.
‘……단 위에는 나 홀로 서 있었는데…… 설마…….’
위진홍은 고개를 치켜든 상태로 눈알만 살짝 내렸다.
미청년의 허리에 꽂혀 있는 황금빛 검이 보였다.
‘……검집에도 구름 문양을 새겼어? 천하에 이런 악취미를 가진 놈은…….’
그의 머릿속에 한 도호가 떠올랐다.
조금 전 욕했던 그것이었다.
“……저, 정광?”
“…….”
정광은 말없이 주먹을 치켜들었다가 내려쳤다.
가벼운 동작이었으나 당하는 이에게는 아니었다.
쾅!
“으악!”
머리가 쪼개진 것 같은 고통!
위진홍이 정수리를 감싸 쥐고 눈물을 글썽거리는데.
정광이 얼굴을 바짝 갖다 대며 싱긋 웃었다.
더없이 화려한 미소였지만…….
위진홍의 눈에는 악귀가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다시 한번 말해봐요. 어서.”